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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첼레리아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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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첼레리아 부조는 1930년대 후반 로마의 칸첼레리아 궁전에서 발견된 두 개의 패널로 구성된 부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조는 도미티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화해, 그리고 도미티아누스의 카티족 원정 준비 장면을 묘사하며, 플라비우스 왕조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의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리즈 A는 도미티아누스 사후 네르바 황제의 모습으로 수정되었으며, 고전주의 양식으로 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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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첼레리아 부조
작품 정보
칸첼레리아 부조 A
칸첼레리아 부조 A
종류부조
제작 시기도미티아누스 시대 (81-96년) 또는 네르바 시대 (96-98년)
재료대리석
크기높이 2.10m
소장바티칸 박물관
상세 정보 - 칸첼레리아 부조 A
주제도미티아누스의 개선 또는 출발
등장 인물도미티아누스 (미네르바, 로마)
특징도미티아누스의 초상 파괴
상세 정보 - 칸첼레리아 부조 B
칸첼레리아 부조 B
칸첼레리아 부조 B
주제네르바의 즉위 (Adlocutio)
등장 인물네르바, 로마 원로원, 로마 시민
특징네르바의 연설 장면 묘사

2. 역사

칸첼레리아 부조는 1930년대 말 로마의 칸첼레리아 궁전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2] 이 부조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주문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1][12] 현재는 로마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12]

부조가 원래 어느 건물을 장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몇 가지 추측이 있다.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의 군사적 업적을 기념하며 세워진 성소인 템플룸 디보룸(Templum Divorum)이나,[2][13] 도미티아누스 집권기에 지어졌다가 그의 사후에 철거된 여러 개선문 중 하나를 장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14]

2. 1. 발견

칸첼레리아 부조는 1930년대 후반 로마의 칸첼레리아 궁전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2]

흔히 프리즈 A와 프리즈 B로 불리는 두 개의 패널은 불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프리즈 A는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으나 왼쪽 끝 부분이 소실되어 원본의 정확한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프리즈 B는 여러 부분이 파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두 부조 모두 높이는 210cm로 측정되었다.[12]

이 부조를 누가 조각했고 어느 건물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의뢰를 받아 동일 인물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1][12] 현재 부조는 로마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시 중이다.[1][12]

2. 2. 추정 제작 시기 및 목적

칸첼레리아 부조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의뢰로 그의 재위 기간(서기 81년-96년) 중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12] 부조에 묘사된 사건들을 바탕으로, 제작 시기는 최소 서기 83년 이후로 여겨진다.[4][15]

그러나 부조의 양식은 정확한 연대 추정에 다소 어려움을 준다. 티투스 개선문처럼 도미티아누스 시대로 확실히 판명된 다른 부조들이 매너리즘적이고 바로크 양식의 특징을 보이는 반면,[5][16] 칸첼레리아 부조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고전주의 양식과 유사하게 조각되었기 때문이다.[5][16]

이 부조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생애와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서기 69년에 세운 플라비우스 왕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4][15] 따라서 플라비우스 왕조 통치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황제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선전(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15]

2. 3. 현재 소장 위치

현재 이 부조는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

3. 구성

칸첼레리아 부조는 크게 두 개의 패널, 즉 프리즈 A와 프리즈 B로 구성된다.

프리즈 A는 원래 카티족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묘사했으나, 그가 암살되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후 새로운 황제 네르바의 모습으로 수정되었다.[6][9] 부조에는 황제 외에도 마르스, 미네르바, 로마와 같은 신들과 로마 원로원로마 시민의 게니우스, 병사들이 등장한다.

프리즈 B는 69년의 내전 이후 로마로 돌아온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9] 이는 네로 사후 혼란을 종식시키고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여겨진다.

3. 1. 프리즈 A

패널 A의 왼쪽. 마르스, 미네르바, 로마 등이 황제 (도미티아누스/네르바)에게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프리즈 A는 본래 카티족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묘사한 부조이다.[17][6] 부조에는 마르스, 미네르바, 로마 등의 신들이 황제에게 출정을 촉구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19] 이 외에도 로마 원로원로마 시민의 수호신인 게니우스들과 병사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서, 부조 속 황제의 얼굴은 새로운 황제인 네르바의 모습으로 수정되었다.[20][9] 이러한 수정의 흔적은 현재 부조에서도 확인된다.

3. 1. 1. 도미티아누스의 묘사

프리즈 A는 본래 카티족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묘사하였다.[17] 수에토니우스와 같은 동시대 저술가들은 도미티아누스의 군사적 노력이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영광을 추구한 것이었으며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18] 프리즈 A에 묘사된 장면은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부조 가장 왼쪽에 묘사된 마르스, 미네르바, 로마 여신 등에게 조국을 지키라는 격려를 받으며 출정을 망설이는 장군으로 도미티아누스를 묘사하고 있다.[19] 이 장면에는 로마 원로원로마 시민의 수호신인 게니우스들과 다수의 병사들도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뒤, 로마 원로원은 그의 기억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은 모든 공공 기록물에서 지워졌고 그의 조각상들과 개선문들도 파괴되었다. 그의 조각상 중 일부는 새로운 황제 네르바의 모습으로 다시 조각되었는데, 칸첼레리아 부조의 프리즈 A도 여기에 해당한다. 새로 조각된 네르바의 머리는 신체와 비교했을 때 비율이 눈에 띄게 맞지 않는다. 그의 오른쪽 눈은 왼쪽보다 작고, 목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어, 이 머리가 원래 도미티아누스의 머리를 깎아 만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20]

3. 1. 2. 네르바 황제로의 수정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후, 로마 원로원은 그의 기억에 대한 기록말살형( Damnatio memoriae|담나티오 메모리아이la )을 통과시켰다. 이 결정에 따라 그의 이름은 모든 공공 기록에서 지워졌고, 그의 조각상들과 개선문들도 파괴되었다.[20]

도미티아누스의 조각상 일부는 새로운 황제 네르바를 묘사하도록 다시 조각되었는데, 칸첼레리아 부조의 프리즈 A가 바로 그 사례 중 하나이다. 부조 속 네르바의 머리는 신체와 비교했을 때 그 비율이 눈에 띄게 맞지 않는다. 오른쪽 눈은 왼쪽 눈보다 작고, 목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해당 머리가 원래 도미티아누스를 묘사했던 부분을 깎아내고 네르바의 모습으로 새로 조각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20]

3. 2. 프리즈 B

프리즈 B는 69년에 벌어진 내전이 끝난 뒤, 새로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만나 화해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9][20] 네로 황제 사망 이후의 극심한 혼란을 종식시키고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작과 안정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조에 대한 구체적인 장면 해석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존재하며, 이는 하위 항목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10][11][21][22]

3. 2. 1.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의 만남

프리즈 B는 69년에 벌어진 내전이 끝난 뒤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다. 68년 네로 황제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의 유력한 장군들인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전쟁이 발발했다. 갈바와 오토가 차례로 황제에 올랐다가 제거된 후, 비텔리우스가 황제 자리를 차지했으나 곧 베스파시아누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당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속주의 예루살렘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로 바로 향하는 대신, 비텔리우스와의 전쟁을 동맹인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집트 속주로 가서 지원 세력을 모으는 전략을 택했다.

무키아누스는 69년 12월 20일 로마를 공격하여 비텔리우스 군대를 빠르게 제압했다. 이후 무키아누스가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하고, 도미티아누스가 플라비우스 가문의 대표로서 활동하는 과도 정부가 세워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70년 9월 말에 로마로 돌아왔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프리즈 B가 바로 이 시점의 만남을 묘사한다고 본다. 부조에서 왼쪽에 도미티아누스, 오른쪽에 베스파시아누스가 배치된 구도는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아버지의 부재 중에도 로마를 잘 관리했으며, 부자 관계가 원만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9]

하지만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은 칸첼레리아 부조의 묘사와 다른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키투스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무키아누스의 과도 정부 시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행동을 보였다. 그는 관직 임명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무리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0] 이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온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아들 도미티아누스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을 해석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해 상당한 편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한편으로, 칸첼레리아 부조 자체가 선전물로서 제작되었다면, 이는 미래의 황제가 될 도미티아누스의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들을 잠재우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학자 존스(Jones)는 부조의 묘사처럼 부자간의 만남이 실제로 우호적이었을 것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해석을 선호한다.[11]

3. 2. 2. 역사적 해석의 다양성

칸첼레리아 부조에 묘사된 사건에 대해 고대 작가들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타키투스수에토니우스 같은 역사가들은 무키아누스의 임시 통치 기간 동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행동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도미티아누스가 정치적 직위를 나누어 주는 데 지나치게 열중했으며, 정당하지 않은 군사 작전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주장한다.[10][21]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온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아들 도미티아누스를 제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헌 자료는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11][22] 다른 한편으로, 만약 칸첼레리아 부조가 실제로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면, 이는 미래의 황제가 될 도미티아누스의 행동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인 소문들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11][22]

결론적으로, 부조에 묘사된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의 화해가 실제로 원만했는지, 아니면 정치적 의도를 가진 연출이었는지에 대한 해석은 어느 쪽도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학자 존스(Jones)는 부조가 묘사하는 그대로 부자간의 화해가 실제로 우호적이었다는 비교적 단순한 설명을 선호하지만, 이는 여러 해석 중 하나일 뿐이다.[11][22]

4. 양식

칸첼레리아 부조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16][5] 이는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다른 부조, 예를 들어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가 보여주는 매너리즘적이고 바로크 양식의 경향과는 다른 모습이다.[16]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부조의 정확한 제작 시기를 판단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16][5]

4. 1. 고전주의 양식

칸첼레리아 부조의 양식은 정확한 제작 시기를 정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티투스 개선문에서 볼 수 있듯이, 도미티아누스 통치 시기로 확실히 연대가 확인되는 다른 부조들은 보다 매너리즘적이고 바로크 양식의 특징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반면, 칸첼레리아 부조는 이와 대조적으로 고전주의 양식, 구체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양식을 따라 조각된 것으로 평가된다.[5]

4. 2. 티투스 개선문과의 비교

칸첼레리아 부조에 사용된 양식은 정확한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16][5]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시기로 확실히 연대가 확인된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들은 보다 매너리즘적이고 바로크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반면, 칸첼레리아 부조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고전주의 양식과 유사하게 조각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16][5]

참조

[1] 서적 Last 1948
[2] 서적 Jones 1992
[3] 서적 Jones 1992
[4] 서적 Last 1948
[5] 서적 Jones 1992
[6] 서적 Jones 1992
[7] 웹사이트 The Lives of Twelve Caesars, Life of Domitian https://penelope.uch[...]
[8] 서적 Last 1948
[9] 서적 Last 1948
[10] 서적 Jones 1992
[11] 서적 Jones 1992
[12] 서적 Last 1948
[13] 서적 Jones 1992
[14] 서적 Jones 1992
[15] 서적 Last 1948
[16] 서적 Jones 1992
[17] 서적 Jones 1992
[18] 웹사이트 The Lives of Twelve Caesars, Life of Domitian https://penelope.uch[...]
[19] 서적 Last 1948
[20] 서적 Last 1948
[21] 서적 Jones 1992
[22] 서적 Jones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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