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리나 스포르차 디 포를리 백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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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테리나 스포르차 디 포를리 백작부인은 1463년 밀라노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결혼하여 포를리의 지배권을 얻었다. 남편의 암살 후, 그녀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군사적, 정치적으로 활약하며 "이탈리아의 여걸"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가혹한 통치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체사레 보르자의 침공으로 패배하여 투옥되었으나, 피렌체로 돌아와 연금술 연구에 몰두했으며, 150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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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리나 스포르차 디 포를리 백작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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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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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이몰라의 여주인 포를리의 백작부인 |
출생일 | 1463년 |
출생지 | 밀라노, 밀라노 공국 |
사망일 | 1509년 5월 28일 (46세) |
사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가문 | 스포르차 가문 |
아버지 | 밀라노 공작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
어머니 | 루크레치아 란드리아니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지롤라모 리아리오 자코모 페오 조반니 데 메디치 일 포폴라노 |
자녀 | 파엔차 여주인, 산 세콘도 백작부인 겸 후작부인 비앙카 리아리오 오타비아노 리아리오 체사레 리아리오 조반니 리비오 리아리오 갈레아초 마리아 리아리오 프란체스코 "스포르치노" 리아리오 베르나르디노 (후에 카를로) 페오 루도비코 (후에 조반니) 데 메디치 |
2. 생애
1463년 밀라노에서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와 그의 정부 루크레치아 란드리아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중 한 명이었다.[75][76] 루크레치아는 지안 피에로 란드리아니 백작의 아내였으며, 백작은 밀라노 공작 궁정의 궁인이자 갈레아초의 가까운 친구였다. 어린 시절, 카테리나는 어머니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루크레치아와 맺은 유대감은 피렌체에서 마지막 해를 보낼 때조차 그녀의 삶의 중요한 순간에 가까이 있을 정도로 강했다.[4] 어머니 루크레치아는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1473년 그녀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약혼하였다.[77] 1466년 카테리나의 아버지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아버지 프란체스코의 사망과 함께 밀라노 공작으로 즉위한 후, 카테리나와 그녀의 형제들은 궁정으로 불려갔다. 루크레치아 란드리아니의 네 자녀는 모두 카테리나의 할머니인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맡겨졌다. 보나는 네 자녀 모두를 입양했다. 카테리나와 그녀의 형제들은 스포르차 궁정에서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노출되면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은 그녀가 오빠들과 같은 교육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라틴어를 배우고 당시의 고전 작품을 읽는 혜택을 누렸다. 그녀는 아버지의 할머니로부터 그녀의 호전적인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법, 무기를 사용하는 데 대담함을 보이는 법, 그리고 통치 기술에 대한 날카로움을 배우는 법을 배웠다.[10] 보나로부터 그녀는 양어머니가 남편의 모든 자녀에게 쏟은 모성적 따뜻함과 애정뿐만 아니라 식물성 의약품의 세계에 대한 잠재적인 첫 번째 소개도 받았다. 보나는 개인 약사 크리스토포로 데 브루고라와 함께 궁정에 들어왔고, 카테리나는 나중에 그녀의 실험을 통해 이 분야를 탐구하게 되었다. 카테리나는 밀라노 궁정을 떠난 후에도 보나와 서신을 통해 관계를 이어갔다.[10]
밀라노와 파비아에 가족이 거주했던 카테리나의 아버지이자 헌신적인 사냥꾼이었던 그는 종종 갈리아테나 쿠사고에 머물렀다. 이 두 곳 사이에서 그녀는 사냥에 대한 열정을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2. 1. 어린 시절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1463년 밀라노에서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와 그의 정부 루크레치아 란드리 아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중 한 명이었다.[75][76] 루크레치아는 지안 피에로 란드리 아니 백작의 아내였으며, 백작은 밀라노 공작 궁정의 궁인이자 갈레아초의 가까운 친구였다. 어린 시절, 카테리나는 어머니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루크레치아와 맺은 유대감은 피렌체에서 마지막 해를 보낼 때조차 그녀의 삶의 중요한 순간에 가까이 있을 정도로 강했다.[4] 어머니 루크레치아는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1473년 그녀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약혼하였다.[77] 1466년 카테리나의 아버지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아버지 프란체스코의 사망과 함께 밀라노 공작으로 즉위한 후, 카테리나와 그녀의 형제들은 궁정으로 불려갔다. 루크레치아 란드리 아니의 네 자녀는 모두 카테리나의 할머니인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맡겨졌다. 보나는 네 자녀 모두를 입양했다. 카테리나와 그녀의 형제들은 스포르차 궁정에서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노출되면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은 그녀가 오빠들과 같은 교육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라틴어를 배우고 당시의 고전 작품을 읽는 혜택을 누렸다. 그녀는 아버지의 할머니로부터 그녀의 호전적인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법, 무기를 사용하는 데 대담함을 보이는 법, 그리고 통치 기술에 대한 날카로움을 배우는 법을 배웠다.[10] 보나로부터 그녀는 양어머니가 남편의 모든 자녀에게 쏟은 모성적 따뜻함과 애정뿐만 아니라 식물성 의약품의 세계에 대한 잠재적인 첫 번째 소개도 받았다. 보나는 개인 약사 크리스토포로 데 브루고라와 함께 궁정에 들어왔고, 카테리나는 나중에 그녀의 실험을 통해 이 분야를 탐구하게 되었다. 카테리나는 밀라노 궁정을 떠난 후에도 보나와 서신을 통해 관계를 이어갔다.[10]
밀라노와 파비아에 가족이 거주했던 카테리나의 아버지이자 헌신적인 사냥꾼이었던 그는 종종 갈리아테나 쿠사고에 머물렀다. 이 두 곳 사이에서 그녀는 사냥에 대한 열정을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2. 2. 첫 번째 결혼: 지롤라모 리아리오
1473년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약혼한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1477년 남편과 함께 로마로 가서 프란체스코 5세 오르델라피로부터 포를리의 지배권을 빼앗고자 교황의 도움을 요청하였다.[75][76] 지롤라모는 교황의 총애를 통해 교회군 총사령관과 산탄젤로 성의 대리 성주 칭호를 얻어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큰 부를 축적했다. 1484년 8월 식스토 교황이 선종하자, 지롤라모는 카테리나를 로마로 보내 산탄젤로 성을 차지하도록 했다. 그녀는 10월 25일까지 성채를 방어하며 추기경단이 남편의 요구를 관철하도록 했다.
1473년, 카테리나는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약혼했다.[5] 카테리나는 지롤라모와 결혼하여 밀라노 공작의 딸이 되면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두 궁정의 일원이 되었다.[1] 1477년 이몰라에 개선 입성한 후, 카테리나는 남편과 함께 로마로 갔다.
2. 2. 1. 로마에서의 생활
1473년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약혼한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1477년 남편과 함께 로마로 가서 프란체스코 5세 오르델라피로부터 포를리의 지배권을 빼앗고자 교황의 도움을 요청하였다.[75][76] 지롤라모는 교황의 총애를 통해 교회군 총사령관과 산탄젤로 성의 대리 성주 칭호를 얻어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큰 부를 축적했다. 1484년 8월 식스토 교황이 선종하자, 지롤라모는 카테리나를 로마로 보내 산탄젤로 성을 차지하도록 했다. 그녀는 10월 25일까지 성채를 방어하며 추기경단이 남편의 요구를 관철하도록 했다.15세기 말, 로마는 중세 도시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예술적 중심지로 변화하고 있었다. 1477년 5월 로마에 도착한 카테리나는 문화적 열정이 넘치는 도시 분위기에 휩싸였다.
카테리나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 덕분에 로마 귀족 사회에 융화되었다. 당시 서신에 따르면, 그녀는 로마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으로 존경받았다. 교황을 포함한 모든 사회로부터 환영받고 큰 존경을 받으며, 로마 궁정과 다른 이탈리아 궁정 사이의 중재자로 변모했다.[7]
지롤라모는 피에트로 리아리오 추기경이 사망한 후 교황 식스토 4세의 확장 정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1480년, 교황은 오르델라피 가문으로부터 몰수한 포를리의 영주직을 지롤라모에게 부여했다.
1484년 8월 12일 식스토 4세의 죽음으로 카테리나와 지롤라모의 삶은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교황 사망 후, 로마에서는 반란과 무질서가 퍼져나갔고, 지롤라모의 저택은 약탈당했다.[8]
임신 7개월째였던 카테리나는 남편을 대신하여 산탄젤로 성의 ''로카''(요새)를 점령했다.[9] 그녀는 바티칸을 감시하며 새로운 콘클라베의 조건을 정하려 했다.
성직자 회의는 지롤라모에게 로마를 떠나달라고 요청했고, 이몰라와 포를리의 영주직, 교회의 대장군 군사 지위, 재산 피해에 대한 8,000 두카트를 제안했다. 지롤라모는 이를 수락했으나, 카테리나는 저항을 준비했다. 1484년 10월 25일, 카테리나는 요새를 성직자 회의에 넘겨주고 가족과 함께 로마를 떠났다. 그 후 성직자 회의는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콘클라베를 열었다.[10]
2. 2. 2. 지롤라모의 죽음
1488년 숙부 루도비코 스포르차에 의해 의도적으로 스포르차 가문이 지원을 하지 않아 포를리에 반란이 일어났고, 그 결과 남편 지로라모가 암살되었다. 수차례의 실패 끝에 지롤라모는 1488년 4월 14일 포를리의 귀족 가문인 오르시 가문의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다.[12] 영주의 궁전은 약탈당했고, 카테리나와 그녀의 여섯 자녀는 포로가 되었다.도시 방어 시스템의 핵심 부분인 라발디노 요새는 오르시 가문에 항복을 거부했다. 카테리나는 성주 토마소 페오를 설득하여 항복시키겠다고 제안했다. 오르시 가문은 카테리나가 자녀들을 인질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녀를 믿었지만, 그녀는 요새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전의 감금자들에게 역겨운 협박과 복수를 약속했다. 한 소문에 따르면, 그들이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때, 카테리나는 요새 벽에 서서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며 원한다면 그렇게 해. 내 앞에서 매달아도 좋아... 여기 다른 아이들을 만들 만한 것이 충분히 있으니까!)/Fatelo, se volete: impiccateli pure davanti a me ... qui ho quanto basta per farne altri!it라고 말했다.[12] 하지만 이 이야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카테리나는 사실 임신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역사가들에게 속임수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음모자들이 그녀의 자녀, 즉 지롤라모의 적법한 상속자를 붙잡아두는 데 가진 모든 권한을 무효화했다.
이러한 반응에 충격을 받은 오르시 가문은 리아리오 가문의 아이들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삼촌 루도비코 일 모로 (베네치아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냐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매우 관심이 있었다)의 도움으로 카테리나는 적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영토를 되찾았다.
2. 3. 포를리 통치와 암살 위협
1473년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약혼하여 이몰라의 소유권을 되찾았으며, 1477년 이몰라에 들어간 후, 프란체스코 5세 오르델라피로부터 포를리의 지배권을 빼앗고자 남편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의 도움을 요청하였다.[11]리아리오는 교황의 총애로 교회군 총사령관과 산탄젤로 성의 대리 성주 칭호를 얻어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쥐었으며, 1484년 8월 식스토 교황 선종 후 카테리나는 산탄젤로 성을 차지하였다. 그녀는 10월 25일 추기경단이 남편의 요구를 관철할 때까지 성채를 방어하였다.[11] 이몰라와 포를리 시민들의 호의를 얻고자 공공건물과 성당 건립, 조세 폐지를 시행했으나, 국고가 바닥나자 강제 징수로 돌아가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리아리오의 적대자인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사생아 프란체스케토 치보가 음모를 꾸몄고, 리아리오는 탄압 체제를 실행했다. 인노첸시오 8세는 지롤라모에게 이몰라와 포를리에 대한 영주 지위와 그의 지휘관 임명을 확인했지만, 형식적일 뿐 실질적인 통제력은 없었으며, 보수도 지불하지 않았다.[11] 1485년 말, 시 정부는 돈이 떨어졌고, 지롤라모는 세금을 징수하여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1488년 그는 세 명의 음모자에게 살해당하고, 궁전은 약탈당했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포로가 되었다. 공모자의 우두머리는 포를리의 귀족 오르시였다.
하지만, 라바르디노 성의 대리 성주 톰마소 페오는 리아리오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성채 인도를 거부했다. 백작부인은 성 안으로 들어가 성채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때 그녀는 성벽 위에서 아이는 더 낳을 수 있다고 외쳤다. 루도비코 일 모로가 보낸 군대와 함께 적들을 패배시키고 영토 소유권을 회복했으며, 반대자들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이 일로 ‘이탈리아 제일의 여자(프리마 돈나 디탈리아)’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강압적 통치로 시민들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1488년 4월 30일, 카테리나는 장남 오타비아노를 위해 포를리의 섭정이 되었고, 오타비아노는 포를리의 새로운 영주로 공식 인정받았다.[8] 카테리나는 12년 동안 섭정으로서 성공적인 역할을 수행했다.[8]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오르시 음모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투옥했고, 저택은 철거되었으며 귀중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다.

7월 30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오타비아노 리아리오에게 영지를 위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이 방문했는데, 표면적으로는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카테리나의 통치를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젊은 백작부인은 공적 및 사적 정부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직접 처리했다. 권력 공고화를 위해 인접 국가 영주들과 선물을 교환하고 자녀들의 결혼 협상에 관여했다. 세금을 감면하고 영토 지출을 통제했으며, 민병대 훈련을 직접 처리했다.
포를리와 이몰라 국가는 작았지만,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 문제에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 1492년 로렌초 일 마니피코와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망하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뒤를 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이탈리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했다.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13] 1494년 9월 위기로 이어졌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을 주장하며 이탈리아에 진입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샤를의 주장을 지지하여 1494-1498년 이탈리아 전쟁이 이어졌다.
카테리나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삼촌 루도비코가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프랑스에 반대했으며, 제부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나폴리 국왕을 옹호했다.[14]
1494년 9월 23일 회의 후, 카테리나는 나폴리의 알폰소 2세 왕을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이몰라와 포를리를 방어할 준비를 했다.
10월 20일과 21일 사이에 발생한 모르다노 약탈에서 카테리나는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서 페란디노가 자신의 군대와 함께 파엔차를 떠나 체세나 방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샤를 8세는 로마냐를 피하고 치사 고개 길을 따르는 것을 선호했다. 나폴리 왕국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탈리아 공국들은 베네치아 동맹을 결성했다.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은 프랑스로 철수할 수 있었다.
이번에 카테리나는 중립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군 축출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삼촌인 밀라노의 루도비코와 교황의 지지를 모두 유지했다.[16]
포를리에 돌아와 영토 방어 준비를 마친 카테리나는 군사적 문제, 특히 군수 문제에 매달렸다. 민병대 훈련은 백작 부인이 직접 실시했다. 추가 자금과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삼촌 루도비코, 피렌체 공화국 및 동맹국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도비코 일 모로만이 소규모 병력을 보냈다. 루도비코는 lt=프라카소/가스파레 산세베리노it와 lt=지안 프란체스코 산세베리노/지안프란체스코 산세베리노 다라곤it라는 지휘관 두 명을 보냈지만, 카테리나는 프라카소의 성격을 다루지 못했다. 그녀는 삼촌에게 프라카소가 끊임없이 싸운다고 불평했다.[26]
베네치아 군의 초기 공격으로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후, 카테리나의 군대는 그들을 능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전쟁은 소규모 교전으로 이어졌고, 베네치아 군이 포를리를 우회하여 다른 경로로 피렌체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완강한 방어 덕분에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La Tigreit"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과부가 된 그녀는 몇 명의 연인이 있었으며, 자코모 페오와는 몰래 결혼하였다. 페오는 1495년 8월 27일 가신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카테리나는 암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가족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그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피렌체 사람들과 친분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조반니 데 메디치 일 포폴라노와 1497년에 비밀 결혼을 하였다.[77] 조반니는 1498년에 죽었지만,[77] 카테리나는 루도비코 일 모로와 피렌체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베네치아 사람들의 공격에서 벗어나 주권을 지켜냈다.
그녀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아들 오타비아노 사이의 결합을 거절하자 교황의 분노를 샀으며, 1499년 3월 9일 리아리오 가문이 빼앗긴 이몰라와 포를리의 지배권을 체사레 보르자에게 양도한다는 교황 교서가 반포되었다.
체사레가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영토에 대한 정복 운동을 시작하면서 프랑스군이 더해져 강화된 군대는 그녀를 공격하였다. 카테리나는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켜 놓고 방어전을 구상하였다. 이몰라 성은 디오니지 나르디가 지키고 있었으며, 1499년 12월에 항복하였다. 카테리나는 포를리 시민들을 충성 서약에서 사면해 주고, 홀로 라바르디노 성채에서의 방어전에 나섰다. 그녀는 체사레의 맹공격을 격퇴하면서 평화 제안들을 모두 거절하였다.
최종적으로 무기고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무시당하고, 카테리나는 백병전 후 사로잡혀 로마로 연행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카테리나가 성채보다 민심 확보에 더욱 노력했어야 했다.”며 실패의 사례로 제시하였다. 로마로 끌려간 그녀는 산탄젤로 성에서 1년간 죄수로 지냈다.
보르자의 박해에서 벗어나 피렌체로 도피한 그녀는 1503년 알렉산데르 6세 선종 후 지배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포를리와 이몰라는 체사레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좌절되었다. 카테리나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으로 피신한 후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2. 4. 두 번째, 세 번째 결혼과 체사레 보르자와의 전쟁
카테리나는 1488년 남편 지롤라모 리아리오가 암살당한 후, 그의 가신이었던 자코모 페오와 비밀리에 결혼했다.[17] 자코모는 잔혹함과 오만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미움을 샀으며, 결국 1495년 카테리나의 눈앞에서 암살당했다.[18][21][22][23] 카테리나는 이에 연루된 모든 이들과 그 가족들까지 잔혹하게 처형하며 복수했다.[21] 1497년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대사 조반니 데 메디치 일 포폴라노와 비밀 결혼을 하였고,[77] 1498년 아들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루도비코)를 낳았다.[25] 같은 해 조반니가 사망하면서,[77] 카테리나는 베네치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지켜냈다.1499년 3월 9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 교서를 반포하여 리아리오 가문이 소유했던 이몰라와 포를리의 지배권을 체사레 보르자에게 양도했다.[28] 루이 12세의 지원을 받은 체사레 보르자는 카테리나의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27] 카테리나는 자식들을 피신시키고 이몰라와 포를리에서 저항했지만, 1499년 12월 이몰라가 함락되었고, 포를리 시민들은 충성 서약을 면제받고 보르자에게 항복했다.[30] 카테리나는 라바르디노 성에서 홀로 방어전을 펼쳤으나, 1500년 1월 12일 결국 체사레 보르자에게 사로잡혔다.[31] 그녀의 완강한 방어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칭송을 받았으며, "La Tigreit"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29] 포로로 잡힌 카테리나는 로마로 연행되었고, 이후 교황 독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산탄젤로 성에 1년간 갇혔다.
2. 5. 투옥과 피렌체에서의 여생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산탄젤로 성에서의 투옥과 교황 독살 미수 혐의에서 벗어난 후, 1501년 6월 30일 나폴리 왕국 정복을 위해 루이 12세의 군대와 함께 로마에 온 이브 달레그에 의해 석방되었다.[33]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카테리나가 모든 봉토를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했다고 주장했고,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는 로마냐 공작으로 임명되었다.[33] 석방 후, 카테리나는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의 저택에서 잠시 머무른 뒤 리보르노를 거쳐 피렌체로 갔다.[33]피렌체에서 카테리나는 세 번째 남편 조반니 데 메디치가 소유했던 카스텔로 메디치 빌라에 주로 머물렀다.[20] 그러나 곧 부당한 대우와 재정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녀는 아들 조반니의 양육권과 상속, 메디치 가문과의 대출을 둘러싸고 형부인 로렌초 데 메디치와 4년간 법적 다툼을 벌였다.[20] 결국 그녀는 메디치 가문에 대출금을 상환해야 했지만, 조반니의 양육권과 상속은 되찾을 수 있었다.[20] 1504년, 그녀의 아들은 마침내 그녀에게 돌아왔다.[20]
1503년 8월 18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면서 체사레 보르자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카테리나는 교황 율리우스 2세[34]에게 서신을 보내 이몰라와 포를리의 영지 회복을 시도했다. 그러나 두 도시 주민들은 카테리나의 복귀를 반대했고,[34] 결국 영지는 1503년 10월 22일 안토니오 마리아 오르델라피에게 넘어갔다.[34]
이전의 정치적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잃은 카테리나는 여생을 자녀, 특히 막내 아들 조반니에게 헌신하며 보냈다. 그녀는 또한 연금술 실험에 몰두하여 "Gli Experimenti"라는 제목의 원고를 남겼다.[35] 1509년 4월, 카테리나는 심한 폐렴에 걸렸고, 회복되는 듯했으나 재발하여 1509년 5월 28일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8] 그녀의 시신은 피렌체의 레 무라테 예배당의 작은 무덤에 안치되었으나,[39] 1845년 교도소 개조 작업 중에 유실되었다.
3. 유산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비교하며, 카테리나의 행동이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기에 가톨릭 교회의 승인을 받은 이사벨보다 가혹한 평가를 받았다고 지적한다.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연금술, 화장품, 의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454개의 레시피가 담긴 필사본을 제작했다.[60] 이, 열, 상처 치료법과 더불어 킨테센스와 현자의 돌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60] 향수, 피부 및 모발 관리법 등 다양한 화장품 레시피도 개발했다.[37] 1484년 폴리(Forlì)로 이주한 후에는 약용 정원을 조성하여 실험을 계속했다.[37] 그녀의 필사본은 아들 조반니 달라 반데 네레에게 전해졌고, 이후 메디치 가문에 보존되었다가 분실되었다.[61] 19세기에 피에르 데시데리오 파솔리니가 그녀의 문서 대부분을 "Experimenti"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17]
카테리나는 연금술에 깊이 관여하여 생명의 엘릭서와 현자의 돌을 찾고자 노력했다.[60] 400개 이상의 연금술 레시피를 만들었으며, 여기에는 화장품, 의약품, 연금술적 방법이 통합적으로 사용되었다.[60] 예를 들어, 그녀는 연금술 원리를 사용하여 헤어 염료와 로션 같은 화장품을 만들었다.[60] 그녀는 "엘리시르 비타에"라는 영원한 건강과 젊음을 부여하는 엘릭서를 연구했으며, 이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60] 또한 기억력 향상, 나병 치료 등 다양한 효능을 가진 "놀랍고 신성한 물"을 만들었다.[63] 카테리나는 활석을 화장품, 의약품, 연금술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했다.[62] 그녀는 금속의 무게와 색상을 변경하여 금처럼 보이게 하는 등 정치적, 재정적 목적을 위해 연금술을 활용하기도 했다.[60]
잔 칼로지리디스의 소설 "보르지아의 신부(The Borgia Bride)"(2005)에서 카테리나는 아라곤의 산차와 친구가 되어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을 계획한다. 카테리나는 잔 칼로지리디스의 2010년 역사 소설 "스칼렛 콘테사(Scarlet Contessa)"의 주제이기도 하다. 2011년 쇼타임 시리즈 "보르지아스 (2011년 TV 시리즈)(The Borgias)"에서는 지나 맥키가, 보르지아 (TV 시리즈)(Borgia)에서는 발렌티나 체르비가, 메디치 (TV 시리즈)(Medici)에서는 로즈 윌리엄스 (배우)가 카테리나를 연기했다.
카테리나는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2(Assassin's Creed II)" 및 소설 "어쌔신 크리드: 르네상스(Assassin's Creed: Renaissance)"에 등장하며, "어쌔신 크리드 2#포를리 전투(The Battle of Forlì)" DLC와 후속작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Assassin's Creed: Brotherhood)" 및 소설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 (소설)(Assassin's Creed: Brotherhood)"에서 에치오 아우디토레의 조력자 및 연애 상대로 등장한다. 사라 듀넌트의 2013년 소설 "블러드 & 뷰티(Blood & Beauty)"에는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체포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몰라(Imola)는 피렌체에 가까운 요충지로, 파치 가의 음모의 원인이 된 곳이다. 카테리나의 남편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이 음모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한다. 지롤라모 암살 배후로는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또는 카테리나의 숙부 루도비코가 거론된다.
지롤라모 암살 당시, 카테리나와 아이들은 성 밖에서 반란군에게 붙잡혔으나, 성의 수비대는 항복하지 않았다. 카테리나는 수비대를 설득하겠다며 아이들을 남겨두고 성으로 들어갔으나, 나오지 않자 반란군은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카테리나는 성벽 위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며 "아이들은 여기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 일로 카테리나는 "이탈리아의 여걸(비라고 디탈리아)"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횡포와 오만으로 일족 및 영민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그녀의 통치를 비판하며 "성벽 강화보다 영민의 마음을 얻는 데 힘써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반니는 용병대장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아들 코시모 1세는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4. 평가
피렌체 역사가 바르톨로메오 체레타니는 그녀를 "현명하고, 용감하고, 훌륭했다"고 묘사한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으며, 말수가 적었다고 한다. 프랑스풍의 검은 벨벳 모자를 쓰고, 남자의 허리띠와 금화 두카트가 가득한 스카르셀라를 가지고 다녔으며, 낫을 휴대하여 병사들이 그녀를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용병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백작의 사생아로, 정신과 대담함이 그와 매우 흡사했으며, 뛰어난 미덕을 갖추고 있었지만 몇 가지 악덕 또한 있었다고 평가한다.
마린 사누도 일 조바네는 두 번째 남편 자코모 페오가 죽은 후 음모자들의 가족을 학살한 것을 두고 "거의 여장부, 가장 잔혹한 여성"이라고 불렀다. 는 그녀를 "교활하다"고 평가하며, 상황에 따라 당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지만,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언급했다.
베르나르도 도비치 다 비비에나는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테리나와 칼라브리아 공작 페르디난도 2세의 "이상한 인계"를 이야기하며 그녀의 얼굴이 못생겼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후세에는 큰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당시의 메달은 남성적인 특징과 다소 비대한 여성을 묘사하고 있다. 1502년경, 이사벨라 데스테의 정보원에 따르면 카테리나는 "너무 뚱뚱해서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갈레아초 마리아도 "너무 뚱뚱해 보이지 않기 위해"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카테리나는 스포르차 가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인 약간 굽은 뚜렷한 코와 튀어나온 턱을 물려받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결 모양이었으며 머리 뒤로 묶고 다녔던 것으로 보이지만, 금발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카테리나가 라발디노 요새를 되찾은 후 자신의 성기를 드러냈다는 전설을 상세하게 논했다.[69]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를 대신하여 스포르차와 교류할 기회가 있었"고, 그녀의 적들이 인질로 잡힌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치마를 들추고 성기를 가리키며 더 많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응수했다고 묘사했다.[69]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강론''과 ''피렌체사''에서 이 사건을 다르게 묘사한다.[71][72] ''피렌체사''에서는 치마를 들어 올리는 사건을 생략하고, 카테리나가 적들에게 "남편 살해에 대한 복수로 죽음과 모든 종류의 고문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의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는 더 많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수단이 있다고 말했다."라고 묘사한다.[71][72]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69] 동시대인들은 마키아벨리가 묘사하는 치마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카테리나의 지혜와 정치적 수완에 대해 이야기한다.[73] 그녀는 아이들에 대한 위협에 말로 대응하며, 장남이 안전한 곳에 있고 자신이 임신 중이라고 언급했다.[72]
줄리아 L. 헤어스톤은 마키아벨리의 이야기가 카테리나를 비여성화하고, 여성과 어머니의 전형적이지 않은 행동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69] 엘리자베스 레브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가 카테리나에 대한 혐오감을 반영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29][74] 피에르 데시데리오 파솔리니는 마키아벨리가 이 이야기를 믿었고, 냉소적인 형태로 역사를 전하는 것을 즐겼다고 평가한다.[73]
이몰라는 피렌체에 가까운 요충지이며, 파치 가의 음모의 원인이 된 곳이다. 지롤라모는 음모의 배후라고도 한다. 지롤라모 암살의 배후는 메디치 가의 로렌초, 혹은 카테리나의 숙부인 루도비코라고도 한다.
지롤라모가 암살되었을 때, 카테리나는 반란군에게 아이들을 인질로 남겨두고 성으로 들어가 수비대를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성으로 들어간 채 나오지 않자, 반란군은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카테리나는 성관 옥상에 서서 치마를 걷어 올리며 "아이들은 여기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실제로 성벽 위에서 치마를 걷어 올렸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 일로 인해 "이탈리아의 여걸(비라고 디탈리아)"이라는 칭찬을 받았으나, 의연하고 강한 태도는 횡포와 오만으로 이어져 영민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인 자코모와 강제로 결혼했고, 자코모가 암살당했을 때에는 스스로 복수의 칼날을 휘둘렀다. 자식에게도 애정이 없어, 적남 오타비아노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가문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보르자 침공에 직면했을 때, 영민은 물론 일족의 협력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고 패배한 것은 평소의 행실이 재앙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성벽 강화에 쓰는 돈이 있다면, 영민의 마음을 얻는 데 써야 했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미움을 받으면서도 두려움을 샀던 여걸에게 더욱 비극적인 여주인공의 색채를 더했고, 그녀의 이름은 특히 포를리와 이몰라에서 오랫동안 전해졌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1960년대에도 이몰라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혼낼 때 "카테리나 백작부인이 올 거야"라고 말하며 타이른다고 한다.
조반니 데 메디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조반니는 용감한 용병대장으로, 코냐크 동맹 전쟁에서 황제군과 싸우다 28세에 전사했다. 그의 아들 코시모 1세는 훗날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4. 1. 긍정적 평가
카테리나는 1478년 파치 가의 음모의 원인이 된 이몰라를 통치하였으며, 그녀의 남편 지롤라모는 이 음모의 배후로 여겨진다. 지롤라모가 암살되었을 때, 카테리나와 아이들은 성 밖에서 반란군에게 붙잡혔으나, 성의 수비대는 항복하지 않았다. 카테리나는 반란군을 설득하겠다고 하고 아이들을 남겨둔 채 성으로 들어갔다. 반란군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카테리나는 성벽 위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며 "아이들은 여기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녀가 실제로 성벽 위에서 치마를 걷어 올렸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지만, 그녀를 "이탈리아의 여걸(비라고 디탈리아)"로 칭송받게 했다.그러나 이러한 의연함은 횡포와 오만으로 이어져, 일족 및 영민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애인 자코모와의 강제 결혼, 자코모 암살 후의 잔혹한 복수, 적남 오타비아노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않은 점 등은 그녀에 대한 반발을 샀다. 마키아벨리는 그녀의 통치에 대해 "성벽 강화보다 영민의 마음을 얻는 데 힘써야 했다"라고 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르자의 침공으로 인한 패배는 그녀에게 비극적 여주인공의 이미지를 더했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1960년대에도 이몰라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혼낼 때 "카테리나 백작부인이 올 거야"라고 말하며 타일렀다고 한다.
4. 2. 부정적 평가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의연하고 강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는 횡포와 오만으로 이어져 일족 및 영민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인 자코모와 강제로 결혼했고, 자코모가 암살당했을 때는 복수를 하여 영내에 피의 비를 내리게 해 안팎으로 반발을 샀다. 또한 자식에게도 애정이 없어, 적남 오타비아노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가문을 물려주지 않았다.그녀가 보르자 침공에 직면했을 때, 영민은 물론 일족의 협력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고 패배한 것은 평소의 행실이 재앙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그녀의 통치를 "성벽 강화에 쓰는 돈이 있다면, 영민의 마음을 얻는 데 써야 했다"라고 평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패배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두려움을 샀던 여걸에게 더욱 비극적인 여주인공의 색채를 더했고, 그녀의 이름은 특히 포를리와 이몰라에서 오랫동안 전해졌다. 카테리나를 널리 소개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1960년대에도 이몰라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혼낼 때 "카테리나 백작부인이 올 거야"라고 말하며 타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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