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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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중부는 고려 시대 무신으로, 무신정변을 주도하여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후 부패와 혼란 속에 몰락한 인물이다. 그는 1170년 무신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폐위시킨 후, 이의방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이후 이의방을 제거하고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나,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의 부패, 잦은 반란 등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결국 1179년 경대승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가계는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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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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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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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고려의 무신 |
재임 시작 | 1174년 |
재임 종료 | 1179년 10월 18일 |
이전 | 이의방 |
이후 | 경대승 |
출생일 | 1106년 |
사망일 | 1179년 10월 18일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아들 정균, 딸 해주 정씨 |
친척 | 송유인 (사위) |
이름 | |
한글 | 정중부 |
한자 | 鄭仲夫 |
로마자 표기 | Jeong Jungbu |
일본어 | てい ちゅうふ |
가문 | |
가문 | 해주 정씨 |
군사 경력 | |
소속 | 고려군 |
계급 | 정3품 상장군 |
관직 | |
관직 | 문하시중 |
임기 시작 | 미상 |
임기 종료 | 1179년 9월 16일 (음력) |
2. 생애
정중부는 1106년에 태어나 젊은 시절 무술과 병법을 배웠다. 키가 7척(약 210cm)이나 되는 거구였으며, 자신감과 지략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성실한 군인이었던 그는 왕의 신뢰를 얻어 병마사까지 승진했다.[3]
당시 고려는 문신 우위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군 장군들은 문관들의 종이나 하인처럼 취급받았고, 1014년에는 군인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후 무과가 폐지되면서 군인들의 고통은 더욱 커져갔다.[3]
1167년, 의종의 왕실 연회에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고 조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정중부가 귀족과 문신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3]
1170년, 의종이 휴식을 위해 자신의 별장에 갔을 때 무술 시합이 열렸다. 한 젊은 군인이 시합에서 우승하여 왕의 칭찬을 받자, 궁정 고문들과 환관들이 50대 후반의 장군 이소응에게 젊은 챔피언과 대결하도록 강요했다. 노련한 장군은 젊은 챔피언에게 패배했고, 한뢰라는 젊은 문신이 장군을 모욕하고 왕과 많은 군인들 앞에서 그의 뺨을 때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정중부는 한뢰를 때려눕히고 모욕했다. 이 사건으로 오랫동안 쌓였던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3]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의 젊은 군인들이 정중부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촉구했고, 정중부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동의했다. 정중부의 명령에 따라 군대는 왕과 그의 고문들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김돈중과 한뢰를 포함한 거의 모든 고문들이 살해되었으며, 의종은 폐위되었다. 정중부는 허수아비 왕 명종을 옹립하여 100년에 걸친 한국의 무신 정권을 시작했다.[3]
쿠데타 이후, 혁명의 지도자들은 서로 반목했다. 이고가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하자, 정중부는 이고를 숙청하고 이의방과 함께 조정을 다스렸다.[3] 1173년에는 김보당의 난을 진압했고, 1174년에는 조위총의 난을 맞아 토벌에 고전하던 이의방을 암살하고 문하시중(재상)에 임명되어 대권을 장악했다.[3]
정중부는 조위총의 난을 2년 만에 진압하고, 1176년에는 망이·망소이의 난 등 국내 혼란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은 축재와 방자한 행동으로 인심을 잃었다.[3]
1178년, 고령을 이유로 치사했지만, 1179년 정중부 일파의 전횡에 분개한 경대승이 왕궁을 점거했을 때, 정균, 송유인 등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3]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해주 정씨로,[3] 용모가 늠름하고 풍채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주의 군적(軍籍)에 올랐다가 상경하여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1144년 견룡대정으로 재직 중 왕의 측근이자 내시(內侍)인 김돈중(김부식의 아들)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중부는 크게 분노하여 김돈중을 구타하였고, 김부식은 정중부를 벌하려 했으나 왕이 그를 보호해 주었다. 이 사건으로 정중부는 김돈중을 비롯한 문관들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3]
『고려사』에 따르면, 정중부는 해주 출신으로 체격이 컸고 수염도 아름다워 사람들의 외경을 샀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고향에 군적을 두었지만, 개경으로 상경하여 검열을 받는 과정에서 재상 최홍재에 의해 발탁되어 공학금군(控鶴禁軍)에 들어갔다.
2. 2. 무신정변 주도
1170년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했을 때,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문관들을 살해했다.[3] 이는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등 무신들의 불만이 쌓인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쿠데타군은 개경의 왕궁과 관청을 장악하고, 김돈중을 처형했다. 이후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하여 약 100년간의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되었다(무신정변).[3]
2. 2. 1. 무신정변의 배경
고려 인종 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은 정중부가 문신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된 계기가 되었다.[3]고려 의종 대에는 문신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의종은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지 못하고 문신들과 향락에 빠져 지냈다. 1170년 의종이 화평재에서 문신들과 연회를 즐길 때, 배고픔과 차별 대우에 지친 이의방, 이고 등은 정중부에게 불만을 토로했고, 정중부는 이들과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당시 고려는 문신 우위 정책을 시행하여 군 장군들은 문관들의 종이나 하인으로 취급받는 등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1014년에는 군인들이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이후 무과를 폐지하면서 군인들의 고통은 더욱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은 무신정변의 배경이 되었다.
2. 2. 2. 무신정변의 전개
1170년 의종은 잦은 연회와 향락으로 왕의 업무를 소홀히 하였고, 이 과정에서 문신들에 비해 무신들은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4] 화평재에서 열린 연회에서 무신들은 굶주린 채 경호를 서야 했던 반면, 문신들은 술과 시를 즐겼다. 이러한 차별에 불만을 품은 이의방, 이고 등은 정중부에게 불만을 토로했고, 정중부 역시 분노하여 이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게 되었다.1170년 8월 30일, 의종이 보현원으로 행차했을 때, 왕은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하도록 명했다.[4] 이 때,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군졸과의 수박희에서 패배하자,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며 모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정중부는 한뢰에게 크게 항의했고, 왕이 정중부를 달래었지만, 이고는 칼을 빼들 정도로 상황이 격앙되었다.[5][4]
이 사건을 계기로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호위 장병들을 이끌고 문신들을 무차별 살해하기 시작했고, 내직(內直)의 벼슬아치 및 문신들까지 모두 제거했다. 이후 의종을 폐위시키고 거제도로, 태자는 진도로 유배 보낸 뒤, 왕의 동생 익양공 호(皓)를 명종으로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2. 2. 3. 무신정권 초기
1170년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는 형식적으로는 이의방과 권력을 나누었지만,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다. 그는 무력을 바탕으로 정치(무단정치)를 펼쳤으며,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사, 행영마병 겸 중군병마판사가 되었다.[1]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의 반란도 잇따랐다.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은 장순석 등과 함께 정중부와 이의방을 제거하고 의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의종 역시 이의민에게 살해되었다.[1] 1174년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정중부는 약 2년에 걸쳐 강경책과 온건책을 함께 사용하여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고, 그 과정에서 이의방을 살해하여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1] 이후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1175년에는 은퇴를 청하였으나 명종이 궤장을 하사하며 허락하지 않았다.[1] 정권 안정을 위해 잠시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으나, 이는 다른 무신들의 불만을 샀다.[1]
1170년 쿠데타 이후, 이의방은 반역을 이유로 이고와 채원을 살해했다. 그 후 이의방은 잠시 동안 정중부를 찾아가 양아들로 입적했다. 1173년, 문관 김보당은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동북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의방은 의종을 암살하기로 결정했고, 전직 국왕을 살해한 후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 후 이의방은 불교와 유교를 탄압하고, 많은 문관과 학자들을 처형했으며, 왕족을 강간하고 태자를 자신의 딸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폭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마침내 1174년 평양에서 조위총의 반란이 시작되었다.[2]
정중부는 이의방의 공포 통치를 끝내기로 결심하고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에게 이의방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이의방이 살해되면서 권력은 정중부에게 넘어갔다. 정중부는 평양에서 반란군과 계속 싸웠지만, 공주에 거주하는 노비와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정중부는 조위총의 봉기를 간신히 진압했고, 망이와 망소이 형제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관군이 봉기를 계속 진압하면서 망이 형제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177년에 처형되어 반란은 종식되었지만, 많은 다른 빈곤층 사람들이 정부에 계속 반란을 일으켰다.[2]
전국적으로 법과 질서가 무너지자 정중부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정치에서 은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의 아들 정균은 막강한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집권 가문으로부터 더 많은 권력과 지지를 얻으려는 많은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심지어 정중부의 하인과 노비들조차 정치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길거리에서 그들과 싸웠다. 정치는 불의로 흘러갔고, 많은 사람들은 정중부의 부당한 통치를 끝내기 위해 또 다른 쿠데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고려군의 최연소 장군인 경대승이 1179년 10월 정중부에 반기를 들어 정균과 송유인을 살해했다. 정중부는 부패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며칠 후 공개 처형되었다.[2]
명종 즉위 후 교위가 되었다. 의종 원년(1147년), 왕궁에 함부로 출입했다는 이유로 어사대의 탄핵을 받았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의 행적은 오랫동안 불분명하지만, 의종의 재위 말년에는 상장군으로 승진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이후, 무인 세력이 점차 대두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치주의의 기조는 여전히 강했고, 문관이 고관의 요직을 독점하고, 무관은 냉대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문벌 귀족과 무인 집단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고, 의종의 치세를 거치며, 이러한 대립의 양상은 극에 달했다. 1170년 8월, 의종이 개경 교외의 보현원에 행차했을 때, 국왕을 수행한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과 모의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문관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을 감행했다. 개경의 왕궁과 관청을 장악한 쿠데타군은, 저항하는 관료들을 학살하는 한편, 정중부에게 미움을 산 김돈중도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9월에는 의종마저 폐위되고, 명종이 옹립되면서 약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무신정변).[3]
2. 3. 권력 강화 및 최후
1174년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거병하자, 정중부는 약 2년에 걸쳐 강온양면책을 써서 조위총의 난을 잠재우고 그 와중에 이의방을 살해하여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1] 이후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권력자로서 살아가다가, 1175년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명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치사를 면하였다.[1] 이후 정권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문신 우대 정책을 펴 같은 무신들의 불만을 샀다.[1]정중부는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 장군에게 이의방을 살해하라고 명령했고, 이의방은 결국 정균에게 살해되었다.[3] 권력은 정중부에게 넘어갔지만, 평양에서 반란군과 계속 싸웠고, 공주시에 거주하는 노비와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3] 정중부는 조위총의 봉기를 간신히 진압했고, 망이와 망소이 형제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관군이 봉기를 계속 진압하면서 망이 형제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3] 그들은 1177년에 처형되어 반란은 종식되었지만, 많은 다른 빈곤층 사람들이 정부에 계속 반란을 일으켰다.[3]
전국적으로 법과 질서가 무너지자 정중부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정치에서 은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3] 그의 아들 정균은 막강한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집권 가문으로부터 더 많은 권력과 지지를 얻으려는 많은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3] 심지어 정중부의 하인과 노비들조차 정치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길거리에서 그들과 싸웠다.[3] 정치는 불의로 흘러갔고, 많은 사람들은 정중부의 부당한 통치를 끝내기 위해 또 다른 쿠데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3]
결국,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이 정균, 사위 송유인과 함께 정중부를 효수하여 저자거리에 매달았다.[1] 이때 그의 다른 자녀들도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후 그가 역적으로 몰려 단죄됨으로써 그의 가계나 족보도 실전되었다.[1]
3. 평가
정중부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경대승에게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이 처형당한 기록[4]을 통해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1. 부정적 평가
1179년 경대승에게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과 함께 효수되어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이때 그의 다른 자녀들도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후 그가 역적으로 몰려 단죄됨으로써 그의 가계나 족보도 실전되었다.[4]4. 관련 작품
5. 가계
참조
[1]
서적
A Concise History of Korea: From the Neolithic Period Through the Nineteenth Century
Rowman & Littlefield
[2]
역사
고려사 경대승이 정중부·송유인을 살해하다
1179-09-16
[3]
문서
약 172cm로 추산. 1척을 24.5cm 정도로 본다.
[4]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5]
역사
고려사 정중부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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