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펑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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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펑페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1910년 산시성에서 태어나 1931년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하고 1933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동독 주재 대사를 역임했고, 저우언라이, 천이와 함께 중국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외교부장을 역임했으며,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다. 이후 국무원 부총리, 홍콩·마카오 반환 관련 업무를 담당했으며, 아들의 부패 혐의로 인해 2000년 자살했다. 2010년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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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펑페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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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지펑페이 |
원어 이름 | 姬鹏飞 |
로마자 표기 | Ji Pengfei |
출생 | 1910년 2월 2일 |
출생지 | 청나라 산시 성 린이 현 |
사망 | 2000년 2월 10일 |
사망지 | 베이징 시 |
배우자 | 쉬한빙 (1919-2015) |
자녀 | 지성더 |
소속 정당 | 중국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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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홍콩 마카오 사무판공실 주임 | 1983년 - 1990년 |
총리 | 자오쯔양 리펑 |
이전 | 랴오청즈 |
이후 | 루핑 |
중국 공산당 중앙 대외연락부 부장 | 1980년 2월 - 1982년 5월 |
이전 | 저우룽신 |
이후 | 진밍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 1982년 9월 13일 - 1982년 5월 4일 |
총리 | 자오쯔양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비서장 | 1979년 - 1981년 |
총리 | 화궈펑 자오쯔양 |
이전 | 진밍 |
이후 | 두신위안 |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 | 1972년 1월 6일 - 1973년 11월 18일 |
총리 | 저우언라이 |
이전 | 천이 |
이후 | 차오관화 |
동독 주재 중국 대사 | 1950년 9월 - 1955년 1월 |
이전 | 랴오청즈 |
이후 | 루핑 |
2. 생애
지펑페이는 1910년 산시성 윈청시 린이현에서 태어나[3], 1931년 녕도 폭동 이후 홍군에 입대하고 1933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고참 당원이었다. 초기에는 군의 훈련을 받고 부대 위생 및 정치 업무에 종사했으며 장정에도 참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외교부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 경력을 쌓았으며, 1953년 동독 주재 초대 대사로 임명되었고, 1955년부터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직책을 유지했으며, 1972년 천이의 사망 후 외교부장에 취임하여 1974년까지 재임했다. 외교부장 재임 중 1972년 일본과의 중일공동성명에 서명하며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다.[1]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장(1979년), 부총리 겸 국무원 비서장(1980년-1982년), 국무원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1982년-1992년) 등 여러 고위직을 거치며 홍콩 및 마카오 반환 관련 사전 준비 작업을 담당했다.[1][2] 또한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말년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고위 간부였던 아들 지성더가 1999년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후 감형)를 받는 사건이 있었다. 아들의 사건과 관련하여 2000년 2월 자살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의 장례는 비교적 소박하게 치러졌다.[3] 사후 신화통신에 의해 두드러진 공산주의 투사로 평가받았으며, 2010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가 열려 다시 한번 그의 업적을 기렸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산시성 윈청시 린이현에서 1910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희굉빈(姬宏邠), 옛 이름은 길락(吉洛)이다.[3]1931년, 녕도 폭동 이후 홍군에 입대하였고, 1933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장정에도 참가한 고참 당원이며, 군의 훈련을 받고 오랫동안 부대의 위생과 정치 업무에 종사했다.
2. 2. 외교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지펑페이는 외교부로 자리를 옮겨 외교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동독에 외교 사절단을 이끌었으며, 1953년에는 43세의 나이로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최연소 대사로서 동독 주재 초대 대사로 임명되었다. 1955년에는 외교부 부부장으로 복귀하여 저우언라이, 천이와 함께 중국 외교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문화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천이, 차오관화와 함께 외교부를 장악한 반혁명 세력의 일원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직책에 머물렀다. 1972년 천이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 대행을 거쳐 정식으로 외교부장에 취임하여 1974년까지 재임했다. 외교부장 재임 중이던 1972년에는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상과 함께 중일공동성명에 서명하며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다.[1] 또한, 1972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5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1978년에 재확인되었다.
문화대혁명 이후 시기에도 지펑페이는 여러 직책을 맡았다. 1979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장,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부총리 겸 국무원 비서장을 지냈다.[1][2] 1982년부터는 국무위원 겸 국무원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을 맡아 1992년까지 10년간 홍콩 특별행정구 기본법 기초위원회 주임으로서 홍콩·마카오 반환 사전 준비를 담당했다. 그는 홍콩 문제에 관한 중영 공동 성명 조인식에도 참석했다. 이와 더불어 원로 간부들의 퇴직을 돕기 위한 당 기구인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 3. 문화대혁명과 외교부장
문화 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천이, 차오관화와 함께 외교부를 장악한 반혁명 무리의 일원으로 지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직책에 머물렀다.1972년 천이가 사망한 후, 지펑페이는 외교부장 직을 대행하다가 정식으로 취임하여 1974년까지 역임했으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 같은 해인 1972년, 그는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와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와 함께 중일 공동 성명에 서명하여 중일 국교 정상화를 실현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75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서기장으로 임명되었고, 1978년에 재확인되었다.
2. 4. 문화대혁명 이후
문화대혁명 이후 시기에 지펑페이는 여러 직책을 맡았다. 1979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부총리 겸 비서장을 지냈다.[1][2] 1982년부터는 국무위원,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겸 비서장을 역임했다. 또한 1992년까지 10년간 국무원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과 홍콩 특별행정구 기본법 기초위원회 주임으로서 홍콩과 마카오의 중국 반환 관련 사전 준비 작업을 담당했으며, 홍콩 문제에 관한 중영 공동 성명 조인식에도 참석했다. 그는 원로 간부들의 퇴직을 돕기 위해 설립된 당 기구인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 창설부터 폐지될 때까지 활동했다.[1][2]1999년, 그의 아들인 지성더(희승덕)는 중국 인민해방군 정보부 고위 간부로 재직 중 부패, 기밀 정보 판매, 공금 유용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횡령한 돈을 반환하고 다른 불법 행위를 폭로하면서 형량이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지펑페이 본인은 아들의 위안화 밀수 사건 연루(사형 판결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와 관련하여, 아들의 혐의가 억울한 누명이라며 장쩌민 당시 주석에게 면제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2000년 2월 독극물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3] 이러한 배경 속에서 중국 외교의 공로자임에도 그의 장례는 비교적 소박하게 치러졌고, 2001년 10월 신화사의 사망 기사 역시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사후 신화통신은 그를 뛰어난 공산주의 투사로 칭송했으며, 2010년 2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가 열려 그의 업적을 다시 한번 기렸다.
2. 5. 아들의 비리 혐의와 사망
1999년, 중국 인민해방군 정보부의 고위 간부였던 아들 지성더(姬勝德, 희승덕)가 부패, 기밀 정보 판매, 공금 유용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훔친 돈을 반환하고 다른 불법 행위를 폭로하면서 형량이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지펑페이는 아들의 억울한 누명을 주장하며 장쩌민 당시 총서기에게 면제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일로 인해 2000년 2월, 항의의 의미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중국 외교의 공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러졌으며, 2001년 10월 신화통신사의 사망 기사도 매우 간략하게 다루어졌다.
2. 6. 사후 평가
신화통신사는 지펑페이를 두드러진 공산주의 투사로 칭송하였다.[1] 하지만 그의 말년은 아들 지성더의 사건으로 인해 순탄치 않았다. 중국 인민해방군 정보부 고위 간부였던 아들 지성더는 1999년 부패, 기밀 정보 판매, 공금 유용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훔친 돈을 반환하고 다른 불법 행위를 폭로하면서 형량이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일설에 따르면, 지펑페이는 아들의 사건이 억울한 누명이라며 장쩌민에게 면제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2000년 2월 항의의 의미로 독극물 자살을 했다고 전해진다.[3] 중국 외교의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러졌으며, 2001년 10월 신화사의 사망 기사 역시 매우 간략하게 다루어졌다.[3]
그러나 2010년 2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지펑페이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가 열리면서 그는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Chinese Foreign Policy
https://www.google.c[...]
Scarecrow Press
2011-05-05
[2]
서적
Democracy Denied: Identity, Civil Society and Illiberal Democracy in Hong Kong
https://www.google.c[...]
Routledge
2018-12-17
[3]
인민일보
姬鹏飞同志生平
https://cn.govopenda[...]
人民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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