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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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족협약은 1733년부터 1761년까지 스페인과 프랑스 부르봉 왕가 간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을 의미한다. 제1차 가족 협약은 1733년 펠리페 5세와 루이 15세 사이에 체결되어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 회복을 위한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했다. 제2차 가족 협약(1743년)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체결되었으며, 스페인의 이탈리아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프랑스의 지원을 담았다. 제3차 가족 협약(1761년)은 7년 전쟁 중 체결되었으며, 영국에 대항하기 위한 스페인의 참전을 이끌었으나, 스페인은 이로 인해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해야 했다. 이후 1779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 참전을 위한 아랑후에스 조약이 체결되었고, 1796년에는 제2차 산일데폰소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가족 협약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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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협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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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왕가 협약 |
서명 | 1733년, 1743년, 1761년 |
관련 국가 | 프랑스 스페인 |
체결 가문 | 부르봉 가문 |
배경 |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
명칭 (프랑스어) | |
명칭 | Pacte de Famille |
명칭 (스페인어) | |
명칭 | Pacto de Familia |
2. 제1차 가족 협약 (1733년)
제1차 가족 협약(Primer Pacto de Familiaes)은 1733년 11월 7일 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프랑스의 루이 15세 사이에 체결된 에스코리알 조약(Treaty of the Escorial영어)을 말한다.[11]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였고, 루이 15세는 펠리페 5세의 조카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부르봉 왕가 출신인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는 인정되었으나, 스페인은 이탈리아 내 영토를 합스부르크 왕가에 넘겨주어야 했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펠리페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으려 했고, 루이 15세는 장인 스타니스와프 1세를 폴란드 왕위에 복위시키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체결된 이 조약은 두 군주가 같은 부르봉 가문이라는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가족 협약'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프랑스는 동맹을 강화하고, 프랑스는 스페인의 지브롤터 회복을 돕기로 약속했으며, 스페인은 영국에 부여했던 상업적 특혜를 철회하기로 했다. 또한 프랑스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무역에서 중요한 권리를 확보했다.[1] 이 조약은 스페인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프랑스 측으로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2]
전쟁 결과, 스타니스와프 1세의 복위는 실패했지만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획득했고, 스페인은 펠리페 5세의 아들 카를로스를 위해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비록 조약 내용 중 일부(지브롤터 반환, 영국과의 상업 문제)는 즉시 이행되지 않았으나, 이는 이후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지는 긴장의 원인이 되었다.
2. 1. 배경


제1차 가족 협약은 1733년 11월 7일 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그의 조카인 프랑스의 루이 15세 사이에 엘 에스코리알에서 체결된 'Treaty of the Escorial|에스코리알 조약eng'을 가리킨다.[11]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로,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가 끊기자 부르봉 왕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스페인 왕위에 올랐다.[11]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른 끝에 위트레흐트 조약(1713년)을 통해 스페인과 프랑스가 통합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왕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스페인은 이탈리아 내 영토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넘겨주어야 했다.
두 나라는 부르봉 왕가라는 혈연으로 묶여 있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자체가 두 왕국의 통합을 막기 위해 벌어졌던 만큼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1718년부터 1720년까지 이어진 사국 동맹 전쟁에서는 서로 적대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1726년 플뢰리 추기경이 프랑스의 수석 장관이 되면서 스페인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729년 루이 15세의 후계자가 태어나면서 두 왕국이 별개의 국가로 유지될 가능성이 커진 것도 관계 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733년, 폴란드의 국왕 아우구스투스 2세가 사망하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루이 15세는 자신의 장인이자 한때 폴란드 왕이었던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이 전쟁에 개입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 펠리페 5세는 이 전쟁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잃었던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을 기회로 여겼다. 특히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트 파르네세는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려 있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과거 스페인령이었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엘리자베트 파르네세는 남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1] 스페인 측 협상가 호세 파티뇨는 프랑스로부터 카를로스의 이익을 보장하는 양보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1733년 11월 7일, 에스코리알 조약, 즉 제1차 가족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으로 스페인은 프랑스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참전을 지원하는 대가로, 장차 카를로스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 그리고 프레시디 국가를 차지하는 것을 프랑스로부터 인정받았다. 또한 프랑스는 스페인의 중요한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무역에서 특혜를 얻었으며, 영국이 스페인과의 무역 제한에 보복할 경우 스페인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1][2] 조약에는 프랑스가 영국에게 빼앗긴 지브롤터를 스페인이 되찾는 것을 돕고, 스페인은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영국에게 부여했던 상업적 특혜를 철회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비록 스타니스와프 1세의 폴란드 왕위 복위는 실패했지만, 전쟁 결과 프랑스는 전략적 요충지인 로렌 공국을 얻었고, 스페인은 펠리페 5세의 아들 카를로스를 위해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3] 그러나 지브롤터 반환이나 영국과의 상업 문제에 관한 조항은 이행되지 않았고, 이는 이후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2. 2. 체결 및 내용
'''제1차 가족 협약'''(Primer Pacto de Familiaes)은 1733년 11월 7일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그의 조카인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사이에 체결된 '''에스코리알 조약'''(Treaty of the Escorial영어)이다.[11][1]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로,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가 끊기자 부르봉 왕가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스페인 왕위에 올랐다.[11]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스페인과 프랑스가 통합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왕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나,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겨주어야 했다. 루이 15세는 펠리페 5세의 조카였으며, 폴란드의 전 국왕 스타니스와프 1세의 딸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 동맹은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발발 시 프랑스가 개입하는 배경이 되었다.
두 국가는 가까운 혈연관계에도 불구하고 사국 동맹 전쟁(1718-1720)에서는 서로 적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1726년 플뢰리 추기경이 프랑스의 수석 장관이 된 후 스페인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으며, 1729년 루이 15세의 후계자가 태어나면서 두 왕국이 별개로 유지될 가능성이 커지자 관계 개선은 더욱 용이해졌다.
펠리페 5세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기회로 삼아 1714년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 등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이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장남인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상 왕위에 오르기 어렵다고 보고, 그를 위해 이탈리아 영토 확보를 추진했다. 펠리페 5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 동맹은 두 군주의 혈연관계 때문에 '가족 협약'으로 불리게 되었다.
스페인의 호세 파티뇨와 프랑스의 플뢰리 추기경 간의 협상을 통해 체결된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와 스페인은 동맹을 맺는다.
- 프랑스는 스페인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영국에 빼앗긴 지브롤터를 되찾는 것을 돕기로 약속한다. (당시 이행되지 않음)
- 스페인은 1714년 영국에 부여했던 상업적 특혜를 철회하여 프랑스에 유리하도록 한다. (당시 이행되지 않음)
- 프랑스는 스페인령 아메리카를 포함한 스페인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권리를 확보한다.[1] 이는 막대한 양의 은과 수익성 있는 시장 접근을 의미했다.
- 영국이 스페인의 무역 제한 조치에 보복할 경우, 프랑스는 스페인을 방어한다.
- 카를로스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 프레시디 국가를 획득하고, 엘리자베트 파르네세는 이탈리아 내 재산권을 유지한다.
- 이탈리아에 영향을 미치던 이전 조약들은 폐지된다.
이 조약의 결과, 스타니스와프 1세는 폴란드 왕위를 되찾지 못했지만,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로렌 공국을 획득했다. 펠리페 5세는 아들 카를로스를 위해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3] 비록 조약의 일부 조건(지브롤터 반환 지원, 영국의 상업적 특혜 철회)은 즉시 이행되지 않았으나, 이러한 약속과 변화된 세력 구도는 이후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지는 긴장의 원인이 되었다.[2]
2. 3. 결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의 목표였던 스타니스와프 1세의 복위는 실패했다.[3] 그러나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로렌 공국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이용하여 이탈리아 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했으며, 그 결과 아들 카를로스를 위해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확보할 수 있었다.[3]또한, 조약에는 프랑스가 지브롤터를 스페인이 되찾는 것을 돕고, 스페인은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영국에 부여했던 상업적 특혜를 폐지하기로 합의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3] 비록 이러한 약속들은 당시에는 이행되지 않았지만, 영국과의 긴장을 고조시켜 이후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3]
3. 제2차 가족 협약 (1743년)
제2차 가족 협약은 1743년 10월 25일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퐁텐블로 조약eng)으로 성립되었으며,[11] 제1차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 체결되었으며, 조항의 상당수는 전쟁 수행과 관련이 있었다.[11][4] 협정을 통해 1748년 펠리페 5세의 넷째 아들인 필리페가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공작이 되면서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4]
3. 1. 배경
제1차 가족 협약 이후, 유럽의 정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발발로 다시 한번 요동쳤다. 이 전쟁은 스페인과 프랑스가 다시 한번 부르봉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그의 영향력 있는 아내 엘리자베스 파르네세 여왕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확장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인판테 필리페를 위해 이탈리아 지역에 영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4] 이를 위해 스페인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기회로 삼아 두 차례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한편,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강력한 경쟁자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의 지원이 절실했다. 루이 15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더 나아가 대서양 무역에서 프랑스의 입지를 넓히고자 했다.[4] 그는 스페인의 이탈리아 내 야심을 지원하는 대가로 전쟁에서의 협력을 확보하려 했다. 구체적으로 카를로스(훗날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를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보장하고, 인판테 필리페에게는 밀라노 공국을 확보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스페인의 요구를 수용하며 양국의 이해관계를 긴밀히 엮으려 했다.[4] 또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에 부과되었던 상업적 제약을 완화하는 문제도 논의되었다.[4]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1743년 10월 25일 퐁텐블로에서 두 번째 가족 협약, 즉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되었다.[11] 이 협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부르봉 가문 두 왕국의 군사적, 정치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조항 대부분 역시 전쟁 수행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11][4] 이처럼 강화된 부르봉 동맹은 당시 유럽의 주요 경쟁국이었던 영국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4]
3. 2. 체결 및 내용
제2차 가족 협약은 1743년 10월 25일 '''퐁텐블로 조약'''(Treaty of Fontainebleaueng)이라는 이름으로 성립되었다.[11] 이 협약은 제1차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5세와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 사이에 체결되었다.당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협약의 조항 대부분은 전쟁 수행과 관련된 내용이었다.[11][4] 스페인의 엘리자베스 파르네세 여왕은 이 협약을 통해 스페인이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필리페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스페인은 두 차례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하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다. 프랑스의 루이 15세 역시 스페인의 이익을 프랑스의 전쟁 명분과 긴밀히 연결시키려 했다. 루이 15세는 카를로스를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보장하고, 필리페를 밀라노 공국의 통치자로 삼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에 부과된 상업적 제약을 없애는 데 동의했다.[4]
이 협정은 스페인과 프랑스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으며, 특히 스페인은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748년에는 펠리페 5세의 넷째 아들인 필리페가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공작이 되었다.[4] 반면, 영국은 더욱 긴밀해진 부르봉 동맹과 대서양 무역에서 프랑스의 역할 증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4]
- [https://books.google.es/books?id=ersCAAAAYAAJ&printsec=titlepage&source=gbs_summary_r&cad=0#PPA367,M1 제2차 가족 협약 원문]
3. 3. 결과
제2차 가족 협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 체결되었으며, 조항의 대부분은 전쟁 수행과 관련이 있었다.[11] 스페인의 엘리자베타 파르네세 왕비는 이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의 세력을 확장하고 둘째 아들 필리포 1세 (파르마 공작)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했다. 이에 스페인은 두 차례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고, 오스트리아와의 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다.동맹의 결과로 1748년 펠리페 5세의 넷째 아들인 필리포가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공작이 되면서[4] 스페인의 이탈리아 내 영향력이 커졌다.[11] 스페인은 이 협정을 통해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득을 얻었으며, 영국은 더욱 긴밀해진 부르봉 왕가의 동맹과 대서양 횡단 무역에서 프랑스의 참여 증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4]
4. 제3차 가족 협약 (1761년)
제3차 가족 협약은 1761년 8월 15일,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와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 사이에 파리 조약의 형태로 체결된 동맹이다.[11] 이 협약은 7년 전쟁 중에 맺어졌으며, 이전까지 중립을 지키던 스페인이 프랑스 측에 가담하여 영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협약에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방계 가문이 통치하던 동맹국 나폴리 왕국과 파르마 공국도 포함되었다.[6]
4. 1. 배경
제3차 가족 협약은 7년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61년 8월 15일,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와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 사이에 파리 조약의 형태로 체결되었다.[11] 카를로스 3세는 펠리페 5세의 셋째 아들이었고, 루이 15세와는 사촌 관계였다. 이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프랑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전쟁 중이었으나, 스페인은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카를로스 3세의 동맹 결정은 스페인을 전쟁에서 배제하려 했던 선왕 페르난도 6세의 중립 정책을 뒤집는 것이었다. 페르난도 6세가 1759년 8월 사망하자, 그의 이복형제이자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장남인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이미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25년 가까이 통치한 경험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이던 1742년, 당시 나폴리-시칠리아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3세는 부르봉 왕가의 동맹을 지원하려 했으나, 영국 해군 함대의 개입으로 중립국 지위를 유지해야만 했다.[5]
7년 전쟁의 전황이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프랑스 재상 에티엔 프랑수아 드 줴수엘은 스페인을 제3차 가족 협약에 참여시키거나, 영국 및 그 동맹국들과 평화 협상을 추진하는 이중 전략을 모색했다.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제국의 해외 영토가 취약하다는 점과, 프랑스가 영국과의 평화 협상 과정에서 스페인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공식적인 동맹이 프랑스의 일방적인 평화 협정 체결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동맹을 선택했다. 두 부르봉 왕가는 협력을 통해 영국과의 분쟁을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연례 스페인 보물선이 스페인에 도착한 이후 발효되도록 계획되었으며, 이는 영국에게 스페인의 참전 의사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6][7] 협약에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방계 가문이 통치하던 스페인의 동맹국 나폴리 왕국과 토스카나 대공국 (일부 자료에서는 파르마 언급[6])도 포함되었다.
4. 2. 체결 및 내용
]제3차 가족 협약은 1761년 8월 15일,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스페인)와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 사이에 '''파리 조약 (1761년)'''으로 체결되었다.[11] 카를로스 3세는 펠리페 5세의 셋째 아들이었고, 루이 15세와는 사촌 관계였다.
1761년 당시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전쟁 중이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는 1759년 왕위에 오르면서, 선왕이자 이복형인 페르난도 6세 (스페인 왕)가 유지하던 중립 정책을 폐기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카를로스 3세는 즉위 전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영국의 압력으로 중립을 지켜야 했던 경험이 있었다.[5]
7년 전쟁이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프랑스 재상 에티엔 프랑수아 드 줴수엘은 스페인을 전쟁에 참여시키거나 영국과 평화 협상을 하는 이중 전략을 모색했다.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 제국의 해외 영토가 영국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과, 프랑스가 스페인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단독으로 영국과 평화 조약을 맺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결국 그는 프랑스와의 공식 동맹을 통해 프랑스의 일방적인 행동을 막고 양국이 공동으로 영국과의 분쟁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이 협약은 연례 스페인 보물선이 스페인에 안전하게 도착한 후에 발효되었는데, 이는 영국에게 스페인이 전쟁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6][7] 협정에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방계 가문이 통치하던 동맹국 나폴리 왕국과 파르마 공국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참전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1762년, 영국 해군은 스페인 제국 무역의 핵심 항구인 쿠바의 아바나와 필리핀의 마닐라를 점령했다(아바나 전투 (1762년), 마닐라 전투 (1762년)). 이로써 스페인의 대서양 및 태평양 무역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스페인은 동맹에 따라 영국의 오랜 동맹국인 포르투갈 왕국을 침공(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 (1762년))했으나,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에게 세 차례 모두 패배하며 25,000명 이상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프랑스는 스페인에 대한 보상으로 비밀리에 퐁텐블로 조약 (1762년)을 맺어 북아메리카의 루이지애나 (뉴 프랑스) 영토를 스페인에 넘겨주었다. 전쟁을 마무리 짓는 1763년 파리 조약 (1763년)에서 스페인은 아바나와 마닐라를 돌려받는 대가로, 전략적 요충지인 플로리다 전체를 영국에 할양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제3차 가족 협약은 프랑스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스페인에게는 막대한 손실을 안겨준 동맹이 되었다.
4. 3. 결과
제3차 가족 협약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불리한 상황에 놓였을 때 체결되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는 선왕 페르난도 6세의 중립 정책을 폐기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택했다. 이는 스페인 제국의 해외 영토 방어와 영국과의 평화 협상에서 프랑스가 스페인의 이익을 저버릴 가능성을 우려한 결정이었다.[6][7] 협약에는 스페인 부르봉가의 방계 가문이 통치하던 스페인의 동맹국 나폴리 왕국과 파르마 공국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스페인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스페인의 참전은 영국에게 마닐라와 아바나를 공격할 빌미를 주었다. 1762년, 영국군은 스페인 제국의 무역에 핵심적인 두 항구, 쿠바의 아바나와 필리핀의 마닐라를 점령했다. 아바나 포위전과 마닐라 전투에서의 승리로 영국은 스페인의 대서양 및 태평양 항로를 사실상 차단했다.
또한, 스페인은 동맹에 따라 영국의 오랜 동맹국인 포르투갈 왕국을 침공하기로 합의하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에게 세 차례의 침공 시도 모두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며, 스페인과 프랑스 연합군은 총 25,000명 이상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스페인에 대한 보상으로 비밀리에 퐁텐블로 조약을 맺어 루이지애나 영토의 나머지 지역을 스페인에 넘겨주었다. 하지만 1763년 파리 조약에서 스페인은 점령당했던 아바나와 마닐라를 돌려받는 대신, 전략적으로 중요한 플로리다 전역을 영국에 할양해야만 했다. 결국 제3차 가족 협약은 스페인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으며, 프랑스에게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5. 그 후 프랑스-스페인 협약
1779년 4월 12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아랑후에스 조약을 체결하여 스페인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고 영국과 적대하게 되었다.[8][10] 이 협약은 제3차 가족 협약의 갱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제4차 가족 협약'이라고 불리지 않았다.[8][10]
이후 1796년 8월, 스페인의 재상 마누엘 데 고도이는 프랑스와 제2차 산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축출된 이후에 체결되었기 때문에 '가족 협약'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5. 1. 아랑후에스 협약 (1779년)
1779년 4월 12일, 프랑스와 스페인은 아랑후에스 협약( Treaty of Aranjuezeng )을 체결했다.[8][10] 부르봉 왕가 출신의 루이 16세와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 사이에 맺어진 이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영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스페인의 주요 목표는 7년 전쟁과 그 이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영국에게 빼앗겼던 영토, 특히 지브롤터를 되찾는 것이었다.[8] 이 협약은 제3차 가족 협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제4차 가족 협약'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는 않았다.[8][10]5. 2. 제2차 산일데폰소 조약 (1796년)
1796년 8월, 카를로스 4세의 재상이었던 마누엘 데 고도이는 프랑스와 협상하여 제2차 산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가족 협약'으로 간주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조약 체결 당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인물들이 살해되거나 국외로 망명하여 더 이상 프랑스를 통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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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cte de Famille of 1761
http://www.heraldica[...]
199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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