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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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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기보는 경상북도 영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 관료를 지내다 사퇴 후 의병 활동을 했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1922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고, 여러 차례 탈당과 복당을 반복했다. 이후 타이베이에서 농업에 종사하다 광복을 맞이했으며, 1946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전임위원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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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기보
원래 이름崔基輔
출생지조선 경상도 영일군 죽장면 일광리 324번지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북도 성주
출생일1881년 9월 13일
사망일1951년 9월 15일
본관해주(海州)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양주 조씨 부인
자녀슬하 5남 3녀
직책
직책대한제국 경상북도 성주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慶尙北道 星州郡 副郡守)
임기1901년 8월 ~ 1902년 2월
직책2대한제국 강원도 영월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江原道 寧越郡 副郡守)
임기21902년 2월 ~ 1902년 3월
직책3前 대한제국 강원도 울진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慶尙北道 蔚珍郡 副郡守)
임기31902년 3월 ~ 1902년 5월
임기41902년 5월 ~ 1902년 8월
임기51902년 8월 ~ 1903년 1월
임기61903년 1월 ~ 1903년 2월
임기71903년 2월 ~ 1903년 5월
임기81903년 5월 ~ 1904년 3월
임기91904년 3월 ~ 1905년 10월
직책4前 대한제국 경상북도 경주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慶尙北道 慶州郡 副郡守)
직책5前 대한제국 경상북도 영일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迎日郡 副郡守)
직책6前 대한제국 강원도 삼척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江原道 三陟郡 副郡守)
직책7前 대한제국 강원도 원주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原州郡 副郡守)
직책8前 대한제국 강원도 홍천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洪川郡 副郡守)
직책9前 대한제국 경기도 양주군 부군수
(前 大韓帝國 京畿道 楊州郡 副郡守)
군주고종 이형
정치 활동
정당무소속
경력의병장 활동
한국독립당 전임위원
서훈
서훈2014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웹사이트
웹사이트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최기보" 검색

2. 이력

경상도 영일에서 출생하였으며, 유아기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유년기에는 경상도 밀양경상도 경주에서 잠시 거주하였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 관료를 지냈으나, 사퇴 후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최산남'''(崔山南)·'''최불암'''(崔佛巖)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경상북도, 경상남도, 강원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였고, 춘천에서 3.1 운동을 목격하였다. 이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활동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 탈당과 복당을 반복했다. 1940년 이후에는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타이베이타이중 등지에서 소작농과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타이중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2. 1. 대한제국 시기 (1901년 ~ 1910년)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했다. 1905년 관료직을 그만둔 뒤에는 경북 일대에서 무기를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며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1906년 산남의진이 거병하자 이에 참여하여 장영수위(將營守衛)와 우포장(右炮將) 등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2. 2. 일제강점기 (1910년 ~ 1945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경상북도, 경상남도, 강원도 등지를 떠돌며 처사(處士)로 지냈고, 이때 '''최산남'''(崔山南)·'''최불암'''(崔佛巖)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위해 영남과 강원 지방의 유교 성리학 향교 대표들과 만나 일제 격퇴를 공모하였다. 1919년에는 강원도 춘천에서 3.1 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후 전국을 방랑하며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모의하다가 1922년 9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민족행정특보위원을 지냈다. 한국독립당에서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시기 ! 활동 내용 ! 직책
한국독립당 가입 및 활동 시작 | 민족행정특보위원
한국독립당 탈당 | -
한국독립당 복당 | 독립군행정특보위원
한국독립당 두 번째 탈당 | -
한국독립당 재복당 | -
한국독립당 활동 지속 | 상임위원
한국독립당 세 번째 탈당 | -



1940년 9월, 한국독립당을 세 번째로 탈당한 후 중화민국 타이완 성 타이베이로 건너갔다. 타이완에서의 생활은 아래와 같다.

시기 ! 장소 ! 활동 내용
타이베이 | 조선인 소작농
타이베이 | 러시아식 셔츠 공장 중급 공원
타이중 | 조선인 소작농



1945년 8월 15일, 타이중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2. 3. 광복 이후 (1945년 ~ 1948년)

1946년 5월 고국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1946년 8월부터 1948년 2월까지 한국독립당 전임위원 직을 지냈으며, 1948년 2월 한국독립당을 마지막으로 탈당하였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14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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