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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9년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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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9년의 역은 1051년부터 1062년까지 무쓰국(지금의 도호쿠 지방)에서 일어난 아베 씨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중심으로 한 조정 간의 전쟁이다. 아베 씨는 에미시의 유력 호족으로, 중앙 정부에 저항하며 반독립 세력을 형성했다.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무쓰노카미로 부임하여 아베 씨를 토벌하려 했지만,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후 데와 기요하라 씨의 지원을 받아 전세를 뒤집고 아베 씨를 멸망시켰다. 이 전쟁은 가와치 겐지의 세력 확대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겐지의 무가적 유산을 창시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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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9년의 역 - [전쟁]에 관한 문서

2. 배경

국가는 대부분 한 명의 지사가 감독했지만, 현재의 도호쿠 지방에 위치한 무쓰국은 9세기에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정복된 에미시 원주민을 통제하는 군사 장군이 관할했다. 역사적으로 이 직책은 항상 아베 씨 가문이 맡았으며, 아베 장군과 지사 사이에는 행정 통제권을 놓고 많은 갈등이 있었다.[3]

1050년, 에미시를 감독하는 장군은 아베노 요리토키였는데, 그는 지사의 뜻에 거의 개의치 않고 스스로 세금을 부과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지사는 교토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지사이자 원주민 통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15세였던 아들 요시이에와 함께 아베 씨를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3]

2. 1. 무쓰 국과 아베 씨

당시 무쓰국의 유력한 대호족이었던 아베씨는 흔히 부수장(俘囚長)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에미시 가운데 조정에 항복하거나 포로가 된 부수(俘囚)들 중 유력자들로, 조정은 이들을 통해 에미시를 회유하고 포섭하려 했다. 고헤이 7년에 발급된 태정관부(太政官符)에서는 당시 아베씨의 수장이었던 요리토키를 "죽은 부수수(俘囚首)인 아베노 요리토키"라고 불렀다.[13]

아베씨는 혼인 등을 통해 세력을 넓혔는데, 요리토키 대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오늘날 일본 이와테현 내륙부에 해당하는 키타카미강 유역, 오쿠(奧) 6군에 성책을 쌓고 반독립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역은 오쿠 6군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누카노부(糠部, 지금의 일본 아오모리현 동부)에서 와타리(亘理)·이구(伊具, 지금의 일본 미야기현 남부)에 달했다. 요리토키는 딸들을 타이라 나가히라(이구 쥬로)와 후지와라 츠네키요(와타리 곤노타이후) 등에게 시집보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베씨를 토착 호족이라기보다는 왕조국가 특유의 '쓰와모노(兵)'[14]로 보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일본 학자 세키 유키히코(関幸彦)는 헤이시(平氏)겐지(源氏)히데사토류(秀鄕流) 후지와라씨[15]와 같은 군사귀족 외에도 현지 호족이 중앙 권력을 따라 군사귀족화한 케이스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아베씨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주장을 폈다. 《무쓰와키》에서 아베노 요리토키가 5위 관위를 갖는 자들에게 붙이는 통칭인 '다이후'로 불리고 있음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국가는 대부분 한 명의 지사가 감독했지만, 도호쿠 지방무쓰국은 9세기에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정복된 에미시 원주민을 통제하는 군사 장군이 관할했다. 역사적으로 이 직책은 항상 아베 씨 가문이 맡았으며, 아베 장군과 지사 사이에는 행정 통제권을 놓고 많은 갈등이 있었다.[3]

1050년, 에미시를 감독하는 장군은 아베노 요리토키였는데, 그는 지사의 뜻에 거의 개의치 않고 스스로 세금을 부과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지사는 교토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지사이자 원주민 통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들 요시이에와 함께 아베를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3]

무쓰국의 토착 세력으로, 유력 호족인 아베씨는 에미시 중 조정에 귀순한 무쓰 부수의 수장이었다는 견해가 강하다. 또한 왕조 국가 시대에 조정 측에 고용된 용병대장인 병사(つわもの)였을 것이라는 설이나, 도호쿠 지방의 짐승 가죽이나 사금을 야마토 조정에 제공하는 무역 중개자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다. 『무쓰와키』에 따르면, 에이쇼 시대(1046년-1052년) 무쓰 국 오쿠로쿠군(奥六郡)의 아베 요리요시는 할아버지 아베 타다요리 시대부터 "동이 추장"으로서 권세를 떨쳐 여러 촌락을 복종시키고, 국사(国司)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동이 추장" 이야기는 『무쓰와키』의 군서류종본(群書類従本)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존경각문고본(尊経閣文庫本)에는 타다요리의 이름이 없고, 단지 요리요시가 "추장"을 자칭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토가와 텐은 『범국기(範国記)』 ちょう겐 9년(1036년) 12월 22일 조에 무쓰 곤노카미(陸奥権守)로 임명된 "아베 타다요시"를 아베 타다요시와 동일 인물로 보고, 타다요시 부자가 도읍에서 무쓰로 내려가 그대로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오쿠로쿠군에 토착하여 현지의 에미시를 따르게 했다는 "중앙 귀족 출신" 설을 주장하고 있다.[7][8]

2. 2.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부임

11세기 후반, 아베씨는 조정의 조세 요구까지 거부할 정도로 성장했다. 에이쇼 6년(1051년), 무쓰노카미 후지와라노 나리토(藤原登任)가 아베씨 토벌에 나섰으나 오니키리베(鬼切部)에서 대패하고 교토로 도망쳤다. 조정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무쓰노카미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3]

요리요시는 당시 가와치 겐지의 2대 도료(棟樑)로서 겐지 무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요리요시가 무쓰에 도착한 이듬해인 에이쇼 7년(1052년), 고레이제이 천황의 조모인 쇼토몬인(上東門院) 쇼코(彰子)의 병환 쾌유를 비는 대사면령으로 아베씨는 죄를 사면받았다. 요리요시는 온건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며, 아베노 요리토키는 요리요시를 환대하고 자신의 이름이 요리요시와 같은 발음이라며 요리토키(賴時)로 바꾸는 등 평화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다.[3]

국가는 보통 한 명의 지사가 감독했지만, 도호쿠 지방무쓰국은 9세기 일본이 정복한 에미시 원주민을 통제하는 군사 장군이 관할했다. 이 직책은 역사적으로 아베 씨 가문이 맡았으며, 아베 장군과 지사 사이에 행정 통제권을 놓고 갈등이 잦았다.[3]

1050년, 에미시 감독 장군 아베노 요리토키는 지사의 뜻에 개의치 않고 세금을 부과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지사는 교토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지사이자 원주민 통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요리요시는 아들 요시이에와 함께 파견되었다.[3]

3. 전투의 경위

전투는 12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단기적인 휴전과 평화 기간을 제외하면 9년이었다. 산발적인 전투는 치열했고 많았지만, 1057년 가와사키 전투까지는 주요 전투가 거의 없었다. 아베노 요리토키는 그 직전에 사망했고, 미나모토 씨는 그의 아들인 아베노 사다토와 싸웠는데, 사다토는 가와사키에서 미나모토 군을 격파하고 눈보라 속에서 추격했다.[3][4][5]

미나모토가 이끄는 정부군은 험한 지형과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데와국의 기요하라 씨가 제공한 병력을 포함한 새로운 병력으로 보강되었다. 1062년,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는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와 함께 구리야가와 전투에서 아베 군의 요새를 공격하여 물 공급을 차단하고 요새에 불을 질렀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사다토는 항복했다.[3][5]

3. 1. 초기 갈등과 일시적 평화

에이쇼(永承) 6년(1051년), 조정은 세력이 커진 아베씨를 토벌하기 위해 무쓰노카미 후지와라노 나리토(藤原登任)를 보냈으나, 오니키리베(鬼切部)에서 아베씨에게 크게 패하고 교토로 도망쳤다. 이후 조정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무쓰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요리요시가 무쓰에 도착한 다음 해인 에이쇼 7년(1052년), 고레이제이(後冷泉) 천황의 조모인 쇼토몬인(上東門院) 쇼코(彰子)의 병환 쾌유를 기원하는 대사면령으로 아베씨는 죄를 사면받았다. 요리요시는 온건하고 신중한 태도로 아베씨와 평화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고, 아베노 요리토키(賴時)는 요리요시를 환대하며 자신의 이름이 요리요시와 같다는 이유로 요리토키로 바꾸기까지 했다.

1057년 가와사키 전투까지 큰 전투는 거의 없었으나, 이후 전투는 12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베노 요리토키는 가와사키 전투 직전에 사망했고, 미나모토 씨는 그의 아들 아베노 사다토와 싸웠다. 사다토는 가와사키에서 미나모토 군을 격파하고 눈보라 속에서 추격했다.[3][4][5]

미나모토 씨가 이끄는 정부군은 험한 지형과 날씨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데와국의 기요하라 씨가 제공한 병력을 포함한 새로운 병력으로 보강되었다. 1062년,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는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와 함께 구리야가와 전투에서 아베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들은 물 공급을 차단하고, 토루와 울타리를 공격하여 요새에 불을 질렀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사다토는 항복했다.[3][5]

3. 2. 아구리가와 사건과 개전

덴기(天喜) 원년(1053년) 요리요시는 진슈후쇼군(鎭守府將軍)이 되었다. 그의 무쓰노카미 임기가 끝나가던 덴기 4년(1056년) 2월, 진슈후에서 고쿠후로 돌아오던 요리요시는 밀사로부터 휘하의 재청관인 후지와라노 미쓰사다(藤原光貞)ㆍ모토사다(元貞) 형제가 기습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쓰사다는 요리요시에게 사다토(요리토키의 아들)가 이전에 자신의 누이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자신들을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요리요시는 분노하여 사다토를 불렀지만, 요리토키가 사다토를 감싸면서 지방관과 호족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3]

《무쓰와키》에 기록된 이 아구리가와 사건은 전통적으로 요리요시의 모략으로 인한 자작극이라는 설이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요리요시가 아닌 반(反)아베씨 재청관들이 모략의 주체였다는 견해가 있다.[3]

당시 요리요시 근처에는 요리토키의 사위이자 휘하 장수였던 나가히라와 쓰네키요도 있었다. 요리요시는 언제 그들이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가히라가 눈에 띄는 갑옷과 은투구를 갖춰 입고 요리토키에게 요리요시군의 위치를 알려줬다는 모함을 믿고 나가히라를 죽였다. 두려움을 느낀 쓰네키요는 요리토키가 다가(多賀) 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려 요리요시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8백 기(騎)를 이끌고 요리토키에게 도망쳤다. 쓰네키요의 이 선택은 '전9년의 역'을 장기화시킨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

전투는 12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단기적인 휴전과 평화 기간을 제외하면 9년이었다. 1057년 가와사키 전투까지는 주요 전투가 거의 없었다. 아베노 요리토키는 그 직전에 사망했고, 미나모토 씨는 이제 그의 아들인 아베노 사다토와 싸웠는데, 사다토는 가와사키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눈보라 속에서 그들을 추격했다.[3][4][5]

3. 3. 요리토키의 죽음과 기노미 전투

덴기 5년(1057년) 5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는 아베씨의 배후에 있던 아베노 도미타다(安倍富忠) 등 쓰가루(津輕) 지역의 부수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당황한 아베노 요리토키는 도미타다를 설득하려 직접 쓰가루로 향하던 중 복병에게 습격당해 큰 상처를 입고, 고로모가와(厨川, 지금의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덴쇼지초天昌寺町)의 본영으로 돌아오던 길에 도노미(鳥海) 요새에서 숨을 거두었다.[3][4][5]

그 해 9월, 요리요시는 요리토키가 죽었음을 조정에 보고하며 논공행상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 요리요시는 무쓰 국부(지금의 미야기현 다가조시)를 출발해 아베노 사다토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요리요시의 병력은 적었고, 가와자키(河崎) 요새(지금의 이치노세키시)에 4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킨 사다토는 기노미(黃海)에서 요리요시군과 충돌했다. 요리요시군은 대패했고, 많은 유력한 무사들을 잃었다. 요리요시는 맏아들 요시이에를 포함한 일곱 기만 거느리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다.[3][4][5]

전투는 12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단기적인 휴전과 평화 기간을 제외하면 9년이었다. 1057년 가와사키 전투까지는 주요 전투가 거의 없었다. 아베노 요리토키는 그 직전에 사망했고, 미나모토 씨는 이제 그의 아들인 아베노 사다토와 싸웠는데, 사다토는 가와사키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눈보라 속에서 그들을 추격했다.[3][4][5]

3. 4. 기요하라 씨의 참전과 전세 역전

고헤이(康平) 5년(1062년),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는 데와국 센보쿠(仙北, 지금의 일본 아키타현)의 기요하라 씨 족장 기요하라노 미쓰요리(清原光頼)에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보내며 지원을 요청했고, 마침내 미쓰요리는 이를 받아들였다.[16] 7월, 미쓰요리의 동생 다케노리가 1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요리요시 측에 합류했다. 이로써 1만 명의 연합군이 편성되었는데, 이 중 요리요시 측 3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요하라 씨의 군사였다.[16]

기요하라 씨의 참전으로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다. 연합군은 고마쓰(小松) 요새에서의 첫 승리를 시작으로 연승을 거듭했고,[16] 9월 17일에는 아베 씨의 거점인 구리야가와(厨川)·우바토(嫗戸, 지금의 모리오카시 아베노타테쵸安倍館町) 요새를 함락시켰다.[16] 아베노 사다토는 방패에 들려 요리요시 앞에 끌려왔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을 거두었고, 쓰네키요는 무딘 칼로 참수되었다.[16] 이로써 아베 씨가 몰락하면서 전투는 끝났다.[16]

미나모토가 이끄는 정부군은 험한 지형과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데와국의 기요하라 씨가 제공한 병력을 포함한 새로운 병력으로 보강되었다.[3][5] 1062년, 구리야가와 전투에서 요리요시는 아들의 도움을 받아 아베의 요새를 공격하여 물 공급을 차단하고 불을 질렀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사다토는 항복했다.[3][5]

『무쓰와키(陸奥話記)』에 따르면 요리요시·기요하라 씨 연합군의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순서지휘관비고
제1진다케사다다케노리의 아들
제2진다치바나노 사나요리(橘貞頼)다케노리의 조카, 아키타군 오가(男鹿)(현재 오가시) 호족
제3진요시히코노 히데타케(吉彦秀武)다케노리의 조카이자 사위
제4진다치바나노 요리사다(橘頼貞)사나요리의 동생
제5진요리요시, 다케노리, 재청 관인3진으로 나뉨
제6진키비노 미치타다(吉美候武忠)
제7진기요하라노 타케미치(清原武道)



연합군은 8월 17일, 사다토모의 숙부 요시테루의 거점인 고마쓰 책을 공격하여 성내로 돌입했다. 무네토가 800여 기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제5군 정예병에게 패배했다.

9월 5일, 사다토모는 8000여 명으로 공격했지만, 연합군의 반격에 패배했다. 9월 6일, 연합군은 의천의 관을 공격했고, 병사들이 강을 건너 방화하여 사다토모는 도망쳤다. 다음 날 7일, 연합군은 아베 씨의 본거지인 오쿠로쿠군으로 침공하여 오아사노, 세하라를 공략하고 11일에 조카이 책을 공격했다. 무네토, 쓰네키요가 도망쳐 조카이 책은 쉽게 함락되었다. 다케노리는 아베 마사토모의 구로사와지리 책, 쓰루스네 책, 히요토리 책을 잇따라 함락시켰다.

9월 15일, 연합군은 주카와 책(이와테현모리오카시 덴쇼지정)과 오바토 책(모리오카시 아베관정)을 포위했다. 아베 군은 맹렬히 저항했지만, 요리요시는 주변 민가를 해체하여 불을 질러 책에 방화했다. 9월 17일, 주카와 책이 함락되면서 전9년의 역은 종결되었다.

신장이 6척(약 182cm), 복위가 7척 4촌(약 224cm)인 사다토모는 깊은 상처를 입고 요리요시를 힐끗 보고 숨을 거두었다. 쓰네키요는 무딘 칼로 참수되었고, 사다토모의 아들 지요도지와 동생 시게토도 살해되었다. 무네토, 이에토, 마사토모, 타메모토 등도 항복하여 포로로 연행되었다.

기요하라 씨 참전 후, 불과 1개월 만에 아베 씨가 멸망한 것에 대해, 아베 씨와 기요하라 씨 사이에 밀약이 성립되어 조기 종전이 합의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

4. 전후 처리와 영향

1063년 2월 7일, 조정은 요리요시를 정4위하 이요노카미(伊予守)로 옮겨 오슈에서의 영향력을 제한했다. 사다토의 동생 무네토(宗壬) 등은 이요지쿠젠 등지에 유배되었다.[10] 1064년 2월 22일, 요리요시는 포로가 된 아베 무네토모 등을 데리고 12년 만에 교토로 귀환, 1067년다자이후로 이송되었다.[10] 이 사건은 『헤이케 이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케노리는 전공으로 종5위하 진슈후쇼군에 임명되어 오쿠 6군의 지배권을 받았고, 데와 기요하라 씨가 무쓰ㆍ데와 양국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쓰네키요의 처였던 아루카이치노 마에는 남편 사후 다케사다에게 재가, 쓰네키요의 아들도 다케사다의 양자가 되어 후3년의 역의 복선이 되었다.

고로모 강 성에서 쫓겨난 사다토와 요시이에 사이에 오간 렌가는 《고콘 초몬주》에 전해진다. 요시이에는 "고로모의 방패는 찢어졌도다."라고 읊었고, 사다토는 "세월이 흘러 실이 엉켜 고통스럽다"라고 답했다.[4]

4. 1. 겐지의 세력 확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는 미나모토 씨의 무가적 유산 창시자로 여겨지며, 특히 가미로 숭배받는다. 하치만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하치만타로"라고 불리기도 한다.[4]

「전9년의 역」에서 요리요시·요시이에가 승리하면서 가와치 겐지(河内源氏)는 무가 집안 중 최고 격식을 가진 집안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중세 이후에도 계속해서 언급되었다. 실제로 요리요시·요시이에의 가계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나와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고,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타카우지 역시 가와치 겐지였다. 이들이 무문의 맹주 상징으로 정이대장군을 칭한 배경에는, 요리요시가 에조(蝦夷)를 정벌한 이 전역이 있었다.[11] 요리토모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및 오슈 후지와라 씨 정벌 때 「전9년의 역」을 의식하여, 히라즈미 멸망 후에도 북상하여 부조(父祖)의 전승지 「구리야가와」에서 요시이에가 동지에 행했던 쇠못 고사를 재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전9년의 역 성지인 「시와 군(斯波郡)」을 영유한 아시카가 씨의 분가는 시바 씨를 칭하며 무로마치 막부 삼관령가의 필두가 되었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와치 겐지의 닛타 씨 방계인 토쿠가와 씨를 자칭했다.

『우지 슈이 모노가타리』에는 요시이에의 무예가 사람의 지혜를 초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2. 중세 무사 정권으로의 영향

미나모토노 요시이에미나모토 씨의 무가적 유산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하치만의 아들 "하치만타로"라고 불리며 가미로 숭배받는다.[4]

「전9년의 역」에서 요리요시·요시이에의 승리는 가와치 겐지(河内源氏)가 무가 최고 격식의 집안이라는 근거로 중세 이후 반복적으로 참조되었다. 요리요시·요시이에의 가계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를 열었고,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도 가와치 겐지였다. 이들이 정이대장군을 칭한 배경에는 요리요시가 에조(蝦夷)를 정벌한 이 전역이 있다.[11] 요리토모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및 오슈 후지와라 씨 정벌 때 「전9년의 역」을 의식, 히라이즈미 멸망 후에도 북상하여 부조(父祖)의 전승지 「구리야가와(厨川)」에서 요시이에가 행했던 쇠못 고사를 재현했다. 아시카가 씨의 분가 시바 씨는 전9년의 역 성지 「시와 군(斯波郡)」을 영유, 무로마치 막부 삼관령가의 필두가 되었다.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와치 겐지의 닛타 씨 방계 도쿠가와 씨를 자칭했다.

우지 슈이 이야기의 「시라카와 원(白河院) 오소하레(おそはれ) 기사」에는 요시이에의 무예가 사람의 지혜를 초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명칭의 변천

이 전쟁은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오슈에 부임한 1051년부터 아베 씨가 멸망한 1062년까지 걸린 기간 때문에, 아즈마카가미 쇼겐 4년 11월 23일 조에서는 "오슈 12년 합전"이라고 불렀다.[6] 고지단 권4에는 "12년의 정전",[6] 구간초에는 "12년의 싸움",[6] 고콘초몬주 권9에는 "12년의 합전"이라고[6] 기록되어 있어, 가마쿠라 시대 중기까지는 "12년 합전"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호겐 이야기에는 "전9년의 합전"이라고[6] 기록되어 있듯이, 가마쿠라 시대 말기 이후 "전9년 합전"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기록인 헤이케 이야기에는 "요리요시의 9년의 싸움과 요시이에의 3년의 싸움을 합쳐 12의 합전이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어, "12년 합전"이 "이 합전과 고산넨 전투(1083년 - 1087년)를 합한 명칭"이라고 오해되어, 12년에서 3년을 빼서 "전9년 합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6]

또한, 중세 사료에서 "역"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예는 남북조 시대의 겐이슈 등 소수에 불과하며, "합전"이라는 명칭이 근세까지 일반적이었다. "역"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이 된 것은 메이지 시대의 고본 국사안의 영향으로, 그 후 국정 교과서의 명칭이 "역"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History of Hiraizumi http://hiraizumi.or.[...] Hiraizumi Tourism Association 2013-02-18
[2] 논문 The Way of the Bow and Arrow. The Japanese Warrior in ''Konjaku Monogatari'' Sophia University
[3]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5]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6] 서적 辺境の争乱 교육사
[7] 문서 戸川点「前九年合戦と安倍氏」(初出:十世紀研究会 編『中世成立期の政治文化』(東京堂出版、1999年)/所収:戸川『平安時代の政治秩序』(同成社、2018年))
[8] 문서 戸川点「安倍氏と鳥海柵」(初出:『国際開発学研究』16巻2号(拓殖大学国際開発研究所、2017年)/所収:戸川『平安時代の政治秩序』(同成社、2018年))
[9] 간행물 大矢邦宣「黄金の都、平泉 栄枯盛衰ものがたり」『芸術新潮』2011年10月号、31ページ
[10] 서적 古澤直人「謀叛に関わる勲功賞」『中世初期の〈謀叛〉と平治の乱』(吉川弘文館、2019年) ISBN 978-4-642-02953-7 P49-52.
[11] 문서 関、2006年、78-81ページ
[12] 뉴스 日本経済新聞 2009-11-04
[13] 문서 마에(末陪, 前)란 일본에서 귀부인에게 붙이던 존칭이다. 다만 '中加一乃末陪'나 '有加一乃末陪'의 읽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판명된 바가 없다. '有加一乃末陪'의 경우 오늘날 보편적으로는 '아루카이치노 마에(あるかいちのまえ)'로 읽지만 '아리카이치노 마에(ありかいちのまえ)'로 읽은 것도 있다. 한편 일본의 작가 다카하시 가쓰히코(高橋克彦)가 쓴 소설 「불타오르다(원제: 炎立つ)」에서는 有를 '유우(ゆう)'로 읽어, 한자 표기를 '結有'로 하고 '유카이치노 마에'라 부르고 있다.
[14] 문서 율령제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군사력으로 지방에서 빈발하던 소요 사건의 진압을 위해 이용되었던 일종의 용병단. 흔히 일본 중세사의 '무사'의 원조격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무사들과는 달리 토지 소유나 지배 여부에 구애받지 않는 집단이었다고 여겨진다.
[15] 문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반란을 진압하고 조정으로부터 은상을 받은 무사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鄕)를 파조로 하는 후지와라씨 방계
[16] 인용 "將軍深悪之, 故以鈍刀漸斬其首." 《무쓰와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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