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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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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마비용은 17세기 프랑스의 베네딕토회 수사이자 학자이며, 고문서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1681년 《고문서론》을 통해 고문서의 진위 판별에 대한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여, 당시 위조 문서가 만연했던 상황에서 역사 연구의 기반을 다졌다. 마비용은 또한 베네딕토회 성인들의 전기와 역사를 연구하여 《성 베네딕트 수도회 성인전》을 저술했으며, 유럽 각지의 수도원을 방문하여 고문서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동시대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근대 역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파리 메트로역의 이름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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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비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 접두사
이름장 마비용
존칭 접미사O.S.B.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성 모리스 수도회
창립자고문서학 및 외교 문서학
알려진 업적《고문서학》
출생일1632년 11월 23일
출생지생피에르몽, 샹파뉴, 아르덴
사망일1707년 12월 27일
사망지파리
안장지생제르맹데프레 교회
아버지에티엔 마비용
어머니잔 게랭
계급수도승
주요 저서《성 베네딕토 수도회 연대기》

2. 생애

마비용은 당시 고대 샹파뉴 지방에 속했던, 현재는 아르덴 데파르트망에 속하는 생-피에르몽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에티엔 마비용과 잔 게랭이었다. 12세에 그는 랭스에 있는 Collège des Bons Enfants의 학생이 되었다. 1650년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3년 후 떠났고, 1653년 모리스 수도회의 생-레미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학문에 대한 헌신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658년 코르비 수도원으로 보내져 기력을 회복했다. 그는 1660년 코르비에서 서품을 받았다.[2]

1663년 그는 다시 파리 근처의 생-드니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이듬해에는 파리에 있는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 이동은 학문적인 교류를 위한 광범위한 기회를 제공했고, 마비용은 뤽 다셰리, 샤를 뒤 프렌, 시에르 뒤 캉주, 에티엔 발뤼즈, 루이-세바스티앙 르 냉 드 틸레몽 등과 만나 함께 연구했다.

2. 1. 청년기

장 마비용은 샹파뉴아르덴 지역의 상피에르몽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2] 어린 시절부터, 근처에서 사제를 하고 있던 백부로부터 라틴어 교육을 받았다. 백부는 마비용의 장래를 기대하며, 상피에르몽에서 가까운 랑스 대학의 부속학교로의 입학을 추천하였다. 이 시절부터 그는 고문서 및 사본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1650년, 마비용은 랑스대학 부속의 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배웠고, 다음해에 정식으로 부제가 되었다. 1652년에는 랑스대학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653년 8월, 그는 돌연 신학교를 자퇴하고 시내의 상레미 성당(en)으로 옮겨, 상모르 학파의 수도사가 될 것을 결의하였다.[2] 상레미성당은 베네딕트회에서 발생한 상모르 학파의 중심 거점 중 한곳으로, 마비용은 높은 평가를 받아, 다음해 9월에 이곳에서 첫 수도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마비용은 허약한 체질의 소유자로, 간간이 두통을 수반하는 질병을 앓고 있었다. 수도원의 상장들은 그의 건강을 염두에 두어 요양을 추천하였으나, 회복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1658년 아미앵 근교의 코르비 수도원(en)에 파견되었다. 당시의 프랑스에서 가장 충실한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었던 코르비에서 그는 신학, 특히 신학 발전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전례 도중 결핵에 걸리게 된 마비용은 생명의 위기를 직면한다. 이윽고 기적적으로 회복된 그는 1660년 3월 27일아미앵에서 사제 서품을 받게 되나,[2] 그는 남은 목숨이 길지 않음을 깨닫고, 얼마 남지 않는 인생을 기도와 연구에 바칠 것을 서원하게 되었다.

1663년 마비용은 파리의 상드니 대성당으로 옮겨,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곳은 프랑스의 역대 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며, 죽은 후 매장되는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역대 국왕에 관련된 물품들을 포함하여 많은 보물들이 모셔져 있었다. 역사 지식을 보유한 마비용은 수도원장으로부터 이들 물품의 관리직을 명받았다. 이즈음, 파리에 있었던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은 상 모르 학파의 총본산적인 존재로 위치하고 있어, 그곳의 도서관 사서였던 장 뤽 드 아셰리(en)는 베네틱트회의 역사에 관한 사료의 수집, 정리 작업 임무를 맡고 있었다. 마비용의 식견을 알게 된 아셰리는 그를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으로 오도록 추천하였다. 1664년 7월 마비용은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으로 이동하여 아셰리의 조수가 되었다. 이 이동은 학문적인 교류를 위한 광범위한 기회를 제공했고, 마비용은 뤽 다셰리, 샤를 뒤 프렌, 시에르 뒤 캉주, 에티엔 발뤼즈, 루이-세바스티앙 르 냉 드 틸레몽 등과 만나 함께 연구했다.[2]

2. 2. 학문 활동

마비용은 스승 아셰리로부터 성 베르나르의 전집 완성 작업을 이어받아, 1667년에 완료하였다. 당시 성 베르나르의 위작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꼼꼼한 텍스트 비교를 통해 진품만을 가려냈다. 이후, 스승이 수집한 사료와 직접 수행한 조사 여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베네딕트회 성인들의 전기를 집필하는 《성 베니딕트 수도회 성인전》(Acta Sanctorum ordinis Sancti Benedicti)을 1668년부터 1701년까지 총 9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려운 성인 관계는 삭제하여 다른 수도사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대응하여 점차 인정을 받았다.

마비용의 연구는 스승 아셰리가 남긴 방대한 고문서와 역사 사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비용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 각지의 수도원 도서관 등을 방문하여 고문서를 직접 발굴하고 사본을 제작하는 조사 여행을 꾸준히 진행했다. 1672년 플랑드르 지방, 1680년 로렌 지방, 1682년 부르고뉴 지방을 방문하였고, 1683년에는 루이 14세의 명으로 독일스위스를 방문하여 콜베르의 협조를 받아 다양한 문서를 조사했다. 특히 부르고뉴의 룩세이유에서는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갈리아 전례를 발견하여 1685년에 주석을 붙여 간행하기도 했다.

1685년에는 샤를-모리스 르텔리에 (fr)의 주선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청과 학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서관과 문서고를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나폴리와 몬테카시노 등도 방문하여 3000권 이상의 사본을 제작하고, 일부는 왕립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후에도 알자스, 로렌, 샹파뉴, 노르망디 등지를 방문하며 활발한 조사 활동을 펼쳤다.

고문서론


이러한 연구와 조사 활동의 결과, 1681년에 《고문서학》을 간행하여 마르크 블로크로부터 "인류 정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해"라는 평가를 받았다.

2. 3. 조사 여행과 《고문서론》

마비용이 스승 아셰리로부터 처음으로 받은 일은 성 베르나르의 전집 완성으로, 1667년에 완료되었다. 그는 꼼꼼한 텍스트 비교를 통해 위작을 걸러내고 진품만을 채록했다. 이후 마비용은 스승이 수집한 사료 정리와 조사 여행을 통해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베네딕트회 성인들의 전기를 집필하는 작업을 맡았다. 그는 성인전과 기적 보고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연대 확정에 힘썼으며, 진위가 의심되는 사료는 채택하지 않았다. 1668년부터 1701년까지 총 9권으로 완결된 《성 베네딕트 수도회 성인전》(Acta Sanctorum ordinis Sancti Benedicti)은 마비용을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베네딕트회에서 오랫동안 믿어왔던 몇몇 성인들의 관계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성인전》에서 제외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마비용은 "그리스도교도는 진리를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며,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나 지어낸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야 말로 수도회의 불명예로 이어진다"라고 반론했다.

마비용은 1685년 스승 아셰리가 사망한 후, 그가 남긴 방대한 고문서와 역사 사료를 물려받았다. 그는 유럽 각지의 수도원 도서관 등을 조사하기 위해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조사 여행을 떠났다. 1672년 플랑드르 지방, 1680년 로렌 지방, 1682년 부르고뉴 지방을 방문했다. 1683년에는 루이 14세의 명을 받아 독일스위스를 방문하여, 콜베르의 협조를 받아 여러 고문서를 조사했다. 특히 부르고뉴의 룩스루에서 메로빙 왕조 시대의 갈리아 전례를 발견하여 1685년 간행했다. 같은 해, 프랑스 대주교 샤를르 모리스 르 테리에의 제안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조사 여행을 했고, 3000권 이상의 사본을 제작했다. 이후에도 알자스 로렌, 샹파뉴, 노르망디 등지를 조사 여행했다.

17세기 이전 유럽에는 고문서의 진위 판별 방법이 확립되지 않아, 30년전쟁 이후 영토 분쟁에서 위조 문서 문제가 심각했다. 예수회 수도사 다니엘 하펜브레그(en)는 1675년 '고문서 서설'에서 고문서 진위 판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6세기 문서는 대부분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는 베네딕트회가 보유한 고문서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고, 마비용은 이에 반박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외교 문서에 관하여''(1681) 표지


4년간의 조사 끝에 마비용은 1681년 《고문서론》을 간행하여 고문서의 작성 연도와 진위 여부는 관계가 없으며, 서식, 문면 등 내적 성격 조사를 통해 진위를 판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펜브레그가 가짜로 판정한 문서가 진본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 책은 과학적 고문서학의 확립을 의미하는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마비용은 장-바티스트 콜베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주목을 받았고, 왕립 도서관을 위한 책을 찾기 위해 플랑드르,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를 여행했다.[3]

2. 4. 만년

''Annales Ordinis Sancti Benedicti''(1739)


마비용의 학술적 업적과 인격은 프랑스 안팎에서 높이 평가받았지만, 모든 이들이 이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1683년, 트라피스트회 개혁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아르망 장 르 브티리에 드 랑세는 수도자는 참회를 하는 자이며 학문은 그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며, 상 모르 학파와 베네딕트회를 비난하였다. 마비용은 1691년 수도사의 무지는 잘못된 신앙으로 이어진다는 반론을 폈으나, 랑세와 절친한 사이였기에 표면적인 분쟁을 피하려 했고, 문제는 장기화되었다.

1698년, 마비용은 《에우제비우스의 로마 서간》(Eusebius Romanus)에서 로마 카타콤베에서 발굴된 유체에 대해 제대로 감정되지 않은 채 성인의 유체로 판단되어 외국으로 보내지는 일에 경종을 울렸다가, 1701년 금서성청으로부터 이단 혐의를 받아 해당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 또한 1687년부터 상 모르 학회에서 진행해왔던 아우구스티누스 전집 편찬과 관련하여, 예수회로부터 쟝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699년, 마비용은 해명을 위한 서문을 썼고, 1701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전집 간행과 마비용 및 관계자들의 활동에 축복을 내려 반대파의 중상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와중에 마비용은 1693년부터 《성 베네딕트 수도회 연대기》 (Annales Ordinis Sancti Benedicti occidentalium monachorum patriarchae) 집필을 시작하여 1703년 첫 권을 간행했다. 생전에 1066년까지를 다룬 제4권까지만 완성되었으나, 이 책은 그가 훌륭한 교회사가였음을 보여주는 저작이 되었다.

1701년 마비용은 왕명으로 프랑스 금석학 문학 아카데미의 창립 멤버로 위촉되었으며, 1704년 《고문서론》의 추가본이 간행되었다. 1707년 사망한 마비용은 파리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에 묻혔다.

마비용의 활동은 교회인으로서의 처지와 시대적 제약을 받았지만, 고문서학 및 역사학에 대한 그의 진실 추구 자세는 근대 이후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프리츠 슈테른은 1956년에 저술한 그의 문서에서, 마비용을 "그 시대의 위대한 역사철학자"로 언급했다.[9] 파리 메트로의 마비용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

3. 업적

파리 메트로 10호선의 마비용 역은 장 마비용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고문서학의 확립17세기 이전 유럽에서는 고문서의 진위를 판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지 않았다. 30년 전쟁으로 인해 영토 분쟁이 발생하면서, 증거로 제시된 고문서 중에는 위조 문서가 많아 정확한 판별 기술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회 수도사 다니엘 하펜브레그(en)는 1675년 '성인전'의 '고문서 서설'에서 고문서 진위 판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6세기 문서는 국왕 문서나 교황의 대칙서를 포함하여 모두 가짜이며 오래될수록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서의 재질이나 보존 환경을 무시한 이론으로, 베네딕트회는 이에 반발하여 장 마비용에게 반론을 요청했다.

마비용은 베네딕트회가 보존해온 고문서와 프랑스 전역의 고문서를 조사하여 4년간의 연구 끝에 《고문서론》(De re diplomatica)을 출판했다.

1681년, 예수회 소속 다니엘 판 파펜브로크가 생 드니 대수도원에 보관된 메로빙거 왕조 문서의 진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자, 마비용은 그의 저서 ''외교 문서에 관하여''를 출판했다.[3] 그는 문서의 작성 연도와 진위 여부는 관계가 없으며, 오래된 문서도 보존 조건에 따라 전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서식과 문면 등 문서의 내적 성격 조사가 진위 판별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하펜브레그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가 가짜로 판정한 문서가 진본임을 밝혔다. 마비용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나는 실제로 어떤 역사적 문서는 위조되었고 다른 문서들은 가필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본 필사본과 위조되고 가필된 필사본을 구별하기 위한 규칙을 고안하고 전해야 한다.[3]

《고문서론》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고문서학의 확립을 의미한다. 이 저술은 마비용을 장-바티스트 콜베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주목을 받게 했다.[3]
베네딕토회 역사 연구마비용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의 작품을 편집하여 1667년에 출판했으며, ''Acta Ordinis S. Benedicti''라는 제목으로 베네딕토회 성인들의 삶에 대한 기념비적인 컬렉션을 1668년부터 1701년 사이에 9권으로 출판했다. 이 작업은 돔 뤼크 다셰리와 협력하여 진행되었는데, 다셰리는 생제르맹데프레의 사서였으며 마비용보다 선배였다. 마비용은 다셰리가 수집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Acta''를 만들었으며, 이후 추가한 서문에서는 초기 중세 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성인들의 삶을 사용했다.

3. 1. 고문서학의 확립

17세기 이전 유럽에서는 고문서의 진위를 판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지 않았다. 30년 전쟁으로 인해 영토 분쟁이 발생하면서, 증거로 제시된 고문서 중에는 위조 문서가 많아 정확한 판별 기술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회 수도사 다니엘 하펜브레그(en)는 1675년 '성인전'의 '고문서 서설'에서 고문서 진위 판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몇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6세기 문서는 국왕 문서나 교황의 대칙서를 포함하여 모두 가짜이며 오래될수록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서의 재질이나 보존 환경을 무시한 이론으로, 베네딕트회는 이에 반발하여 장 마비용에게 반론을 요청했다.

마비용은 베네딕트회가 보존해온 고문서와 프랑스 전역의 고문서를 조사하여 4년간의 연구 끝에 《고문서론》(De re diplomatica)을 출판했다.

1681년, 예수회 소속 다니엘 판 파펜브로크가 생 드니 대수도원에 보관된 메로빙거 왕조 문서의 진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자, 마비용은 그의 저서 ''외교 문서에 관하여''를 출판했다.[3] 그는 문서의 작성 연도와 진위 여부는 관계가 없으며, 오래된 문서도 보존 조건에 따라 전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서식과 문면 등 문서의 내적 성격 조사가 진위 판별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하펜브레그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가 가짜로 판정한 문서가 진본임을 밝혔다. 마비용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나는 실제로 어떤 역사적 문서는 위조되었고 다른 문서들은 가필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본 필사본과 위조되고 가필된 필사본을 구별하기 위한 규칙을 고안하고 전해야 한다.[3]

《고문서론》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고문서학의 확립을 의미한다. 이 저술은 마비용을 장-바티스트 콜베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주목을 받게 했다.[3]

3. 2. 베네딕토회 역사 연구

마비용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의 작품을 편집하여 1667년에 출판했으며, ''Acta Ordinis S. Benedicti''라는 제목으로 베네딕토회 성인들의 삶에 대한 기념비적인 컬렉션을 1668년부터 1701년 사이에 9권으로 출판했다. 이 작업은 돔 뤼크 다셰리와 협력하여 진행되었는데, 다셰리는 생제르맹데프레의 사서였으며 마비용보다 선배였다. 마비용은 다셰리가 수집한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Acta''를 만들었으며, 이후 추가한 서문에서는 초기 중세 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성인들의 삶을 사용했다.

3. 3. 역사학 연구 방법론

4. 유산

파리 메트로 10호선의 마비용 역은 장 마비용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6] 1701년, 마비용은 국왕에 의해 아카데미 데 장세트 에 벨르 레트르의 창립 멤버로 임명되었으며, 1704년에는 ''외교 문서에 관하여''의 보충판이 출판되었다. 1707년 그는 사망하여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에 묻혔다.[5]

프리츠 슈테른은 1956년에 마비용을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역사 학자"라고 평가했다.[5]

5. 논란

마비용 자신의 수도원 내 덜 학구적인 수도자들은 그의 《생애》가 너무 학문적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랑세 라 트라프 원장은 그가 육체 노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수도회 규칙을 어기고 있다고 선언했다.[4] 그는 또한 "알려지지 않은 성인"의 유물 숭배를 비난하여 문제를 일으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대한 논란이 많은 비판을 썼으며, 얀센주의 혐의를 받았지만, 항상 국왕과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4]

5. 1. 랑세와의 논쟁

랑세 라 트라프 원장은 장 마비용이 육체 노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수도회 규칙을 어기고 있다고 비판했다.[4] 마비용은 "알려지지 않은 성인"의 유물 숭배를 비난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대한 논란이 많은 비판을 써서 얀센주의 혐의를 받기도 했지만, 항상 국왕과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4]

5. 2. '알려지지 않은 성인' 숭배 비판

마비용 자신의 수도원 내 덜 학구적인 수도자들은 그의 《생애》가 너무 학문적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랑세 라 트라프 원장은 그가 육체 노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수도회 규칙을 어기고 있다고 선언했다.[4] 그는 또한 "알려지지 않은 성인"의 유물 숭배를 비난하여 문제를 일으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대한 논란이 많은 비판을 썼으며, 얀센주의 혐의를 받았지만, 항상 국왕과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4]

5. 3. 아우구스티누스 전집 편찬 논쟁

마비용 자신의 수도원 내 덜 학구적인 수도자들은 그의 《생애》가 너무 학문적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랑세 라 트라프 원장은 그가 육체 노동보다는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수도회 규칙을 어기고 있다고 선언했다.[4] 그는 또한 "알려지지 않은 성인"의 유물 숭배를 비난하여 문제를 일으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대한 논란이 많은 비판을 썼으며, 얀센주의 혐의를 받았지만, 항상 국왕과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4]

참조

[1] 간행물 Jean Mabillon
[2] 뉴스 Jean Mabillon https://www.britanni[...] Britannica, The Editors of Encyclopaedia 2022-12-23
[3] 서적 De re diplomatica 1681
[4] 간행물 A Case in which a Revitalization of Something Medieval Turned out not to be Medievalism http://www.uni.edu/u[...] UNIVERSITAS: The University of Northern Iowa Journal of Research, Scholarship, and Creative Activity 2006
[5] 서적 The Varieties of History Meridian Books 1956
[6] 서적 Expert Bytes: Computer Expertise in Forensic Documents - Players, Needs, Resources and Pitfalls https://books.google[...] CRC Press 2013-09-11
[7] 서적 ヨーロッパ中世古文書学 九州大学出版会 2000
[8] 간행물 Jean Mabillon
[9] 서적 The Varieties of History Meridian Books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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