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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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지유는 명나라 멸망 후 반청 활동을 펼치다 일본으로 망명하여 학문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남명(南明)을 지지하고 정성공과 협력하여 남경(南京) 공략전에 참여했으나 실패 후 일본으로 건너가 야나가와 번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얻었다. 이후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초청으로 에도에서 유학을 강의하며 미토학에 큰 영향을 주었고, 대성전 설계에도 참여했다. 그의 사상은 실용을 중시하는 경세치용학적 태도를 보였으며, 사후 유고가 문집으로 묶여 가나가와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그의 무덤은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있으며, 도쿄 대학 농학부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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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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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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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주지유 (朱之瑜) |
자 | 노장(魯絳) |
호 | 순수(舜水) |
출생 | 만력 28년 10월 12일 (1600년 11월 17일) |
출생지 | 명나라 절강성 소흥부 여요현 (현재 절강성 여요시) |
사망 | 덴나 2년 4월 17일 (1682년 5월 24일) |
사망지 | 일본 무사시국 에도 (현재 도쿄도) |
묘지 | 일본 히타치국 구지군 즈이류산 (현재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시) |
국적 | 명나라 → 일본 |
로마자 표기 | Ju Sunsu |
기타 이름 | 주순수(朱舜水) |
직업 | 학자, 유학자 |
활동 기간 | 명나라 말기 ~ 일본 망명 후 |
종교 | 유교 |
대표 작품 | 『순수선생문집(舜水先生文集)』 28권 |
2. 생애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 주지유는 반청복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1657년에는 안남국(安南國)으로 건너가 벼슬을 제안받았으나, 안남 국왕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 본국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이후 중국 화남, 안남, 일본 등지를 오가며 무역으로 반청 운동 자금을 마련했다.[2]
1645년 일본으로 건너가 명나라에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사쓰마 번은 3,000명의 병력과 자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대륙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꺼려 어떠한 지원도 제공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한 후, 1651년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거절되었고, 안남으로 갔다. 1656년, 중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안도 세이안의 도움으로 1659년 나가사키에 거주할 수 있는 특별 허가를 받았다. 1664년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초청을 받아 에도로 가서 토쿠 학파의 수석 강사가 되었다.
미쓰쿠니와 주지유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그는 생애 마지막 17년 동안 미쓰쿠니의 보호를 받으며 정치와 철학에 대해 논하며 훌륭한 통치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그는 많은 일본 학자들과 교류했으며, 대중을 위한 공개 강연을 하도록 초청받기도 했다.
83세로 사망한 후, 도쿠가와 미쓰쿠니에 의해 유고가 편찬되어 1715년 『순수 선생 문집』 전 28권으로 묶였다. 가나가와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1. 명나라 멸망과 반청복명운동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 17년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자성은 만주족에 의해 몰아내지고 새로운 왕조인 청나라가 성립되었다. 주지유는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정성공 부자 등 명나라 유신들이 화남을 중심으로 명나라 부흥 운동을 시작하자 이 운동에 참여하여, 군자금을 얻기 위해 일본이나 베트남으로 건너가 무역 등을 하였다.[2] 남명 정권의 노왕 주이해와, 대만에 근거지를 둔 정성공을 지원하여, 영력 13년(1659년) 7월의 난징 공략전에도 참가했다.주지유는 정성공이 쇄국 정책 하의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는 일본청원사로 파견되었다. 쇼호 4년(1647년), 게이안 4년(1651년), 조오 3년(1653년), 만지 원년(1658년)에 각각 나가사키에 들렀다. 난징 공략전 패배 후, 만지 2년(1659년) 겨울에 복명 운동을 포기하고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을 희망했지만, 통사소에서 체류 허가의 회신이 늦어지자 일단 귀국했다.
2. 2. 일본 망명과 학문적 영향
1659년, 남경 공략 전투가 실패로 돌아가자, 주지유는 같은 해 정성공의 사신으로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다음 해(1660년) 일본 야나가와 번(柳川藩)의 학자인 안도 세이안(安東省菴)의 도움으로 (막부 인가(認可)의) 영주권을 얻어냈다.[2] 1665년에는 미토번(水戸藩) 번주(藩主)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의 초청으로 에도에서 유학을 강의하였다. 미토의 대성전을 건립할 때 성묘(聖廟), 명륜당(明倫堂), 존경각(尊經閣)을 설계하였다.주지유의 유학은 일본 유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중심으로 한 미토학(水戸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 중 몇 명은 후에 주요 일본 역사 편찬물인 ''대일본사''를 저술했으며, 그 역시 편집에 참여했다. 그는 직접 ''주순수 전집''을 저술했으며, 미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고학(古学)''으로 알려진 유교 지적 운동을 시작하는 데 기여했다. 다른 제자들은 일본의 주자학 발전에 관여했다. 주지유는 또한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라쿠엔 정원을 재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
주지유의 학문은 주자학과 양명학의 중간에 위치하며, 이학·심학을 좋아하지 않고 공론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실리·실행·실용·실효를 중시했다. (경세치용학과도 통한다).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주지유를 경애하여, 미토학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으며, 아즈마 탄바쿠나, 기노시타 준안·야마가 소코 등의 학자들과도 교우하며, 한적 문화를 전했다.
2. 3. 사망과 후대의 평가
주지유는 1644년 북경이 청군에 함락된 이후 반청 활동에 참여했다.[2] 1657년 안남국(安南國)으로 가서 벼슬을 권유받았으나 안남국왕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 본국으로 추방당했다. 이후에도 중국 화남(華南), 안남, 일본 등지로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여 반청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2] 남명(南明) 노왕(魯王) 주이해(朱以海)를 지지하고 한때 정성공(鄭成功)에 협력하기도 했다.[2] 1659년에는 남경(南京) 공략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2]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같은 해 정성공의 사신으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다.[2] 1660년, 일본 야나가와 번(柳川藩)의 학자인 안도 세이안(安東省菴)의 도움으로 (막부 인가(認可)의) 영주권을 얻어냈다.[2] 1665년, 미토번(水戸藩) 번주(藩主) 도쿠가와 미쓰쿠니(徳川光圀)의 초청으로 에도(江戸)에서 유학을 강의하였다.[2] 미토(水戸)의 대성전을 건립할 때 성묘(聖廟), 명륜당(明倫堂), 존경각(尊經閣)을 설계하였다.
주지유의 유학은 일본 유학, 특히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중심으로 한 미토학(水戸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지유가 사망한 장소를 기리는 기념비가 도쿄 대학 농학부 정문 안에 있으며, 이는 코토토이 거리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의 묘는 명나라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시에 있다. 83세로 사망하였으며, 사후에는 도쿠가와 미쓰쿠니에 의해 유고가 편찬되어, 쇼토쿠 5년(1715년)에 『순수 선생 문집』 전 28권으로 묶였다. 도쿄 대학 농학부 내에는 "주순수 선생 종언의 땅"이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묘소는 미토 번주 역대 묘지인 즈이류잔(이바라키현히타치오타 시)에 명나라 양식의 묘가 세워졌다.
3. 사상과 영향
1656년, 주지유는 중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일본에 머물렀다. 안도 세이안의 도움으로 1659년 나가사키에 거주할 수 있는 특별 허가를 받았다. 1664년에는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초청을 받아 에도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번의 다이묘였던 미쓰쿠니의 토쿠 학파 수석 강사가 되었다.
주지유는 도쿠가와 미쓰쿠니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보호를 받으며 조언자이자 스승으로서 정치와 철학에 대해 논했다.
3. 1. 일본 유학에 끼친 영향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중심으로 한 미토학(水戸學)에 큰 영향을 끼쳤다.[2] 미토의 대성전을 건립할 때 성묘(聖廟), 명륜당(明倫堂), 존경각(尊經閣)을 설계하였다.미쓰쿠니의 조언자이자 스승으로서 정치와 철학에 대해 논하며 미쓰쿠니에게 노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히 배려하고 훌륭한 통치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그는 많은 일본 학자들과 교류했으며, 대중을 위한 공개 강연을 하도록 초청받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 몇 명은 후에 주요 일본 역사 편찬물인 ''대일본사''(The History of Great Japan)를 저술했으며, 주지유 역시 편집에 참여했다. 그는 직접 ''주순수 전집''(The Collected Works of Zhu Shunshui)을 저술했으며, 미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고학''(古学)으로 알려진 유교 지적 운동을 시작하는 데 기여했다. 다른 제자들은 일본의 주자학 발전에 관여했다. 주지유는 또한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라쿠엔 정원을 재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
4. 저작
5. 기념 시설
도쿄 대학 농학부 정문 안에 주지유가 사망한 장소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고토토이 거리에서 옮겨온 것이다. 주지유의 묘는 명나라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바라키현 히타치오타시에 있다.[1]
참조
[1]
논문
Chu Shun-shui, 1600-82. A Chinese Confucian Scholar in Tokugawa Japan
1975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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