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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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우든은 미국의 농구 선수이자 코치로, 선수 시절에는 퍼듀 대학교에서 활약했으며, 1960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코치로서 그는 데이턴 고등학교, 사우스벤드 중앙 고등학교,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거쳐 1948년부터 1975년까지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27년간 620승 147패의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UCLA를 10번의 NCAA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끌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7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의 지도력과 농구 철학은 농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선수와 코치 모두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최초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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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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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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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0년 10월 14일 |
출생지 | 인디애나주홀 |
사망일 | 2010년 6월 4일 (99세) |
사망지 |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 |
포지션 | 가드 |
코치 스포츠 | 농구, 야구 |
선수 경력 | |
농구 | 퍼듀 (1929–1932) 인디애나폴리스 카우츠키스 (1932–1937, 1938–1939) 화이팅/해먼드 시저 올-아메리칸스 (1937–1938) |
야구 |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1948) |
코치 경력 | |
농구 | 데이턴 고등학교 (1933–1935) 사우스 벤드 센트럴 고등학교 (1935–1944)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1946–1948) UCLA (1948–1975) |
야구 |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1948) |
관리 경력 | |
팀 |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1946–1948) |
기록 | |
전체 기록 (대학 농구) | 664승 162패 |
전체 기록 (대학 야구) | 7승 7패 |
수상 및 업적 | |
선수 | 헬름스 및 프레모-포레타 전국 선수권 (1932) 올-NBL 퍼스트 팀 (1938) NBL 득점 리더 (1933) 3× 컨센서스 올-아메리칸 (1930–1932) 헬름스 올해의 선수 (1932) 빅 텐 메달 오브 아너 (1932) |
코치 | 10× NCAA 챔피언 (1964, 1965, 1967–1973, 1975) 12× NCAA 리저널 – 파이널 포 (1962, 1964, 1965, 1967–1975) 15× Pac-12 챔피언 (1950, 1952, 1956, 1962–1965, 1967–1975) 3× PCC 토너먼트 챔피언 (1953–1955) 5x AP 올해의 대학 코치 (1967, 1969, 1970, 1972, 1973) 6x 헨리 아이바 상 (1964, 1967, 1970–1973) 5x NABC 올해의 코치 (1964, 1967, 1969, 1970, 1972) 인디애나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20) 대통령 자유 훈장 (2003) |
명예의 전당 | |
농구 명예의 전당 입성 연도 | 1960년 (선수), 1973년 (코치) |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입성 연도 | 2006년 |
군 복무 | |
소속 | 미국 해군 |
복무 기간 | 1942–1946 |
계급 | 중위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2. 선수 경력
존 우든은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농구에 재능을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팀을 주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퍼듀 대학교에서는 3년 연속 올 아메리칸에 선정되며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NBL 등의 프로 리그에서 선수로 활동하면서 134개의 자유투를 연속으로 성공시키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 해군에 복무하여 해군 소위로 전역했다.[1]
2. 1. 유년 시절 및 고등학교
존 로버트 우든은 1910년 10월 14일 인디애나주 홀에서 태어났다. 1918년 가족과 함께 인디애나주 센턴의 작은 농장으로 이사했다. 그는 세 명의 형제와 두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누이 중 한 명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어린 시절 우든의 역할 모델은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인디애나 고등학교 농구를 지배했던 전설적인 팀인 프랭클린 원더 파이브의 퍼지 밴디비어였다. 14세 때 가족이 인디애나주 마틴스빌로 이사한 후, 우든은 1927년 자신의 고등학교 팀을 주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세 번 올스테이트 선수로 선정되었다.
2. 2. 대학교 (퍼듀 대학교)
퍼듀 대학교에 진학하여, 명물 코치 워드 램버트의 지도를 받았다. 우든이 이끈 팀은 1932년 전미 1위에 랭크되었고, 그는 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올 아메리칸에 선정된 선수가 되었다. 또한 학업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2. 3. 프로 선수 경력
대학교 졸업 후, 우든은 고등학교에서 농구 지도를 하는 한편, 당시 존재했던 NBL 등의 프로 리그에서 선수로 뛰었다. 1937-38 시즌에는 올 NBL 1st 팀에 선정되었다.[1] 또한, 이 시기에는 134개 연속 자유투 성공이라는 기록을 세웠다.[1]3. 코칭 경력
존 우든은 켄터키주 데이턴 고등학교에서 2년간 코치 생활을 시작하여, 코치로서 유일하게 패배가 더 많은 시즌(6-11)을 기록했다.[23][24] 이후 고향인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중앙 고등학교에서 9년간 영어 교사이자 농구 코치를 맡았다. 고등학교 코치 11년 동안 통산 218승 42패를 기록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해군에 입대하여 2년간 복무하고 중위로 제대했다.
1946년, 우든은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에서 농구와 야구 코치, 체육국장을 겸임하며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7년, 우든이 이끄는 농구팀은 인디애나 주 대학 컨퍼런스에서 우승했지만, 전미 대학간 농구 협회(NAIB)의 흑인 선수 출전 금지 규정에 항의하여 전국 토너먼트 참가를 거부했다. 당시 팀에는 흑인 선수 클라렌스 J. 워커가 있었다.[27][29] 1948년, NAIB가 규정을 철폐하자 우든은 팀을 NAIB 전국 토너먼트 결승에 진출시켰으나 루이빌에 패했다. 이는 우든이 코치로서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배한 유일한 사례였다.[30]
3. 1. 고등학교

우든은 데이턴 고등학교에서 2년간 코치를 맡았다. 데이턴에서 보낸 첫 해인 1932-33 시즌[23]은 그가 코치로서 유일하게 졌던 기록(6-11)을 남긴 해였다.[24] 이후 인디애나로 돌아가 사우스벤드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농구 코치 및 체육 부장을 역임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다.[25][26] 우든은 데이턴에서 2년, 센트럴에서 9년을 보냈으며, 11년간의 고등학교 코치 경력에서 218-42의 기록을 남겼다.[1]
3. 2.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우든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테레호트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에서 농구와 야구 코치를 맡았고, 체육 부장직도 겸임했다.[1][3] 또한,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강의도 했다.[27][28]1947년, 우든이 이끈 농구팀은 인디애나 주 대학 컨퍼런스에서 우승하여 전미 대학간 농구 협회(NAIB) 전국 토너먼트에 초청받았다. 그러나 우든은 NAIB의 흑인 선수 출전 금지 정책에 반대하여 초청을 거절했다. 당시 우든의 팀에는 인디애나주 이스트 시카고 출신의 흑인 선수 클라렌스 J. 워커가 있었다.[27][29]
1948년, 우든은 다시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컨퍼런스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해 NAIB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 출전 금지 정책을 철회했고,[30] 우든은 팀을 NAIB 전국 토너먼트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루이빌에 패했다. 이는 우든이 코치로서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배한 유일한 사례였다. 같은 해, 워커는 대학 농구 포스트 시즌 토너먼트에 출전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었다.[30]
3. 3. UCLA
존 우든은 1948년부터 1975년까지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농구팀 코치를 맡아, 부임 전 18년간 단 두 번의 컨퍼런스 우승에 그쳤던 UCLA를 10번의 NCAA 챔피언십 우승(1967~1973년 7연패 포함)을 이끈 대학 농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으로 만들었다.우든의 UCLA는 NCAA 남자 농구 기록인 88연승, 4번의 30승 무패 시즌, NCAA 토너먼트 38연승, 홈구장 폴리 파빌리온에서 98연승 등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1][48][49] 그는 UCLA에서 27시즌 동안 620승 147패(승률 .808)를 기록했다.
우든은 "웨스트우드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1975년 10번째 전국 챔피언십 우승 당시에도 연봉 35,000달러 이상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34][50] 그는 은퇴 선물로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받았고,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코치직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50] 2009년, ''The Sporting News''는 우든을 "역대 최고의 코치"로 선정했다.[53]
3. 3. 1. 초기 (1948-1963)

1948년, 우든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의 농구 코치로 부임하여 학교 역사상 네 번째 농구 코치가 되었다. 그는 프레드 코젠스, 캐디 웍스, 윌버 존스의 뒤를 이었다. 우든은 첫 해에 6000USD의 3년 계약을 맺었다.[3] UCLA에 부임하기 전,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코치직을 제안받았으나, 미네소타의 악천후로 인해 우든은 예정된 전화를 받지 못했다. 결국 우든은 브루인스의 코치직을 수락했고, 미네소타 대학교 관계자가 연락했을 때는 이미 UCLA에 약속을 한 후였다.[3][31]
우든은 부임 즉시 성공을 거두며, 부진한 팀을 단기간에 변화시키는 드문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공의 일부는 그의 독특한 공격 시스템 덕분이었는데, 이는 오늘날 많은 코치들이 사용하는 시스템과 동일하다. 우든은 "나는 내 시스템이 런앤점프, 1-3-1 트래핑, 박스앤원, 트라이앵글앤투, 스위칭 맨투맨 등 내가 본 모든 현대적인 수비에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32]
우든이 부임하기 전, UCLA 농구팀은 이전 18년 동안 단 두 번의 컨퍼런스 챔피언십 시즌을 보냈다. 그의 첫 시즌에 그는 전년도에 12-13의 기록을 세운 브루인스 팀을 태평양 연안 컨퍼런스(PCC) 남부 디비전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22-7의 기록을 세웠다.[3] 이는 1919년 학교가 농구를 시작한 이후 UCLA의 한 시즌 최다 승리 기록이었다.[33] 그는 다음 시즌에 24-7의 기록과 1950년에 두 번째 디비전 타이틀과 전체 컨퍼런스 타이틀을 추가하며 이 기록을 경신했고, 그의 첫 4년 동안 두 개의 타이틀을 더 추가했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든은 처음에 자신의 위치를 즐기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삶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멜 타우베가 1950년에 퍼듀를 떠났을 때, 우든은 웨스트 라파예트로 돌아가 그곳에서 수석 코치직을 수락하려 했다. 그는 결국 UCLA 관계자가 1948년 협상 중에 3년 계약을 고집한 사람이 자신임을 상기시켰을 때 마음을 바꾸었다. 우든은 퍼듀가 더 많은 돈, 차, 주택을 제공했지만 계약 만료 전에 UCLA를 떠나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고 느꼈다.[34]
1955-56 시즌까지 우든은 UCLA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그는 팀을 첫 무패 PCC 컨퍼런스 타이틀과 17연승으로 이끌었지만, 필 울퍼트가 코치하고 빌 러셀과 K.C. 존스가 있던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팀에 의해 연승이 중단되었고, 이 팀은 결국 1956년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UCLA는 다음 시즌에도 이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고, 피트 뉴웰이 코치한 캘리포니아 대학교 팀이 컨퍼런스를 장악하고 1959년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NCAA 토너먼트에 복귀하지 못했다. 또한 그 당시 우든 팀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학교 미식축구팀 선수들에게 불법적인 돈이 지급된 스캔들 이후 UCLA의 모든 스포츠 팀에 부과된 보호 관찰이었다. 이 스캔들은 PCC 컨퍼런스의 해체로 이어졌다.[35]
1961-1962 시즌까지 보호 관찰이 해제되었고, 우든은 팀을 다시 컨퍼런스 정상으로 이끌었다.
3. 3. 2. 전성기 (1964-1975)
우든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며, 흔치 않게 부진한 프로그램을 "즉각적으로 전환"시키는 코치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공의 일부는 그의 독특한 공격 시스템 덕분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수많은 코치들이 사용하고 있는 시스템과 동일하다. 존 우든은 "나는 내 시스템이 내가 본 모든 현대적인 수비에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믿으며, 여기에는 런앤점프, 1-3-1 트래핑, 박스앤원, 트라이앵글앤투, 그리고 스위칭 맨투맨이 포함됩니다."라고 말했다.[32]우든이 UCLA에 오기 전, 농구 프로그램은 이전 18년 동안 단 두 번의 컨퍼런스 챔피언십 시즌을 보냈다. 그의 첫 번째 시즌에 그는 전년도에 12-13의 기록을 세운 브루인스 팀을 태평양 연안 컨퍼런스(PCC) 남부 디비전 챔피언으로 변모시켰고, 22-7의 기록을 세웠다.[3] 이는 1919년 학교가 농구를 시작한 이후 UCLA의 한 시즌 최다 승리 기록이었다.[33] 그는 다음 시즌에 24-7의 기록과 1950년에 두 번째 디비전 타이틀과 전체 컨퍼런스 타이틀을 추가하여 그 숫자를 넘어섰고, 그의 첫 4년 동안 두 번 더 우승을 추가했다. 그 당시까지 UCLA는 PCC가 디비전 플레이를 시작한 이후 총 두 개의 디비전 타이틀을 획득했고, 1927년에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 스포츠 컨퍼런스에서 우승한 이후 어떤 종류의 컨퍼런스 타이틀도 획득하지 못했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든은 처음에 자신의 위치를 즐기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삶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멜 타우베가 1950년에 퍼듀를 떠났을 때, 우든은 웨스트 라파예트로 돌아가 그곳에서 수석 코치직을 마침내 수락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결국 UCLA 관계자가 1948년 협상 중에 3년 계약을 고집한 사람이 자신임을 상기시켰을 때 설득당했다. 우든은 퍼듀가 더 많은 돈, 차, 주택을 제공했지만 계약 만료 전에 UCLA를 떠나는 것은 그의 약속을 깨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34]
1955-56 시즌까지 우든은 UCLA에서 지속적인 성공의 기록을 세웠다. 그해 그는 팀을 첫 무패 PCC 컨퍼런스 타이틀과 17연승으로 이끌었지만, 이는 결국 필 울퍼트의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팀(빌 러셀과 K.C. 존스가 있었음)에 의해 끝났고, 그 팀은 결국 1956년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UCLA는 이 수준에서 즉시 다음 시즌으로 진출할 수 없었고, 피트 뉴웰이 코치한 캘리포니아 골든 베어스 팀이 컨퍼런스를 장악하고 1959년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NCAA 토너먼트로 복귀할 수 없었다. 또한 그 당시 우든 팀의 운명을 방해한 것은 학교 미식축구팀 선수들에게 불법적인 지불이 이루어진 스캔들 이후 UCLA의 모든 스포츠 팀에 부과된 보호 관찰이었다. 보호 관찰은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등 세 개의 추가 학교로 확대되었다. 이 스캔들은 PCC 컨퍼런스의 해체로 이어졌다.[35]
1961-1962 시즌까지 보호 관찰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고 우든은 팀을 컨퍼런스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음 단계를 밟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학 농구 역사상 유례없는 지배력을 발휘했다. UCLA는 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NCAA 토너먼트의 파이널 포에 진출했다. 1962년 준결승에서 에드 저커의 최종 전국 챔피언 신시내티 팀과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파울 콜로 인해 좁은 패배를 당한 우든은 그의 브루인스가 전국 챔피언십을 다툴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했다.[35] 2년 후인 1964년, 어시스턴트 코치 제리 노먼은 팀의 작은 선수들과 빠른 속도의 공격이 상대 팀의 턴오버 가능성을 높이는 존 프레스 수비를 채택함으로써 보완될 것이라고 우든을 설득했을 때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다.[35] 그 결과 득점이 극적으로 증가하여 UCLA에 강력한 팀을 제공했고, 브루인스가 빅 바버스의 더 크고 느린 인종 분리적 듀크 팀을 98–83으로 꺾으면서 학교의 첫 번째 농구 전국 챔피언십이자 첫 무패 시즌을 향해 30-0으로 나아갔다. 월트 해저드는 경기 후반에 선수 통제 파울로 퇴장당했지만, 그는 승리를 축하하며 네트를 자르고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을 때 중요하지 않았다. 게일 굿리치 (27점), 키스 에릭슨, 프레드 슬로터, 잭 허쉬, 그리고 후보 케니 워싱턴 (26점, 12 리바운드)이 UCLA 승리에 기여했다. 6피트 5인치보다 키가 큰 선수가 없는 브루인스의 속도와 존 프레스는 29개의 턴오버를 강요했고 듀크의 해크 티슨과 제이 버클리, 두 명의 6피트 10인치 선수의 키의 이점을 무효화했다.
1964-1965 시즌 NCAA 챔피언들은 UCLA가 개막전에서 일리노이에게 27점 차로 패하면서 불길한 출발을 보였다.[36] 이후 게일 굿리치, 케니 워싱턴, 더그 맥킨토시와 함께 팀이 전국 챔피언을 반복하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브루인스는 데이브 스트랙의 미시간 팀을 NCAA 토너먼트 결승에서 91-80으로 꺾었다. 굿리치는 프린스턴의 빌 브래들리와 함께 올해의 선수상을 공유했다. 1966년 팀은 오리건 주에게 서부 대학교 체육 협회(현재 Pac-12)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UCLA는 당시 컨퍼런스 챔피언만이 토너먼트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그해 NCAA 토너먼트에 출전할 자격이 없었다. 브루인스의 1967년 화신은 2학년 스타 알신더와 함께 복수심을 품고 돌아와 컨퍼런스 타이틀뿐만 아니라 또 다른 30-0 시즌으로 전국 왕관을 되찾았고, 1975년 NCAA 챔피언십 직후 우든의 은퇴 때까지 한 시즌을 제외하고 매 시즌 타이틀을 유지했다.
우든 아래에서 브루인스의 부활은 그들이 새로운 홈구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만들었다. 1932년부터 브루인스는 남자 체육관에서 경기를 했다. 일반적으로 2,400석이었지만, 1955년부터 도시 소방관의 명령에 따라 1,500석으로 제한되었다. 이로 인해 브루인스는 더 많은 관중을 끌 것으로 예상될 때, 즉 브루인스의 첫 전국 타이틀 이후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경기를 팬 퍼시픽 오디토리움, 로스앤젤레스 기념 스포츠 아레나 및 로스앤젤레스 주변의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우든의 권고에 따라 폴리 파빌리온이라는 훨씬 더 큰 캠퍼스 시설이 1965-66 시즌에 맞춰 건설되었다. 웨스트우드에 있는 이 건물은 1965년 11월 27일 UCLA와 UCLA 신입생의 특별 경기로 헌정되었다. 이는 루 알신더 (나중에 카림 압둘-자바)의 신입생 시즌이었다 (그 당시 신입생은 대학팀에서 뛸 수 없었다). UCLA는 전국 챔피언을 방어하고 있었고 시즌 전 여론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신입생들은 경기를 75-60으로 쉽게 이겼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강력한 지표였다.
1967-1968 시즌에는 규칙 변경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주로 알신더의 바스켓 근처에서의 압도적인 플레이 때문이었다. 덩크 슛은 금지되었고 우든의 은퇴 직후인 1976-1977 시즌까지 부활되지 않았다. 이는 규칙 위원회가 슈퍼스타 선수의 지배에 대응하여 변화를 시작한 두 번째 사례였으며, 1944년에는 골텐딩 규칙이 조지 미칸의 바스켓 근처에서의 지배적인 수비 플레이에 대항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1월, UCLA는 47연승을 아스트로돔에 가져갔고, 휴스턴 팀(엘빈 헤이즈, 돈 체니, 켄 스페인이 있었음)이 있는 가이 루이스를 만나 세기의 경기에서 전국 최초의 전국적으로 방송된 정규 시즌 대학 농구 경기에서 만났다. 휴스턴은 UCLA를 71-69로 꺾었고, 헤이즈는 39점을 득점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우든은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UCLA는 그해 나머지 시즌 동안 무패를 기록했고, NCAA 토너먼트 준결승 재경기에서 휴스턴을 101-69로 꺾고 전국 챔피언십에 진출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표지에 "루의 복수. 휴스턴의 참패"라는 제목을 실었다.[37] UCLA는 헤이즈를 10점으로 제한했다. 그는 경기당 평균 37.7점을 기록했다. 우든은 헤이즈를 막았던 다이아몬드-앤-원 수비를 고안한 노먼의 공로를 인정했다.[38][39] 세기의 경기는 또한 우든과 에드가 레이시와 관련된 사건으로 기억된다. 레이시는 엘빈 헤이즈에 대한 수비에서 효과적이지 않았고 우든은 11분 후에 그를 벤치에 앉혔다. 레이시는 다시 경기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든에게 분노한 레이시는 3일 후 팀을 떠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나는 그 사람과 함께 뛰는 것을 결코 즐기지 못했다"고 말했다.[40] 1968년 NCAA 토너먼트 동안 UCLA의 재능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4명의 선수를 올 토너먼트 팀에 배치했다. 알신더 외에 루시우스 앨런, 마이크 워렌, 린 섁클포드가 찬사를 받았다. 케니 헤이츠도 1968년 UCLA 팀의 멤버였다.
루 알신더는 1969년 브루인스에서 그의 마지막 시즌을 보내며 UCLA가 조지 킹의 퍼듀 팀을 92-72로 꺾고 세 번째 연속 전국 챔피언십을 달성했다. 3개의 연속 타이틀은 알신더가 3연패를 하는 동안 대학 농구의 슈퍼스타로 자리 잡으면서 토너먼트에서 3번의 연속 MVP 상을 받았다. 알신더와 우든은 그가 UCLA를 떠난 후에도 계속 소통할 것이다. 2017년 자바는 그들의 오랜 우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코치 우든과 나"라는 책을 썼다.[41]
한 스포츠 기자는 알신더가 마침내 졸업하고 대학 농구가 전국 챔피언을 결정하는 일상적인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날, UCLA 외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예언은 다음 6년 동안 터무니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1970년 팀은 알신더조차도 UCLA 프로그램의 성공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시드니 위크스, 헨리 비비, 커티스 로우, 존 발레리, 케니 부커가 조 윌리엄스가 코치한 신생 잭슨빌을 80-69로 꺾고 브루인스를 4연속 NCAA 타이틀로 이끌었다. 위크스와 로우는 수비에서 7피트 아티스 길모어를 더블 팀으로 묶어 경기당 평균 100점을 기록했던 고성능 잭슨빌 공격을 막았다. 길모어와 5'10" 렉스 모건은 언론에 의해 "배트맨과 로빈"으로 불렸다.
1971년 NCAA 챔피언십 경기에서 스티브 패터슨은 잭 크래프트의 스캔들에 시달리는 빌라노바 팀의 하워드 포터보다 득점을 더 많이 했고 UCLA는 68-62로 승리했다. 다음 해에 UCLA는 우든의 10번의 챔피언십 중 가장 근접한 경기를 치렀고, 휴 더럼의 플로리다 주 팀을 81-76으로 꺾고 1972년 타이틀을 획득했다. 경기 후 빌 월튼은 "우리는 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72-1973 시즌은 UCLA 농구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캠페인 중 하나였다. 신입생들은 다시 대학팀에서 뛸 자격을 얻었고 브루인스는 30-0으로 승리 행진을 75연승으로 늘리며 NCAA 토너먼트를 통과했고 진 바르토우의 멤피스 주 팀을 결승전에서 87-66으로 꺾었고, 빌 월튼은 놀랍게도 22번의 필드 골 시도 중 21번을 성공시켰다. 월튼과 우든은 다시 모두의 올해의 선수와 올해의 코치였다. 키스 윌크스, 그렉 리, 래리 홀리필드가 그 팀의 멤버였고, 윌크스는 NBA 챔피언십에서 4번 우승하기도 했다.
UCLA의 두 번의 큰 연승은 1973-1974 시즌에 끝났다. 1월에 승리 행진은 디거 펠프스의 노터데임 팀이 브루인스를 71-70으로 꺾으면서 88경기에서 멈췄다. 2개월 후 놈 슬론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팀이 NCAA 토너먼트 준결승에서 UCLA를 80-77로 더블 연장에서 꺾었다. 데이비드 톰슨은 NC 주의 올 아메리칸이었고 톰 버레슨은 빌 월튼에 대한 수비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UCLA는 시즌 초에 울프팩을 18점 차로 꺾었지만 3월에 만났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우든은 1975년 3월 1일, 스탠퍼드를 93-59로 꺾은 승리를 마지막 경기로 폴리 파빌리온에서 코치했다. 4주 후, 이전 선수이자 이전 어시스턴트 코치 데니 크럼과 루이빌을 75-74로 꺾은 1975년 NCAA 토너먼트 준결승 경기에서 우든은 64세의 나이로 챔피언십 경기 직후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42] 그의 전설적인 코칭 경력은 리처드 워싱턴과 데이비드 마이어스가 52점을 합작하고 UCLA가 조 B. 홀과 켄터키를 92-85로 꺾고 우든의 와일드캣츠를 상대로 한 첫 번째 코칭 승리이자 전례 없는 10번째 전국 챔피언십을 차지하면서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마르케스 존슨과 앙드레 매카터도 우든의 마지막 챔피언십 팀의 핵심 기여 선수였다. 우든의 마지막 팀의 성공은 특히 알신더, 월튼, 해저드, 굿리치와 같은 유명 스타가 없었기 때문에 인상적이었고, 그 팀은 튼튼한 기회주의자들의 그룹이었다.
앤디 힐은 1970년부터 1972년까지 NCAA 챔피언십에서 우든 아래에서 3번의 브루인 팀에 있었고, 수십 년 후 우든과 함께 2001년 책 ''빠르게 하되 서두르지 말라! 평생의 가르침에서 성공을 찾아서''를 공동 저술했다.[43][44] 이 베스트셀러는 힐이 우든 아래에서 선수로 얻은 경험을 텔레비전 임원으로서 성공을 거두는 데 어떻게 적용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43][45][46] 그의 목표는 우든의 코칭 스타일이 비즈니스 세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또한 그의 코치이자 멘토로서 우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파고든다.[43]
3. 3. 3. 은퇴 이후
우든은 1975년 NCAA 토너먼트 준결승에서 데니 크럼이 이끄는 루이빌을 75-74로 꺾은 후, 64세의 나이로 챔피언십 경기 직후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42] 그의 코칭 경력은 리처드 워싱턴과 데이비드 마이어스가 52점을 합작하고 UCLA가 조 B. 홀이 이끄는 켄터키를 92-85로 꺾으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승리는 우든이 와일드캣츠를 상대로 거둔 첫 번째 코칭 승리이자 전례 없는 10번째 전국 챔피언십이었다.[42] 마르케스 존슨과 앙드레 매카터도 우든의 마지막 챔피언십 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알신더, 월튼, 해저드, 굿리치와 같은 스타 선수 없이 튼튼한 기회주의자들로 구성된 팀이었기에 우든의 마지막 팀의 성공은 더욱 인상적이었다.앤디 힐은 1970년부터 1972년까지 NCAA 챔피언십에서 우든의 지휘 아래 세 번의 브루인스 팀에서 활약했으며, 수십 년 후 우든과 함께 2001년 책 ''빠르게 하되 서두르지 말라! 평생의 가르침에서 성공을 찾아서''를 공동 저술했다.[43][44] 이 베스트셀러는 힐이 우든 밑에서 선수로 얻은 경험을 어떻게 텔레비전 임원으로서 성공하는 데 적용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43][45][46] 이 책은 또한 그의 코치이자 멘토로서 우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파고든다.[43]
2004년, 93세의 우든은 선수들의 연습 및 기타 가벼운 임무를 돕는 어시스턴트로 복귀하는 것을 꺼리지 않겠다고 말했다.[47]
UCLA에서 우든은 "웨스트우드의 마법사"로 알려졌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그 별명을 싫어했다.[34] 그는 UCLA에서 27시즌 동안 620승을 거두고 마지막 12시즌 동안 10개의 NCAA 타이틀을 획득하여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 중 1967년부터 1973년까지는 7번 연속 우승이었다.[1] 그의 UCLA 팀은 또한 NCAA 남자 농구 기록인 88경기 연승[48][49]과 4번의 완벽한 30-0 시즌을 세웠다.[1] 그들은 또한 NCAA 토너먼트에서 38연승[1]과 폴리 파빌리온에서 98연승을 거두었으며, 우든은 10시즌 동안 150-3의 기록을 세웠다.
ESPN의 릭 라일리는 "우든은 1975년, 그가 10번째 전국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때를 포함하여 연간 35000USD 이상의 급여를 받은 적이 없었고(캠프와 강연회 제외), 인상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라고 썼다. 그는 은퇴 선물로 브루인 파우더 블루 메르세데스를 받았다.[50] 그의 저술에 따르면, 우든은 잭 켄트 쿡 구단주로부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코칭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는 UCLA가 그에게 지불하는 것의 10배가 될 수 있었다.
2009년, 우든은 ''The Sporting News''에 의해 "역대 최고의 코치"로 선정되었다.[53]
4. 유산 및 영향
존 우든은 UCLA 브루인스 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며, NCAA 남자 농구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임 전 18년 동안 단 두 번의 컨퍼런스 챔피언십 시즌만을 기록했던 UCLA는 우든의 첫 시즌에 22-7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PCC 남부 디비전 챔피언에 올랐다.[3] 이는 1919년 학교 농구팀 창단 이후 UCLA의 한 시즌 최다 승리 기록이었다.[33]
1964년, 제리 노먼 코치의 제안으로 존 프레스 수비를 채택하면서 UCLA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 결과 득점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빅 바버스 감독의 듀크 대학교 팀을 98-83으로 꺾고 학교 역사상 첫 번째 농구 전국 챔피언십과 첫 무패 시즌(30-0)을 달성했다. 이후 UCLA는 1975년 우든의 은퇴까지 거의 매 시즌 전국 챔피언십을 차지하며 대학 농구 역사상 유례없는 지배력을 발휘했다. 특히 1967년부터 1973년까지 7번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1] 그의 UCLA 팀은 NCAA 남자 농구 기록인 88경기 연승[48][49]과 4번의 완벽한 30-0 시즌을 기록했다.[1] 또한 NCAA 토너먼트에서 38연승[1]을 기록했다.
우든은 UCLA에서 27시즌 동안 620승을 거두었으며, 마지막 12시즌 동안 10개의 NCAA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는 1964년, 1967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에 NCAA 대학 농구 올해의 코치로 선정되었으며, 1967년에는 헨리 이바 상 USBWA 대학 농구 올해의 코치로 선정되었다. 1972년에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의 "올해의 스포츠 선수" 상을 빌리 진 킹과 공동으로 수상했다. 1960년에는 선수로서[54], 1973년에는 코치로서의 업적으로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55] 선수와 코치 모두로 헌액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3][7]
코치 경력이 끝난 후, UCLA는 우든에게 명예 남자 농구 코치라는 칭호를 부여했다.[56] 2006년 11월 17일, 우든은 전미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창립 멤버로서 대학 농구에 미친 영향력을 인정받았다.[57] 2009년에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주리 밸리 컨퍼런스 육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8]
1977년부터 시작된 존 R. 우든 상은 4개의 대학 농구 올해의 선수상 중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여겨진다.[58] 고등학교 농구의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 게임 MVP상은 "존 R. 우든 최우수 선수상"으로 명명되었다. 우든 레거시는 그를 기리기 위해 개최된다.
1998년에는 인격, 리더십, 신앙을 보여주는 전직 선수 또는 코치에게 수여되는 코치 우든 "생애의 열쇠"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파이널 포에서 매년 개최되는 레전드 오브 더 하드우드 브렉퍼스트에서 수여된다.
우든의 이름을 딴 학교와 체육 시설도 있다. 그의 모교인 마틴스빌 고등학교의 체육관, 로스앤젤레스 통합 교육구의 존 R. 우든 고등학교,[60] UCLA의 폴리 파빌리온 농구 코트("넬 & 존 우든 코트"),[61] 헐먼 센터의 홈 코트("넬리 앤 존 우든 코트"),[63] UCLA의 학생 레크리에이션 센터[64]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03년 7월 23일, 존 우든은 미국 최고 시민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67] 2006년에는 캘리포니아 레세다의 우체국이 코치 존 우든 우체국으로 개명되었다.[71]
2010년 10월 14일, UCLA 학부생회는 우든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고 대학에 대한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존 우든 데이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73]
2012년 10월 26일, 블레어 버스웰의 우든 청동상이 새로 개조된 폴리 파빌리온에 헌정되었다.[77][78] 제프리 로우스가 제작한 2012년 공공 예술 조각상 ''우든의 유산''은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애나에서 전시된다.
미국 우편 서비스는 2024년에 발행될 일등 영원 우표의 주제로 우든을 기릴 것이다.[79]
4. 1. 농구 철학 및 지도 방식
존 우든은 UCLA 브루인스 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한 후,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부진했던 팀을 단기간에 바꿔 놓는 "즉각적인 전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성공에는 그가 고안한 독특한 공격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우든은 자신의 시스템이 런앤점프, 1-3-1 트래핑, 박스앤원, 트라이앵글앤투, 스위칭 맨투맨 등 현대의 모든 수비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믿었다.[32]우든은 부임 전 2번의 컨퍼런스 챔피언십 시즌 밖에 없었던 UCLA 농구팀을 첫 시즌에 22승 7패를 기록, 태평양 연안 컨퍼런스(PCC) 남부 디비전 챔피언으로 이끌었다.[3] 이는 1919년 UCLA 농구팀 창단 이후 한 시즌 최다 승리였다.[33] 이후, 다음 시즌에 24승 7패를 기록, 1950년에 두 번째 디비전 타이틀과 전체 컨퍼런스 타이틀을 추가하였으며, 그의 첫 4년 동안 두 개를 더 추가했다.
1955-56 시즌, 우든은 UCLA를 첫 무패 PCC 컨퍼런스 타이틀과 17연승으로 이끌었지만, 필 울퍼트가 이끌고 빌 러셀과 K.C. 존스가 있던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팀에게 패하며 연승이 끊겼고, 결국 샌프란시스코 대학교는 1956년 NCAA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이후 UCLA는 피트 뉴웰이 코치한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밀려 컨퍼런스에서 주춤했고, 1959년 NCAA 토너먼트에서도 캘리포니아 대학교가 우승했다. 설상가상으로 UCLA 미식축구팀 선수들의 불법적인 금전 수수 스캔들[35]로 인해 UCLA의 모든 스포츠 팀이 보호 관찰 처분을 받으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1961-62 시즌, 보호 관찰이 해제되자 우든은 팀을 다시 컨퍼런스 정상으로 이끌었다. UCLA는 사상 처음으로 NCAA 토너먼트 파이널 포에 진출했지만, 1962년 준결승에서 에드 저커가 이끄는 신시내티 대학교에 석패했다.[35] 2년 후인 1964년, 어시스턴트 코치 제리 노먼의 제안으로 존 프레스 수비를 도입하면서 UCLA는 98-83으로 빅 바버스의 듀크 대학교를 꺾고 학교 역사상 첫 번째 농구 전국 챔피언십과 첫 무패 시즌(30승 0패)을 달성했다.[35] 월트 해저드가 경기 후반 퇴장당했지만,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게일 굿리치(27점), 키스 에릭슨, 프레드 슬로터, 잭 허쉬 등이 활약했고, 특히 후보 선수였던 케니 워싱턴은 26득점 12리바운드로 맹활약했다. 6피트 5인치(약 195cm)보다 큰 선수가 없는 UCLA는 빠른 속도와 존 프레스로 29개의 턴오버를 유발하며 듀크 대학교의 장신 선수들을 무력화시켰다.
이후 UCLA는 1975년 우든 감독 은퇴까지, 1966년을 제외하고 매년 전국 챔피언십을 차지하며 대학 농구 역사에 전례 없는 지배력을 구축했다.
우든은 선수 시절 경험과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농구 철학을 정립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빠르게 하되 서두르지 말라", "준비하지 않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와 같은 격언을 강조하며, 끊임없는 노력과 준비성을 강조했다.[104][105] 또한, '성공의 피라미드'를 통해 농구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성공하기 위한 철학적인 요소들을 제시했다.[102]
우든의 7가지 신조[101]는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아버지 조슈아로부터 받은 것이다.
- 자신에게 진실하라.
- 매일을 당신의 걸작으로 만들어라.
- 다른 사람을 도우라.
- 좋은 책, 특히 성경에서 깊이 영감을 얻으라.
- 우정을 훌륭한 예술로 만들라.
- 비 오는 날을 위한 피난처를 지으라.
- 매일 인도를 위해 기도하고 당신의 축복에 감사하라.
우든은 성공의 피라미드에 대해 강연하고 책을 저술했다.[102] 성공의 피라미드는 농구와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한 철학적인 구성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만년에 기업으로부터 영감을 주는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하트포드 보험 및 NCAA 광고에도 출연했다. 2010년 6월, 그의 사망 이후, 모든 UCLA 스포츠 팀은 시즌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의 철학을 기리기 위해 검은색 피라미드 안에 "JRW" 이니셜이 새겨진 패치 또는 헬멧 스티커를 착용했다. 남자 농구팀은 2019년까지 이 패치를 착용했다. 그는 코치로서 받은 급여를 훨씬 초과하는 강연료를 받았으며, 이 수익으로 모든 손자들의 교육 계좌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공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경쟁적 위대함"이 있었는데, 우든은 이를 "최고의 실력이 요구될 때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 매일 최고의 실력이 요구된다."라고 정의했다.[103]
우든은 농구와 인생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우든의 격언:
- 준비하지 않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
- 유연성은 안정성의 핵심이다.
- 빠르게 하되 서두르지 말라.[104][105]
- 관심을 보여줄 기회를 찾아라. 가장 작은 몸짓이 종종 가장 큰 차이를 만든다.
4. 2. 농구계에 미친 영향
존 우든은 UCLA 브루인스 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부임 전 18년 동안 단 두 번의 컨퍼런스 챔피언십 시즌만을 기록했던 UCLA는 우든의 첫 시즌에 22-7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PCC 남부 디비전 챔피언에 올랐다.[3] 이는 1919년 학교 농구팀 창단 이후 UCLA의 한 시즌 최다 승리 기록이었다.[33]우든의 독특한 공격 시스템은 이러한 성공의 일부였으며, 오늘날 많은 코치들이 사용하는 시스템과 동일하다. 우든은 "나는 내 시스템이 내가 본 모든 현대적인 수비에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32]
1955-56 시즌, 우든은 UCLA를 첫 무패 PCC 컨퍼런스 타이틀과 17연승으로 이끌었다. 비록 이 연승은 1956년 NCAA 디비전 I 남자 농구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필 울퍼트 감독의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팀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UCLA는 지속적인 성공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UCLA는 피트 뉴웰 감독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팀에게 밀려 주춤했지만, 미식축구팀 스캔들로 인한 보호 관찰 기간이 끝난 1961-62 시즌부터 다시 컨퍼런스 정상으로 복귀했다.
1964년, 어시스턴트 코치 제리 노먼의 제안으로 존 프레스 수비를 채택하면서 UCLA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 결과 득점이 극적으로 증가했고, 빅 바버스 감독의 듀크 대학교 팀을 98-83으로 꺾고 학교 역사상 첫 번째 농구 전국 챔피언십과 첫 무패 시즌(30-0)을 달성했다.
이후 UCLA는 1975년 우든의 은퇴까지 거의 매 시즌 전국 챔피언십을 차지하며 대학 농구 역사상 유례없는 지배력을 발휘했다. 특히 1967-68 시즌에는 덩크 슛 금지 규칙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로돔에서 열린 세기의 경기에서 엘빈 헤이즈가 이끄는 휴스턴 대학교 팀에게 패한 것을 제외하고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다. UCLA는 NCAA 토너먼트 준결승에서 휴스턴에게 설욕하며 전국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1972-73 시즌, UCLA는 NCAA 토너먼트 결승에서 진 바르토우 감독의 멤피스 주립 대학교 팀을 87-66으로 꺾고 75연승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빌 월튼은 22번의 필드 골 시도 중 21번을 성공시키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1973-74 시즌, UCLA의 연승 행진은 디거 펠프스 감독의 노터데임 대학교 팀에게 71-70으로 패하며 88경기에서 멈췄다. 또한, NCAA 토너먼트 준결승에서 놈 슬론 감독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교 팀에게 더블 연장전 끝에 80-77로 패하며 챔피언십 획득에 실패했다.
1975년, 우든은 조 B. 홀 감독의 켄터키 대학교 팀을 92-85로 꺾고 10번째 전국 챔피언십을 차지한 후 은퇴했다.
우든은 UCLA에서 27시즌 동안 620승을 거두었으며, 마지막 12시즌 동안 10개의 NCAA 타이틀을 획득했다. 특히 1967년부터 1973년까지 7번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1] 그의 UCLA 팀은 NCAA 남자 농구 기록인 88경기 연승[48][49]과 4번의 완벽한 30-0 시즌을 기록했다.[1] 또한 NCAA 토너먼트에서 38연승[1]을 기록했다.
우든의 은퇴 이후 UCLA는 1995년 짐 해릭 감독 아래에서 전국 챔피언십을 차지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2006년에는 벤 하울랜드 감독이 팀을 전국 챔피언십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플로리다 대학교에게 패했다.[33]
5. 수상 및 영예
우든은 여러 차례 그의 업적을 인정받았다. 1964년, 1967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에 NCAA 대학 농구 올해의 코치로 선정되었다.[54] 1967년에는 헨리 이바 상 USBWA 대학 농구 올해의 코치로 선정되었다. 1972년에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의 "올해의 스포츠 선수" 상을 빌리 진 킹과 공동 수상했다. 1960년에는 선수로서,[54] 1973년에는 코치로서의 업적으로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55] 선수와 코치 모두로 헌액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3][7]
코치 경력이 끝난 후, UCLA는 우든에게 명예 남자 농구 코치라는 칭호를 부여했다.[56] 2006년 11월 17일, 우든은 전미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창립 멤버로 대학 농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오스카 로버트슨, 빌 러셀, 딘 스미스,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와 함께 초대 멤버를 대표하는 5명 중 한 명이었다.[57] 2009년에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주리 밸리 컨퍼런스 육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코치 우든은 미주리 밸리 컨퍼런스의 평생 공로 부문에서 아홉 번째 수상자였다.[28] 우든은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영예는 자신의 교파인 기독교 교회에서 수여하는 "미국 최고의 농구 코치"였다고 말했다.[51]
1977년부터 존 R. 우든 상은 4개의 대학 농구 올해의 선수상 중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되었다. 이 상은 대학 농구에서 미식축구의 하이즈만 트로피와 같은 지위를 얻었으며, 수상자는 로스앤젤레스 애슬레틱 클럽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58] 고등학교 농구의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 게임 MVP상은 "존 R. 우든 최우수 선수상"으로 명명되었다. 우든 레거시는 그를 기리기 위해 개최된다.
1998년에는 인격, 리더십, 신앙을 보여주는 전직 선수 또는 코치에게 수여되는 코치 우든 "생애의 열쇠"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파이널 포에서 매년 개최되는 레전드 오브 더 하드우드 브렉퍼스트에서 수여되며, Athletes in Action에서 주최한다.
1984년 2월 3일, 우든은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육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9]
2000년, 우든은 빈스 롬바르디 암 재단에서 "롬바르디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롬바르디 코치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코치의 정신을 보여주는 개인에게 매년 수여된다.
우든의 이름을 딴 학교와 체육 시설이 있다. 그의 모교인 마틴스빌 고등학교의 체육관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51] 2005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통합 교육구의 고등학교가 존 R. 우든 고등학교로 개명되었다.[60] 2003년, UCLA는 폴리 파빌리온의 농구 코트를 존과 넬 우든을 기리기 위해 헌정했다. "넬 & 존 우든 코트"라고 명명되었으며, 우든은 그의 아내의 이름이 먼저 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래 제안된 "존 & 넬 우든 코트"에서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다.[62] 2008년,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는 헐먼 센터의 홈 코트를 "넬리 앤 존 우든 코트"로 명명하여 우든에게 이 영예를 수여했다.[63] UCLA의 학생 레크리에이션 센터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4] 2008년, 우든의 UCLA 농구팀이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스포츠 아레나에서 6시즌을 치렀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명예의 전당 기념 동판에 헌정되었다.[65] 2008년 11월 8일,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는 전설적인 코치와 그의 고인이 된 아내 넬리를 기리기 위해 헐먼 센터의 코트를 넬리 앤 존 우든 코트로 공식 명명했다. 이 행사에는 코치 우든의 녹음된 코멘트와 1946–47 및 1947–48 팀 구성원의 참여가 포함되었다.[66] 시카모어스는 앨비언 칼리지 (MI) 브리튼스와의 시범 경기에서 새로 명명된 코트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
2003년 7월 23일, 존 우든은 미국 최고 시민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우든의 1975년 전국 선수권 팀의 멤버였던 앙드레 매카터의 3년간의 노력 끝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수여했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롱 비치의 Ukleja 윤리 리더십 센터는 2009년에 존 우든 윤리 리더십 상을 제정했으며, 우든이 초대 수상자였다.[67] 1986년, 존 우든은 퍼듀 대학교 자유 예술 대학의 뛰어난 동문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상이 처음 수여된 해였다.
1976년, 우든은 미국 성취 아카데미의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다.[68][69]
2004년 5월 17일, 우든은 리비에라 컨트리 클럽에서 LA 스포츠 & 엔터테인먼트 위원회로부터 앰배서더 공로상을 수상했다.[70]
2006년 우든의 96번째 생일에, 우든의 딸이 살고 있는 근처인 캘리포니아 레세다의 우체국이 코치 존 우든 우체국으로 개명되었다.[71] 이 행위는 브래드 셔먼 하원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 따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서명했다.[1]
2010년 10월 14일, UCLA 학부생회는 우든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고 대학에 대한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존 우든 데이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73] 모건 센터에 있는 UCLA 육상 명예의 전당의 일부는 캠퍼스에서 그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우든의 서재를 재현한 것이다.[74]
''골프 다이제스트''는 우든을 더블 이글과 홀인원을 같은 라운드에서 기록한 4명 중 한 명으로 꼽았다.[75] 이 기록은 1947년 사우스 벤드, 인디애나의 사우스 벤드 컨트리 클럽에서 달성되었다.
우든의 동아리 베타 세타 파이의 주요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은 코치 우든과 그의 아내 넬리를 기려 "원칙의 남자들을 위한 존 앤 넬리 우든 연구소"라고 명명되었다.[76] 코치 우든의 격언과 신조는 연구소에서 리더십 개발을 가르치는 데 핵심이 된다.
2012년 10월 26일, 조각가 블레어 버스웰의 우든 청동상이 새로 개조된 폴리 파빌리온에 헌정되었다.[77][78]
제프리 로우스가 제작한 2012년 공공 예술 조각상 ''우든의 유산''은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애나에서 전시된다.
미국 우편 서비스는 2024년에 발행될 일등 영원 우표의 주제로 우든을 기릴 것이다.[79]
6. 개인사
우든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래의 아내인 넬리 "넬" 라일리를 만났다.[84] 1932년 8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Circle Theatre에서 열린 밀스 브라더스 콘서트에 참석했다.[85] 부부는 아들 제임스 휴 우든과 딸 낸시 앤 뮬하우젠을 두었다.[1] 넬리는 1985년 3월 21일[1] 암으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6]
우든은 넬리가 세상을 떠난 후 25년 동안 넬리에 대한 헌신을 유지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매달 21일이 되면 그녀의 묘소를 방문하여 사랑의 편지를 쓰는 월간 의식을 지켰다. 편지를 다 쓰고 나면 봉투에 넣어 함께 살았던 시절 그녀가 베고 잤던 베개 위에 수년간 쌓아둔 편지 더미에 추가했다.[87] 말년에 시력이 나빠져 편지를 쓰는 것을 중단했다.[88]
넬리의 죽음에 슬퍼하며 우든은 자신의 믿음으로 위안을 얻었다.[89]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자신의 신념을 농구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저는 농구가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항상 분명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농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전체적인 삶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승리하는 삶은 구세주에게 믿음을 두는 삶뿐입니다."[90] 우든의 믿음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매일 성경을 읽었고, 퍼스트 크리스천 교회에 다녔다.[89] 그는 자신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만약 제가 종교 때문에 기소된다면, 저를 유죄로 만들 충분한 증거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91]
2009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을 일부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했던 "자유주의자"라고 묘사했다.[92]
7. 말년
우든은 말년까지 건강한 신체 상태를 유지했다. 2006년 4월 3일, 그는 게실염 치료를 위해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사흘을 보냈다.[93] 2007년에는 결장 출혈로 다시 입원했으며, 그의 딸은 퇴원 후 아버지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94] 2008년 3월 1일 자택에서 넘어져 왼쪽 손목과 쇄골이 부러졌지만, 그의 딸에 따르면 건강 상태는 좋았고 24시간 감독을 받았다.[95] 2009년 2월에는 폐렴으로 4주 동안 입원했다.[96]
2010년 5월 26일, 우든은 탈수 증세로 로널드 레이건 UCLA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다.[97] 그는 그곳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 2010년 6월 4일 99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98][99][100] 그는 아들, 딸, 세 명의 손자, 네 명의 손녀, 그리고 13명의 증손을 남겼다. 개인 장례식 후, 우든은 아내 넬리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힐스 지역에 있는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의 야외 공동 묘소에 안장되었다. 2주 후 UCLA의 폴리 파빌리온에서 공개 추도식이 열렸다.
8. 저서
(1985) 하드커버 개정판
(2003) 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