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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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횡은 중국 초한 시대의 인물로, 형 전영과 함께 거병하여 제나라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활약했다. 그는 항우에게 대항하여 제나라를 재건하고, 한나라와의 갈등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의로운 죽음은 후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으며, 외연도에서는 전횡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한다.
전횡은 진나라 말기, 형 전영 및 사촌형 전담과 함께 고향 적현(狄縣)에서 거병했다. 기원전 209년, 전담은 스스로 제나라 왕위에 올랐으나,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포위된 위나라 왕 위구를 구원하러 출정했다가 전사했다. 이후 전영은 전문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으며, 전횡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평정했다.
적벽 대전 전야,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손권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을 때, 손권이 "유비는 어째서 조조를 섬기려 하지 않는가?" 하고 묻자 제갈량은 전횡의 최후를 예로 들며 유비가 조조에게 항복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2. 생애
항우는 전영을 쳐부수고 제나라의 성곽을 불태우는 등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전횡은 제나라 군사를 수습해 항우에 맞섰다. 유방이 팽성을 함락하자 항우는 제나라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회군했고, 전횡은 제나라의 옛 성을 되찾고 전광을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한신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전광과 전횡은 도망쳤고, 항우가 파견한 용저도 한신에게 격파되자 전횡은 팽월에게 달아났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황제로 추대되자 팽월은 양왕이 되었다. 전횡은 휘하 500명과 함께 섬으로 도망쳤다. 유방은 전횡 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죄를 용서하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전횡은 두 명의 식객과 함께 유방에게 향하던 중, 낙양 30리 밖에서 자결했다.
전횡의 식객은 전횡의 목을 유방에게 바쳤고, 유방은 왕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두 식객은 전횡의 무덤 곁에서 자살했다. 섬에 남아있던 500여 명도 전횡이 죽은 것을 알고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1. 거병과 제나라 왕위 계승
진나라 말기, 전횡은 형 전영 및 사촌형 전담과 함께 고향 적현(狄縣)에서 거병했다. 기원전 209년, 전담은 스스로 제나라 왕위에 올랐으나,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포위된 위나라 왕 위구를 구원하러 출정했다가 패배하여 전사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전건의 동생 전가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전영은 이에 분노했다.
전영은 항량의 도움을 받아 장한의 위협에서 벗어난 후 제나라를 공격했고, 전가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기원전 208년, 전영은 전담의 아들 전문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으며, 전횡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평정했다.
항량은 장한을 공격하기 위해 전영에게 군사를 요청했으나, 전영은 전가를 죽이면 군사를 내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초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장한과 전투를 벌였지만, 항량이 전사하면서 항량의 조카 항우는 전영을 원망하게 되었다. 이후 항우를 따라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제후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전도는 제나라 왕, 전안은 제북왕이 되었으나, 전영은 항우에게 밉보여 봉해지지 못했다.
이에 전영은 진여와 함께 항우를 원망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전영은 전도를 내쫓고 전안을 죽였으며, 자신을 따르지 않던 전시까지 죽이고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었다.
2. 2. 한나라와의 갈등과 최후
항우는 전영을 쳐부수고 제나라의 성곽을 불태우는 등 무자비한 진압을 일삼았다. 이에 전횡은 제나라 군사를 수습해 항우에 맞섰다. 유방이 팽성을 함락하자 항우는 제나라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회군했고, 전횡은 제나라의 옛 성을 되찾고 전영의 아들 전광을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의 장수 한신이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제나라는 역이기를 통한 동맹 제안을 받아들여 수비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신은 제나라를 침공하여 제나라 군을 격파했고, 전광과 전횡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도망쳤다. 항우가 파견한 용저도 한신에게 격파되고 전횡은 팽월에게 달아났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황제로 추대되자 팽월은 양왕이 되었다. 전횡은 휘하 500명과 함께 섬으로 도망쳤다. 유방은 전횡 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죄를 용서하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전횡은 두 명의 식객과 함께 유방에게 향하던 중, 낙양 30리 밖에서 자결했다.
전횡의 식객은 전횡의 목을 유방에게 바쳤고, 유방은 전횡을 왕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두 식객은 전횡의 무덤 곁에서 자살했다. 섬에 남아있던 500여 명도 전횡이 죽은 것을 알고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적벽 대전 전야,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손권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을 때, 제갈량은 철저 항전의 의지를 전횡의 최후를 예로 들어 대답했다. 손권이 "유예주(유비)는 어째서 끝까지 조조를 섬기지 않는가?"라고 묻자, 제갈량은 "전횡은 제나라의 장사에 불과했음에도 의리를 지켜 굴욕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유예주는 한 왕실의 후예입니다. (중략) 어찌 조조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258년, 제갈탄이 당시 실질적으로 위를 지배하고 있던 사마씨에 반란을 일으켜 패사했을 때, 그의 수하 수백 명은 항복을 거부하고 "제갈공을 위해"라며 의연하게 죽어갔다. 이 또한 전횡과 그의 식객의 고사에 비견되었다.
3. 2. 부정적 평가
적벽대전 전야,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손권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을 때, 제갈량은 철저 항전의 의지를 전횡의 최후를 예로 들어 대답했다. 손권이 "유예주(유비)는 어째서 끝까지 조조를 섬기지 않는가?"라고 묻자, 제갈량은 "전횡은 제나라의 장사에 불과했음에도 의리를 지켜 굴욕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유예주는 한 왕실의 후예인데, 어찌 조조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위 감로 3년 (258년), 제갈탄이 당시 실질적으로 위를 지배하고 있던 사마씨에 반란을 일으켜 패사했을 때, 그의 수하 수백 명은 항복을 거부하고 "제갈공을 위해"라며 의연하게 죽어갔다. 이 또한 전횡과 그의 식객의 고사에 비견되었다.
3. 3. 중립적 평가
적벽 대전 전야,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손권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제갈량을 파견했을 때, 제갈량은 전횡의 최후를 예로 들어 철저 항전의 의지를 표명했다. 손권이 "유예주(유비)는 어째서 끝까지 조조를 섬기지 않는가?"라고 묻자, 제갈량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횡은 제나라의 장사에 불과했음에도 의리를 지켜 굴욕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유예주는 한 왕실의 후예입니다. (...) 어찌 조조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258년, 위나라에서 제갈탄이 사마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사했을 때, 그의 수하 수백 명은 항복을 거부하고 "제갈공을 위해"라며 의연하게 죽어갔다. 이는 전횡과 그의 식객들의 고사에 비견되었다.
4. 전횡을 기리는 문화
전횡은 한나라에 저항한 인물로, 그의 충절과 의리를 기리는 문화가 남아있다.
한국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에는 전횡과 관련된 전횡장군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4. 1. 한국의 외연도 전횡장군제
충청남도 보령시 외연도에는 전횡과 그 부인, 딸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4일에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4. 2. 기타
5.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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