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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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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 시대에 발달한 풍속화로, 가부키 배우, 미인, 풍경 등을 주제로 한 목판화이다. 17세기 초 육필화와 단색 목판화로 시작하여, 1765년 다색 인쇄 기법인 니시키에가 개발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우키요에는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뚜렷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원근법 등을 특징으로 한다. 배우 그림, 미인화, 풍경화, 춘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19세기 후반 사진의 등장으로 쇠퇴했다. 서양 미술에 영향을 미쳐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에는 신판화, 창작 판화 등의 형태로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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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시키에는 다색 목판화 기법으로 제작된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한 종류이며, 1765년경 하이카이 시인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어 기술이 발전했고, 아즈마니시키에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었으나 점차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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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
개요
16세기 양식으로 곱게 차려입은 일본 여인 그림.
'《뒤돌아보는 미인》, 히시카와 모로노부, 17세기 후반'
분주한 극장을 그린 컬러 인쇄물
'《시바이 우키에》, 오쿠무라 마사노부, 1741–1744년경'
오른편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 대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려하게 분장한 일본 배우의 컬러 인쇄물.
'《오타니 오니지 3세》, 샤라쿠, 1794년'
투명한 빗을 통해 엿보는 진한 화장을 한 중세 일본 여인의 클로즈업 컬러 인쇄물
'《빗》, 우타마로, 1785년경'
왼편으로 걷는 세 명의 그룹과 배경에 숲과 높은 산이 있는 컬러 풍경 인쇄물.
'《하라》, 《도카이도 오십삼차》의 13번째 역, 히로시게, 1833–34년'
몇몇 꽃 근처에서 날고 있는 새를 그린 컬러 인쇄물.
'《뻐꾸기와 철쭉》, 호쿠사이, 1828년'
거대한 해골에 위협받는 사무라이를 그린 세 개의 컬러 인쇄물 세트.
'《타키야샤 공주와 해골 요괴》, 우타가와 구니요시, 1844년경'
명칭
일본어浮世絵
로마자 표기ukiyo-e
한국어 표기우키요에
정의
의미'에도 시대에 번성한 일본 미술 장르'
어원덧없음을 의미하는 浮世에서 유래
주된 주제당대 도시민의 일상생활과 유흥
대표적인 소재미인화 (美人画)
가부키 배우 (役者絵)
풍경화 (風景画)
역사화 (武者絵)
봄 그림 (春画)
새와 꽃 (花鳥画)
역사
초기'히시카와 모로노부에 의해 발전, 주로 흑백 판화 (스미즈리에) 제작'
니시키에의 등장'1760년대에 스즈키 하루노부가 다색 목판화 (錦絵)를 개발하여 전성기를 맞음'
주요 작가기타가와 우타마로
도슈사이 샤라쿠
가쓰시카 호쿠사이
우타가와 히로시게
우타가와 구니요시
쇠퇴기'에도 시대 말기 서양 문화의 유입과 사진 기술의 발달로 쇠퇴'
영향서양 미술에 큰 영향 (자포니즘)
19세기 후반 유럽 화가들에게 영감을 줌
현대 미술에도 영향 지속
기법
제작 과정그림 그리기
목판 조각
채색
인쇄
특징목판화의 특성을 활용한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표현
주요 기법먹선 (墨絵)
채색 (彩色画)
돋을새김 (浮彫り)
현대적 계승
신한가新版画, 메이지 시대 이후 전통 우키요에 기법을 계승한 새로운 판화 운동
창작 판화創作版画, 작가가 직접 디자인과 조각, 인쇄를 모두 담당하는 판화 운동

2. 역사

우키요에는 일본의 역사에서 풍속화로 등장했다. 우키요에 화가 가운데에는 가노파(狩野派일본어), 도사파(土佐派일본어) 출신의 화가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는 당시 가노파로부터 파문을 당한 화가들이 많이 우키요에로 전향을 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키요에는 무로마치 시대로부터 모모야마 시대까지의 풍속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와사 마타베에(岩佐又兵衛) 「낙중낙외도병풍(洛中洛外図屏風)(후나키본)」 우측 6폭. 1615년경. 국보. 가부키 춤이 보인다.


다음은 스와(2008)에 따른 우키요에의 4기 구분이다.

  • 에도 전기 – 게이초(慶長)・겐나 연간(1596년-1624년)부터 호레이키(宝暦) 연간(1751년-1764년), 약 150년
  • 에도 중기 - 메이와(明和) 원년(1764년)부터 칸세이(寛政) 연간(1789년-1801년), 약 35년
  • 에도 후기 - 쿄와(享和) 연간(1801년-1804년)부터 케이오(慶応) 연간(1865년-1868년), 약 70년
  • 메이지 이후 - 메이지 원년(1868년) 이후


1765년에 에도의 하이쿠 시인들을 중심으로 그림 달력(絵暦일본어) 교환 모임이 유행하면서 스즈키 하루노부 등이 아즈마니시키에(니시키에)(東錦絵일본어)를 고안하여 우키요에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다색 인쇄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겹쳐서 색을 입힐 때 쓰이는 기준 표시가 연구되고, 튼튼하고 품질이 높은 에치젠 봉서지(奉書紙), 이요마사 지(伊予柾紙), 니시노우치 지(西野内紙) 등의 종이가 보급되었으며, 경제 발전으로 밑그림, 조각, 인쇄 등 복잡한 공정의 분업 체제가 정비된 점이 중요하다.

안에이(安永) 시대(1772년~1780년)에는 기타오 시게마사(北尾重政)의 사실적인 미인화(美人画)가 인기를 끌었다. 가쓰카와 슌쇼(勝川春章)는 브로마이드 형태의 배우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가 등장하여 섬세하고 수준 높은 오쿠비에(大首絵) 미인화가 많이 그려졌다.

간세이(寛政) 시대 (1789년~1800년)를 시작으로 우키요에 시장에 여러 가지 제재가 생겼다. 1790년에는 인쇄 제도가 만들어져 출판물에 규제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1795년에는 쓰타야 쥬사부로(蔦屋 重三郎)가 도슈사이 샤라쿠(東洲斎写楽)의 그림을 출판하였다. 샤라쿠는 독특한 과장법으로 배우의 그림을 그렸으나, 특징이 너무 과장되어 인기는 사그라지고, 우타가와 도요쿠니(歌川豊国)의 배우 그림인 '야쿠샤부타이스가타에'(役者舞台姿絵일본어)에 밀렸다. 그 후 우타가와 도요쿠니의 제자들에 의해 우키요에 화단의 최대 파벌인 우타가와 파가 형성되게 된다.

1807년부터 1858년까지의 시기를 우키요에 후기로 본다.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죽은 후 미인화는 게이사이 에이센 등 관능적인 미인을 그린 그림이 주류를 이루었다. 게이사이 에이센은 유녀(遊女)집이나 백분(白粉)집을 경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요염(婀娜)”이라고 불리는, “콧날이 오똑한 긴 얼굴에, 올라간 눈과 뻐드렁니의 왜곡된 얼굴 표현”과 같은, 그 시대 특유의 미를 보여주었다.

계제 영천(渓斎英泉) 『염본춘정후지노설 상권(艶本春情富士乃雪 上巻)』, 1824년.


가쓰카와 슌쇼 문하의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여행 붐에 따라 '후가쿠 36경'을 제작했고,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도카이도 53차'를 간행하여 명승지의 풍경화 우키요에가 발달하게 되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다와라야(俵屋) 소우리(宗理)를 이름으로 사용하며 독자적인 수묵 미인화 양식을 확립하고, 동판화(銅版画)를 모방한 명소 그림 목판 실험 작품을 발간했다. 곡정마금(曲亭馬琴)의 독본(読本) 『춘설궁장월(椿説弓張月)』의 삽화를 담당하며 명성을 얻었고, 『호쿠사이 만화(北斎漫画)』와 베로 람(ベロ藍)을 사용한 『후가쿠 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 『제국폭포 순회(諸国瀧廻り)』, 『제국명교기람(諸国名橋奇覧)』, 책 『후가쿠 백경(富嶽百景)』을 발행하여 명소 그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했다. 90세로 사망할 때까지 화가로 남았으며, 딸 오이(応為)는 말년의 아버지의 작화를 도왔다고 전해진다.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제국폭포 순회 기소로의 오쿠 아미다가타키(諸國瀧廻り 木曽路ノ奥阿弥陀ヶ瀧)」 1833년경.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동도명소(東都名所)』에서 베로 람을 사용했지만, 호쿠사이에 비해 억제된 색채를 사용했다. 판원 호에이도(保永堂)에서 『동해도 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 전 55장 세트를 발행했고, 이는 무가나 호상의 구매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가쿠 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과 발행 시기가 가까워 호쿠사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판원 우오야(魚屋) 에이키치(栄吉)에서 『명소 에도 백경(名所江戸百景)』 120장 세트(1장은 2대 히로시게(二代広重) 필)를 발행했다. 이 시리즈는 베로 람과 양홍(洋紅)을 사용했지만, 색채는 억제되었고, 광각 렌즈로 본 듯한 “근접 확대법”을 채택했다.

우타가와 쿠니사다(歌川国貞) 「아와유키 나시로로서의 나카무라 츠루조(淡雪奈四郎としての中村鶴蔵)」, 1852년.


배우 그림으로는 우타가와 구니사다가 스승 도요쿠니의 맥을 이어 박력있는 그림을 내놓았다. 류테이 타네히코(柳亭種彦)와 함께 『가자시이나가겐지(偐紫田舎源氏)』 등의 합권(合巻) 삽화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역자에(役者絵)와 미인화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구사조시(草双紙일본어)로 전기(傳奇) 소설이 많이 나오자, 우타가와 구니요시가 무사도를 그리게 되었다. 구니요시의 '수호전' 시리즈는 당시 인기를 모았으며 수호전의 붐을 일으켰다. 원(元)·명(明) 시대에 성립하여 일본에서도 독본(読本)에 도입되어 인기를 얻은 「수호전(水滸伝)」은 우키요에도 취급된다.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는 판원 카가야 키치에몬(加賀屋吉右衛門)에서의 『통속 수호전 호걸 백팔인(通俗水滸伝豪傑百八人)』 시리즈에서 인기를 얻는다. 덴포 14년(1843년)의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頼光) 공관 도치구모 작 요괴도(みなもとの よりみつこうの やかたに つちぐも ようかいを なすの ず)」는 『태평기(太平記)』에 기록된 헤이안 시대 중기의 일화이지만, 발행 후 덴포의 개혁(天保の改革)에서 사치 금지를 풍자하고, 12대 장군 이에요시(家慶)와 노중(老中)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을 그려넣었다는 소문이 돌아, 해적판(海賊版)이 횡행했다.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 「미나모토노 요리미츠 공관 도치구모 작 요괴도(부분)(源頼光公館土蜘作妖怪図(部分))」, 1843년.


1853년에 발간된 '에도 스나고 사이겐키'에는 '도요쿠니는 인물화, 구니요시는 무사, 히로시게는 명승지'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안세이 2년(1855년) 10월, 에도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나마즈에(鯰絵)」가 많은 판원으로부터 발행되었다. 나마즈(ナマズ)가 지진을 일으킨다는 전설은 에도 시대 중기부터 있었고, 가시마 신궁(鹿島神宮) 경내에 봉안하는 “요이시(要石)”로 나마즈(ナマズ)를 누르고 있었다고 생각되었지만, 지진 당일은 가미나즈키(神無月)였기 때문에 가시마 묘진(鹿島明神)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서의 신들의 회의로 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지진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에도 사람들은 생각했다.

나마즈에(鯰絵). 가시마 묘진(鹿嶋明神)이 지진을 일으키는 나마즈(鯰)를 요이시(要石)로 눌러 막고 있다.


가에이 7년(1854년) 3월, 일미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에 의해 200년 이상에 걸친 「쇄국(鎖国)」이 끝났다. 안세이 5년(1858년)에는 일미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및 네덜란드(オランダ)·러시아(ロシア)·프랑스(フランス)·영국(イギリス)과 동등한 조약이 맺어지고, 요코하마(横浜)가 개방되면서 「요코하마에(横浜絵)」가 탄생했다. 1860년부터 1872년에 걸쳐 발행되었으며, 화가는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요시카즈(芳員) 등, 쿠니요시(国芳) 문하가 많다.

요코하마에(横浜絵). 우타가와 사다히데(歌川貞秀) 「요코하마 교역 서양인 짐 운송도(横濱交易西洋人荷物運送之圖)」


1859년 (안세이(안세이/安政일본어) 6년)에서 1912년 (메이지 45년)까지를 우키요에의 말기로 구분한다.

페리 제독의 검은 배가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 이후 일본이 구미 세계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외지의 문화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요코하마에(요코하마 그림)가 유행하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혼란스러워진 이 시절, 가부키 등의 관람 작품에도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등장하였다.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문하인 쓰키오카 요시토시(쓰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일본어)와 오치아이 요시키(오치아이 요시키/落合芳幾일본어)는 공동으로 에이메이 28주쿠(에이메이 28슈쿠/英名二十八衆句일본어)를 그렸는데, 이 작품에는 피투성이의 잔인한 장면들이 나타난다.

가와나베 교사이(가와나베 교사이/河鍋暁斎일본어) 등 가노파 출신의 우키요에 작가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윤곽선을 쓰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풍경화도 고바야시 기요치카(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清親일본어)에 의해 나왔으며, 우타가와 요시후지의 어린이 대상의 장난감 그림도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나 이후 우키요에는 사진 등의 기술로 인해 점점 쇠퇴하게 된다. 사진에 대항하여 우키요에 화가들의 여러 가지 노력이 고안되었으나,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가운데, 쓰키오카 요시토시는 섬세한 서양풍의 화풍으로 다수의 역사화, 풍속화 등을 남겨, '마지막 우키요에 화가'라 불리게 된다.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우키요에 이외의 그림을 배우게 하여, 가부라키 기요카타(가부라키 기요카타/鏑木清方일본어) 등 여러 제자가 일본화가로 대성하게 된다. 이후 우키요에의 전통은 다른 장르를 통해 이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 우키요에의 목판다색인쇄 기법을 살린 작품을 다수 남긴 화가로 가와세 하스이(가와세 하스이/川瀬巴水일본어, 1883-1957) 등이 있다.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사망과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우키요에는 수량과 질적인 면에서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의 급속한 서구화는 목판 인쇄술을 언론 분야로 돌리고 사진과의 경쟁을 불러왔다. 순수 우키요에의 실천가들은 더욱 드물어졌고, 낡은 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장르에 대한 취향은 사라졌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주목할 만한 작품을 계속 제작했지만, 1890년대까지는 그 전통이 쇠퇴해 갔다.

19세기 중반부터 독일에서 수입된 합성 안료가 전통적인 유기 안료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많은 판화들은 밝은 빨간색을 광범위하게 사용했고, 아카에(붉은 그림)이라고 불렸다. 요시토시(1839–1892)와 같은 예술가들은 1860년대에 살인과 유령, 괴물과 초자연적인 존재, 그리고 전설적인 일본과 중국의 영웅들을 묘사하는 잔혹한 장면의 유행을 주도했다. 그의 ''명월백화(月百姿)''(1885–1892)는 달을 모티브로 다양한 환상적이고 평범한 주제들을 묘사하고 있다. 기요치카(1847–1915)는 철도 도입과 같은 도쿄의 급속한 근대화를 기록한 판화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카노파 화가였던 치카노부(1838–1912)는 1870년대에 판화로 전향하여, 특히 일본 황실과 메이지 시대 일본 생활에 대한 서구의 영향을 보여주는 장면을 많이 그렸다.

전쟁 그림. 가와가와 요시모리 작. 1869년. 「본능사 합전도」라는 제목이지만, 실제로는 보신 전쟁·우에노 산 전투


경응 3년(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 260여 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그 후, 반막부파인 사쓰마 번이 요시노부에게 압력을 가했기에, 이듬해 경응 4년(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 후일의 보신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것들을 발행한 것이 「전쟁 그림」이며, 에도 시대의 「무사 그림」과는 구분된다. 특히 에도가 전장이 된 우에노 산에서 쇼기대와 신정부군과의 싸움이 많이 발행되었다. 구막부 측에는 종래의 「개정」을 할 힘이 없었고, 신정부 측에는 자파의 선전이 되는 것이므로 발행을 묵인했다. 그 이후로도 사가의 란, 타이완 출병(모두 메이지 7년·1874년), 세이칸 전쟁(메이지 10년·1877년), 일청 전쟁(메이지 27년-28년·1894년-95년), 일러 전쟁(메이지 37년-38년·1904년-05년)이 발행되었다.

고바야시 키요치카 「도쿄 명소도·료고쿠 불꽃놀이도」, 1880년.


1868년(경응 4년) 7월, 에도는 「도쿄」로 개칭되었고, 9월에 메이지로 개원, 이듬해 메이지 2년(1869년) 2월 천황이 구 에도 성에 들어가 명실상부 일본의 수도가 된다. 메이지 5년(1872년)에는 신바시-요코하마 간에 철도가 개통되고, 니혼바시 주변에 목조에 석재를 병용한 2층 이상, 발코니가 있는 「의양풍 건축」이 세워진다. 거기에 인력거·마차 및 가스등 등 도쿄의 변천을 그린 것이 「개화 그림」이다. 3대 히로시게나 고쿠키 등 우타가와파가 대표적인 예이며, 「양홍」을 다용한 자극적인 색조의 것이 많다.

츠키오카 요시토시·슌테이 「미담무사팔경 동원의 추월」.


고바야시 키요치카는 하급 무사로서 쇼군 이에모치·요시노부를 따라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가하고, 구막부 패배 후 긴신하는 요시노부를 따라 시즈오카로 간다. 메이지 7년(1874년), 도쿄로 돌아와 화가로 서게 된다. 빛을 의식한 도쿄 명소도를 그리고 「광선화」라고 불린다. 도시를 그리는 점에서는 「개화 그림」의 요소도 있지만, 화가 개성이 부족한 것과는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색채가 다르다.

키쿠치 요우사이 『전현고실』 권 6 「후지와라 아소미 야스마사」.


막말에 피비린내 나는 그림을 그린 츠키오카(다이소) 요시토시는 메이지 10년대 중반이 되면 「역사화」에 주력한다.

개국·신정부 성립에 의해, 앵화 정책이 추진되어 메이지 9년(1876년)에는 공부성이 「공부미술학교」를 설립하고, 이탈리아 화가·조각가·건축가를 초빙한다. 하지만 정부는 수출품으로서 유럽의 모방이 아니라 기존의 공예품이 더 팔린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국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 「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역사화가 중시되는 것이 된다. 또한, 앵화 정책에 의해 냉대받았던 가노 요시가야·하시모토 가스케 등은 문부 관료 오카쿠라 텐신과 정치학·철학의 오고이 교사로 일본에 왔지만, 그 후 일본 미술에 눈을 뜨고 텐신과 행동을 함께하는 어니스트 페놀로사의, 양화와 남화를 배척한 새로운 회화(「일본화」라는 용어는 「양화」에 대한 대립 개념이며 메이지 20년대에 등장하여 30년대에 일반에도 정착한다.)를 만들어내는 주장에 동조한다.

그 시대에 주목받은 것이 키쿠치 요사이의 『전현고실』(전 10권. 덴포 14년-메이지 원년·1843년-68년)이다. 신무 천황부터 남조 시대의 고카메야마 천황 시대까지의 공가·귀족·승려·무사·여방 등 571명의 고실과 그들에게 어울리는 의복과 얼굴을 펼친 1정(2페이지)에 그린 것으로, 메이지 10년대 이후 화가의 「분본」으로서 활발히 인용된다. 우키요에 화가를 포함한 기존 화가에 한정하지 않고 양화가도 『전현고실』을 참고하여 그리게 된다.

일청·일러 전쟁 후, 신문이나 잡지, 석판화·사진에 엽서가 보급되고, 우키요에 화가는 삽화가 등으로의 전향을 강요받게 된다. 메이지 40년(1907년) 10월 4일 아침 신문 아사히 신문 「니시키에 도매상의 근래」에는 「에도 명물의 하나로 여겨졌던 니시키에는 근년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쇠퇴하고(생략) 사진술이 행해지고, 콜로타입판이 특히 근래에는 엽서가 유행하여 니시키에의 초상화는 볼 수 없다. 요즘은 그리는 사람도 없고 새기는 사람도 없다」라고 적혀 있다. 가부라기 키요카타는 간신히 다이쇼 시대까지 그림 종이 가게가 있었다고 말한다.

야마무라 코우카 「『리엔노하나』보다, 13세 모리타 칸야의 장 발장」, 1921년.


역풍 속에서 와타나베 쇼자부로는 1905년(메이지 38년)에 摺師와 彫師를 고용하여 판원을 일으킨다. 당초는 고판목 摺り 및 양질의 摺り物로부터의 판목 일으키기와 복각품뿐이었지만, 다이쇼에 들어와 화가와 교섭하여 신판화를 제작하게 된다. 하시구치 고요·이토 신스이·카와세 하스이·야마무라 코우카 등을 기용하고, 또 그들도 목판화에 의한 표현에 자극을 받았다.

1923년(다이쇼 12년), 관동 대지진에 의해 와타나베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많은 판원이 폐업으로 몰렸다. 하지만 그는 재기하여 미국 체험이 있는 요시다 히로시를 기용하여 구미에서 팔리는 작품을 발행했다. 와타나베는 쇼와 37년(1962년)에 사망하지만, 그의 판원은 21세기에도 건재하다. 또한, 아다치 판화 연구소도 같은 제작·영업을 하고 있다.

2. 1. 초기

메이레키 대화재(1657년)부터 호레키 시대(1751년 - 1763년)까지를 초기로 보며, 이 시대의 우키요에는 육필화와 단색 목판화인 스미즈리에(墨摺絵일본어)가 주를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목판화의 원화를 그리는 사람을 한시타에시(版下絵師일본어)라 불렀으며, 그중에서도 그림책이나 우키요조시(浮世草子일본어) 등의 삽화를 그렸던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일본어)가 우키요에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일본어, 1642-1693)의 작품인 '호색남'(好色一代男일본어, 1682년)에는 12개의 틀이 있는 부채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우키요에'라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꼽히고 있다.

공원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을 묘사한 6폭 병풍 그림.


히코네 병풍은 1624년에서 164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키요에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도리이파의 창시자인 도리이 기요노부(鳥居清信일본어, 1664-1729)의 시대에는 단색 목판화에 붓으로 색을 입힌 작품이 나타났다. 주로 빨간 안료를 사용하여 색칠했으며, '단에'(丹絵일본어), '베니에'(紅絵일본어) 등이 있었다. 베니에는 두세 가지 색상이 더해져 베니즈리에(紅摺絵일본어)라고도 불렸다. 이 시절부터 도리이파는 가부키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현재까지도 가부키 공연 간판 제작에 관여하고 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노는 연인 한 쌍의 흑백 그림


초기 목판화, 히시카와 모로노부, 1670년대 후반 또는 1680년대 초

미인화는 풍속화에서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선대에 있던 명나라의 양귀비상을 일본 여성에 적용했다는 설이 있다. 낙관에 '일본화사', '대화화사'라고 쓴 것이 히시카와 모로노부이다. 아와국의 봉박(금은박을 섞은 자수)업 출신으로, '미소가에시 비진'(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을 대표로 하는 걸물(걸개 그림) 외에도, 권자(간스, 마키모노), 우키요조시, 마쿠라에 등의 판본과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모로노부의 등장은 17세기 후반에 에도의 문화가 간사이 지방의 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된다. 판본은 처음에는 먹색 한 가지였지만, 후기 작품으로 먹스리본에 붓으로 채색하는 단에가 나타나고, 일매 스리도 등장한다.

탕녀도, MOA 미술관 소장. 중요문화재.


모로노부 사후, 오쿠무라 마사노부는 적색 염료를 필채한 홍에나, 먹에 아교를 많이 섞어 광택을 내는 칠에, 주에에 부에도 창시하고, 2, 3색 스리를 가능하게 한 홍스리에나, 탁본을 응용한 흑백 반전의 석스리에의 창시에도 관계했다. 그리고 화사일 뿐만 아니라, 판원 '오쿠무라야'를 운영하여 자유로운 작화와 판매 경로를 얻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다른 판원과 상품을 卸し合い(오로시아이) 상기를 넓혔다.

가부키는 에도 초기에 생겨나, 막부의 금령도 있어 성인 남성만이 연기하는 형태가 되었다. 가부키의 역자에에 특화된 것이 도리이파이다. '표주박발 지렁이그림(표주박발 미미즈가키)'이라고 불리는 표주박처럼 잘록한 다리에, 지렁이가 기어 다닌 것 같은 강한 먹선을 살린 묘사, '대대판'이라는 큰 판형(약 55×33센티)으로 알려졌다. 도리이파는 현재도 계승되고 있으며, 가부키좌의 간판을 맡고 있다(도리이 키요미츠).

카이게츠도 안도 등 카이게츠도파는 공방에서 수묵의 미인화를 양산했다. 서민을 구입층으로 하고, 저렴한 진흙 안료를 사용했다.

1720년(교호 5년)에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금서령을 완화하고, 기독교와 관계없는 란서의 수입을 허용함으로써, 원근법을 이용하여 그려진 동판화 등을 볼 기회가 생겼다.[6] 원근법은 오쿠무라 등에 의한 부에를 낳게 된다.[6]

2. 2. 중기

1765년에 에도의 하이쿠 시인들을 중심으로 그림 달력(絵暦일본어) 교환 모임이 유행하면서 스즈키 하루노부 등이 아즈마니시키에(니시키에)(東錦絵일본어)를 고안하여 우키요에는 전성기를 맞이한다.[6] 다색 인쇄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겹쳐서 색을 입힐 때 쓰이는 기준 표시가 연구되고, 튼튼하고 품질이 높은 에치젠 봉서지(奉書紙), 이요마사 지(伊予柾紙), 니시노우치 지(西野内紙) 등의 종이가 보급되었으며, 경제 발전으로 밑그림, 조각, 인쇄 등 복잡한 공정의 분업 체제가 정비된 점이 중요하다.

안에이(安永) 시대(1772년~1780년)에는 기타오 시게마사(北尾重政)의 사실적인 미인화(美人画)가 인기를 끌었다. 가쓰카와 슌쇼(勝川春章)는 브로마이드 형태의 배우 초상화를 그렸다. 이 시기에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가 등장하여 섬세하고 수준 높은 오쿠비에(大首絵) 미인화가 많이 그려졌다.

간세이(寛政) 시대 (1789년~1800년)를 시작으로 우키요에 시장에 여러 가지 제재가 생겼다. 1790년에는 인쇄 제도가 만들어져 출판물에 규제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1795년에는 쓰타야 쥬사부로(蔦屋 重三郎)가 도슈사이 샤라쿠(東洲斎写楽)의 그림을 출판하였다. 샤라쿠는 독특한 과장법으로 배우의 그림을 그렸으나, 특징이 너무 과장되어 인기는 사그라지고, 우타가와 도요쿠니(歌川豊国)의 배우 그림인 '야쿠샤부타이스가타에'(役者舞台姿絵일본어)에 밀렸다. 그 후 우타가와 도요쿠니의 제자들에 의해 우키요에 화단의 최대 파벌인 우타가와 파가 형성되게 된다.

2. 3. 후기

1807년부터 1858년까지의 시기를 우키요에 후기로 본다.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죽은 후 미인화는 게이사이 에이센 등 관능적인 미인을 그린 그림이 주류를 이루었다. 게이사이 에이센은 유녀(遊女)집이나 백분(白粉)집을 경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요염(婀娜)”이라고 불리는, “콧날이 오똑한 긴 얼굴에, 올라간 눈과 뻐드렁니의 왜곡된 얼굴 표현”과 같은, 그 시대 특유의 미를 보여주었다.

가쓰카와 슌쇼 문하의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여행 붐에 따라 '후가쿠 36경'을 제작했고,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도카이도 53차'를 간행하여 명승지의 풍경화 우키요에가 발달하게 되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다와라야(俵屋) 소우리(宗理)를 이름으로 사용하며 독자적인 수묵 미인화 양식을 확립하고, 동판화(銅版画)를 모방한 명소 그림 목판 실험 작품을 발간했다. 곡정마금(曲亭馬琴)의 독본(読本) 『춘설궁장월(椿説弓張月)』의 삽화를 담당하며 명성을 얻었고, 『호쿠사이 만화(北斎漫画)』와 베로 람(ベロ藍)을 사용한 『후가쿠 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 『제국폭포 순회(諸国瀧廻り)』, 『제국명교기람(諸国名橋奇覧)』, 책 『후가쿠 백경(富嶽百景)』을 발행하여 명소 그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했다. 90세로 사망할 때까지 화가로 남았으며, 딸 오이(応為)는 말년의 아버지의 작화를 도왔다고 전해진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동도명소(東都名所)』에서 베로 람을 사용했지만, 호쿠사이에 비해 억제된 색채를 사용했다. 판원 호에이도(保永堂)에서 『동해도 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 전 55장 세트를 발행했고, 이는 무가나 호상의 구매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가쿠 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과 발행 시기가 가까워 호쿠사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판원 우오야(魚屋) 에이키치(栄吉)에서 『명소 에도 백경(名所江戸百景)』 120장 세트(1장은 2대 히로시게(二代広重) 필)를 발행했다. 이 시리즈는 베로 람과 양홍(洋紅)을 사용했지만, 색채는 억제되었고, 광각 렌즈로 본 듯한 “근접 확대법”을 채택했다.

배우 그림으로는 우타가와 구니사다가 스승 도요쿠니의 맥을 이어 박력있는 그림을 내놓았다. 류테이 타네히코(柳亭種彦)와 함께 『가자시이나가겐지(偐紫田舎源氏)』 등의 합권(合巻) 삽화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역자에(役者絵)와 미인화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구사조시(草双紙일본어)로 전기(傳奇) 소설이 많이 나오자, 우타가와 구니요시가 무사도를 그리게 되었다. 구니요시의 '수호전' 시리즈는 당시 인기를 모았으며 수호전의 붐을 일으켰다. 원(元)·명(明) 시대에 성립하여 일본에서도 독본(読本)에 도입되어 인기를 얻은 「수호전(水滸伝)」은 우키요에도 취급된다.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는 판원 카가야 키치에몬(加賀屋吉右衛門)에서의 『통속 수호전 호걸 백팔인(通俗水滸伝豪傑百八人)』 시리즈에서 인기를 얻는다. 덴포 14년(1843년)의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頼光) 공관 도치구모 작 요괴도(みなもとの よりみつこうの やかたに つちぐも ようかいを なすの ず)」는 『태평기(太平記)』에 기록된 헤이안 시대 중기의 일화이지만, 발행 후 덴포의 개혁(天保の改革)에서 사치 금지를 풍자하고, 12대 장군 이에요시(家慶)와 노중(老中)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을 그려넣었다는 소문이 돌아, 해적판(海賊版)이 횡행했다.

1853년에 발간된 '에도 스나고 사이겐키'에는 '도요쿠니는 인물화, 구니요시는 무사, 히로시게는 명승지'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안세이 2년(1855년) 10월, 에도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나마즈에(鯰絵)」가 많은 판원으로부터 발행되었다. 나마즈(ナマズ)가 지진을 일으킨다는 전설은 에도 시대 중기부터 있었고, 가시마 신궁(鹿島神宮) 경내에 봉안하는 “요이시(要石)”로 나마즈(ナマズ)를 누르고 있었다고 생각되었지만, 지진 당일은 가미나즈키(神無月)였기 때문에 가시마 묘진(鹿島明神)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서의 신들의 회의로 외출 중이었기 때문에 지진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에도 사람들은 생각했다.

가에이 7년(1854년) 3월, 일미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에 의해 200년 이상에 걸친 「쇄국(鎖国)」이 끝났다. 안세이 5년(1858년)에는 일미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및 네덜란드(オランダ)·러시아(ロシア)·프랑스(フランス)·영국(イギリス)과 동등한 조약이 맺어지고, 요코하마(横浜)가 개방되면서 「요코하마에(横浜絵)」가 탄생했다. 1860년부터 1872년에 걸쳐 발행되었으며, 화가는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요시카즈(芳員) 등, 쿠니요시(国芳) 문하가 많다.

2. 4. 말기

1859년 (안세이(안세이/安政일본어) 6년)에서 1912년 (메이지 45년)까지를 우키요에의 말기로 구분한다.

페리 제독의 검은 배가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 이후 일본이 구미 세계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외지의 문화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요코하마에(요코하마 그림)가 유행하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혼란스러워진 이 시절, 가부키 등의 관람 작품에도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등장하였다.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문하인 쓰키오카 요시토시(쓰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일본어)와 오치아이 요시키(오치아이 요시키/落合芳幾일본어)는 공동으로 에이메이 28주쿠(에이메이 28슈쿠/英名二十八衆句일본어)를 그렸는데, 이 작품에는 피투성이의 잔인한 장면들이 나타난다.

가와나베 교사이(가와나베 교사이/河鍋暁斎일본어) 등 가노파 출신의 우키요에 작가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윤곽선을 쓰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풍경화도 고바야시 기요치카(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清親일본어)에 의해 나왔으며, 우타가와 요시후지의 어린이 대상의 장난감 그림도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나 이후 우키요에는 사진 등의 기술로 인해 점점 쇠퇴하게 된다. 사진에 대항하여 우키요에 화가들의 여러 가지 노력이 고안되었으나,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가운데, 쓰키오카 요시토시는 섬세한 서양풍의 화풍으로 다수의 역사화, 풍속화 등을 남겨, '마지막 우키요에 화가'라 불리게 된다.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우키요에 이외의 그림을 배우게 하여, 가부라키 기요카타(가부라키 기요카타/鏑木清方일본어) 등 여러 제자가 일본화가로 대성하게 된다. 이후 우키요에의 전통은 다른 장르를 통해 이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 우키요에의 목판다색인쇄 기법을 살린 작품을 다수 남긴 화가로 가와세 하스이(가와세 하스이/川瀬巴水일본어, 1883-1957) 등이 있다.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사망과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우키요에는 수량과 질적인 면에서 급격한 쇠퇴를 겪었다. 이후 메이지 시대의 급속한 서구화는 목판 인쇄술을 언론 분야로 돌리고 사진과의 경쟁을 불러왔다. 순수 우키요에의 실천가들은 더욱 드물어졌고, 낡은 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장르에 대한 취향은 사라졌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주목할 만한 작품을 계속 제작했지만, 1890년대까지는 그 전통이 쇠퇴해 갔다.

19세기 중반부터 독일에서 수입된 합성 안료가 전통적인 유기 안료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많은 판화들은 밝은 빨간색을 광범위하게 사용했고, 아카에(붉은 그림)이라고 불렸다. 요시토시(1839–1892)와 같은 예술가들은 1860년대에 살인과 유령, 괴물과 초자연적인 존재, 그리고 전설적인 일본과 중국의 영웅들을 묘사하는 잔혹한 장면의 유행을 주도했다. 그의 ''명월백화(月百姿)''(1885–1892)는 달을 모티브로 다양한 환상적이고 평범한 주제들을 묘사하고 있다. 기요치카(1847–1915)는 철도 도입과 같은 도쿄의 급속한 근대화를 기록한 판화와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카노파 화가였던 치카노부(1838–1912)는 1870년대에 판화로 전향하여, 특히 일본 황실과 메이지 시대 일본 생활에 대한 서구의 영향을 보여주는 장면을 많이 그렸다.

경응 3년(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 260여 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그 후, 반막부파인 사쓰마 번이 요시노부에게 압력을 가했기에, 이듬해 경응 4년(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 후일의 보신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것들을 발행한 것이 「전쟁 그림」이며, 에도 시대의 「무사 그림」과는 구분된다. 특히 에도가 전장이 된 우에노 산에서 쇼기대와 신정부군과의 싸움이 많이 발행되었다. 구막부 측에는 종래의 「개정」을 할 힘이 없었고, 신정부 측에는 자파의 선전이 되는 것이므로 발행을 묵인했다. 그 이후로도 사가의 란, 타이완 출병(모두 메이지 7년·1874년), 세이칸 전쟁(메이지 10년·1877년), 일청 전쟁(메이지 27년-28년·1894년-95년), 일러 전쟁(메이지 37년-38년·1904년-05년)이 발행되었다.

1868년(경응 4년) 7월, 에도는 「도쿄」로 개칭되었고, 9월에 메이지로 개원, 이듬해 메이지 2년(1869년) 2월 천황이 구 에도 성에 들어가 명실상부 일본의 수도가 된다. 메이지 5년(1872년)에는 신바시-요코하마 간에 철도가 개통되고, 니혼바시 주변에 목조에 석재를 병용한 2층 이상, 발코니가 있는 「의양풍 건축」이 세워진다. 거기에 인력거·마차 및 가스등 등 도쿄의 변천을 그린 것이 「개화 그림」이다. 3대 히로시게나 고쿠키 등 우타가와파가 대표적인 예이며, 「양홍」을 다용한 자극적인 색조의 것이 많다.

고바야시 키요치카는 하급 무사로서 쇼군 이에모치·요시노부를 따라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가하고, 구막부 패배 후 긴신하는 요시노부를 따라 시즈오카로 간다. 메이지 7년(1874년), 도쿄로 돌아와 화가로 서게 된다. 빛을 의식한 도쿄 명소도를 그리고 「광선화」라고 불린다. 도시를 그리는 점에서는 「개화 그림」의 요소도 있지만, 화가 개성이 부족한 것과는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색채가 다르다.

막말에 피비린내 나는 그림을 그린 츠키오카(다이소) 요시토시는 메이지 10년대 중반이 되면 「역사화」에 주력한다.

개국·신정부 성립에 의해, 앵화 정책이 추진되어 메이지 9년(1876년)에는 공부성이 「공부미술학교」를 설립하고, 이탈리아 화가·조각가·건축가를 초빙한다. 하지만 정부는 수출품으로서 유럽의 모방이 아니라 기존의 공예품이 더 팔린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국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 「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역사화가 중시되는 것이 된다. 또한, 앵화 정책에 의해 냉대받았던 가노 요시가야·하시모토 가스케 등은 문부 관료 오카쿠라 텐신과 정치학·철학의 오고이 교사로 일본에 왔지만, 그 후 일본 미술에 눈을 뜨고 텐신과 행동을 함께하는 어니스트 페놀로사의, 양화와 남화를 배척한 새로운 회화(「일본화」라는 용어는 「양화」에 대한 대립 개념이며 메이지 20년대에 등장하여 30년대에 일반에도 정착한다.)를 만들어내는 주장에 동조한다.

그 시대에 주목받은 것이 키쿠치 요사이의 『전현고실』(전 10권. 덴포 14년-메이지 원년·1843년-68년)이다. 신무 천황부터 남조 시대의 고카메야마 천황 시대까지의 공가·귀족·승려·무사·여방 등 571명의 고실과 그들에게 어울리는 의복과 얼굴을 펼친 1정(2페이지)에 그린 것으로, 메이지 10년대 이후 화가의 「분본」으로서 활발히 인용된다. 우키요에 화가를 포함한 기존 화가에 한정하지 않고 양화가도 『전현고실』을 참고하여 그리게 된다.

일청·일러 전쟁 후, 신문이나 잡지, 석판화·사진에 엽서가 보급되고, 우키요에 화가는 삽화가 등으로의 전향을 강요받게 된다. 메이지 40년(1907년) 10월 4일 아침 신문 아사히 신문 「니시키에 도매상의 근래」에는 「에도 명물의 하나로 여겨졌던 니시키에는 근년에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쇠퇴하고(생략) 사진술이 행해지고, 콜로타입판이 특히 근래에는 엽서가 유행하여 니시키에의 초상화는 볼 수 없다. 요즘은 그리는 사람도 없고 새기는 사람도 없다」라고 적혀 있다. 가부라기 키요카타는 간신히 다이쇼 시대까지 그림 종이 가게가 있었다고 말한다.

역풍 속에서 와타나베 쇼자부로는 1905년(메이지 38년)에 摺師와 彫師를 고용하여 판원을 일으킨다. 당초는 고판목 摺り 및 양질의 摺り物로부터의 판목 일으키기와 복각품뿐이었지만, 다이쇼에 들어와 화가와 교섭하여 신판화를 제작하게 된다. 하시구치 고요·이토 신스이·카와세 하스이·야마무라 코우카 등을 기용하고, 또 그들도 목판화에 의한 표현에 자극을 받았다.

1923년(다이쇼 12년), 관동 대지진에 의해 와타나베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많은 판원이 폐업으로 몰렸다. 하지만 그는 재기하여 미국 체험이 있는 요시다 히로시를 기용하여 구미에서 팔리는 작품을 발행했다. 와타나베는 쇼와 37년(1962년)에 사망하지만, 그의 판원은 21세기에도 건재하다. 또한, 아다치 판화 연구소도 같은 제작·영업을 하고 있다.

3. 특징

우키요에는 기본적으로 판화이기 때문에 여러 번 인쇄가 가능하여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구사조시나 그림 두루마기, 가와라반(현재의 신문)의 삽화 역할을 했으며, 현대의 캘린더에 해당하는 그림 달력(絵暦일본어) 제작에도 많이 이용되었다.

일본 여성의 얼굴을 묘사한 컬러 판화. 색상은 선명하고 평평하며 윤곽선은 검은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스즈키 하루노부(Suzuki Harunobu)의 《밤에 신사를 방문하는 여인》, 17세기


우키요에는 흐릿하지 않은 확실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의 표현이 없는 것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초기 우키요에 화가들은 중국 회화의 구성 원칙에 대한 정교한 지식과 훈련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일본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대부분의 우키요에 판화는 명확하고 두껍고 평평한 선으로 윤곽이 선명하게 정의된다. 초기 판화는 단색이었으나, 색상이 등장한 후에도 이러한 특징적인 선은 계속해서 지배적이었다.

어두운 색상의 소박하고 비대칭적인 차碗 사진
미학을 보여주는 16세기 차碗


우키요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패턴, 변화하는 유행에 대한 관심, 긴장되고 역동적인 포즈와 구성은 일본 미학의 많은 개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는 시간의 흐름의 흔적이 있는 단순함, 비대칭성, 불완전성을 선호하며,는 미묘함, 겸손함, 절제를 중시한다.

원근법도 받아들여졌는데, 서구식 기하학적 원근법과 중국식 방법을 함께 사용했다. 기하학적 원근법은 배경에, 표현적인 중국식 원근법은 전경에 사용되었으며, 불교 그림에서 사용되는 중국식 3부 구성법(三部構図法)도 사용되었다. 이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큰 파도》에서 볼 수 있는데, 전경에는 큰 배, 중경에는 작은 배, 배경에는 작은 후지산이 배치되어 있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대중문화의 일부였으며, 현대의 미술 전시처럼 액자에 넣어 멀리서 감상하는 형태가 아닌, 손에 들고 살펴보며 즐기는 형태였다.

4. 주제

우키요에는 주로 풍경, 가부키 배우, 스모 역사, 유곽의 여인들을 그렸다. 희극적인 요소를 띠고 있어 현대의 만화와 연결되는 것들도 많다. 중국화 혹은 일본화의 전통적인 주제들이 우키요에에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남녀 간의 성적인 일을 주제로 한 춘화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렸다. 춘화는 묶음으로 판매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판매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제작비를 많이 들일 수 있어 기술적으로도 수준이 높은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현실의 성풍속을 풍자한 묘사도 있고 반드시 선정적인 것은 아니어, 단순히 포르노 작품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고 지적받고 있다.

우키요에의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은 종류의 그림들이 있다.


  • 미인화(美人画): 젊은 여성을 그린 그림으로, 당시에 인기가 있었던 가게의 간판 아가씨나 유곽의 여자 등이 그려졌다.
  • 배우 그림(役者絵): 가부키의 배우 등 인기 배우를 그린 그림으로, 브로마이드 형태의 것이나 광고 전단지 등에 쓰인 것도 있었다.
  • 희화(戯画): 재미있게 또는 우스꽝스럽게 그린 그림으로, 익살스러운 모습 및 의인화된 주인공이 등장한다. 풍자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오락성이 강하다.
  • 도바에(鳥羽絵): 수묵으로 그려진 희화로, 주로 손발이 긴 인물이 등장하며 현대의 만화와 비슷하다. 에도 시대의 승려인 '도바 소죠'(鳥羽僧正)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 만화(漫画): 그림책으로, 여러 가지 만물을 그려넣은 그림이다. 현대의 만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 춘화(春画): 성행위의 장면이나 성적인 물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 명소 그림(名所絵): 명승지 등을 담은 그림으로, 당시에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없었던 민중이 간접적인 체험으로 이용했다. 여행 팜플렛 격인 역할도 갖는다.
  • 무사 그림(武者絵): 전설이나 기전, 역사에 등장하는 무사를 그린 그림이다. 기전이 붐을 일으켰던 시대 이후 유행을 했다.
  • 역사화(歴史画): 역사적 명장면 등을 담은 그림이다.
  • 장난감 그림(玩具絵):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보드 게임(스고로쿠(双六) 등)이나 딱지 등에 그려지거나, 인기 우키요에의 미니추어 판, 종이 인형 등에 그려진 그림이다.
  • 미타테에(見立絵): 일본 고전 작품의 패러디를 그린 그림이다.
  • 스모 그림(相撲絵): 스모를 묘사한 그림으로, 스모 역사들의 브로마이드 등이 있었다.
  • 하리마제에(張交絵): 한 장의 종이에 여러 가지 그림을 전부 넣은 형태의 그림이다.
  • 시에(死絵): 유명 인사가 사망한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의 작품도 있다.
  • 고도모에(子供絵): 어린이들의 노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 나가사키에(長崎絵): 나가사키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문화를 담은 그림이다.
  • 요코하마에(横浜絵): 요코하마 지역의 이국 문물을 묘사한 그림이다.
  • 나마즈에(鯰絵): 메기를 그린 그림으로, 안세이(安政) 시대의 대지진 후에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메기가 지진을 일으킨다는 속설에서 나왔다.
  • 호소에(疱瘡絵): 천연두를 방지하기 위한 부적이다.
  • 부채 그림(団扇絵): 부채에 붙이는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다.


난로 옆에 예쁘게 차려입은 두 일본 여성의 컬러 판화. 벽지와 다른 물건들은 정교하게 엠보싱 처리되어 있다.
미인화는 우키요에의 주요 부분이었다. 이 니시키에의 벽지와 다른 물건들은 정교하게 엠보싱 처리되어 있다.
'난로 위의 저녁 눈', 하루노부, 1766]]

전통적인 일본 종교는 대부분의 아브라함계 종교에서처럼 성이나 포르노그래피를 도덕적 타락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의 변화하는 도덕관이 억압으로 이어질 때까지 춘화는 주요 장르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에 엄격한 검열법을 적용했지만, 포르노그래피는 중요한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검열관의 승인을 받았다. 이러한 판화의 많은 부분은 침실 장면, 훔쳐보는 사람, 과장된 해부학적 묘사에 높은 수준의 묘사 능력과 종종 유머를 보여주었다. 기생의 묘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이미지는 유흥가의 오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거의 모든 우키요에 거장들이 어느 시점에서 춘화를 제작했다.

역사화(役者絵) 판화, 가부키 배우 두 명사라쿠, 1794


사에(死絵). 8대째 이치카와 단주로. 1854년. 열반도(涅槃図)의 미다테. 32세에 자살하고 약 300종의 사에(死絵)가 있다고 한다.


스모에(相撲絵). 샤라쿠 「다이도잔 도야이리(大童山土俵入)」 1794년. 토리쿠미(取組)를 하지 않는 미세모노(見世物)의 비만 소년.


나가사키에(長崎絵). 카피탄과 그를 시중드는 소년. 18세기 후반. 아이하후리(合羽摺).

5. 제작법

우키요에는 화가(우키요에시(浮世絵師일본어), 에시(絵師일본어)), 조각사(호리시(彫師일본어)), 인쇄공(스리시(摺り師일본어))의 분업으로 제작되었다. 판화는 여러 작업장의 여러 장인 팀의 작품이었으며, 디자이너가 직접 목판을 새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일반적으로 완성된 판화에는 화가와 출판사의 이름만 표기되었다. 우키요에 화가들은 종종 판화와 그림 모두를 제작했으며, 어떤 이들은 한쪽에만 전문적으로 종사하기도 했다.

우키요에 판화 작업장


우키요에 판화의 판목


우키요에 판화는 서구처럼 기계식 프레스가 아닌 수작업으로 수제 종이에 인쇄되었다. 화가는 얇은 종이에 먹으로 그림을 그렸고, 이 그림은 벚나무 목판에 붙여졌다. 그리고 종이의 위쪽 층을 벗겨낼 수 있을 때까지 기름으로 문질러 투명한 종이 층을 남겨 목판 조각가가 가이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목판 조각가는 이미지의 검은색이 아닌 부분을 잘라내어 잉크를 묻혀 인쇄할 수 있는 돌출된 부분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원본 그림은 파괴되었다.

여러 가지 색을 인쇄할 때, 종이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겐토(見当일본어)라는 표식이 매겨졌다. 겐토는 1744년 우에무라 기치에몬(上村吉右衛門일본어)이 고안했다는 설과, 1765년 긴로쿠(金六일본어)라는 스리시가 처음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각 색상의 판목을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라고 하는 맞춤 표시가 한 모서리와 인접한 면에 배치되었다.

Photo of a dish of deep blue powder
19세기에 두각을 나타낸 합성 염료인 프러시안 블루.


인쇄업자들은 처음에 광물이나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 염료를 사용했다. 18세기에는 프러시안 블루가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풍경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64년 서양에서 더 저렴하고 일관성 있는 합성 아닐린 염료가 들어왔다. 메이지 정부는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염료의 사용을 장려했다.

6. 해외 영향

6. 1. 해외에서의 영향

우키요에는 해외에서의 영향 또한 받았다. 독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공 안료인 '베로아이'(베로아이/ベロ藍일본어)는 선명한 남색을 표현할 수 있어 가쓰시카 호쿠사이 등에 의해 널리 쓰여졌다. 서양의 원근법과 음영 기법 또한 받아들여졌다.

6. 2. 해외로의 영향

1851년 런던에서 전시회가 열린 이후 우키요에는 19세기 유럽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명암이 적고 평면적이며 색이 강렬하다. 몇몇 작품들은 검은색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강한 대비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키요에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이후부터 19세기 유럽 화가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미술 이론을 거부하고 새로운 작품과 화가로서의 개성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첫 기반을 다진 것이 인상파였다. 인상파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메리 카사트, 에드가 드가, 그리고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들은 우키요에에게서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1865년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몽이 도자기의 포장지에 있었던 '호쿠사이 만화'를 친구들에게 돌려서 보여준 것이, 인상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고흐의 '탕기 영감'이라는 작품의 배경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고, 히로시게의 그림이 유채화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나, 에두아르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이 작품은 배경이 없고 명암이 적으며 검은색과 붉은색을 대비한 강렬한 색으로 그려져 있어 유럽의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우키요에의 강렬함과 단순함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 '에밀 졸라의 초상' 또한 배경의 벽에 우키요에 작품이 보이고 있다. 클로드 모네는 일본의 우키요에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평면적인 그의 작풍 스타일 또한 우키요에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게다가 자포니즘의 영향과 일본 미술을 취급하고 있었던 빙에 의해 아르 누보에는 우키요에 등의 평면적인 의장이 보인다.

클로드 드뷔시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큰 파도'(가나가와 오키나미우라/神奈川沖波裏일본어)를 보고 자극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는 등(서재에 그림이 걸려있는 모습이 확인되는 사진이 있음), 클래식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키요에의 파도를 형상화한 악보 표지
서구의 시각 예술뿐만 아니라 음악도 우키요에에서 영감을 받았다. 데뷔시의 바다프랑스어 (1905)의 오케스트라 악보 표지.


일본 미술, 특히 우키요에 판화는 초기 인상파 화가들 시대부터 서구 미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초기 화가이자 수집가들은 1860년대 초부터 자신의 작품에 일본의 주제와 구성 기법을 통합했다. 마네의 그림에 있는 무늬가 있는 벽지와 러그는 우키요에 그림에서 발견되는 무늬가 있는 기모노에서 영감을 받았고, 휘슬러는 우키요에 풍경화처럼 자연의 덧없는 요소에 주목했다. 반 고흐는 열렬한 수집가였으며, 히로시게아이젠의 판화를 유화로 모사했다. 드가카사트는 일본풍의 구성과 시각으로 덧없는 일상의 순간을 묘사했다. 우키요에의 평면적인 원근법과 균일하지 않은 색채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포스터 제작자에게 특히 영향을 미쳤다. 툴루즈-로트렉의 석판화는 우키요에의 평면적인 색채와 윤곽선뿐만 아니라 공연자와 매춘부와 같은 주제에도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일본 판화의 인장을 모방하여 자신의 작품 대부분에 원 안에 이니셜을 새겼다. 당시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다른 예술가들로는 모네, 라 파르주, 고갱, 그리고 나비파 회원인 보나르와 뷔야르가 있다.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데뷔시호쿠사이히로시게의 판화에서, 특히 바다프랑스어 (1905)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 이미지스트 시인인 에이미 로웰과 에즈라 파운드는 우키요에 판화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로웰은 동양적 주제 또는 동양식으로 "떠도는 세상의 그림"(1919)이라는 시집을 출판했다.

7. 현대의 우키요에

메이지 정부가 국민들에게 일본 내 여행을 장려하면서 1905년경부터 여행 스케치북이 인기 장르가 되었다. 1915년, 출판사 와타나베 쇼자부로는 자신이 출판한 전통적인 일본 소재의 판화를 외국인과 상류층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여 신한가일본어 ("신판화")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하시구치 고요, 이토 신스이, 카와세 하스이가 있다. 와타나베는 비일본인 예술가들의 작품도 출판했는데, 그중 초기 성공작으로는 1916년 영국인 찰스 W. 바틀릿이 제작한 인도와 일본을 테마로 한 판화 세트가 있다. 다른 출판사들도 와타나베의 성공을 따라했고, 일부 신한가일본어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흑백 판화
''어부''야마모토 카나에, 1904


소사쿠한가일본어('창작 판화') 운동의 예술가들은 판화 제작 과정의 모든 측면, 즉 디자인, 조각, 인쇄를 직접 담당했다. 야마모토 카나에는 1904년 목판화 기법을 사용하여 ''어부''를 제작했는데, 이 기법은 그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구식이며 상업적 대량 생산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좋지 않게 여겨졌다. 1918년 일본 목판화가 협회의 설립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하나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 운동은 예술가의 개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특정한 주제나 스타일이 없었다. 작품은 온치 고시로의 완전 추상 작품부터 히라츠카 운이치의 전통적인 일본 풍경의 인물 묘사까지 다양하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판화는 소사쿠한가일본어 운동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판화 제작자들은 전통적인 목판화와 함께 실크스크린, 에칭, 메조틴트, 혼합매체 등 서구 기법을 사용한다.

8. 관련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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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뉴스 竹中健司「甦れ世界の浮世絵版木◇各地の図書館や美術館調査海を渡って再び摺る◇」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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