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핸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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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핸래티는 1961년 A6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된 인물이다. 1961년 8월, 슬라우에서 데이트를 하던 마이클 존 그렉스턴과 발레리 진 스토리는 무장 강도에게 납치되어 그렉스턴은 살해당하고 스토리는 강간당한 뒤 중상을 입었다. 경찰은 용의자로 핸래티를 특정하고 체포했으나, 결정적인 증거 부족과 알리바이 주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다. 2001년, DNA 검사를 통해 핸래티의 유죄가 확인되었고, 사건은 영국 사법 시스템과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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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제임스 핸래티 |
원어 이름 | James Hanratty |
출생일 | 1936년 10월 4일 |
출생지 | 영국 켄트 주 브롬리 |
사망일 | 1962년 4월 4일 |
사망지 | 영국 베드퍼드 베드퍼드 교도소 |
사망 원인 | 사형 (교수형) |
국적 | 영국 |
경력 | A6급 살해 |
범죄 정보 | |
죄목 | 계획 살인 |
형벌 | 사형 (교수형) |
관련 정보 | |
관련 사건 | A6 살인 사건 |
학력 | 세인트 제임스 카톨릭 고등학교, 반넷 |
2. 사건 발생
1961년 8월 23일 오전 6시 45분경, 베드퍼드셔주 클로필 마을 인근 A6 도로변의 데드맨스 힐 휴게소에서 마이클 존 그렉스턴의 시신과 중상을 입은 발레리 진 스토리가 발견되었다.[9][10][11] 발견자는 당시 교통 조사를 하던 옥스퍼드 대학교 학부생 존 커였다.[9][10]
그렉스턴은 .38 리볼버로 머리에 두 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상태였고, 스토리는 강간당한 뒤 같은 총으로 여러 발의 총상을 입어 척수 손상으로 인한 하반신 마비 상태였다.[11] 이들은 전날 밤 버킹엄셔 도니 리치에서 총을 든 남성에게 납치되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에 사용된 1956년형 회색 모리스 마이너 승용차(등록번호 847 BHN)는 같은 날 저녁 에식스주 레드브리지 지하철역 근처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3] 이 차량은 그렉스턴의 가족 소유였으며, 사건 당일 두 사람이 이용 중이었다.[3]
피해자 그렉스턴은 슬라우 소재 도로 연구소의 과학자였고, 스토리는 같은 연구소의 조수였다. 두 사람은 불륜 관계였으며, 이 사실은 사건 이후 스토리가 잡지에 기고하면서 알려졌다.[3] 그렉스턴은 별거 중인 아내와 두 자녀가 있었고,[14][15] 스토리는 슬라우 교외 시펜햄에 거주하고 있었다.[16]
2. 1. 피해자들의 증언
1961년 8월 22일 화요일 늦은 저녁, 밸러리 스토리는 마이클 존 그렉스턴과 함께 버킹엄셔 도니의 도니 리치 옥수수밭에 주차된 차 안에 있었다. 이때 한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그렉스턴이 창문을 내리자, 남자는 큰 검은색 권총을 들이대며 코크니 억양으로 "이건 강도다. 나는 절박한 사람이고, 4개월 동안 도망쳐 왔다. 시키는 대로 하면 괜찮을 거다."라고 말했다. 남자는 차 뒷좌석에 올라타 그렉스턴에게 밭 안쪽으로 더 운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약 두 시간 동안 그들을 붙잡아두고 계속 이야기했으며, 스토리는 그가 "things"를 "fings"로, "think"를 "fink"로 발음하는 특징이 있었다고 회상했다.[17]밤 11시 30분경, 남자는 음식을 원한다며 그렉스턴에게 운전을 지시했다. 그는 메이든헤드의 베어 호텔을 언급했고, 우유 자판기, 담배 가게, 주유소에 들르도록 했다. 그렉스턴과 스토리는 돈과 차를 줄 테니 놓아달라고 제안했지만, 남자는 뚜렷한 계획 없이 그들과 함께 있으려 하는 듯 보였다. 그들은 런던 북부 교외를 목적 없이 운전했으며, 세인트앨번스를 거쳐 A6 도로에 진입했다.
8월 23일 수요일 오전 1시 30분경, A6 도로 남쪽 방향으로 가던 중 남자는 잠을 자고 싶다며 데드맨스 힐의 휴게소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처음 그렉스턴이 거부하자 남자는 총으로 위협하며 공격적으로 변했다. 남자는 둘을 묶어야겠다고 말했고, 스토리와 그렉스턴은 쏘지 말라고 애원했다. 남자는 그렉스턴의 넥타이로 스토리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렉스턴이 옷이 든 더플백을 건네려 움직이는 순간, 남자는 그렉스턴의 머리에 두 발의 총을 쏘아 즉사시켰다. 스토리가 소리치자 남자는 그렉스턴이 자신을 놀라게 했다고 답했다. 남자는 스토리를 강간했다.
이후 남자는 천으로 그렉스턴의 머리를 덮고, 스토리에게 시신 위로 차 뒷좌석에 타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거부하자 차 밖으로 끌어내 뒷좌석에 태운 뒤 강간했다. 남자는 스토리에게 그렉스턴의 시체를 휴게소 가장자리로 끌어내게 한 후, 차에 다시 타서 시동 거는 법과 기어 조작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는 그가 운전 경험이 없거나 모리스 마이너 차종에 익숙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스토리는 차에서 내려 그렉스턴의 시신 옆에 다시 앉았다.
남자가 다가오자 스토리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며 목숨을 구걸했다. 남자는 차 쪽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가 돌아서서 그녀에게 총을 네 발 발사했고, 재장전 후 다시 발사했다. 총 7발가량 발사되었고, 그중 5발이 스토리를 맞혔다. 그녀는 땅에 쓰러져 죽은 척했고, 남자는 그녀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기어를 심하게 긁으며 남쪽 루턴 방향으로 차를 몰고 달아났다. 이때 시간은 오전 3시경으로, 도니 리치에서 사건이 시작된 지 약 6시간이 지난 후였다. 스토리는 지나가는 차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의식을 잃었다.[3] 그녀는 이후 구조되었고, 척수 손상으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지만 살아남았다. 그녀는 수사 기관에 범인의 특징으로 "얼음처럼 푸른 눈"과 "기괴한 행동"을 증언했다.
3. 초기 수사 및 용의자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생존자 발레리 스토리의 초기 진술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사를 시작했다. 스토리는 범인이 4개월간 도주 중이었다고 말했으며, 말끔한 정장 차림에 구두는 잘 닦여 있었다고 묘사했다.
1961년 8월 24일 저녁, 범행에 사용된 .38 리볼버 권총이 런던 36A 버스 뒷좌석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총은 탄창이 가득 채워진 상태였고 지문은 깨끗이 닦여 있었다. 총과 함께 발견된 손수건은 훗날 DNA 증거 확보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경찰은 하숙집 주인들에게 의심스러운 투숙객에 대한 제보를 요청했다. 이를 통해 알렉산드라 코트 호텔(Alexandra Court Hotel)에 머물던 피터 루이스 알폰(Peter Louis Alphon)이 초기 유력 용의자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프레더릭 듀런트(Frederick Durrant)'라는 가명으로 소개했으나, 실제로는 스코틀랜드 야드 고위 간부의 아들이었다.[18] 알폰은 사건 당일 밤의 알리바이가 확인되어 일단 석방되었다.
8월 29일, 밸러리 스토리와 또 다른 목격자 에드워드 블랙홀(Edward Blackhall)의 진술을 바탕으로 범인의 몽타주 사진이 제작되어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 몽타주는 이후 실제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과 닮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후 알폰은 다른 폭행 사건(마이크 달라 폭행)의 용의자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결정적으로 밸러리 스토리가 신원 확인 절차에서 알폰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못했다. 알폰은 경찰 조사에서 "차 안에 다른 지문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지문이 나를 드러냈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알폰에 대한 수사가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9월 11일 런던의 빈 호텔(Vienna Hotel) 지하 객실에서 범행 총기와 일치하는 탄피 두 개가 발견되면서 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호텔 매니저 윌리엄 너즈(William Nudds)는 해당 객실의 마지막 투숙객으로 '제임스 라이언(James Ryan)'이라는 인물을 지목했다. 너즈는 알폰과 라이언의 투숙 및 행적에 대해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라이언'이라는 인물이 사건과 관련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경찰은 이 '라이언'이라는 인물에 대한 추적을 시작했다.
3. 1. 제임스 핸래티 체포
9월 11일, 런던의 빈 호텔(Vienna Hotel) 게스트 지하 침실에서 두 개의 탄피가 발견되었다. 이 탄피는 마이클 그렉스턴을 살해한 총알 및 버스에서 발견된 .38 리볼버 권총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8] 호텔 매니저 윌리엄 너즈(William Nudds)는 경찰 조사에서 해당 방의 마지막 사용자가 '제임스 라이언(James Ryan)'이라고 진술했다.경찰 조사 결과, '라이언'은 4건의 차량 절도 및 강도 전과가 있는 25세의 제임스 핸래티(James Hanratty)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핸래티는 스코틀랜드 야드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가 불확실하여 도주 중이라고 스스로 밝혔지만 A6 살인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통화 중 핸래티는 'think'를 'fink'로 발음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19]
1961년 10월 11일, 핸래티는 블랙풀의 스티보니아 카페(Stevonia cafe)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3일 후인 10월 14일, 밸러리 스토리는 경찰이 준비한 용의자 식별 절차에서 핸래티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 절차에서 용의자들은 범인이 했던 말인 "Be quiet, will you? I'm thinkingeng(조용히 해주시겠어요? 생각하고 있어요)"를 반복해야 했다. 이후 핸래티는 마이클 그렉스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20]
4. 제임스 핸래티 재판 및 처형
1961년 10월 11일, 제임스 핸래티는 블랙풀에서 경찰에 체포되었고, 사흘 뒤인 10월 14일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가 신원 확인 절차에서 그를 지목하자 마이클 그렉스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20] 1962년 1월 22일, 베드퍼드셔 재판소에서 핸래티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21] 핸래티는 살인 혐의로 체포되기 전 이미 네 차례의 자동차 절도 및 주거 침입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과가 있었으나, 폭력 범죄 기록은 없었다.
4. 1. 논란과 사형 집행
핸래티의 재판은 1962년 1월 22일, 윌리엄 고먼 경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베드포드셔 재판소에서 시작되었다.[21] 검찰 측은 그레이엄 스완윅 QC가 이끌었으며, 변호는 마이클 셔라드 QC가 맡았다. 재판은 21일 동안 진행되어 당시 영국 법률 역사상 가장 긴 재판으로 기록되었다.[21]그러나 핸래티를 범행과 직접 연결하는 결정적인 법의학 증거는 부족했다. 핸래티의 혈액형(O형)은 범인과 일치했지만, 이는 영국 인구의 36%가 가진 흔한 혈액형이었다.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의 지목 외에는 핸래티가 범행 현장인 메이든헤드 근처에 있었다는 다른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다. 그는 전문적인 절도범이었으나 폭력 전과는 없었고 총기를 사용한 이력도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범인은 운전이 서툴렀던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핸래티는 숙련된 차량 절도범이었다는 점도 의문을 더했다. 강탈당한 차량과 범행에 사용된 총기는 버스 안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두 종류의 몽타주 역시 논란거리였다. 피해자 여성과 목격자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서로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핸래티와도 유사성이 떨어졌다.
핸래티는 재판 초기 리버풀에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 도중 북웨일스 릴에 있었다고 알리바이를 번복했다. 하지만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증언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핸래티의 재판에서는 정신 상태에 근거한 변론은 제기되지 않았다.[3]
검사 측은 핸래티가 범행 현장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배심원단은 1962년 2월 17일 평결을 위해 퇴정했다.[22] 6시간의 숙의 후 배심원단은 판사에게 '합리적 의심'의 정의에 대해 질문했으며, 총 9시간의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다.
핸래티의 항소는 3월 13일 기각되었다. 결정적인 증거 부족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유죄 판결에 대해 여론은 회의적이었고, 억울한 누명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9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핸래티의 사형 집행 중단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핸래티는 1962년 4월 4일 베드포드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인 해리 앨런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핸래티의 유해는 처음 베드포드 교도소 부지에 묻혔으나, 1966년 2월 22일 발굴되어 왓퍼드의 묘지로 이장되었다.[23]
5. 사건 이후의 진상 조사 노력
핸래티의 사형 집행 이후, 그의 가족과 지지자들은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핸래티의 가족은 변호사 제프리 빈드만 경을 통해 사건에 대한 추가 조사를 여러 차례 요구했다.[31]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가족 차원을 넘어 영국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운동가들에게도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이들은 핸래티가 무죄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유죄 판결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증거들에 주목했다.
이러한 요구와 사회적 관심 속에서 영국 내무부는 세 차례에 걸쳐 공개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시기 | 조사 담당자 | 보고 대상 (당시 내무부 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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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3월 22일 | 수사반장 더글러스 님모 | 로이 젠킨스 |
1975년 4월 10일 | 루이스 하우저 변호사 | 로이 젠킨스 |
1996년 5월 29일 | 수사 치프 수퍼린텐던트 로저 매튜스 | 마이클 하워드 |
한편, 언론인 밥 워핀든은 사건의 증인들이 목격했다고 증언한 모리스 마이너 차량이 과연 동일한 차량인지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더욱 발전된 DNA 분석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5. 1. A6 국방 위원회
'A6 국방 위원회'는 언론인 폴 풋, 노동당 정치인 페너 브록웨이, 조안 레스터 등을 포함한 운동가 및 활동가 그룹이었다. 이들은 밸러리 스토리가 살았던 이튼 앤 슬라우 선거구의 전현직 국회의원이기도 했다.[24] 위원회는 핸래티의 변호를 지원하고, 그의 유죄 판결을 뒤집기 위해 활동했다.A6 위원회는 피터 알폰이 살인범일 수 있다는 여러 정황을 제시했다.
- 알폰이 핸래티보다 몽타주 사진과 더 닮았다.
- 알폰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크니 억양을 사용했다.
- 알폰은 사건 당일 행적에 대한 설득력 있는 알리바이를 제시하지 못했다.
- 알폰이 핸래티보다 더 그럴듯한 범행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 알폰은 운전을 잘하지 못했는데, 이는 증인들이 모리스 마이너 차량이 레드브리지 역 방향으로 불안정하게 운전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관련될 수 있다.
- 폴 풋은 알폰의 은행 계좌 사본을 입수했는데, 1961년 10월부터 1962년 6월까지 알폰이 총 7569GBP의 현금을 받은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폴 풋은 "특히 피터 알폰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는 알폰이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많이 알지 못했으며", 특히 "그렉스텐 부인이 살인을 사주한 주동자였다는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25]
5. 2. 루도빅 케네디의 활동
언론인이자 운동가인 루도빅 케네디는 제임스 핸래티의 무죄를 주장하는 많은 기사를 썼다. 하지만 그는 핸래티의 DNA 증거가 공개된 직후, 자신의 저서 《36건의 살인과 두 건의 부도덕한 수입》의 새로운 판에서 핸래티의 무죄 주장을 철회했다.[26]5. 3. 진 저스티스와 제레미 폭스의 조사
1962년, 런던의 사업가 장 쥐스티스는 벨기에 외교관의 아들이자 변호사인 제레미 폭스와 함께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7] 쥐스티스는 제임스 핸래티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믿었고, 처음에는 망설이던 폭스를 설득하여 함께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두 사람은 1962년 2월 피터 알폰을 찾아내 그와 관계를 맺으며 진실을 알아내려 했다. 쥐스티스는 재판에 매일 참석했으며, 알폰과의 모든 전화 통화를 녹음하는 등 철저히 기록했다. 알폰은 녹음 사실을 알고 격분하여 폭스에게 협박성 전화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알폰은 쥐스티스와 폭스에게 한 남자가 그렉스텐과 스토리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자신에게 5000GBP를 주었으며, 다른 남자가 준 총으로 그들을 납치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렉스텐에게 두 번 도망칠 기회를 주었지만 그가 돌아왔으며, 총은 실수로 발사되었다고 주장했다.
1966년 BBC의 시사 프로그램 파노라마에서는 쥐스티스가 녹음한 테이프의 일부를 공개했다. 알폰은 약 1971년까지 자신의 자백 내용을 유지하다가 이후 주장을 번복했다.[28] 언론인 밥 워핀든은 쥐스티스와 폭스가 알폰에게 재정적 지원을 한 것은 폭스가 호텔비를 내준 단 한 번뿐이었다고 기록했다.[29] 폭스는 1970년대에 쥐스티스와 헤어졌지만, 1999년 사망할 때까지 핸래티의 무죄를 주장하며 싸움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지 3년 뒤 항소 법원은 핸래티의 시신에서 나온 DNA 증거를 근거로 유죄 판결을 확정했다.
피터 알폰은 2009년 1월 자택에서 넘어져 사망했다. 이후 더 인디펜던트에 기고한 글에서 언론인 리처드 잉그럼스는 알폰이 폴 풋 등과의 대화에서 "사건에 대해 강박적으로 이야기하며 종종 자신을 범인처럼 암시했다"고 전했다. 잉그럼스는 풋이 2002년 DNA 검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2004년 사망할 때까지 핸래티의 알리바이를 믿었다고 덧붙였다.[30]
6. DNA 증거와 재심
1990년대 이후 발전된 DNA 분석 기술은 제임스 핸래티 사건의 진실 규명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1997년 3월 19일, 영국 내무부는 사건을 형사 사건 검토 위원회(CCRC)에 회부하여 재조사를 시작했다.[32][33]
조사 과정에서 과거 증거물인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의 속옷과 살인 무기를 감쌌던 손수건이 확보되었고,[36] 핸래티 유족의 동의 하에 DNA 대조 작업이 진행되었다.[23][34] 2001년, 핸래티의 시신을 발굴하여 DNA를 추출했으며,[35] 이를 증거물(손수건의 점액, 속옷의 정액)에서 나온 DNA와 비교한 결과, 두 샘플 모두 핸래티의 DNA와 정확히 일치함이 밝혀졌다.[36]
이 결정적인 DNA 증거를 바탕으로 2002년 항소 법원은 핸래티의 유죄가 "의심할 여지 없이" 입증되었다고 판결했다.[38][37] 법원은 증거 오염 가능성을 일축하며 DNA 증거의 확실성을 인정했다.[36] 이로써 핸래티 사건은 과학적 증거를 통해 오랜 논란 끝에 유죄로 최종 확정되었으며, '억울한 사형 집행'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36][38][39]
한편, 핸래티의 처형은 영국 내 사형 폐지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37] DNA 분석 이전까지는 진범 논쟁과 함께 수사 과정의 문제점도 지적된 바 있다.
6. 1. 2002년 항소 법원의 판결
1997년 3월 19일, 내무부는 이 사건을 새로운 형사 사건 검토 위원회(CCRC)에 회부했으며, 바덴 스키트가 조사를 주재했다.[32][33]원래의 물리적 증거 중 일부는 파기되었으나, 스토리의 속옷에서 채취한 표본은 1991년에 발견되었고, 1997년 말에는 살인 무기를 감쌌던 손수건이 버크셔 경찰의 소유로 발견되었다.[36] 제임스 핸래티의 어머니와 형제는 DNA를 기증했는데,[23] 이는 생존한 증거에서 추출한 DNA와 비교했을 때 핸래티의 무죄를 입증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1999년 6월의 검사 결과는 가족 일치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보여주었다. 즉, 증거 DNA가 제임스 핸래티의 DNA일 가능성이 다른 누구보다 "250만 배 더 높다"는 것이었다.[34] 항소 법원은 핸래티의 시신을 발굴하라고 명령할 권한은 없었지만, 해리 울프 경은 "정의의 이익을 위해" 발굴이 바람직하다고 결정했다.[34]
2001년, 제임스 핸래티의 시신이 발굴되어 DNA를 추출했다.[35] 그의 DNA는 살인 무기를 감쌌던 손수건에 보존된 점액 및 강간 피해자 스토리가 입었던 속옷에 보존된 정액에서 추출한 DNA와 비교되었다. 두 샘플 모두 핸래티의 DNA와 정확히 일치했다.[36] 살인 무기가 싸여 있던 손수건에서는 핸래티의 DNA 외에 다른 DNA는 발견되지 않았다. 스토리의 속옷 표본에서는 두 개의 다른 남성 DNA 세트가 나왔는데, 하나는 핸래티와 일치했고 다른 하나는 항소 법원이 그레스턴의 것으로 해석했다.[36]
2002년 항소 법원 판사들은 핸래티의 발굴된 시신과 그의 가족 구성원의 DNA 검사 결과를 통해 핸래티의 유죄가 "의심할 여지 없이" 입증되었다고 확신했다.[38][37] 항소 법원은 관련된 다양한 증거 품목의 처리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 판결을 내렸고, 오염에 대한 주장은 "공상적"이라고 기각하며 "DNA 증거만으로도 유죄의 확실한 증거"라고 결론지었다.[36] 판사들은 판결 요약에서 "DNA 증거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라고 언급하며, 핸래티가 유죄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정황 증거들이 DNA 증거와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핸래티는 범죄 현장과 관련된 세 번의 신원 확인 절차에서 목격자들에게 지목되었고, 살인범과 말투가 같았으며, 살인 무기에서 발사된 총알이 발견된 호텔 방에 범행 전날 밤 머물렀다는 점, 그리고 살인 무기가 그의 도주 경로로 추정되는 버스 노선에서 발견된 점 등을 언급했다. 또한 그의 DNA가 스토리의 속옷과 총을 싼 손수건에서 발견된 점을 지적하며, 법원은 "이러한 일련의 소위 우연의 일치가 우연이 아니라 증거적 관점에서 유죄 판결의 안전성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를 제공한다"고 결론 내렸다.[36][38][39]
2002년 항소 심리에서 핸래티 가족을 대리한 변호사 마이클 맨스필드 QC는 생존한 증거 품목 중 바이알이 깨져 오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36] 그러나 그는 오염을 배제할 수 있다면 DNA 증거가 제임스 핸래티가 살인과 강간을 저질렀음을 입증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부주의한 취급 절차로 인해 증거가 오염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36][40] 폴 풋과 다른 일부 운동가들은 40년 이상 경찰 실험실에 보관된 의류 품목의 작은 DNA 샘플이 "현대 증거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보관되었고, 증폭 기술을 거쳐 유전자 프로파일을 얻어야 했다는 점을 들어 DNA 증거가 오염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DNA 검사 결과 핸래티의 유죄가 과학적으로 입증됨에 따라, 오랫동안 제기되었던 억울한 사형 집행이라는 의혹은 해소되었다.
7. 사건의 역사적, 사회적 의의
A6 살인 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사건의 진실과 사법 시스템의 공정성에 대한 오랜 논쟁을 불러왔다. 핸래티의 유죄 판결 이후에도 그의 가족과 지지자들은 판결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며 재심을 요구했다.[41]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밸러리 스토리는 재판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했으며, 이후에도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2002년 DNA 증거가 발표된 이후, 스토리는 여러 TV 및 신문 다큐멘터리에 참여하여 얻은 수익 4만파운드 이상을 슬라우 이동 수송(Slough Mobility Transport)에 익명으로 기부하여 장애인 이동 지원 차량 구매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 중 한 대에는 '밸러리(Valeri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43][44]
7. 1. 사형제 폐지에 미친 영향
핸래티의 처형은 영국에서 에반스 사건을 계기로 고조되었던 사형 폐지 운동에 더욱 불을 지폈고, 이는 사형 집행 정지를 거쳐 최종적으로 사형 제도가 폐지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한편, 사건의 진범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으며, 여러 인물들이 용의자로 지목되고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사 기관이 핸래티에게 유리할 수 있는 목격 증언을 묵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오심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사건 현장의 손수건에 묻어 있던 점액과 핸래티의 DNA를 대조하기 위해 그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검사 결과 두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핸래티가 진범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고 오랜 논란은 종결되었다.
7. 2. 밸러리 스토리의 사망
밸러리 스토리(Valerie Storie)는 생전에 범인에 대해 "저는 범인을 알아봤습니다. 그의 눈을 쳐다봤고, 그도 제 눈을 쳐다봤습니다. 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고, 그도 제가 그를 알아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범인을 찾아냈습니다."라고 확신에 찬 증언을 남겼다.[42]2016년 3월 26일, 스토리는 자신이 태어난 치펜햄의 자택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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