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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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총독부(Generalgouvernement)는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후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처음에는 '점령 폴란드 영토 총독부'로 불리다가 1940년 '총독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총독부는 폴란드 영토의 일부를 포함하며, 아돌프 히틀러는 이 지역을 독일화하려 했다. 한스 프랑크가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크라쿠프가 수도였다. 총독부는 4개의 지구로 나뉘었으며, 1941년에는 동갈리치아가 추가되었다. 총독부는 인종 차별 정책을 시행하여 폴란드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등을 차별하고, 유대인 집단 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자행되었다. 1944년 소련군의 진격으로 붕괴되었으며, 한스 프랑크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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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나치 독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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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공식 명칭 (독일어) | Generalgouvernement für die besetzten polnischen Gebiete (게네랄고우퍼네멘트 퓌어 디 베세첸 폴니셴 게비에테) |
한국어 명칭 | 점령 폴란드 지역 총독부 |
다른 명칭 (독일어) | Generalgouvernement (게네랄고우퍼네멘트) |
다른 명칭 (폴란드어) | Generalne Gubernatorstwo (게네랄네 구베르나토르츠보) |
다른 명칭 (우크라이나어) | Генеральна губернія (헤네랄나 후베르니야) |
지위 | 나치 독일의 행정 자치 구역 |
존속 기간 | 1939년 - 1945년 |
이전 국가 | 폴란드 제2공화국 (1939년) |
이후 국가 | 폴란드 임시 정부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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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
초기 수도 | 리츠만슈타트 (1939년 10월 12일 - 1939년 11월 4일) |
이후 수도 | 크라카우 (1939년 11월 4일 - 1945년 1월 19일) |
정치 | |
정치 체제 | 민정 |
총독 | 한스 프랑크 (1939년-1945년) |
부총독 (국무장관)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1939년-1940년) |
부총독 (국무장관) | 요제프 뷜러 (1940년-1945년) |
역사 | |
주요 사건 |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1일) |
설립 | 1939년 10월 26일 |
갈리치아 편입 | 1941년 8월 1일 |
폴란드 국민 해방 위원회 수립 선언 | 1944년 7월 22일 |
비스와-오데르 공세 | 1945년 1월 17일 |
해체 | 1945년 1월 19일 |
언어 | |
공용어 | 독일어 |
기타 사용 언어 |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이디시어 |
통화 | |
통화 | 폴란드 즈워티, 라이히스마르크 |
면적 및 인구 | |
면적 (1941년) | 142,000 제곱킬로미터 |
인구 (1941년) | 약 12,000,000명 |
인구 밀도 | 84.5 명/제곱킬로미터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폴란드,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
2. 명칭
1940년 7월까지 독일이 수립한 폴란드 지역 정권의 명칭은 '''점령 폴란드 영토 총독부'''(게네랄구페르네망 퓌어 디 베제츠텐 폴니셴 게비테/Generalgouvernement für die besetzten polnischen Gebietede)였다. 1940년 7월 31일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가 이 명칭을 총독부(게네랄구페르네망/Generalgouvernementde)로 줄였다.[79] 이 지역은 구어체로는 레스트폴렌/Restpolende(잔존 폴란드 영토)이라고도 불렸다.
1939년 8월 23일 서명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서는 비스와 강과 부크강 사이 광대한 지역을 분할 폴란드의 "소련 영향권"으로, 바르샤바는 두 국가의 공동통치령이 될 예정이였다. 처음 조약과의 차이를 보정하기 위해 독소 대표들이 9월 28일 만나 양국간 영구적 국경을 다시 정했다. 새로 맺어진 독소 국경 조약에 따라 원래 독일의 영향권이었던 리투아니아 지역은 소련으로 들어가는 대신, 폴란드인이 다수인 지역을 포함한 폴란드 중앙부 전체가 독일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게네랄구페르네망/Generalgouvernementde'라는 단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에 수립한 바르샤바 총독부에서도 사용되었다.[80]
3. 역사
히틀러는 독일 하에 들어가게 된 점령 폴란드 지역의 서부 대부분을 독일국으로 직접 합병하였다. 이는 레벤스라움의 확대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81] 독일은 이 직접 합병한 서부 폴란드 지역 대부분을 단치히-서프로이센 국가대관구 및 바르텔란트 국가대관구라는 2개의 새로운 국가대관구 하의 행정구역으로 편입했다. 나머지 3개 지역, 이른바 지체나우, 상실레지아, 수바우키 삼각지역은 독일 본토의 인접한 대관구에 편입시켰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10월 8일과 10월 12일자 지령으로 독일에 인접한 구 폴란드 영토를 독일에 병합하고, 다음과 같은 행정 구역을 설치하여 일부에 제국 대관구 명칭을 부여했다.
병합 영토의 빠른 독일화를 위해 RKF와 HTO 양측이 드라코적 정책(Draconian measures)으로 이를 통치했고 그 결과 바르텔란트 지역을 중심으로 서부 폴란드 지역에서 대규모의 대량 강제 추방 사태가 발생했다. 구 폴란드의 나머지 지역은 독일 동부 국경 지역의 별도 행정구역인 독일 네벤렌트(Nebenland)에 편입되었다. 히틀러는 1939년 10월 12일 총통 명령을 통해 총독부를 수립할 것을 명했고, 이 명령은 1939년 10월 26일 발효하였다.[75]
독일에 병합되지 않은 구 폴란드 영토는 폴란드 총독부라는 통치 기관의 지배를 받았다. 1939년 10월 26일에 한스 프랑크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수도는 크라쿠프였으며, 행정 구역은 바르샤바, 루블린, 라돔과 크라쿠프의 4개 지역으로 나뉘었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 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였던 동갈리치아가 폴란드 총독부의 5번째 지역이 되었다.
신설 총독부의 총독으로 한스 프랑크가 임명되었다. 구 폴란드 지역에서 독일 영토로 흡수합병된 지역과, 서양 국가와의 협상카드이자 노예노동자들의 거주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점령지의 잔존국 사이 독일의 통치는 극명하게 달랐다. 독일은 폴란드인 다수지역 사이 상호 교류를 막기 위해 두 지역 사이 경계를 폐쇄했다.
이 새로운 정부의 이름은 처음에는 Generalgouvernement für die besetzten polnischen Gebiete(점령 폴란드 지역 총독부)였으나 1940년 7월 31일 한스 프랑크의 명령으로 Generalgouvernement(총독부)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이름은 행정부의 실제 속성을 의미와 일치한 것은 아니였다. 독일은 이 폴란드 지역을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 군정청 하에 있었던 짧은 기간을 빼고는 아에 점령된 영토로 치지조차 않았다.[82] 나치 독일은 이 폴란드 영토를 폴란드 침공 이후 국가 자체가 사라졌으며 영토 또한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폴란드 총독부는 순수하게 독일의 통치 기관이었으며,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괴뢰 정권이 아니었다. 이는 독일 지배하의 유럽에 새로운 폴란드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1941년 3월 히틀러는 “여기를 15~20년 안에 완전한 독일인 거주지로 만들 것”이라고 결정했다. 히틀러는 “400만~500만 명의 독일인에 대해 1200만 명이나 되는 폴란드인이 있다. 폴란드 총독부 영토는 라인란트와 마찬가지로 독일인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1939년 총독부 창설 이후 1944년 소련이 이 지역을 장악할 때까지 총독부 내에서 4백만명이 사망하였다. 폴란드 지하조직이 독일인 1명을 죽일 때, 독일 경찰은 다른 폴란드인에게 경고성 의미로 폴란드인 50-100명 가까이를 살해했다.[83]
1939년 가을, 독일에 병합된 구 폴란드 영토에서 폴란드인들이 폴란드 총독부 영토로 강제 이주당했고, 폴란드인들에게는 거대한 강제 수용소와 같은 곳이 되었다. 거기서 폴란드 남녀는 독일 제3제국의 공장과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강요당했다.
1944년 말 소련군이 폴란드 전역을 거의 장악하면서, 폴란드 총독부는 붕괴되었다. 프랑크는 1945년 5월 미군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누르엠베르크 재판의 피고가 되었다. 재판 중 프랑크는 가톨릭교회에 개종하였다. 프랑크는 40권에 달하는 자신의 일기를 법정에 제출하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거가 그에 의해 수집되었다. 프랑크는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10월 1일 교수형에 의한 사형 선고를 받았다.
3. 1. 독일의 폴란드 정책
독일은 '게네랄플란 오스트(동방 총계획)'에 따라 폴란드 지역을 독일화하려 했다.[77] 1941년 3월 한스 프랑크는 아돌프 히틀러가 "15-20년 내에 폴란드 지역을 순수한 독일인의 땅으로 바꾸겠다"고 결정했다고 부하들에게 알렸다.[5] 프랑크는 "현재 1,200만명의 폴란드인이 살고 있는 이곳은 향후 독일인 5-6백만명이 사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총독부는 라인란트처럼 완전한 독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77][5]
마르틴 보르만의 메모에 따르면, 독일은 하층 폴란드인들을 농노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중산층과 상류층을 추방하거나 제거하여, 결국 "지배 민족"인 독일인들로 대체하는 것을 구상했다.[12]
독일 관료들은 원주민의 미래와 관련하여 다양한 계획을 세웠다. 그중 하나는 약 2천만 명의 폴란드인을 서시베리아로 강제 추방하고, 4-5백만 명을 독일화하는 것이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의미했고, 소수는 "독일화"되고, 바람직한 자질을 가진 젊은 폴란드인들은 납치되어 독일에서 자랄 것이다.[14]
1943년, 독일 정부는 비옥한 검은 토양 때문에 자모시에 지역을 추가 독일화 대상으로 선정했고, 독일 식민지 정착촌 건설 계획이 세워졌다. 대부분의 폴란드 주민은 추방되었다.[15]
나치 계획자들은 폴란드 지역의 정확한 영토 재편성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독일은 총독부 수립 이전에 이미 전쟁 전 폴란드의 서부 지역 대부분을 병합했으며, 나머지 지역도 언젠가는 독일 국토에 직접 편입될 예정이었다. 가장 초기의 제안(1939년 10월/11월)은 1939년 정복한 폴란드 영토의 남부 여러 지역(약 18,000km²)을 포함하는 별도의 `라익스가우 베스키덴란트`(베스키덴란트)를 설립하는 것이었다.[16][17]
1940년 11월, 바르테란트 라익스가우의 가우라이터 아르투어 그라이저는 토마슈프 마조비에츠키와 페트리카우 군이 총독부의 라돔 지역에서 그의 가우로 이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동의했지만, 프랑크가 이 군들을 넘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국경 문제의 해결은 최종 승리 이후로 연기되었다.[18]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1941년 6월) 후, 프랑크 자신은 1941년 12월 16일 연설에서 자신이 통제하는 지역을 "반달족의 가우"라고 하는 독일 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표명했다.[19][20]
1942년 8월 24일 프랑크가 자신의 직책에서 사임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마르틴 보르만은 총독부를 완전히 해체하고 그 영토를 여러 라익스가우로 분할하는 계획을 추진하려고 했다. 그는 폴란드의 나머지 지역에서 "더 평화로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인구를 분리하고, "범죄"와 폴란드 지하 저항 운동의 중심지인 바르샤바시를 격리시키는 것을 제안했다.[21]
루트비히 피셔(1939년부터 1945년까지 바르샤바 총독)는 바르샤바에 있는 그의 주요 공간 질서 사무소에서 자신의 계획을 준비했다. 그는 라돔과 루블린 지역을 그들 사이에 나누어 베스키덴, 비스툴란트("비스툴라 땅"), 갈리치아(Galicia와 케움)의 세 주를 설립하는 것을 제안했다.[21]
4. 행정
총독부는 총독(독일어: Generalgouverneur)이 통치했으며, 총독부 사무국(독일어: Amt des Generalgouverneurs, 1940년 12월 9일부터 총독부 정부(독일어: Regierung des Generalgouvernements)로 개칭)이 지원했다.[53] 총독부의 유일한 총독은 한스 프랑크였다. 총독부 내 나치당 조직은 'Arbeitsbereich Generalgouvernement'였으며, 이 역시 프랑크가 이끌었다.
사무국은 국무장관(독일어: Staatssekretär)이자 정부 수반(독일어: Regierung)인 요제프 뷜러가 이끌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 5월까지 아르투어 자이스=인크바르트가 부총독을 역임했고, 이후 뷜러가 1945년 1월까지 프랑크의 부총독으로 일했다. 총독 외에도 총독부의 고등 SS 및 경찰 지휘관(SS-''오버그룹펜퓌러'' 프리드리히-빌헬름 크뤼거, 1943년 10월부터는 SS-오버그룹펜퓌러 빌헬름 코페) 등 여러 사람이 입법권을 가졌다.
총독부는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다. 폴란드 망명 정부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부는 폴란드 국가가 사실상 소멸했다고 간주했다.[53] 총독부는 식민지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으며, 폴란드 대표는 지방 행정부 이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총독부 정부 청사는 바르샤바가 아닌 크라쿠프에 위치했다. 독일어가 공용어였지만, 지방 정부에서는 폴란드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행정 편의를 위해 구 폴란드 국가의 유용한 제도들이 유지되었다. 고위급 폴란드 장교는 체포되거나 강등되었고, 폴란드 경찰은 청색 경찰로 재편되어 질서경찰에 예속되었다. 폴란드 교육 제도는 유지되었지만, 대부분의 고등 교육 기관은 폐쇄되었다. 폴란드 지방 행정부는 새로운 독일 상관에게 예속되었다. 폴란드 재정 시스템과 즐로티 통화는 유지되었지만, 수입은 독일 국가로 귀속되었다. 새로운 은행이 설립되어 새 지폐를 발행했다.
독일인들은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을 서로 대립시키려 했다. 1939년 10월부터 독일이 합병한 우크라이나계 지역 내에서는 우크라이나 위원회가 설립되어 독일 당국에 우크라이나 공동체를 대표하고, 소련 통제 지역에서 탈출한 약 3만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지원했다. 이 위원회는 이전 폴란드 정부가 금지했던 문화 및 경제 활동도 수행했다. 학교, 합창단, 독서 모임, 극장이 문을 열었고, 폴란드 정부가 폐쇄했던 20개의 우크라이나 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1941년 3월까지 4만 6천 명의 회원을 가진 808개의 우크라이나 교육 단체가 있었다.
크라쿠프에는 우크라이나 출판사와 정기 간행물이 설립되었는데,[24] 독일 검열과 종이 부족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과서, 우크라이나 문학 고전, 소련 반체제 우크라이나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했다. ''Krakivs'ki Visti''는 프랑크가 이끌고 미하일 호미악이 편집했으며, 총독부의 "주요 합법적인 신문"이었고, "20세기 초 가장 저명한 우크라이나 문화 인물들 중에서 더 많은(그리고 더 나은) 기고자들을 끌어들였다."[25]
총독부 내 우크라이나 단체들은 독일-폴란드 분쟁에서 8만 5천 명의 우크라이나 포로 석방을 협상할 수 있었다.[26]
전쟁 후 폴란드 최고국가재판소는 총독부 정부를 범죄 기관으로 선언했다.
;총독 (Generalgouverneur)
- 한스 프랑크 (1939년 10월 26일 – 1945년 1월 17일)
;부총독 (Stellv. Generalgouverneur)
- 아르투어 자이스=인크바르트 (1939년 10월 25일 – 1940년 5월 22일)
- 요제프 뷰러 (1940년 5월 22일 – 1945년 1월 17일)
4. 1. 사법 제도
독일군 침략 이후 1940년 초까지 폴란드에서는 독일 군사 재판소를 제외한 어떤 법원도 운영되지 않았다. 이후 폴란드 사법 체계가 재건되어 독일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은 사건을 판결했지만, 독일 사법 체계도 병행하여 수립되었다. 두 체계의 관할권이 겹치는 경우 독일 사법 체계가 우선했다.폴란드인, 특히 유대인을 차별하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다. 1941년에는 새로운 형법이 도입되어 많은 범죄에 사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1939년 10월 31일에는 독일 정부에 대한 모든 행위에 대해, 1940년 1월 21일에는 경제적 투기에 대해, 1940년 2월 20일에는 성병 유포에 대해, 1941년 11월 10일에는 유대인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에 대해 사형이 도입되었다.

4. 2. 치안
총독부(나치 독일)의 경찰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27]- 질서경찰(Ordnungspolizei, OrPo)(독일인)
- 푸른 경찰(Blue Police)(독일 통제하의 폴란드인)
- 치안경찰(Sicherheitspolizei)(독일인), 다음으로 구성됨:
- 범죄경찰(Kriminalpolizei)(독일인)
- 게슈타포(Gestapo)(독일인)
가장 많은 수의 OrPo 대대는 점령군으로서 전통적인 치안 역할에 집중했다. 일부는 평정 작전에 직접 관여했다. 1940년 5월 6일, 점령된 크라쿠프에 주둔한 가울라이터 한스 프랑크는 1939년부터 독일이 합병한 폴란드 서부 지역인 바르테가우 지역에서 활동하는 자기방위대(Selbstschutz)라고 불리는 유사한 SS 부대를 기반으로 특별부대(Sonderdienst)를 설립했다.[29] ''Sonderdienst''는 공격 이전에 폴란드에 살았던 민족 독일인 폴크스도이체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침략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에는 "최종 해결 방안"의 모든 주요 학살 현장에 배치된 "트라브니키 부대원"(독일어: ''Trawnikimänner'')과 같은 특수 훈련을 자원한 소련 포로도 포함되었다.[30][31]
고위 폴란드 장교(체포되거나 강등된)가 없는 폴란드 전직 경찰관들은 푸른 경찰에 징집되어 현지 질서경찰에 예속되었다. 약 3,000명의 남성이 총독부의 민정 행정 책임자에게 공식적으로 배정된 ''Sonderdienst''에서 복무했다.[30]
총독부의 산림 지역 경찰을 담당하는 산림 보호대도 존재했다.[32] 철도 경찰은 철도를 담당했다.
독일인들은 전쟁 전 폴란드 감옥을 사용하고, 새로운 감옥을 조직했다. 독일 행정부는 집시, 포로, 게릴라 전투원, 유대인을 숨기는 등의 불법 행위를 신고하도록 강제하는 테러 시스템을 구축하여 폴란드 국민을 통제했다. 독일 경찰은 잠입 수사를 사용했다.[33]
4. 3. 군사 점령군
독일은 폴란드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 상당수의 군대를 배치했다.[34]기간 | 베르마흐트(Wehrmacht) 육군 | 경찰 및 SS (독일군만 포함) | 총계 |
---|---|---|---|
1939년 10월 | 550,000 | 80,000 | 630,000 |
1940년 4월 | 400,000 | 70,000 | 470,000 |
1941년 6월 | 2,000,000 (바르바로사 작전 임박으로 인한 높은 수치) | 50,000 | 2,050,000 |
1942년 2월 | 300,000 | 50,000 | 350,000 |
1943년 4월 | 450,000 | 60,000 | 510,000 |
1943년 11월 | 550,000 | 70,000 | 620,000 |
1944년 4월 | 500,000 | 70,000 | 570,000 |
1944년 9월 | 1,000,000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소수 참여) | 80,000 | 1,080,000 |
4. 4. 나치 선전
총독부의 선전은 1941년 봄까지는 '민중계몽 및 선전국(Fachabteilung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FAVuP)', 그 이후에는 '선전본부(Hauptabteilung Propaganda, HAP)'에 의해 지휘되었다.[35][36] 언론은 총독부 정부의 언론 책임자 사무소(''Dienststelle der Pressechef der Regierung des Generalgouvernements'')가 관할했고,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주재 총독부 전권 대표(''Der Bevollmächtige des Generalgouverneurs in Berlin'')가 담당했다.
수천 장의 반유대주의 포스터가 바르샤바에 배포되었다.[35][36] 독일인들은 폴란드인들이 명령에 복종하기를 원했다.[37] 이를 위해 정치 선전이 활용되었다.

나치는 폴란드어 신문인 노비 쿠리에르 바르샤프스키 (Nowy Kurier Warszawski), 쿠리에르 첸스토호프스키 (Kurier Częstochowski), 고니에츠 크라코프스키 (Goniec Krakowski (1939–1945)), 지엔니크 라돔스키 (Dziennik Radomski), 고니에츠 코지엔니 (Goniec Codzienny), 일러스트로와니 쿠리에르 폴스키 (Ilustrowany Kurier Polski (1939-1945)), 가제타 우보프스카 (Gazeta Lwowska (1941-1944)), 파라 (Fala (monthly)) 등을 통제하에 발행했다.
독일 주간 뉴스(Die Deutsche Wochenschau)의 선전 뉴스릴이 장편 영화 상영에 앞서 상영되었다. 일부 장편 영화 역시 나치 선전을 담고 있었다. 폴란드 지하 조직은 폴란드인들에게 영화 관람을 삼가도록 권유하며, “Tylko świnie / siedzą w kinie”("돼지들만 영화를 본다")라는 운율을 갖춘 짧은 시구를 사용했다.[38] 점령된 폴란드에는 폴란드 영화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폴란드인들은 1941년 반폴란드 선전 영화인 《귀향》(Heimkehr) 제작에 독일인들과 협력했다. 전쟁 후 폴란드 배우들은 반폴란드 선전 활동에 협력한 혐의로 기소되어, 공식 경고부터 투옥까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39]
폴란드의 모든 극장은 해체되었다. 바르샤바에는 독일 극장인 "테아터 데어 슈타트 바르샤우"(Theater der Stadt Warschau)가 설립되었고, 독일이 통제하는 폴란드 극장인 "테아트르 미아스타 바르샤비"(Teatr Miasta Warszawy)도 운영되었다. 코미디 극장인 "테아트르 코메디아"(Teatr Komedia)와 14개의 소규모 극장도 존재했다. 크라쿠프의 율리우시 스와워츠키 극장(Juliusz Słowacki Theatre)은 독일군이 사용했다.
폴란드인들은 라디오 수신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모든 수신기는 1940년 1월 25일까지 지역 행정부에 제출해야 했다. 독일계 폴란드인들은 자신의 수신기를 등록해야 했다.[40] 독일 당국은 선전 목적으로 확성기를 설치했는데, 폴란드인들은 이를 "szczekaczki"(폴란드어 "szczekać"에서 유래, "짖다"라는 뜻)라고 불렀다.[41]
4. 5. 공개 처형
독일군은 바르샤바 시내와 바르샤바 주변 지역(바르샤바 순환도로)에서 수천 명의 폴란드인, 그중 다수가 민간인 인질을 살해하여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총살하거나 교수형에 처했다.[42][43] 이러한 공개 처형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자행된 헌병 경찰 제도와 유사한 공포 정치의 일환이었다. 처형은 주로 1943년 9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오스트리아 출신 나치 친위대 및 경찰 지휘관(SS and Police Leader) 쿠체라(Franz Kutschera)가 명령했다.4. 6. 도시 계획 및 교통망
바르샤바는 파브스트 계획에 따라 재건될 예정이었으며, 정부 청사는 필수츠키 광장 주변에 위치했다.[44] 총독부 수도 크라쿠프는 후베르트 리터의 '크라쿠프 일반 건축 계획(Generalbebauungsplan von Krakau)'에 따라 재건되었다.[44] 한스 프랑크는 그의 거주지인 바벨 성을 재건축했다.[44] 뎀브니키(크라쿠프)는 계획된 나치 행정 구역이었다.[45][46] 크라쿠프 공원 근처에는 독일인 전용 주거 지역이 건설되었다.[47] 독일은 우치-라돔 철도 노선(일부는 총독부 내에 위치)과 라돔의 기관차를 건설했다.[48]4. 7. 행정 구역
총독부는 4개 지구(Distrikte)로 구성되었는데, 바르샤우, 루블린, 라돔, 크라카우였다.[49]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동갈리치아가 총독부에 편입되어 다섯 번째 지구인 Distrikt Galizien이 추가되었다.[49]

각 지구는 도시 군(Stadtkreise)과 농촌 군(Kreishauptmannschaften)으로 세분되었다.[49] 1941년 9월 15일 법령에 따라 대부분의 주요 도시(및 해당 군)의 이름은 역사적 독일 자료를 기반으로 개명되거나, 독일식 이름이 없는 경우 폴란드어와 소련어 이름의 독일식 버전이 부여되었다.[49]
'Distrikt 바르샤바' | |
Stadtkreise | 바르샤바 (바르샤바) |
Kreishauptmannschaften | 가르볼린, 그로예츠(그루예츠), 로비치(로비츠), 민스크(민스크 마조비에츠키), 오스트라우(오스트루프 마조비에츠카), 시에들체, 스키에르니에비체2, 소하체프, 소콜로프-벵그로프(소콜우프 포들라스키-벵그루프), 바르샤바-랜드 |
'Distrikt 크라쿠프' | |
Stadtkreis/ kreisfreie Stadt (1940년부터) | 크라쿠프(크라쿠프) |
}} | 뎀비츠(뎨비차), 야로슬라우(야로스와프), 야세우(야슬로), 크라쿠프-랜드, 크로스노1, 메쿠프(미에후프), 노이마르크(노비 타르그), 노이-산데츠(노비 송치), 프셰미실1, 라이히스호프(르제슈프), 사녹, 타르나우(타르누프) |
'Distrikt 루블린' | |
Stadtkreise | 루블린 |
Kreishauptmannschaften | 비아와-포들라스카(비아와 포들라스카), 빌고라이, 홀름(헬름), 그루베쇼프(흐루베슈프), 야누프 루벨스키, 크라스니스타프, 루블린-랜드, 풀라위, 레흐덴(라진), 자모시/힘러슈타트/플루크슈타트(자무시) |
'Distrikt 라돔' | |
Stadtkreise | 키엘체, 라돔, 체슈토호바(체스토호바) |
Kreishauptmannschaften | 부스코(부스코주드루이), 예드제유프, 키엘체-랜드, 콘스키(콘스키), 오파토우(오파투프), 페트리카우(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 라돔-랜드, 라돔스코, 스타라호비츠(스타라호비체), 토마쇼프 마조비에츠키(토마슈프 마조비에츠키) |
'Distrikt 갈리치엔' | |
Stadtkreise | 렘베르크(리비우/르부프) |
Kreishauptmannschaften | 브레샨(브제자니), 츠호르트카우(츠호르트키우), 드로호비치, 카미온카-스트루밀로바(카미안카-부츠카), 콜로메아(콜롬이야), 렘베르크-랜드, 라바-루스카(라바-루스카), 스타니슬라우(이바노프란키우스크), 삼보르(삼비르), 스트리이, 타르노폴, 솔로치우(졸로치우), 칼루시(칼루시) |
1, 1941년 이후 추가됨. 2, 1941년 이후 제거됨. |
5. 인구 통계
1939년 12월, 총독부의 인구는 1140만 명이었다.[51] 1년 후에는 121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40년 12월 기준으로 인구의 83.3%는 폴란드인, 11.2%는 유대인, 4.4%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0.9%는 독일인, 0.2%는 기타였다.[51] 나치 독일이 ‘합병’한 지역에서 추방된 후 약 86만 명의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총독부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와 상쇄되는 것은 폴란드 지식인과 저항 가능성이 있는 다른 계층에 대한 독일의 집단 학살이었다. 1941년부터 질병과 기근으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에서 강제 노동을 하도록 대량으로 강제 이송되었고, 결국 약 100만 명이 이송되었으며 그중 많은 수가 독일에서 사망했다.
5. 1. 인종 차별 정책
1940년, 총독부 (나치 독일)에서는 인종에 따라 여러 집단으로 분류하고 권리와 식량 배급에 차등을 두는 정책이 시행되었다.[51] 각 집단은 도시 내 허용 구역, 대중교통, 이용 가능한 식당 등에서 차별을 받았다. 가장 특권층부터 최하층까지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52]- 독일 출신 독일인 (''Reichdeutsche'')
- 독일 외 지역 출신, 적극적인 민족 독일인 (폴크스도이체) 1, 2등급
- 독일 외 지역 출신, 소극적인 독일인과 가족 구성원 (일부 폴란드 민족 포함), 폴크스도이체 3, 4등급
- 우크라이나인
- 고랄리 (''Goralenvolk'')
- 폴란드인
- 로마니족
- 유대인


독일은 다른 슬라브인들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인들을 농노 계급으로 전락시키고, 나머지는 추방하거나 제거하여 독일인 이주민으로 대체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51] 약 2천만 명의 폴란드인을 서시베리아로 추방하고 400만~500만 명을 독일화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폴란드 총독부 지역에서는 모든 중등 교육이 폐지되었고, 모든 폴란드 문화 시설이 폐쇄되었다.[51]
최하층으로 분류된 유대인은 결국 집단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에서 요제프 뷰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총독부 지역에서의 “최종 해결” 실행을 추천했다. 1942년부터 독일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시작했고, 총독부 내 4개의 강제 수용소에서 가스실을 이용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었다.[51]
6. 경제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총독부에 거주하는 12세 이상의 유대인과 14세 이상의 폴란드인들은 강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53] 독일이 정복한 폴란드의 다른 지역 출신 폴란드인들 중 많은 수가 총독부로 추방되었고, 이 지역은 독일의 공장과 농장에서 강제로 노동자로 일하도록 끌려온 남녀를 위한 노예 노동력 공급원으로 사용되었다.[5] 1942년에는 총독부에 거주하는 모든 비독일인이 강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54]
1939년 9월 폴란드-독일 전쟁 중 바르샤바의 일부 지역과 여러 도시(비우뉴, 술레이우프, 프람폴)가 파괴되었다. 폴란드인들은 주택이나 사업체를 재건할 건축 자재를 구입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저축을 잃었고, "물리나르키"라고 불리는 총독부 통화는 독일이 통제하는 폴란드 발권은행에서 관리했다.
폴란드 국가 소유의 이전 자산은 총독부(또는 합병된 지역에서는 나치 독일)에 의해 몰수되었다. 폴란드 개인의 중요한 재산(예: 공장과 대규모 토지)도 종종 몰수되어 독일 "신탁"( Treuhänderde)에 의해 관리되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격리 지역으로 추방되었고, 그들의 주택과 사업체는 독일인들에게 몰수되었으며, 소규모 사업체는 때때로 폴란드인들에게 넘겨졌다.[55]
농민들은 독일군에게 많은 식량을 제공해야 했고, 가장 작은 농장을 제외한 모든 농장을 국유화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독일 행정부는 높은 세금을 포함한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시행했다.[56]
6. 1. 식량 공급
1939년 9월부터 1941년 6월까지 유럽 유대인의 대량 기아가 대량 학살을 위한 시도였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이 있지만, 이 기아로 인해 많은 유대인 인구가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57] 전쟁 전 폴란드는 대량의 식량을 수출했지만, 1940년 총독부는 국내 수요를 충족할 만큼의 식량을 공급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을 수출했다.[58]1939년 12월, 총독부 내 폴란드 및 유대인 수용 위원회와 현지 관리들은 피난한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 식량과 숙소를 제공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추방 과정에서 총독부가 제공한 지원은 미흡했다.[59] 강제 이송 과정에서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59]
게토와 강제 수용소 외부의 식량 가격은 폴란드 암시장과의 조화를 위해 합리적인 수준으로 설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물가 상승으로 인해 많은 지역이 물물교환 시스템에 의존했다.[65]
1941년 12월, 총독부는 유대인을 굶겨 죽이는 것이 비용이 적게 드는 해결책이라고 인식했다.[62] 1942년 8월, "독일에 중요한" 일을 하지 않는 유대인에게 식량 제공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62] 식량농업부는 강제 수용소의 식량 배급을 관리했다.[63]
6. 2. 암시장
식량 부족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암시장에 의존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암시장은 게토 안팎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65] 게토 외부에서는 배급량이 부족하여 시민들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암시장이 성행했다. 1941년 8월 동유럽 게토의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힌 채로는 결국 굶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게토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 세계와 물물교환을 했다.[65] 유대인들은 게토에 격리되어 경제적으로 고립되고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결과적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여겨졌다. 많은 유대인들은 노동을 대가로 게토 벽 너머 아리아인 지역에서 구입한 식량을 받았다. 게토에 격리된 주민들은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암시장 중개인이라는 또 다른 역할이 생겨났다. 암시장 중개인은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하여 이윤을 남겼다. 게토 내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비탄력적이었지만, 암시장에서의 식량 거래는 매우 경쟁적이었고, 대부분의 게토 유대인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66]7. 저항
독일 점령에 대한 저항은 거의 즉시 시작되었지만, 폴란드는 게릴라전에 적합한 지형이 거의 없었다. 소규모 군 부대들이 1940년 봄까지 싸웠으나, 독일군의 보복적인 민간인 처형으로 인해 작전이 중단되었다.
주요 저항 세력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에 충성하는 폴란드 지하국(AK)이었다. AK는 주로 전쟁 전 폴란드군의 생존자들과 많은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었으며, 20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소련이 조직하고 통제하는 공산주의 폴란드 인민군(AL)도 존재했으며, 1만 4천 명에서 6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1942년에서 1943년 사이 독일의 탄압은 자모시 봉기를 야기했다.
1943년 4월, 독일군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남은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고, 이는 4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일으켰다.
1944년 7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접근하자 망명 정부는 공산주의 장악을 막기 위해 도시에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타데우시 보르-코모로프스키가 이끄는 AK는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지원하지 않았고, 봉기는 실패했다. 63일간의 전투 끝에 봉기 지도자들은 베어마흐트와 조건부 항복에 동의했다. 남은 1만 5천 명의 폴란드 지하국 군인들은 포로 지위를 부여받았고, 남은 18만 명의 민간인들은 추방되었다.
8. 교육
총독부의 모든 대학교는 해체되었고, 많은 크라쿠프 교수들이 크라쿠프 특별 작전(Sonderaktion Krakau) 기간 동안 투옥되었다.
9. 폴란드 문화
독일군은 폴란드의 박물관들을 약탈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소실되었다.[67] 또한, 폴란드 국립도서관을 포함한 바르샤바의 여러 도서관들을 불태워 약 360만 권의 장서를 파괴했다.[68]
10. 독일 스포츠
한스 프랑크는 열렬한 체스 선수였기 때문에 총독부 체스 토너먼트를 조직했다.[69] 스포츠 행사에는 독일인만 참가할 수 있었다.[69] 약 80개의 축구 클럽이 가우리가 총독부의 4개 지구 리그에서 활동했다.[69]
11. 홀로코스트
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에서 총독부 국무장관 요제프 뷜러는 하이드리히에게 총독부에서 "최종 해결 방안"을 실행하도록 촉구했다.[70] 뷜러는 암시장 문제 해결과 "유대인 문제"의 신속한 해결을 지지했으며, 총독부 내 멸절 시설 설치에 유리한 점으로 운송 문제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70] 해체된 폴란드 국철의 자산은 오스트반이 관리하여 죽음의 열차 네트워크를 SS-토텐코프페르반데가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72]
라인하르트 작전은 총독부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T4 작전을 기반으로 샤워실로 위장된 고정 가스실이 설치된 세 개의 비밀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독일인들은 1942년 봄 "재정착"이라는 구실로 유대인 인구 말살을 시작했다.[72] 총독부에는 마이다네크 강제 수용소, 소비보르 멸절 수용소, 벨제츠 멸절 수용소, 트레블링카 등 7개의 멸절 수용소 중 4개가 위치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이들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폴란드와 다른 국가 출신 유대인 수백만 명이 학살되었다.[72]
12. 처벌
한스 프랑크는 민간인에 대한 공포 정치를 시행하고 유대인 대량 학살에 직접 가담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 및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당했다. 그의 비서인 아르투어 자이스-인쿠아르트와 요제프 뷜러는 각각 뉘른베르크와 폴란드에서 사형당했다. 바르샤바 지구 총독이었던 루트비히 피셔는 바르샤바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라돔 지구 총독이었던 에른스트 쿤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5년 5월 미군의 포로가 된 프랑크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가 되었고, 재판 중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프랑크는 40권에 달하는 자신의 일기를 법정에 제출하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거가 그에 의해 수집되었다. 프랑크는 1946년 10월 1일 교수형에 의한 사형 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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