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롤터 대포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지브롤터 대포위는 1779년부터 1783년까지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이 지브롤터를 점령하기 위해 벌인 군사 작전이다. 스페인은 미국 독립 전쟁을 틈타 지브롤터를 탈환하려 했으며, 영국은 조지 어거스터스 엘리엇 총독의 지휘 아래 방어 시설을 강화하고 세 차례에 걸쳐 보급품을 지원받아 포위를 견뎌냈다. 스페인군은 육상 포위와 해상 봉쇄를 시도했지만, 영국 해군의 지원과 지브롤터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1782년 프랑스 해군의 참전과 대규모 공세에도 불구하고, 1783년 파리 조약 체결로 지브롤터는 영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이 포위전은 미국 독립 전쟁의 전개와 군사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지브롤터 대포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 | |
분쟁 | 미국 독립 전쟁 |
날짜 | 1779년 6월 24일 ~ 1783년 2월 7일 |
장소 | 지브롤터 |
결과 | 영국의 승리 |
결과 상세 | 1783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지브롤터가 영국 땅인 것이 인정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하노버 선제후국 |
교전국 2 | |
지휘관 | |
지휘관 1 | 조지 엘리엇 로저 커티스 조지 로드니 아우구스트 데 라 모테 |
지휘관 2 | 루이 드 크릴롱 마르틴 소토마요르 루이스 데 코르도바 안토니오 바르셀로 장 르 미쇼 다르송 |
병력 규모 | |
병력 1 | 7,500명 |
함선 1 | 포함 12척 |
병력 2 | 65,000명 |
함선 2 | 전열함 47척 |
특수 함선 2 | 부양포대 10척, 지벡 7척 |
포함 2 | 포함 40척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333명 사망, 1,010명 부상, 질병으로 인한 사상자 536명 ~ 1,014명 |
사상자 2 | 6,000명 사망, 전열함 1척 나포, 부양포대 10척 침몰 |
민간인 피해 | 민간인 196명 사망, 민간인 병사자 800명 |
2. 배경
지브롤터 바위는 710년 무어리시 캐슬과 함께 처음 요새화되었다. 중세 시기 지브롤터는 10차례의 공방전을 겪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이던 1704년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은 지브롤터를 점령했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영국 영토로 인정되었다. 스페인은 1727년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지브롤터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729년 세비야 조약 체결 후 1730년 지브롤터 반도 북쪽에 요새를 건설하여 스페인 본토로부터 지브롤터를 차단했다.[4]
1738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의 상업을 두고 스페인과 영국이 충돌, 1739년 젱킨스의 귀 전쟁이 발발했다. 양국은 지브롤터 일대에 참호를 파려 했으나, 1748년 평화조약 체결 전까지 지브롤터에서 전투는 없었다.
1761년 8월 15일, 카를로스 3세는 루이 15세와 가족협약을 맺고 영국에 대항했다. 프랑스는 이미 영국과 7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에, 영국은 가족협약에 맞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176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은 아바나와 마닐라를 스페인령 플로리다와 교환하였다.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발발 후, 프랑스와 스페인은 미국 독립군을 지원하며 영국에 맞서 참전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1778년 10월 동맹조약을 통해 미국 편에서 참전했고, 스페인은 1779년 4월 12일 아랑후에스 조약을 체결, 1779년 6월 16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제2차 대륙 회의의 공동교전국이 되었다. 아랑후에스 조약에서 스페인의 주요 목표는 지브롤터 확보였으며, 스페인과 프랑스는 지브롤터 점령 전까지 별도 평화협정이나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지브롤터의 영국 진지는 상당히 취약해졌다.[5]
2. 1. 지브롤터의 지정학적 중요성
지브롤터 바위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1704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중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이곳을 점령한 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영국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스페인은 1727년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지브롤터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에도 지브롤터 반도 북쪽에 요새를 건설하여 지브롤터를 압박했다.[4]18세기 중반, 젱킨스의 귀 전쟁과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과 스페인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스페인은 가족협약을 통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대항했다. 미국 독립 전쟁 발발 이후, 스페인은 아랑후에스 조약을 통해 미국 독립군을 지원하며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를 되찾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5] 당시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브롤터의 방어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2. 2. 스페인의 지브롤터 수복 시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던 1704년,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은 지브롤터를 점령했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지브롤터가 영국 영토로 인정되었다. 스페인은 1727년 영국-스페인 전쟁 당시 지브롤터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1729년 세비야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스페인은 1730년 지브롤터 반도 북쪽에 요새를 건설하여 스페인 본토로부터 지브롤터를 차단했다.1738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의 상업을 두고 스페인과 영국이 충돌했고, 이는 1739년 젱킨스의 귀 전쟁 발발로 이어졌다.[4] 양국은 지브롤터 일대에 참호를 파려고 했으나, 1748년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지브롤터에서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
1761년 8월 15일, 카를로스 3세는 루이 15세와 가족협약을 맺고 영국에 대항했다. 프랑스는 이미 영국과 7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가족협약에 맞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176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은 아바나와 마닐라를 스페인령 플로리다와 교환하였다.
1779년 4월 12일, 스페인은 영국으로부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데 상호 협조하기로 한 아랑후에스 조약을 체결했다. 스페인은 1779년 6월 16일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제2차 대륙 회의의 공동교전국이 되었다. 아랑후에스 조약에서 스페인의 주요 목표는 지브롤터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지브롤터를 점령하기 전까지 별도로 평화협정이나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기로 협의했다.[5]
2. 3. 미국 독립 전쟁과 스페인의 참전
1776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스페인은 미국 독립군을 지원하며 영국에 맞서 참전할 기회를 엿보았다.[5] 프랑스는 1778년 10월 동맹조약을 통해 미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다. 스페인은 1779년 4월 12일 아랑후에스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영국으로부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데 상호 협력하기로 한 제3차 가족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스페인은 1779년 6월 16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제2차 대륙 회의의 공동 교전국이 되었다.[5] 아랑후에스 조약에서 스페인의 주요 목표는 지브롤터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지브롤터를 점령하기 전까지 별도로 평화 협정이나 휴전 협정을 체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지브롤터의 영국군 진지는 취약해졌고, 스페인은 이곳을 점령한 뒤 프랑스군과 함께 영국을 침공한다면 향후 협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5]3. 주요 참전 세력
지브롤터 대포위에 참전한 주요 세력은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동맹을 맺고 영국에 맞서 지브롤터를 공격했다.
국가 | 육군 지휘관 | 해군 지휘관 | 병력 규모 | 주요 부대 |
---|---|---|---|---|
스페인 | 마르틴 알바레즈 데 소토마요르 | 안토니오 바르셀로 | 14,000명[6] | 왕립근위대, 발로나스 근위대, 16개 보병대대, 12개 기병대, 포병대 |
프랑스 | 용기병 (아를레아노 후작 지휘) | |||
영국 | 조지 어거스터스 엘리엇 (지브롤터 총독) | 1,752명 (1778년 기준)[9] | 제12, 39, 56, 58, 65, 72 보병연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대대, 코르시카 부대, 명사수 부대, HMS 팬서(폐선박), HMS 엔터프라이즈(프리깃), 포함 12척 |
스페인군은 마르틴 알바레즈 데 소토마요르가 지휘하는 보병, 기병, 포병을 합쳐 14,000명 규모였고,[6] 해군은 안토니오 바르셀로가 지휘하는 지벡과 포함들이 알헤시라스에 본부를 두고 지브롤터만을 봉쇄했다.[6] 루이스 데 코르도바 이 코르도바가 이끄는 11척의 전열함과 2척의 프리깃은 카디즈만에 주둔하며 영국군의 병력 증강을 막았다.[6]
영국군은 지브롤터 총독 조지 어거스터스 엘리엇이 지휘했으며, 1778년 당시 1,752명이 주둔하고 있었다.[9] 엘리엇은 윌리엄 그린이 설계하고 솔저 아티피셔 컴퍼니가 건축한 킹스 배스쳔,[7] 랜드포트 문을 보호하는 그랜드배터리[8] 등 새로운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방어 계획을 강화했다.
3. 1. 스페인-프랑스 연합군
지브롤터 침공 병력의 총사령관은 마르틴 알바레즈 데 소토마요르였다. 루데신도 틸리는 포병대를 이끌었고, 아를레아노 후작은 기병과 프랑스 용기병을 지휘했다.
스페인 지상군은 왕립근위대와 발로나스 근위대를 포함하여 16개 보병대대와 12개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총 14,000명의 병력이었다.[6]
안토니오 바르셀로는 지벡과 포함들을 이끌고 알헤시라스에 본부를 설치하여 지브롤터만을 봉쇄하는 해상 병력을 지휘했다.[6] 카디즈만에는 루이스 데 코르도바 이 코르도바가 이끄는 11척의 전열함과 2척의 프리깃이 주둔하며 영국군의 병력 증강을 막으려 했다.[6]
3. 2. 영국군
1778년 당시 지브롤터에는 1,752명의 영국군 병력이 있었고, 지브롤터의 총독이었던 조지 어거스터스 엘리엇이 영국군 사령관이었다.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해 지브롤터의 모든 방어시설이 강화되었다. 1770년대 초 지브롤터 바위 일대의 방어시설 상태를 점검한 위원회의 보고에 따라, 엘리엇은 지브롤터에 새로운 방어시설을 만들어 방어 계획을 확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 지어진 대표적인 방어 시설은 윌리엄 그린이 설계하고 솔저 아티피셔 컴퍼니가 건축한 킹스 배스쳔으로, 지브롤터 마을의 해안선을 따라 지어졌다.[7] 그랜드배터리는 스페인 본토에서 지브롤터로 향하는 지협으로 이어지는 주요 관문인 랜드포트 문을 보호했다. 다른 요새와 포대는 지브롤터의 해안선과 지브롤터 바위에 집중 배치되었다.[8]
엘리엇은 방어 계획을 시행하고자 포대와 요새에 더 많은 포를 배치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주둔지에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에서 온 3개 대대와 코르시카 병력 80명도 있었다. 엘리엇은 명사수 부대도 육성했다. 당시 영국 해군의 병력은 지브롤터에 매우 적었으며, 해군 대다수도 마을이나 해안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옛 전열함이었던 HMS 팬서가 항구에 폐선박 겸 부양포대로 정박해 있었다. 프리깃 HMS 엔터프라이즈와 12척의 포함도 지브롤터에 있었다.[9] 영국군은 언젠가 지브롤터가 공격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선박을 통해 병력을 증강받고 보급품도 얻었다. 1778년 프랑스가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자 지브롤터의 방비는 더욱 강화되었지만,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지브롤터를 침공하여 포위를 개시한 것은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 군대였다.[9]
당시 지브롤터에 배치된 영국군 부대는 다음과 같다.
4. 포위전 전개 과정
1779년 6월 16일 스페인이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지브롤터 포위가 즉각 시작되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해상에서 지브롤터를 봉쇄했고, 육지에서는 스페인군이 요새, 보루, 참호, 포대를 건설하며 공격을 준비했다.[10]
1779년 겨울, 영국군 진영은 식량, 연료, 의약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괴혈병이 만연했고, 지브롤터 총독 엘리엇은 런던에 구호품을 요청했다. 영국군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높은 사기를 유지하며 스페인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스페인군은 지브롤터 공방전에 집중하느라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연기해야 했다.[10]
4. 1. 초기 포위 (1779년 ~ 1780년)
1779년 6월 16일 스페인은 영국에 선전포고했고, 즉각 지브롤터 포위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7월 6일, 영국 선박과 해안가에 있던 스페인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려던 스페인 선박 사이에 교전이 발생하여 스페인 선박 몇 척이 나포되었다.[10]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해상에서 지브롤터를 봉쇄했고, 육지에서는 요새, 보루, 참호, 포대를 건설하며 공격을 준비했다.1779년 겨울, 영국군 진영의 식량이 부족해졌다. 빵은 거의 구할 수 없었고, 아이들과 환자에게만 제공되었다. 염장고기와 비스킷이 주 배급품이었고, 가끔 쌀 4온스가 배급되었다. 연료도 부족하여 불을 거의 땔 수 없었고, 항구에서 파괴된 옛 선박의 소금에 절인 목재를 땔감으로 사용했다. 채소와 약품 부족으로 괴혈병이 만연했다. 지브롤터 총독 엘리엇은 런던에 구호품을 요청했으나, 겨울 동안 식량은 더욱 부족해졌다. 그럼에도 영국군 진영의 사기는 높았고, 일부 병력은 스페인군의 시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다. 영국군은 바다에서 구호품이 오기를 바라며 추위와 굶주림을 견뎠다. 한편, 스페인군은 지브롤터 공방전에 대부분의 병력과 선박을 투입하면서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연기했고, 이는 1779년 아르마다 계획의 취소로 이어졌다.[10]
4. 2. 영국의 1차 구원 (1780년)
1779년 겨울, 영국군 진지의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빵은 거의 구할 수 없었고, 염장고기와 비스킷이 주요 배급품이었다. 연료도 부족하여 항구에서 파괴된 옛 선박들의 소금에 절여진 목재를 땔감으로 사용했다. 채소와 약품 부족으로 괴혈병이 자주 발생했다.[11] 지브롤터 총독이었던 엘리엇은 런던에 구호품을 요청했으나 겨울 동안 식량은 더욱 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진지의 사기는 높았으며, 일부 병력은 스페인군의 시험 공격을 무찌르기도 했다. 영국군은 바다에서 구호품이 오기를 바라며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냈다.[10]
1779년 12월, 조지 로드니가 이끄는 대규모 수송선이 21척의 전열함의 호위를 받으며 영국에서 지브롤터로 항해했다. 1780년 1월 8일 영국 해군은 피니스테르곶에서 스페인 수송대를 격퇴하고, 나포한 선박의 물품들로 지브롤터 진지를 보급할 계획이었다.[11] 로드니는 세인트빈센트곶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고 전열함 5척과 수송품을 확보했다. 영국 함대는 쉽게 스페인의 봉쇄를 돌파했고, 1780년 1월 25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제73하일랜드보병연대 1,052명과 충분한 보급품을 전달했다. 로드니의 함대가 떠나자마자 공방전이 재개되었지만, 영국군은 보강된 전력을 바탕으로 스페인군의 공격에 맞섰다.
4. 3. 영국의 2차 구원 (1781년)
조지 다비 부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1781년 4월 12일 지브롤터에 도착하여 구원 작전을 펼쳤다.[10] 29척의 전열함이 100척의 수송선을 호위하며 지브롤터 만으로 진입했고, 스페인 함대는 이를 막지 못했다.[10]스페인 함대는 영국 함대의 진입에 좌절하여, 수송선이 물자를 하역하는 동안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이 포격으로 지브롤터 시가지는 파괴되었지만, 수송선이 정박한 남쪽 방파제에는 피해가 없었다.[10] 영국 함대는 밤에 스페인 함대의 봉쇄를 뚫고 지브롤터를 떠났다.
이 작전으로 영국군은 식량, 보급품뿐만 아니라 탄약, 총, 화약도 충분히 확보하게 되었다.[10] 다비 부제독의 구원 이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봉쇄를 통한 방법이 효과가 없음을 인지하고, 해상과 육상에서 더 많은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4. 4. 프랑스군의 참전과 대규모 공세 (1782년)
1779년 6월 16일 스페인은 영국에 선전포고했고, 즉각 지브롤터 포위가 시작되었다. 같은 해 7월 6일, 영국 선박과 해안가에 있던 스페인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려던 스페인 선박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스페인 선박 몇 척이 나포되었다.[10]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해상에서 지브롤터를 봉쇄했고, 육지에서는 거대한 군대가 공격을 위해 요새, 보루, 참호, 포대를 건설했다.1779년 겨울, 영국군 진지의 식량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빵은 거의 구할 수 없었고, 아이들과 환자에게만 지급되었다. 염장고기와 비스킷이 주 배급품이었고, 가끔씩 4온스의 쌀이 배급되었다. 연료도 부족하여 불을 거의 땔 수 없었고, 항구에서 파괴된 낡은 선박의 소금에 절인 목재를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채소와 약품 부족으로 괴혈병이 만연했다. 지브롤터 총독 엘리엇은 런던에 구호품을 요청했지만, 겨울 동안 식량은 더욱 부족해졌다. 그럼에도 영국군 진지의 사기는 높았고, 일부 병력은 스페인군의 시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다. 영국군은 바다에서 구호품이 오기를 기다리며 추위와 굶주림을 견뎠다. 한편, 스페인군은 지브롤터 공방전에 대부분의 병력과 선박을 투입했기 때문에 예정된 잉글랜드 침공을 연기했고, 이는 1779년 아르마다의 취소로 이어졌다.[10]
5. 부유 포대 전투와 대공세 (1782년 9월)
1779년,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해상에서 지브롤터를 봉쇄했고, 육지에서는 스페인군이 공격을 위해 요새, 보루, 참호, 포대를 건설했다.[10]
6. 영국의 3차 구원과 포위전 종결 (1782년 ~ 1783년)
1779년 6월 16일 스페인은 영국에 선전포고했고, 즉각 지브롤터 포위가 시작되었다. 7월 6일, 영국 선박과 해안가에 있던 스페인군에게 보급품을 제공하려던 스페인 선박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고, 몇 척의 스페인 선박이 나포되었다.[10]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해상에서 지브롤터를 봉쇄했고, 육지에서는 거대한 군대가 공격을 위해 요새, 보루, 참호, 포대를 건설했다.
1779년 겨울, 영국군 진지의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빵은 거의 구할 수 없었고, 아이들과 환자에게만 제공되었다. 염장고기와 비스킷이 주 배급품이었고, 가끔 쌀 4온스가 배급되었다. 연료도 바닥나 거의 불을 땔 수 없었으며, 항구에서 파괴된 옛 선박들의 소금에 절여진 목재를 땔감으로 사용했다. 채소와 약품 부족으로 괴혈병이 자주 발생했다.[10] 지브롤터 총독 엘리엇은 런던에 구호품을 요청했으나, 겨울 동안 식량은 더욱 귀해졌다. 그럼에도 영국군 진지의 사기는 높았고, 일부 병력은 스페인군의 시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다. 영국군은 바다에서 구호품이 오기를 바라며 추위와 배고픔을 견뎠다.[10] 한편, 스페인군은 지브롤터 공방전에 대부분의 병력과 선박을 배치했기 때문에 예정된 잉글랜드 침공을 연기했고, 이는 1779년 아르마다의 취소로 이어졌다.[10]
7. 포위전의 결과와 영향
지브롤터 대포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영국:
- 군사적 승리: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내면서, 영국은 지브롤터의 전략적 요충지를 지켜냈다. 이는 영국 해군력의 우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사기 진작: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견뎌낸 것은 영국군과 지브롤터 주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 협상 우위: 지브롤터를 지켜냄으로써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 이후 평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스페인:
- 군사적 패배: 지브롤터 탈환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했다.
- 국제적 위신 하락: 프랑스와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지브롤터 공격에 실패하면서 스페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미국 독립 전쟁:
- 영국의 전력 분산: 지브롤터 포위전으로 인해 영국은 북미 대륙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자원을 일부 지브롤터 방어에 투입해야 했다.
- 프랑스의 참전: 스페인이 지브롤터 공격에 실패하면서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브롤터의 전략적 가치:
- 지중해 제해권: 지브롤터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중요한 해상 요충지로서, 영국 해군이 지중해 제해권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군사 기지: 대포위전 이후 지브롤터는 영국 해군의 주요 기지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여러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결론적으로 지브롤터 대포위는 영국에게는 군사적,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스페인에게는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었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의 전개 과정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지브롤터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참조
[1]
서적
Gibraltar: The Greatest Siege in British History
https://archive.org/[...]
Viking
2017
[2]
문서
The Great Siege
2014
[3]
서적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r of independence, Volume 2
https://books.google[...]
Fullarton & Company
1850
[4]
서적
The History of Gibraltar and of Its Political Relation to Events in Europe: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Moorish Dynasty in Spain to the Last Morocco War
https://archive.org/[...]
Saunders, Otley, and Company
1862
[5]
웹인용
The Great Siege of Gibraltar
https://web.archive.[...]
The Keep Military Museum
2007-08-06
[6]
서적
Gibraltar besieged, 1779–1783
https://books.google[...]
Heinemann
1965
[7]
웹인용
Gates & Fortifications – King's Bastion
https://web.archive.[...]
aboutourrock.com
2018-03-30
[8]
서적
A Description of Gibraltar
https://books.google[...]
B. Cornwell
[9]
웹인용
British War with France and Spain, 1778–1783
http://www.regiments[...]
2020-07-06
[10]
서적
The Other Armada: The Franco-Spanish Attempt to Invade Britain in 1779
https://books.googl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60
[11]
London Gazette
1780-01-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