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창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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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창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유방을 섬기며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직언을 잘 하였으며, 고제의 총애를 받는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로 세우려는 시도에 반대하고, 황태자 교체 시도를 막아 혜제의 어머니 여후의 감사를 받았다. 고제가 죽은 후에는 조나라 상국으로 부임하여 조왕의 안전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조왕은 여후에 의해 독살당했다. 주창은 도후(悼侯) 시호를 받았으며, 사마천은 그를 실직한 인물로 평가했다.
주창은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으며, 소하와 조참 같은 고위 관리들조차 그를 어려워했다.[2] 고제에게 걸과 주와 같다고 직언할 정도로 강직했다.[2]
주창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 소하, 조참 등 다른 대신들조차 주창에게 겸손하게 대했다. 한번은 주창이 연회 중에 유방에게 상주할 일이 있어 찾아갔는데, 유방이 애첩 척희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주창은 그 자리에서 달아났지만, 유방이 쫓아와 "나는 어떤 주군인가?"라고 묻자, 주창은 "걸(桀)과 주(紂)와 같은 주군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은 웃었지만, 속으로는 주창을 꺼렸다.
[1]
문서
휘장과 깃발을 관리하는 직책
2. 생애
사마천은 주창을 나무나 돌처럼 실직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2. 1. 진나라 말기 활동
주가와 함께 진나라 사수군의 졸사를 지냈다. 유방이 패에서 봉기하고 사수수를 무찌르면서 주창과 함께 유방을 섬겼으며 직치(職志)[1]를 맡았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한왕(漢王)이 되면서 중위가 되었다.[2]
2. 2. 한나라 건국과 초한전쟁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한왕(漢王)에 봉해지면서 주창은 중위(中尉)가 되었다.[2]
한왕 4년(기원전 203년) 3월, 형양을 지키던 종형 주가가 항우에게 죽자 종형의 후임으로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3][4][2] 초한전쟁 중에는 내사로써 오창(敖倉)을 지키고 어사대부로써 제후들을 안정시킨 공로로 2천 8백호를 받았다.[5]
주창은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고제가 연회를 열고 있는데 상주할 일이 있어 찾아갔다가, 고제가 애첩 척희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바로 달아났다. 쫓아온 고제에게 목덜미를 잡혀 "나는 어떤 임금 같냐?"라는 질문을 받자, “폐하는 걸과 주와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제는 대답을 듣고 웃었지만 더욱 주창을 두려워했다.[2]
고제는 총희 척씨의 소생인 유여의를 태자 영 대신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고황후나 장량 등의 반대로 결국은 그만두고 대신 유여의를 조(趙)나라 왕으로 봉했다. 이때 조왕 여의의 나이가 10살밖에 되지 않아, 고제는 자신이 죽은 후 조왕의 안전을 걱정했다. 곁에 있던 어사 조요에게 물어 주창을 조나라의 상국(相國)으로 삼았는데, 이 명령을 받은 주창은 좌천을 당하는 것이기에 울며 항의했으나 고제의 설득을 받고 조나라 상국으로 부임했다. 후임 어사대부는 조요가 맡았다.[2]
2. 3. 황태자 교체 반대
고제는 총희 척씨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 영 대신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고황후와 장량 등의 반대로 그만두고 유여의를 조(趙)나라 왕으로 봉했다.[2] 조왕 유여의는 나이가 10살밖에 되지 않아, 고제는 자신이 죽은 후 조왕의 안전을 걱정했다. 곁에 있던 어사(御史) 조요에게 물어 주창을 조나라 상국(相國)으로 삼았는데, 주창은 좌천이라며 울며 항의했으나 고제의 설득을 받고 부임했다.[2]
주창은 황태자 교체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원래 말더듬이였지만, 분노로 인해 "저는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황태자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폐하께서 황태자를 폐하시려 한다면, 저는 반드시 그 조서를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고제는 웃으며 그 일을 없던 일로 했다. 이를 엿듣던 황태자(혜제)의 어머니 여후는 주창에게 무릎을 꿇고 "당신이 없었다면, 황태자는 폐위될 뻔했습니다"라며 감사했다.
2. 4. 조나라 상국 부임과 죽음
고제는 총애하는 후궁 척씨가 낳은 아들 유여의를 태자 영 대신 태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고황후와 장량 등의 반대로 그만두고 유여의를 조(趙)나라 왕으로 봉했다. 조왕 여의는 당시 10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제는 자신이 죽은 후 조왕의 안전을 걱정했다.[2] 곁에 있던 어사 조요의 추천으로 주창을 조나라 상국으로 임명했다. 주창은 이 명령이 좌천이라 생각하여 울면서 항의했으나, 고제의 설득으로 조나라 상국으로 부임했다. 후임 어사대부는 조요가 맡았다.[2]
고제 사후, 고황후는 조왕을 소환했으나, 주창은 번번이 왕의 병을 핑계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고황후는 세 번이나 소환을 반복한 끝에 먼저 주창을 소환하여 질책하고, 조왕을 불러 한 달 만에 독살했다.[2] 주창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3년 후 사망했다. 시호는 도라 하였다.[2]
3. 가계
작위 이름 재위 기간 비고 분음도후 주창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1년 분음애후 주개방 ? ~ 기원전 141년 주창의 아들 분음후 주의 기원전 141년 ~ ? 주개방의 아들, 죄를 지어 작위 몰수 안양후 주좌거 ? ~ ? 선제 때 주창의 증손으로 다시 봉해짐 안양후 주명 ? ~ ? 주좌거의 손자, 아들이 없어 가계 단절
사마천은 주창을 나무나 돌처럼 실직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4. 평가
유방이 황태자를 바꾸려 했을 때에도 주창은 강하게 반대했다. 원래 말더듬이였던 주창은 분노로 인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저는 입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황태자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폐하께서 황태자를 폐하려 하신다면, 저는 반드시, 반드시 그 조서를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유방은 웃으며 그 일을 없던 일로 했고, 이 일을 엿듣고 있던 황태자 (혜제)의 어머니 여후는 주창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했다.
사마천은 주창을 나무나 돌처럼 실직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참조
[2]
서적
사기 (역사서)
[3]
서적
사기
[4]
서적
사기
[5]
서적
사기
[6]
문서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7]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8]
문서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9]
문서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10]
문서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11]
문서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12]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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