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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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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창 포위전은 228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진창성을 포위한 전투이다. 제갈량은 위나라의 예상대로 진창을 공격했으나, 위나라 장수 학소가 견고하게 방어하여 20여 일간 공세를 펼쳤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촉군은 식량 부족으로 철수했고, 위나라 장수 왕쌍이 추격하다가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학소는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열후에 봉해졌고, 조진과 장합도 공을 인정받아 승진했다. 제갈량은 진창 공격 실패 후 무도와 음평을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이 공로로 승상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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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 포위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진창 포위전
분쟁제갈량의 북벌
시기228년 겨울 – 229년 봄
위치섬서성 천창구 진창성
결과위나라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위나라
교전국 2촉나라
지휘관 및 병력
위나라 지휘관학소, 비요, 왕생, 왕쌍, 장합
위나라 병력진창성: 1,000여 명, 비요군: 불명, 장합군 (낙양에서 지원): 3만 명
촉한 지휘관제갈량
촉한 병력수만 명

2. 배경

228년, 동오가 석정 전투에서 조위를 격파한 후, 위는 서쪽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동쪽을 강화했다. 촉의 승상 겸 섭정인 제갈량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려 했다.[5] 조진은 제갈량의 진격 경로를 예측하고 호조에게 진창에 요새를 건설하도록 지시했다.[5]

같은 해, 1차 북벌에서 촉군은 남안, 천수, 안정 3개 군을 위나라로부터 항복시켰지만, 가정에서 촉군 선봉 마속을 위나라 장합이 격파했기 때문에 옹주에서 철수했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은 다시 제갈량이 북진할 때 진창도를 사용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학소, 왕생에게 명하여 진창성의 수축 및 증축을 진행하게 했다. 《삼국지》 위서 명제기 주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병력 자체는 겨우 천 명 정도밖에 배치할 수 없었다. 이전부터 진창성은 방어 능력이 뛰어난 견고한 성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같은 해 8월, 석정 전투에서 위나라 조휴손권이 꾸민 계략에 빠져 육손 등이 지휘하는 오나라 군에게 대패하는 등 위나라의 정세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 전투 경과

228년 12월(《삼국지》 조진전에는 229년 봄), 제갈량한중에서 출격하여 조진의 예측대로 진창도를 북상하여 진창성을 포위했다. 옹주에 주둔하고 있던 조진은 장군 비요를 파견했다. 게다가 낙양에서는 조예장합을 소환하여 3만 병력을 주어 원군으로 삼았다. 조예는 장합의 도착이 늦어져 진창이 이미 함락된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장합은 진창성의 방어가 견고하고 촉군은 식량을 많이 휴대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원군 도착 전에 제갈량이 철수할 것을 예측하는 한편, 밤낮으로 강행군하여 한중남정까지 진군했다. 과연 이전부터 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촉군은 식량이 떨어져 병력을 철수했다. 이상이 《삼국지》 명제기, 조진전, 장합전에 보이는 경과이다.

《삼국지》에서는 조진의 선견지명이 강조되는 한편, 《삼국지》에 주석으로 사용된 《위략》에서는 학소의 무공이 강조되고 있다. 제갈량이 진창으로 쳐들어오자 학소의 동향인 근상을 파견하여 여러 번 항복을 권했지만, 학소는 자신은 필사적인 결의로 일에 임하고 있음을 말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수천 명 정도의 적은 군대로 제갈량의 군세를 막아내고 완강하게 방어했다. 제갈량은 먼저 운제 (사다리차)·충차(공성퇴)를 사용했지만 학소는 화살과 맷돌로 이를 파괴했다. 다음으로 정란 (공성루)을 사용하여 성 안에 화살을 쏘게 했다. 이에 성 안에 방어용 담을 만들어 방어했다. 게다가 지하에 갱도를 파서 성 뒤로 나가려 했지만, 학소는 성에서 옆으로 구멍을 파서 이를 방해했다. 20여 일 동안 학소는 잘 방어하여 진창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제갈량은 식량이 떨어져 진창 공격을 포기하고 촉으로 철수했다.

제갈량이 철수하자 위나라의 장군 왕쌍은 기병을 이끌고 추격했지만 촉군의 반격을 받아 패사했다 (《삼국지》 제갈량전).

이후 학소는 도성으로 소환되어 조예로부터 노고를 치하받아 열후에 봉해졌다. 더욱 높은 지위에 앉히려고 했지만, 그는 곧 병사했다. 조진은 이 전역의 공적으로 영읍을 이천구백 호로 더하고, 이듬해에는 도성으로 소환되어 대사마로 승진했다. 장합도 낙양으로 귀환하여 정서차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삼국지 연구가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진창의 전투와 후술할 무도·음평 공략까지의 간격이 너무 짧고, 촉군이 휴대했던 식량이 20여 일 분으로 적어, 이로는 진창을 함락시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이 진창 공격은 무도, 음평을 제압하기 위한 양동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10]

3. 1. 포위 및 설득

228년 12월, 군은 진창에 도착했다. 당시 위나라의 방어 시설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6] 제갈량학소의 친구 진상을 보내 항복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학소는 "위나라의 법은 당신이 따르는 것이고, 당신은 나의 본성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조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고 가족을 실망시킬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 도시를 지키다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강경하게 거절했다.[6] 진상은 제갈량에게 학소의 말을 전했고, 제갈량은 다시 진상을 보내 "우리 군대는 거대하고 당신은 작은 병력만 가지고 있는데, 헛된 노력을 위해 죽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라고 회유하게 했다. 그러나 학소는 활에 화살을 장전하고 "아까 말한 것은 변함없소. 당신을 알지만, 내 화살은 그렇지 않소."라고 답하며 진상을 죽일 듯이 암시했다.[7]

3. 2. 공성전

228년 12월(《삼국지》 조진전에는 229년 봄), 제갈량한중에서 출격하여 조진의 예측대로 진창도를 북상하여 진창성을 포위했다. 제갈량은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사다리를 이용한 공성 전술을 펼쳤지만, 하후조불화살로 대응하여 사다리 플랫폼을 불태우고 그 위에 있던 병사들을 몰아냈다.[8] 사다리가 불타는 동안, 제갈량이 성문을 부수기 위해 설계한 공성 망치가 도착했지만, 하후조는 급히 바위를 쇠사슬로 묶어 굴려 공성 망치를 부쉈다.[8]

제갈량은 이후 전술을 재고하여, 공성탑을 준비했다. 그러나 하후조는 외벽 안에 내벽을 건설하여 제갈량을 능가했다.[8] 또 한 번의 패배를 겪은 제갈량은 병사들에게 요새의 지반으로 이어지는 터널을 파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벽의 기초 아래를 파내어 의도적으로 터널을 붕괴시키거나 폭파시키는 더 일반적인 갱도 전술과는 달랐는데,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은 그의 군대가 기습적으로 도시에 진입할 수 있도록 지하 통로를 만들고 싶어했다.[9] 학소는 성에서 옆으로 구멍을 파서 이를 방해했다.

위략》에서는 학소의 무공이 강조되고 있다. 제갈량이 진창으로 쳐들어오자 학소의 동향인 근상을 파견하여 여러 번 항복을 권했지만, 학소는 자신은 필사적인 결의로 일에 임하고 있음을 말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수천 명 정도의 적은 군대로 제갈량의 군세를 막아내고 완강하게 방어했다. 제갈량은 먼저 운제 (사다리차)·충차(공성퇴)를 사용했지만 학소는 화살과 맷돌로 이를 파괴했다. 다음으로 정란 (공성루)을 사용하여 성 안에 화살을 쏘게 했다. 이에 성 안에 방어용 담을 만들어 방어했다. 20여 일 동안 학소는 잘 방어하여 진창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장합이 이끄는 위나라의 증원군 소식이 전해지자 촉군은 퇴각했다.[5] 제갈량이 철수하자 위나라의 장군 왕쌍은 기병을 이끌고 추격했지만 촉군의 반격을 받아 패사했다 (《삼국지》 제갈량전).

3. 3. 위나라의 지원군과 촉군의 퇴각

장합이 이끄는 위나라의 지원군 소식이 전해지자 촉군은 퇴각했다.[5] 영예를 추구하던 위나라 장수 왕쌍은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친링 산맥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제갈량이 설치한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5] 반면에 장합은 제갈량이 진창에 도착하기도 전에 퇴각할 것을 정확히 예측하여 남정으로 향했지만, 제갈량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228년 12월(《삼국지》 조진전에는 229년 봄), 제갈량한중에서 출격하여 조진의 예측대로 진창도를 북상하여 진창성을 포위했다. 옹주에 주둔하고 있던 조진은 장군 비요를 파견했다. 게다가 낙양에서는 조예장합을 소환하여 3만 병력을 주어 원군으로 삼았다. 조예는 장합의 도착이 늦어져 진창이 이미 함락된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장합은 진창성의 방어가 견고하고 촉군은 식량을 많이 휴대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원군 도착 전에 제갈량이 철수할 것을 예측하는 한편, 밤낮으로 강행군하여 한중남정까지 진군했다. 과연 이전부터 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촉군은 식량이 떨어져 병력을 철수했다.[8][9]

제갈량이 철수하자 위나라의 장군 왕쌍은 기병을 이끌고 추격했지만 촉군의 반격을 받아 패사했다 (《삼국지》 제갈량전).[5]

4. 제3차 북벌

229년 봄, 진창 전투 직후 제갈량진식에게 무도와 음평 두 군을 공격하게 했다.[5] 이 지역은 북벌의 통과 지점으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강족 등 강한 병사들을 흡수하여 병력 증강을 꾀하는 목적도 있었다.[11] 위나라 곽회가 구원하러 왔지만, 제갈량 자신이 무도군의 건위로 출격하여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철수했다.[11] 진식은 무도와 음평을 제압했다. 이 공적으로 유선은 조서를 내려 제갈량을 승상으로 복귀시켰다.[11]

5. 결과 및 영향

229년, 진창 전투에서 승리한 학소는 황제의 조서를 받아 열후에 봉해졌으나, 낙양에 머무는 동안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진은 이 전역의 공적으로 영읍을 이천구백 호로 더하고, 대사마로 승진했다. 장합은 정서차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제갈량은 진창 공방전에서 실패했지만, 229년 진식을 보내 무도와 음평 두 군을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했다.[5] 촉한은 이 공적으로 가정의 역의 책임을 물어 강등되었던 제갈량승상으로 복귀시켰다.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진창 공격이 무도, 음평을 제압하기 위한 양동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10]

이 전투는 촉한의 북벌 의지를 꺾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북벌은 계속되었다.

6. 평가 및 관점

6. 1. 군사적 관점

6. 2. 역사적 관점

6. 3. 중도진보적 관점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Sawyer
[3] 서적 Liang
[4] 서적 Sawyer
[5] 서적 Records of Three Kingdoms
[6] 서적 Brief History of Wei
[7] 서적 Brief History of Wei
[8] 서적 Brief History of Wei
[9] 서적 Brief History of Wei
[10] 서적 渡邉義浩著『「三国志」軍師34選』他
[11] 서적 地図でスッと頭に入る三国志 渡邉義浩 昭文社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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