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르주 뒤메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르주 뒤메질은 189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비교 종교학 및 신화학 연구의 권위자이다. 그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앙투안 메예의 지도를 받아 인도유럽 언어학을 연구했다. 뒤메질은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산스크리트 문학과 오비디우스 작품 간의 유사성을 발견했고, 1924년 비교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스탄불 대학교와 웁살라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연구했고, 특히 삼기능 가설을 정립하여 인도유럽 사회의 신화와 사회 구조를 분석했다. 삼기능 가설은 고대 인도유럽 사회가 사제, 전사, 생산자로 구성된 삼기능적 계층 구조를 가졌다는 이론으로, 뒤메질은 이 가설을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했다. 그는 1968년 은퇴 후에도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갔으며, 1986년 사망했다. 그의 연구는 20세기 후반 인도유럽 연구와 비교 신화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문헌학자 -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은 프랑스 프로방스 출신의 시인이자 언어학자, 작가로, 프로방스어 부흥 운동인 펠리브리주 운동을 이끌었으며, 프로방스어 작품과 사전 편찬, 아를 박물관 건립 기여 등으로 19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프랑스의 문헌학자 - 앙투안 메이예
    프랑스의 언어학자 앙투안 메이예는 역사 언어학과 인도유럽어족 비교 연구에 기여하고 문법화 개념을 정립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비교언어학 강사로 활동하며 호메로스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국제 보조어 연구에도 참여했고, 『인도유럽어 연구 입문』, 『라틴어 어원 사전』 등의 주요 저서를 남겼다.
  • 이스탄불 대학교 교수 - 빌헬름 뢰프케
    독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경제학자이자 질서자유주의의 대표 학자로, 나치에 저항하며 해외에서 활동했고, 전후 독일 경제 부흥에 기여했으며, 자유 시장과 사회적·윤리적 틀을 강조한 경제 인본주의를 주장했지만, 인종차별적 견해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이스탄불 대학교 교수 - 리하르트 폰 미제스
    리하르트 폰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응용 수학자로서 유체역학, 항공역학, 통계학 분야에 기여했고, 변형 에너지 이론을 개발했으며, 확률론 연구와 도박 시스템의 불가능성을 정의했다.
  • 신화학자 - 야코프 그림
    야코프 그림은 그림 동화 편찬, 독일어 사전 편찬 참여, 그림의 법칙 정립 등 언어학과 문헌학에 큰 업적을 남긴 독일의 학자이자, 법학자, 민속학자, 자유주의 운동가였다.
  • 신화학자 - 롤랑 바르트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이자 기호학자, 사상가인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의 영도`와 `신화론`으로 이름을 알리고 구조주의와 기호학 연구를 거쳐 포스트구조주의적 시도를 보였으며, '작가의 죽음' 개념을 통해 텍스트 해석의 다의성과 독자의 역할을 강조하며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조르주 뒤메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르주 뒤메질
조르주 뒤메질
개인 정보
이름조르주 뒤메질
원어 이름Georges Dumézil
출생일1898년 3월 4일
출생지프랑스 파리
사망일1986년 10월 11일
사망지프랑스 파리
배우자마들렌 르그랑 (1925년 결혼)
자녀2명
직업 및 활동
직업문헌학 학자
언어학자
종교학 학자
주요 관심 분야인도유럽어족 신화학(비교신화학)
인도유럽 사회
주요 저서신화와 서사시 (1968–1973)
주요 아이디어삼기능 가설
영향을 준 학자막스 뮐러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에른스트 쿤
에밀 뒤르켐
마르셀 그라네
헤르만 귄테르트
얀 데 브리스
오토 회플러
에밀 벤베니스트
스티그 비칸데르
영향을 받은 학자얀 데 브리스
오토 회플러
스티그 비칸데르
에밀 벤베니스트
미르치아 엘리아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가브리엘 튀르빌-페트르
베르너 베츠
에드가르 C. 폴로메
얀 푸흐벨
C. 스콧 리틀턴
딘 A. 밀러
니콜라스 앨런
학력
출신 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박사 논문 제목불멸의 향연
박사 논문 발표 연도1924년
지도 교수앙투안 메이예
학문적 조언자미셸 브레알
근무지
소속 기관이스탄불 대학교
고등연구실천원
콜레주 드 프랑스
기타 정보

2. 생애

조르주 뒤메질은 1898년 파리에서 태어나 리세 루이 르 그랑에서 수학했다. 루이 르 그랑 재학 시절, 비교언어학자 미셸 브레알을 만나 산스크리트어 작문 지도를 받고 범어-영어 사전을 선물 받으며 진로를 결정했다.[12] 브레알의 추천으로 앙투안 메이에의 저서를 접하고, 메이에 밑에서 연구하기로 했다.

1916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수석 입학, 앙투안 메이에와 마르셀 그라네에게서 배웠다.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징집되어 베르당 등에서 후방 임무를 수행했다. 1919년 교수 자격 시험 합격 후 바르샤바 대학교 프랑스어 강사로 부임했지만 곧 사임했다.[12]

1924년 메이에의 지도하에 비교신화학 박사 논문 《불멸의 향연》을 발표했다. 당시 비교신화학은 쇠퇴했지만, 뒤메질은 어원 일치를 통한 신화 분석 방법을 초기 연구에 적용했다.[12] 1925년 결혼 후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종교사를 가르치며 캅카스어족을 접했다. 1929년 《켄타우로스의 문제》를 발표하고, 1930년 고대 인도와 이란 사회 계층의 3분법에 주목, 에밀 뱅베니스트의 지지를 얻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웁살라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12]

1933년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비교신화학 강사로 프랑스에 돌아와 1934년 《우라노스-바르나》, 1935년 《프라멘-브라흐만》을 발표했다. 1938년 인도-유럽어족의 3기능 이데올로기(사제, 전사, 생산자)를 발견하고, 고대 로마 3신(유피테르, 마르스, 키리누스)과의 대응 관계를 제시하여 뱅베니스트의 지지를 얻었다.[12]

1940년대 《유피터-마르스-키리누스》 3부작, 《호라티우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 등을 출판하며 가설을 발전시켰다. 1948년 뱅베니스트의 도움으로 프랑스 공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52년 페루에서 케추아어를 연구하고, 1954년부터 1972년까지 튀르키예에서 우비흐어 연구를 진행, 마지막 화자 테브피크 에센티와 협력했다.[12]

1966년 《고대 로마의 종교》를 시작으로 연구를 종합, 1968년 《신화와 서사시 I》을 출판하고 미국에서 강의했다. 1978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환영 연설을 했다. 198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1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조르주 뒤메질은 1898년 3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 아나톨 장 뒤메질은 고등 교육을 받은 프랑스 육군 장군이었다. 뒤메질은 콜레주 드 뇌프샤토, 트루아 리세, 루이 르 그랑 리세, 타브 리세 등 명문 학교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대 그리스어라틴어에 능통했다.

프란츠 보프의 제자이자 뒤메질 친구의 조부였던 미셸 브레알의 영향으로 뒤메질은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인도유럽 신화와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6년, 뒤메질은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프랑스 육군 포병 장교로 복무하며 크루아 드 게르 훈장을 받았다.

1919년, 뒤메질은 ENS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그의 스승 앙투안 메예는 뒤메질에게 이란어와 인도유럽 언어학을 가르쳤으며, 큰 영향을 주었다. 메예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뒤메질은 언어학보다 신화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세기에는 프란츠 펠릭스 아달베르트 쿤, 막스 뮬러 등의 언어학자들이 비교 신화학 연구를 수행했지만, 그 이론들은 대부분 지지받지 못했다. 뒤메질은 비교 신화학 분야를 회복하고자 했다.

1920년 보베 리세에서 강의했고,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이 시기 뒤메질은 산스크리트 문학오비디우스의 작품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하고, 이들이 공통된 인도유럽 유산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1924년, 뒤메질은 논문 "불멸의 향연"으로 비교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인도이란계, 게르만계, 켈트계, 슬라브계, 이탈리아계 종교의 의례적 음료를 조사했다. ENS에서 뒤메질은 피에르 가크소트와 친분을 맺었다. 가크소트는 민족주의 운동인 액시옹 프랑세즈 지도자 샤를 모라의 추종자였다. 뒤메질이 액시옹 프랑세즈에 동조했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뒤메질은 이를 부인했다.[12]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Georges Dumézil프랑스어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육군 포병 장교로 복무했으며, 베르당, 슈망 데 담 등에서 주로 후방 임무에 종사했다.[1] 크루아 드 게르 훈장을 받았다.[1]

2. 3. 학문적 경력 초기

뒤메질은 191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에서 학업을 재개했다.[1] 앙투안 메예에게 이란어와 인도유럽 언어학을 배웠다.[1] 1920년 보베 리세에서 강의했고,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1]

1924년 논문 "불멸의 향연"(Le festin d'immortalité)으로 비교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 이 논문은 인도이란계, 게르만계, 켈트계, 슬라브계, 이탈리아계 종교의 의례적 음료를 조사했다.[1]

1925년부터 1931년까지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종교사 교수를 역임했다.[1] 오세티아어를 비롯한 여러 코카서스 지역 언어에 능숙해졌고, 나르트 서사시를 연구하여 많은 영향력 있는 단행본을 출판했다.[1]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웁살라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1] 헨리크 사무엘 뉘베리, 스티그 위칸데르, 게오 위덴그렌, 오토 횔플러 등과 교류했다.[1]

2. 4. 프랑스 귀국 및 삼기능 가설 정립

뒤메질은 1933년 프랑스로 돌아와 실뱅 레비의 도움으로 프랑스 고등연구실습원(EPHE)에 자리를 얻었다.[1] 1935년부터 1968년까지 EPHE의 비교종교학 부서 연구 주임을 역임하며,[1] 인도유럽 종교에 대한 교육과 연구를 담당했다. EPHE에서 마르셀 그라네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의 종교 연구 방법론은 뒤메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뒤메질은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문화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중국 신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다.[12]

스웨덴 남부의 왕의 무덤에 있는 북유럽 청동기 시대 석판에 묘사된 고대 의식. 뒤메질은 삼기능설에서 원인도유럽 사회가 사제, 전사, 생산자 계급으로 계층적으로 나뉜 이데올로기에 의해 특징지어졌다고 주장했다.


1938년, 뒤메질은 인도-유럽어족의 3기능 이데올로기, 즉 인도 신화에서의 사제 계급, 전사 계급, 생산자 집단의 3분법과 고대 로마의 3신 (유피테르, 마르스, 키리누스)이 대응하며, 각각의 직무와 기능이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표를 통해, 그동안 뒤메질의 비교신화학에 비판적이었던 에밀 뱅베니스트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뒤메질은 예비역 대위로 프랑스 육군에 복귀했다. 리에주에 주둔하며 벨기에 육군과 연락 장교로 근무했다. 아버지의 친구인 막심 베이강의 도움으로 1940년 4월 앙카라(튀르키예)에 있는 프랑스 군사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프랑스 전투 기간 동안 그곳에 남아 있었다. 1940년 9월 프랑스로 송환되었고, 이후 EPHE에서 전임 강사로 돌아왔다.[4] 젊은 시절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에, 1941년 초 친나치 비시 정부에 의해 EPHE에서 해고되었으나, 동료들의 영향으로 1943년 가을 복직했다.[4]

전쟁 중, 뒤메질은 자신의 이론을 상당히 수정했고, 삼기능 가설을 인도-이란인 연구에 적용했다. 특히 1940년 저서 ''Mitra-Varuna''에서 인도-이란 신인 미트라바루나가 각각 사법적 주권과 종교적 주권을 나타내며, 이러한 기능은 로마 신화노르드 신화에서도 나타나는 초기 인도-유럽 전통의 유물이라고 제안했다.[5] 1941년 ''Jupiter, Mars, Quirinus'', 1942년 ''Horace et les Curiaces'', 1943년 ''Servius et la Fortune'', 1944년 ''Naissance de Rome'' 등의 저서에서 뒤메질은 자신의 삼기능 가설을 고대 로마의 인도-유럽 유산 연구에 적용했다.[6]

2. 6. 삼기능 가설 확장

1940년대 후반부터 조르주 뒤메질의 연구는 베다, 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및 사회에 대한 비교 연구에 집중했다. 페르시아 신화그리스 신화는 그의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했다.[1] 그의 저서 『대천사의 탄생』(Naissance des archanges, 1945)은 고대 이란 종교와 조로아스터교에 관한 그의 유일한 책이다. 이 책에서 뒤메질은 미탄니의 신화가 모든 인도-이란인들이 공유했던 초기 신화에서 유래했으며, 인도-이란 신화의 주요 신들이 인도-유럽 사회의 세 가지 기능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뒤메질에 따르면, 조로아스터의 부상 이후에야 아후라 마즈다가 이란 신화에서 최고 신이 되었다.[1]

1949년부터 1968년까지 뒤메질이 인도유럽 문명 교수로 재직했던 프랑스 공과대학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몇 년 동안 뒤메질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미르체아 엘리아데를 프랑스 고등연구실습원(EPHE)에 영입했고, 두 사람 모두 그의 깊은 영향을 받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신화학자로 널리 여겨진다.[4] 1940년대 후반에 뒤메질이 출판한 주목할 만한 저서로는 『타르페이아』(Tarpeia, 1947), 『로키』(Loki, 1948), 『로마의 인도-유럽 유산』(L'Héritage Indo-Européen à Rome, 1949), 『세 번째 군주』(Le Troisième souverain, 1949)가 있다. 후자의 저서에서는 아리만과 그의 인도-유럽 신들(예: 북유럽 신 헤임달)의 역할을 더 넓은 인도-유럽 신화에서 조사했다.[1] 친구인 스티그 위칸데르의 몇몇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통해 뒤메질은 에밀 뒤르켐과 레비스트로스의 보편주의 이론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따라서 인도-유럽 사회의 삼분법 구조는 인도-유럽인들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뒤메질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와 신화를 연구했고, 삼분법이 그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1]

뒤메질은 1949년 프랑스 공과대학에 선출되어 1968년까지 인도-유럽 문명 교수직을 역임했다.[2] 이 직책은 특별히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3]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뒤메질의 이론은 학자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인정받게 되었다. 에밀 벵베니스트, 스티그 위칸데르, 오토 회플러, 얀 드 브리스와 같은 친구들의 지원으로 뒤메질의 이론은 널리 퍼져 나갔다.[10] 뒤메질의 이론을 채택한 주목할 만한 이란학자로는 벵베니스트, 위칸데르, 게오 위덴그렌, 자크 뒤셰느-기유맹, 마리얀 몰레가 있다. 그러나 뒤메질은 일부 인도학자, 이란학자, 로마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인도학자 파울 티메는 미탄니의 신들이 인도-이란계가 아니라 인도-아리아계 신이라고 주장하며, 뒤메질의 인도-이란 종교 재구성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뒤메질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론을 계속 수정했다. 특히, 그는 인도-유럽 사회의 삼분법 구조에 대한 이론을 수정하여 이제는 확립된 체제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로 간주했다.[1]

1955년 뒤메질은 몇 달 동안 리마 대학교의 방문 교수로 재직하면서 케추아족의 언어와 신화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1] 1950년대에 뒤메질은 인도-유럽 신화에서 다양한 기능 간의 전쟁으로 추정되는 것에 대해 많은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는 세 번째 기능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능에 통합되는 것으로 끝났다고 제안했다. 이 주제에 대한 뒤메질의 아이디어는 『인도-유럽인의 전쟁 기능의 여러 측면』(Aspects de la fonction guerrière chez les Indo-Européens, 1956)에 발표되었다. 1950년대에 뒤메질이 발표한 다른 주목할 만한 저서로는 『하딩구스』(Hadingus, 1953)와 로마, 켈트, 게르만 종교에 관한 몇몇 저서가 있다.[1] 1958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인도-유럽인의 삼분법 이데올로기』(L'Idéologie tripartie des Indo-Européens)는 뒤메질의 핵심 아이디어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로 여겨진다.[3]

2. 7. 은퇴 이후

뒤메질은 1968년 교수직에서 은퇴했지만, 연구와 저술 활동은 계속 이어나갔다.[12] 그는 40개 이상의 언어에 능통했으며, 특히 터키에서 우비흐어의 마지막 화자인 테브피크 에센티(Tevfik Esenç)와 함께 연구하며 이 언어의 보존에 기여했다.[12]

은퇴 후, 뒤메질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Mythe et epopee''(1968-1973)를 출판했다.[12] 1974년에는 폴 발레리 상을 수상했다. 1969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 명예 교수가 되었고, 1970년에는 프랑스 비문 및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75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때 환영 연설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맡았다.[12] 1984년에는 시노 델 두카 세계상을 수상했다.

뒤메질은 1986년 10월 11일 파리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4][10]

3. 삼기능 가설

뒤메질의 삼기능 가설은 발표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지배하는 사람, 지키는 사람, 생산하는 사람" 또는 "왕·성직자(제사장), 전사, 생산에 종사하는 서민"과 같은 삼분법은 보편적인 것이며 인도유럽어족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3] 이에 대해 뒤메질은 적어도 구세계에서 삼분법이 이데올로기로서 여러 구조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도유럽어족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고 반론했다.

또한 삼기능 구조가 뒤메질에 의해 임의적으로 발견된 것이며, 다른 문헌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고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에 대해 뒤메질은 수많은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며 구약성서에는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문헌처럼 삼기능이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없다고 반론했다.[14]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화학자와 종교학자들이 삼기능 가설을 수용하고 연구를 진행했다. 스티그 비칸데르, 스콧 리틀턴, 브루스 링컨과 같은 학자들이 삼기능 가설을 지지했으며, 일본의 요시다 아쓰히코와 오오바야시 타라오는 일본 신화 해석에 활용했다. 역사가 조르주 뒤비도 중세사 연구에 응용했다.[14]

미셸 푸코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뒤메질의 영향에 대해 언급했으며,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서도 뒤메질의 이론이 사용되었다.

뒤메질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미셸 푸코와의 연관성 때문에 구조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뒤메질은 인도유럽어족 신화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전승권(cycl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후에는 "시스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개인의 의지적인 것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구조(structure)"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조언을 받고 "구조"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구조"는 인간 심성의 작용에 포함되는 보편적인 규칙이지만, 뒤메질에게 있어 "구조"는 인도유럽어족의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도출되는 가능성으로서의 원형이며, 결코 인류 일반에게서 보이는 구조가 아니다. 뒤메질은 "삼기능 구조"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을 "여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뜻 무관해 보이는 신화 집단을 개별 신격이나 모티프뿐만 아니라 각 항목의 관계 자체를 중시함으로써 "구조"를 찾아내는 방법론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 영향을 주었다[16].

뒤메질은 인도유럽어 학자이자 구조주의에 영향을 준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3. 1. 삼기능 가설의 주요 내용

뒤메질의 연구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인도유럽어족 신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삼분 구조를 설명하는 “'''삼기능 가설'''(三機能仮説)”이다. 뒤메질은 이 가설을 “삼구분 이데올로기”, “삼기능 체계”, “삼기능 이데올로기”, “삼기능 구조”라고 표현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원시 인도유럽어족의 사회, 종교, 신화는 상위부터 “주권”, “전투”, “생산 등 기타”의 세 가지로 구분되며, 이 이데올로기가 사회 계층과 신학의 주요 부분을 구성했다고 한다. 이 세 가지 기능을 각각 제1기능(F1), 제2기능(F2), 제3기능(F3)이라고 부른다.[13]

  • 제1기능(F1): “주술적 최고 권력”과 “법률적 최고 권력”으로 나뉘어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한다. 전자는 공격적이고 어둡고, 영감에 차 있으며 격렬하게 표상되는 반면, 후자는 이론적이고 밝으며, 온화하고 선의로 가득 차 있다고 표상된다.
  • 제2기능(F2): F1만큼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F2에도 비슷한 구분이 나타난다.
  • 제3기능(F3): 신화에 따르면 원래 집단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나중에 투쟁을 거쳐 F1, F2에 합류했다.
  • 세 가지 기능을 포괄하는 여신의 존재도 확인된다.


뒤메질은 처음에는 원시 인도유럽 시대 사회에 실제로 존재했던 삼구분 사회 계층이 사람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쳐 삼기능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원시 인도유럽 시대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이상적인 모습, 즉 세계관으로서 삼기능 이데올로기가 존재했고, 그것이 사회 계층과 신화 사고에 동등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구조주의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뒤메질은 구조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3. 2. 삼기능 가설의 예시

뒤메질의 연구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인도유럽어족 신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삼분 구조를 설명하는 '''삼기능 가설'''(三機能仮説)이다. 뒤메질은 이 가설을 “삼구분 이데올로기”, “삼기능 체계”, “삼기능 이데올로기”, “삼기능 구조”라고 표현했다.[13]

이 가설에 따르면, 원시 인도유럽어족의 사회와 종교 및 신화는 상위부터 “주권”, “전투”, “생산 등 기타”의 세 가지로 구분되며, 이 이데올로기가 사회 계층과 신학의 주요 부분을 구성했다고 한다. 각각 제1, 제2, 제3 기능(F1, F2, F3)이라고 불린다.[13]

뒤메질의 삼기능 가설 예시[14]
F1F2F3
미타니-히타이트 조약문의 신격아르나, 미트라인드라나사티야
베다의 신격바르나, 미트라바유, 인드라나사티야 쌍신
마하바라타의 영웅들판두, 유디슈티라비마, 아르주나나쿨라, 사하데바
바르나(카스트)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
아베스타의 사회 계층아스라우안라사에슈타르바스트리요-후슈얀트
암샤 스펜타아샤 바히슈타, 보후마나후샤슬라 바르야아무르타트, 하르바타트
파리스의 심판헤라와 왕권아테나와 군사적 승리아프로디테와 미녀
초기 로마 삼신유피터, 디우스 피디우스마르스퀴리누스
로마의 사제플라멘 디알리스플라멘 마르티알리스플라멘 퀴리날리스
로마 초기의 "역사"로물루스, 누마툴루스 호스틸리우스안쿠스 마르키우스
북유럽 신화오딘, 티르토르뇨르드, 프레이, 프레이야


3. 3. 삼기능 가설에 대한 비판과 반론

뒤메질의 삼기능 가설에는 여러 비판이 존재한다. "지배하는 사람, 지키는 사람, 생산하는 사람" 또는 "왕·성직자(제사장), 전사, 생산에 종사하는 서민"과 같은 삼분법은 보편적인 것이며 인도유럽어족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다.[13] 이에 대해 뒤메질은 적어도 구세계에서 삼분법이 이데올로기로서 여러 구조에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도유럽어족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고 반론한다. 또한 삼기능 구조가 뒤메질에 의해 임의적으로 발견된 것이며, 다른 문헌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고 구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뒤메질은 수많은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며 구약성서에는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문헌처럼 삼기능이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없다고 반론한다.[14]

이러한 비판과 함께, 많은 신화학자와 종교학자들은 삼기능 가설을 수용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엘리아데, 스티그 비칸데르, 스콧 리틀턴, 브루스 링컨, 일본의 요시다 아쓰히코와 오오바야시 타라오는 삼기능 가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일본 신화 해석에 활용하고 있다. 역사가 조르주 뒤비도 삼기능 가설을 중세사 연구에 응용했다.[14]

미셸 푸코 등도 뒤메질의 영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 개의 고원" 등에서도 뒤메질의 이론이 사용되고 있다.

4. 정치적 성향 및 논란

뒤메질은 젊은 시절 극우, 왕당파, 반민주주의, 반독일 성향의 악시옹 프랑세즈를 지지했으며,[4] 베니토 무솔리니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5] 그러나 나치즘에는 단호히 반대했고,[6] 언론인으로서 독일 민족주의가 제기하는 위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7] 샤를 모라스가 이끄는 악시옹 프랑세즈에 정식으로 가입한 적은 없으며, "그들과 나를 분리하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라고 주장했다.[8] 1930년대 초, 프리메이슨 조직인 프랑스 대로지 (스코틀랜드 의식 포르티크 로지)에 가입했으며,[9]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정부에 의해 교수직과 공무원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11]

그의 삼기능 가설은 파시즘과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고,[4] 알랭 드 베누아, 장 오드리 등 극우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지적되었다.[5] 이들은 뒤메질의 이론을 극우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고, "인도유럽 인종"(백인과 혼동됨)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데 사용했다.[6] 일부 학자들은 뒤메질이 게르만 종교에 관한 저술에서 "나치 문화에 대한 동정심"을 보였다고 비난했다.[7][8]

콜린 렌프루를 비롯한 일부 비판가들은 뒤메질이 확인한 신화적, 사회적 구조가 인도유럽인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9] 아르날도 모밀리아노와 카를로 진즈부르크는 뒤메질의 삼분설 가설이 파시즘과 유사하며, 그의 인도유럽 사회 재구성이 "유대-기독교" 가치를 훼손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했다.[9]

뒤메질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파시스트 조직원이 아니었고, 고대 인도유럽의 계층적 사회 구조에 매력을 느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9]

4. 1. 정치적 성향

뒤메질은 젊은 시절 극우, 왕당파, 반민주주의, 반독일 성향의 악시옹 프랑세즈를 지지했다.[4]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으나,[5] 나치즘에는 단호히 반대했으며,[6] 언론인으로서 독일 민족주의가 제기하는 위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7] 그러나 그는 샤를 모라스가 이끄는 악시옹 프랑세즈에 정식으로 가입한 적은 없으며, "그들과 나를 분리하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라고 주장했다.[8]

1930년대 초, 뒤메질은 프리메이슨 조직인 프랑스 대로지 (스코틀랜드 의식 포르티크 로지)에 가입했다.[9] 이로 인해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정부에 의해 교수직과 공무원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11]

4. 2. 정치적 논란

뒤메질의 삼기능 가설은 파시즘과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4] 그의 연구가 알랭 드 베누아, 장 오드리 등 극우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지적되었다.[5] 이들은 뒤메질의 이론을 극우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고, "인도유럽 인종"(백인과 혼동됨)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데 사용했다.[6] 일부 학자들은 뒤메질이 게르만 종교에 관한 저술에서 "나치 문화에 대한 동정심"을 보였다고 비난했다.[7][8]

뒤메질은 1930년대에 극우, 왕당파, 반민주주의, 반독일 성향의 악시옹 프랑세즈를 지지했다. 그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만,[5] 나치즘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6] 그러나 뒤메질은 악시옹 프랑세즈 회원이 된 적은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과 악시옹 프랑세즈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고 말했다.[9] 또한, 뒤메질은 1930년대 초 프리메이슨 조직인 프랑스 대로지에 가입했고,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정부에 의해 교수직과 공무원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6]

콜린 렌프루를 비롯한 일부 비판가들은 뒤메질이 확인한 신화적, 사회적 구조가 인도유럽인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9] 아르날도 모밀리아노와 카를로 진즈부르크는 뒤메질의 삼분설 가설이 파시즘과 유사하며, 그의 인도유럽 사회 재구성이 "유대-기독교" 가치를 훼손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했다.[9]

뒤메질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파시스트 조직원이 아니었고, 고대 인도유럽의 계층적 사회 구조에 매력을 느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9]

5. 주요 저서


  • Le festin d'immortalité|불멸의 향연프랑스어, 1924
  • Mitra-Varuna|미트라-바루나프랑스어, 1940 (나카무라 타다오 역, 치쿠마 학예문고 『뒤메질 컬렉션 1』, 2001년)
  • Jupiter-Mars-Quirinus|유피테르-마르스-퀴리누스프랑스어, 1941 (카와스미 노부오, 신노 마사오, 도이에 사이치, 야마네 시게오 역, 『뒤메질 컬렉션 1』)
  • Servius et la Fortune|세르비우스와 포르투나프랑스어, 1943 (타카하시 히데오, 이토 타다오 역, 『뒤메질 컬렉션 2』)
  • Naissance de Rome|로마의 탄생프랑스어, 1944 (카와스미 노부오, 신노 마사오, 야마네 시게오 역, 『뒤메질 컬렉션 3』)
  • Naissances d'archanges|대천사의 탄생프랑스어, 1945 (타나카 마사시, 마에다 타츠히코 역, 『뒤메질 컬렉션 3』)
  • Loki|로키프랑스어, 1948
  • La Saga de Hadings (Saxo Grammaticus, I, v-vii)|신화에서 이야기로프랑스어, 1953 (타카하시 히데오, 이토 타다오 역, 『뒤메질 컬렉션 4』, 1970년판도 참조)
  • L'idéologie tripartie des Indo-Européens|인도유럽어족의 삼분 이데올로기프랑스어, 1958 (마츠무라 카즈오 역, 국문사, 1987년)
  • Les dieux des Germains|게르만인의 신들프랑스어, 1959 (마츠무라 카즈오 역, 국문사, 1993년)
  • Le dieu scandinave Viðarr|비다르프랑스어, ''Revue de l'Histoire des Religions'' 168, 1962 (마츠무라 카즈오 역, 『유리카』 1980년 3월호)
  • Mythe et épopée|신화와 서사시프랑스어 3부작, 1968, 1971, 1973
  • Heur et malheur du guerrier|전사의 행복과 불행프랑스어, 1969 (타카하시 히데오, 이토 타다오 역, 『뒤메질 컬렉션 4』)
  • La religion romaine archaïque|고대 로마의 종교프랑스어, 1974
  • Les dieux souverains des Indo-européens|인도유럽어족의 최고신프랑스어, 1977
  • Appollon sonore|울려 퍼지는 아폴론프랑스어, 1982
  • Fêtes romaines d'été et d'automne|로마의 축제 여름과 가을프랑스어, 1986 (오하시 토시미코 역, 호세이대학 출판국, 1994년)

6. 수상 및 명예


  • 크루아 드 게르 훈장[1]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 팔메 아카데미크 훈장 컴맹더
  •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12]
  • 프랑스 비문 및 문학 아카데미 회원
  • 벨기에 왕립 과학·문학·예술 아카데미 회원
  •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 회원
  • 아일랜드 왕립 아카데미 회원
  • 리에주 대학교, 베른 대학교, 웁살라 대학교, 이스탄불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시노 델 두카 세계상
  • 1995년부터 프랑스 아카데미는 언어학 연구 업적에 대해 매년 조르주 뒤메질 상(Prix Georges-Dumézil)을 수여하고 있다.

참조

[1] harvard
[2] harvard The Times 1986-10-16
[3] harvard
[4] harvard
[5] harvard
[5] harvard
[6] harvard
[7] harvard
[7] harvard
[8] harvard
[8] harvard
[9] harvard
[9] harvard
[9] harvard
[10] harvard
[10] harvard
[10] harvard
[10] harvard
[11] harvard
[11] harvard
[11] harvard
[12] 문서 『饗宴』の場合
[13] 문서 ただし「機能」の用法は社会学におけるそれとは齟齬があり、この点でデュメジルが批判されることもある。
[14] 문서 Les trois ordres ou l'imaginaire du féodalisme (1978)、 Le Chevalier, la Femme et le Prêtre (1981).
[15] 서적 デュメジルとの対話 言語・神話・叙事詩 平凡社
[16] 문서 レヴィ=ストロース本人も随所でデュメジルに言及している。両者と対談したディディエ・エリボンの2つの著作に、2人がお互いを比較しあっている箇所がある。
[17] 백과사전 조르주 뒤메질 https://www.doopedia[...] 두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