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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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직가는 스코틀랜드 출신 가문으로, 자딘 매티슨 상회를 설립한 윌리엄 자딘의 외손자인 윌리엄 케직이 1855년 홍콩에 도착하여 자딘 매티슨 상하이 지점에서 근무하면서 시작되었다. 케직 가문은 1대 윌리엄 케직, 2대 헨리 케직, 3대 토니 케직과 존 케직, 4대 헨리 케직, 칩스 케직, 사이먼 케직, 5대 벤 케직, 아담 케직 등으로 이어지며 자딘 매티슨을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다. 케직 가문은 자딘 매터슨의 이사, 홍콩 입법회 및 행정회 위원, 상하이 시의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홍콩과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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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직가 | |
---|---|
가문 정보 | |
국가 | 영국 |
설립 | 18세기 |
창시자 | 윌리엄 케즈윅 |
민족 | 스코틀랜드인 |
주요 인물 | |
초대 | 윌리엄 케즈윅 |
현재 | 벤 케즈윅 |
사업 | |
주요 사업 | 재벌 홍콩랜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그룹 이화태평양 데어리 팜 인터내셔널 홀딩스 자딘 사이클 & 캐리지 자딘 매서슨 홍콩 상하이 은행 인도차이나 증기선 항해 회사 HSBC 보험 (아시아 태평양) 더 와프 (홀딩스) 홍콩 앤드 왐포아 독 |
기타 사업 | 주식 시장 부동산 금융 해운업 호텔 소매업 |
2. 1대
윌리엄 케직(1834-1912)은 케직 가문의 설립자이다. 스코틀랜드 롤랜드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자딘 매티슨 상회를 설립한 윌리엄 자딘의 누나의 딸이 낳은 아들이다. 1855년 홍콩에 도착하여 자딘 매티슨 상회 상하이 지점에서 근무했다.
1859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개항한 요코하마에 자딘 매티슨 상회 요코하마 지점(영일번관)을 설립했다. 1863년 조슈오걸(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야마오 요조, 노무라 야키치,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 유학을 지원했다.
1867년에는 홍콩의 4대 영국 기업 중 하나이자 세계 최대의 해상 보험 회사인 광동 조합 보험 협회(Union Insurance Society of Canton)의 이사가 되었다.[13]
1886년 영국으로 귀국하여 런던에 설립된 매터슨 상회의 전무가 되었다. 1868년부터 1887년까지 홍콩 정책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1888년 과학자 허버트 W. C. 트웨들과 함께 페루 하시엔다 라 블레아 이 파리냐스 유전을 매입하여, 런던 앤 퍼시픽 페트롤리움 컴퍼니를 설립했다.[14] 1899년부터 서리주 엡섬을 국회의원으로 대표했으며, 1898년에는 이 지역의 고위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1]
1912년 3월 9일 서리주 그레이트 북햄의 자택 이스트윅 파크에서 사망했다.[1]
제임스 존스턴 케직(제임스 존스턴 케직/James Johnstone Keswick영어, 1845년-1914년)은 윌리엄 케직의 동생이다. 1870년 홍콩에 도착하여 26년을 보냈다. 그의 장인은 주룽반도 할양의 주역이자 주일영국공사 헨리 파크스 경이다. 'James the bloody polite'(몹시 정중한 제임스라는 뜻)가 별명이다.
1890년부터 1900년까지 홍콩 입법회 및 홍콩 총상회(영어: Hong Kong General Chamber of Commerce)의 멤버였다. 1890년대부터 세기를 넘을 때까지 자딘 매터슨의 타이판이 되었고, 1889년에는 폴 차터와 함께 부동산 개발 회사인 홍콩 랜드(영어: Hong Kong Land)를 설립했다. 홍콩 랜드는 지금도 자딘 매터슨 계열사다.
존 존스턴 케직(John Johnstone Keswick, 혹은 J.J.K)은 윌리엄 케직의 또 다른 동생이다.[3][4] 캘커타를 거점으로 그의 파트너인 존 스키너 스튜어트와 함께 자딘 스키너(이후 자딘 헨더슨)의 경영에 참여했다. J.J.J. 케직은 또한 20세기 초 리오 틴토 컴퍼니(현재의 리오 틴토 그룹)의 회장이었다.[5] 그는 덤프리스의 로커비에 있는 도몬트에 살았다.[6]
2. 1. 윌리엄 케직 (1834-1912)
윌리엄 케직(1834-1912)은 케직 가문의 설립자이다. 스코틀랜드 롤랜드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자딘 매티슨 상회를 설립한 윌리엄 자딘의 누나의 딸이 낳은 아들이다. 1855년 홍콩에 도착하여 자딘 매티슨 상회 상하이 지점에서 근무했다.1859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개항한 요코하마에 자딘 매티슨 상회 요코하마 지점(영일번관)을 설립했다. 1863년 조슈오걸(이노우에 가오루, 엔도 긴스케, 야마오 요조, 노무라 야키치, 이토 히로부미)의 영국 유학을 지원했다.
1867년에는 홍콩의 4대 영국 기업 중 하나이자 세계 최대의 해상 보험 회사인 광동 조합 보험 협회(Union Insurance Society of Canton)의 이사가 되었다.[13]
1886년 영국으로 귀국하여 런던에 설립된 매터슨 상회의 전무가 되었다. 1868년부터 1887년까지 홍콩 정책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1888년 과학자 허버트 W. C. 트웨들과 함께 페루 하시엔다 라 블레아 이 파리냐스 유전을 매입하여, 런던 앤 퍼시픽 페트롤리움 컴퍼니를 설립했다.[14] 1899년부터 서리주 엡섬을 국회의원으로 대표했으며, 1898년에는 이 지역의 고위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1]
1912년 3월 9일 서리주 그레이트 북햄의 자택 이스트윅 파크에서 사망했다.[1]
2. 2. 제임스 존스턴 케직 (1845-1914)
제임스 존스턴 케직(영어: James Johnstone Keswick, 1845년-1914년)은 윌리엄 케직의 동생이다. 1870년 홍콩에 도착하여 26년을 보냈다. 그의 장인은 주룽반도 할양의 주역이자 주일영국공사 헨리 파크스 경이다. 'James the bloody polite'(몹시 정중한 제임스라는 뜻)가 별명이다.1890년부터 1900년까지 홍콩 입법회 및 홍콩 총상회(영어: Hong Kong General Chamber of Commerce)의 멤버였다. 1890년대부터 세기를 넘을 때까지 자딘 매터슨의 타이판이 되었고, 1889년에는 폴 차터와 함께 부동산 개발 회사인 홍콩 랜드(영어: Hong Kong Land)를 설립했다. 홍콩 랜드는 지금도 자딘 매터슨 계열사다.
2. 3. 존 존스턴 케직
존 존스턴 케직(John Johnstone Keswick, 혹은 J.J.K)은 윌리엄 케직의 또 다른 동생이다.[3][4] 캘커타를 거점으로 그의 파트너인 존 스키너 스튜어트와 함께 자딘 스키너(이후 자딘 헨더슨)의 경영에 참여했다. J.J.J. 케직은 또한 20세기 초 리오 틴토 컴퍼니(현재의 리오 틴토 그룹)의 회장이었다.[5] 그는 덤프리스의 로커비에 있는 도몬트에 살았다.[6]3. 2대
헨리 케직은 윌리엄 케직의 아들이다. 삼촌인 제임스 존스톤 케직이 홍콩을 떠나기 전인 1895년에 홍콩에 도착했다.[7] 홍콩에 오기 전에는 자딘 마테손의 뉴욕 사무소에서 2년간 근무했다.[7]
1911년, 그는 조지 5세의 대관식에 홍콩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면서 홍콩과의 오랜 연관성에 처음으로 공백이 생겼다.[7] 그는 1922년 자신의 요트 "커티 사크"를 타고 홍콩과 극동으로 돌아왔다.[7] 그는 1928년 사망할 때까지 자딘의 이사로 재직했다.[7]
그의 아버지처럼 헨리는 서리주 엡섬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사망 당시 영국 재산은 466,409파운드였다.[7]
그는 이다 위니프레드 존스턴과 결혼하여 데이비드 존스턴, 윌리엄 존스턴 "토니" 케즈윅 경, 그리고 존 헨리 케즈윅 경 KCMG 등 3명의 자녀를 두었다.[7]
3. 1. 헨리 케직 (1870-1928)
헨리 케직은 윌리엄 케직의 아들이다. 삼촌인 제임스 존스톤 케직이 홍콩을 떠나기 전인 1895년에 홍콩에 도착했다.[7] 홍콩에 오기 전에는 자딘의 뉴욕 사무소에서 2년간 근무했다.[7]1911년, 그는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대관식에 홍콩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면서 홍콩과의 오랜 연관성에 처음으로 공백이 생겼다.[7] 그는 1922년 자신의 요트 "커티 사크"를 타고 홍콩과 극동으로 돌아왔다.[7] 그는 1928년 사망할 때까지 자딘의 이사로 재직했다.[7]
그의 아버지처럼 헨리는 서리주 엡섬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사망 당시 영국 재산은 466,409파운드였다.[7]
그는 이다 위니프레드 존스턴과 결혼하여 데이비드 존스턴, 윌리엄 존스턴 "토니" 케즈윅 경, 그리고 존 헨리 케즈윅 경 KCMG 등 3명의 자녀를 두었다.[7]
4. 3대
홍콩과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한 3대 케직 가문 사람들은 헨리 케직의 아들인 "토니"와 존 케직이었다. 그들은 재딘 매더슨의 이사였을 뿐만 아니라 홍콩의 입법회 및 행정회와 상하이의 상하이 시의회 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상하이의 상하이 국제 조계를 담당했다.[10] 또한 그들은 여러 차례 상하이 시의회 및 상공 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윌리엄과 그의 아버지 헨리 케직이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모두 극동 지역의 이익을 책임지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 '''윌리엄 존스톤 "토니" 케직 (1903-1990)'''
윌리엄 존스톤 "토니" 케직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지만, 소년 시절에 영국으로 돌아와 윈체스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8] 1926년 극동으로 건너간 그는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자딘 상회 상하이 지점(중국 본점)에서 근무했다.[9]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위기 동안 상하이 시 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상하이에서 일본군의 살해 시도를 간신히 피했다. 태평양 전쟁 동안 그는 영국의 전시 비밀 첩보 기관인 특수 작전 집행부의 중국 전선 사령관으로 복무했다.[9] 1941년 일본군에 의해 팔을 맞아 부상을 입었으며, 기업의 자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전후에는 런던 매터슨 상회의 전무이사, 허드슨 베이 회사의 회장, 잉글랜드 은행의 이사, 얼라이언스 보증의 부회장,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감독을 역임했다. 조각가 헨리 무어와도 친분이 있었으며, 케직 가문이 관리하는 땅에 그의 조각 몇 점이 놓여있다.
- '''존 케직 경 (1906-1982)'''
존 케직 경(1906-1982)은 1929년 상하이에 도착하여 자딘 매터슨 상회 상하이 지점에서 근무했다. 1930년대 교도통신의 전신인 동맹통신사의 상하이 지국장 마쓰모토 시게하루를 만나 교류했으며, 마쓰모토는 존 케직의 인맥을 통해 영국 신사들이 모이는 ‘상하이 클럽’에 가입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이 만주 폭격을 계획하자 경제적 손실을 우려한 존 케직은 영국에서 폭격 중지를 위한 로비 활동을 전개,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를 워싱턴 D.C.에 보내 폭격 중지를 실현시켰다. 전황 악화 시기에는 실론으로 피신했다.[10] 그는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의 첩보 책임자인 다이리 장군과 함께 특수 작전 집행부(SOE)에서 일했으며,[10] 전쟁 기간 동안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제독의 참모로 복무했다.[10]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자딘 매터슨의 본사는 홍콩으로 이전되었다.[10] 1954년 중국 대륙의 지점망이 모두 접수, 폐쇄되면서 2,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10]
1952년 홍콩 행정 위원회의 비관수(관직) 의원이 되었고,[10] 1953년 회장직을 사임, 1956년 매터슨 사에 참가했다.[10]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영중무역협회’(SBTC) 회장을 역임하며 중국과의 무역 재개에 힘썼다. 1972년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1973년 저우언라이 총리와 베이징에서 회담을 가졌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자딘 매터슨에서 대표권이 없는 회장직을 역임했다.[10]
전쟁 중 영국 정부의 첩보 업무를 담당했다는 설이 있으며,[17] 일본과 싸우는 중국을 지원할 목적으로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의 중국 활동을 지휘했다는 주장도 있다.[17]
존 케직은 거바즈 엘웨스의 막내 딸인 클레어 엘웨스와 1940년 결혼했다.[11] 외동딸 매기 케직(1941–1995)은 찰스 젱크스와 결혼했다.[11][18]
4. 1. 윌리엄 존스톤 "토니" 케직 (1903-1990)
윌리엄 존스톤 "토니" 케직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지만, 소년 시절에 영국으로 돌아와 윈체스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8] 1926년 극동으로 건너간 그는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자딘 상회 상하이 지점(중국 본점)에서 근무했다.[9]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위기 동안 상하이 시 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상하이에서 일본군의 살해 시도를 간신히 피했다. 태평양 전쟁 동안 그는 영국의 전시 비밀 첩보 기관인 특수 작전 집행부의 중국 전선 사령관으로 복무했다.[9] 1941년 일본군에 의해 팔을 맞아 부상을 입었으며, 기업의 자산은 모두 몰수되었다.전후에는 런던 매터슨 상회의 전무이사, 허드슨 베이 회사의 회장, 잉글랜드 은행의 이사, 얼라이언스 보증의 부회장,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감독을 역임했다. 조각가 헨리 무어와도 친분이 있었으며, 케직 가문이 관리하는 땅에 그의 조각 몇 점이 놓여있다.
4. 2. 존 케직 경 (1906-1982)
존 케직 경(1906-1982)은 1929년 상하이에 도착하여 자딘 매터슨 상회 상하이 지점에서 근무했다. 1930년대 교도통신의 전신인 동맹통신사의 상하이 지국장 마쓰모토 시게하루를 만나 교류했으며, 마쓰모토는 존 케직의 인맥을 통해 영국 신사들이 모이는 ‘상하이 클럽’에 가입했다.태평양 전쟁 발발 후, 미국이 만주 폭격을 계획하자 경제적 손실을 우려한 존 케직은 영국에서 폭격 중지를 위한 로비 활동을 전개,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를 워싱턴 D.C.에 보내 폭격 중지를 실현시켰다. 전황 악화 시기에는 실론으로 피신했다.[10] 그는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의 첩보 책임자인 다이리 장군과 함께 특수 작전 집행부(SOE)에서 일했으며,[10] 전쟁 기간 동안 버마의 마운트배튼 백작 루이 제독의 참모로 복무했다.[10]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자딘 매터슨의 본사는 홍콩으로 이전되었다.[10] 1954년 중국 대륙의 지점망이 모두 접수, 폐쇄되면서 2,0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10]
1952년 홍콩 행정 위원회의 비관수(관직) 의원이 되었고,[10] 1953년 회장직을 사임, 1956년 매터슨 사에 참가했다.[10]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영중무역협회’(SBTC) 회장을 역임하며 중국과의 무역 재개에 힘썼다. 1972년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된 후, 1973년 저우언라이 총리와 베이징에서 회담을 가졌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자딘 매터슨에서 대표권이 없는 회장직을 역임했다.[10]
전쟁 중 영국 정부의 첩보 업무를 담당했다는 설이 있으며,[17] 일본과 싸우는 중국을 지원할 목적으로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의 중국 활동을 지휘했다는 주장도 있다.[17]
존 케직은 거바즈 엘웨스의 막내 딸인 클레어 엘웨스와 1940년 결혼했다.[11] 외동딸 매기 케직(1941–1995)은 찰스 젱크스와 결혼했다.[11][18]
5. 4대
5. 1. 헨리 케직 (1938-)
헨리 네빌 린들리 케직(헨리)은 1938년 토니 케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1년 자딘 매터슨에 입사해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매니저를 역임했다. 1963년 홍콩의 중앙에 ‘만다린 홍콩’(현재의 만다린 오리엔탈 홍콩)을 오픈했다. 이것으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그룹의 시작이 된다.1967년에 이사, 1970년에 전무이사, 1972년부터 1975년까지 회장(6대 당주)을 역임했다. 1988년 지주회사 제도를 도입 ‘자딘 매터슨 홀딩스’를 런던에 설립했다. 런던증권거래소와 싱가포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5. 2. 칩스 케직 (1940-)
칩스 케직은 윌리엄 존 스톤 "토니" 케직의 차남으로 1940년에 태어났다. 런던의 상업은행인 함브로스 은행에서 근무했다. 2013년 6월 아스널 회장에 취임했다.5. 3. 사이먼 케직 (1942-)
사이먼 케직/사이먼 케즈윅영어(1942년 출생)은 1962년 자딘에 입사하여 1972년부터 이사로 근무했으며, 1977년 자딘을 떠나 마세손 상회에 합류했다. 1983년 자딘의 수석 전무 이사로 복귀했으며, 이후 아버지인 데이비드 뉴비깅이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대반(회장직)에 취임했다. 사이먼은 자딘의 재구성을 추진하여 보다 국제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그는 회사의 지주 회사가 버뮤다로 이전되고 회사의 고위 경영진 조직을 재구성한 후 1988년에 타이판으로 은퇴했다.6. 5대
2015년 현재에도 제5세대 일족이 자딘 매티슨을 상당히 지배하고 있으며,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하고 있다.[12]
그 가족은 여전히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5세대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12]
2013년 현재 제5세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족은 여전히 저딘 마테슨을 상당히 지배하고 있으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19]
- '''퍼시 웨더올 (1957-)'''
퍼시 웨더올(Percy Weatherall, 1957년생, 또는 Edward Percy Keswick Weatherall)은 헨리 케직(1870-1928)의 증손자이다. 1976년 자딘 매터슨에 입사하여 홍콩, 미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필리핀 등에서 주요 임원직을 역임했다. 1999년부터 자딘 매터슨 이사를 맡았고, 2000년부터 2006년 3월 31일까지 최고운영책임자(Managing Directer)를 역임했다. 타이판(회장직)이 되기 전에는 홍콩 랜드의 CEO였다.
- '''벤 케직 (1972-)'''
벤 케직은 사이먼 케직의 아들로 1972년에 태어났다. 1998년에 입사하여 INSEAD에서 MBA를 취득하기 이전에 데어리 팜과 홍콩 랜드의 요직을 역임했다. 2003년 자딘 퍼시픽의 최고재무책임자가 되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최고 경영자를 역임했다. 2007년 4월 경영에 참여하고 자딘 사이클 앤 캐리지의 전무이사가 되었고, 2012년 4월에는 자딘 매서슨의 타이판(회장직)이 되었다. 그는 또한 사이클 앤 캐리지 빈탕과 MCL 랜드에서 고위 지도자 직책을 맡고 있으며, 아스트라와 유나이티드 트랙터스의 이사직을 겸임하고 있다.
- '''아담 케직 (1973-)'''
아담 케직은 1973년에 칩스 케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딘 퍼시픽과 자딘 모터스 그룹의 최고 경영자이다. 2007년 4월 이사회에 합류했으며, 2001년 N M 로스차일드 & 선스에서 그룹에 합류한 후, 그룹 재무부와 자딘 퍼시픽에서 직책을 맡았다. 2003년 자딘 사이클 앤 캐리지의 그룹 전략 이사로 임명되었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그룹 전무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또한 자딘 매더슨 리미티드의 이사이기도 하다.
6. 1. 퍼시 웨더올 (1957-)
퍼시 웨더올(Percy Weatherall, 1957년생, 또는 Edward Percy Keswick Weatherall)은 헨리 케직(1870-1928)의 증손자이다. 1976년 자딘 매터슨에 입사하여 홍콩, 미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필리핀 등에서 주요 임원직을 역임했다. 1999년부터 자딘 매터슨 이사를 맡았고, 2000년부터 2006년 3월 31일까지 최고운영책임자(Managing Directer)를 역임했다. 타이판(회장직)이 되기 전에는 홍콩 랜드의 CEO였다.6. 2. 벤 케직 (1972-)
벤 케직은 사이먼 케직의 아들로 1972년에 태어났다. 1998년에 입사하여 INSEAD에서 MBA를 취득하기 이전에 데어리 팜과 홍콩 랜드의 요직을 역임했다. 2003년 자딘 퍼시픽의 최고재무책임자가 되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최고 경영자를 역임했다. 2007년 4월 경영에 참여하고 자딘 사이클 앤 캐리지의 전무이사가 되었고, 2012년 4월에는 자딘 매서슨의 타이판(회장직)이 되었다. 그는 또한 사이클 앤 캐리지 빈탕과 MCL 랜드에서 고위 지도자 직책을 맡고 있으며, 아스트라와 유나이티드 트랙터스의 이사직을 겸임하고 있다.6. 3. 아담 케직 (1973-)
아담 케직은 1973년에 칩스 케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딘 퍼시픽과 자딘 모터스 그룹의 최고 경영자이다. 2007년 4월 이사회에 합류했으며, 2001년 N M 로스차일드 & 선스에서 그룹에 합류한 후, 그룹 재무부와 자딘 퍼시픽에서 직책을 맡았다. 2003년 자딘 사이클 앤 캐리지의 그룹 전략 이사로 임명되었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그룹 전무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또한 자딘 매더슨 리미티드의 이사이기도 하다.7. 가계도
윌리엄 자딘(1784–1843)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앤드루 자딘 (1750년경 출생-1793년 사망) | ||
---|---|---|
데이비드 자딘 (1776-1827) | 진 자딘 (1774-1856) | 윌리엄 자딘 (1784–1843) |
데이비드 자딘 (1818–1856) | 조셉 자딘 (1822–1861) | 로버트 자딘 (1825–1905) |
제임스 자딘-패터슨 (1845–1893) | 윌리엄 케즈윅 (1834–1912) | J.J.J. 케즈윅 (1842–1904) |
로버트 자딘-패터슨 (1878–1942) | 헨리 케즈윅 (1870–1928) | 제임스 존스톤 케즈윅 (1845–1914) |
데이비드 자딘 패터슨 (1912년 출생) | 윌리엄 존스톤 "토니" 케즈윅 (1903–1990) | 존 "더 영거" 케즈윅 (1906–1982) |
존 크리스토퍼 루퍼트 부캐넌-자딘 (1952년 출생) | 헨리 케즈윅 (1938년 출생) | 사이먼 린들리 케즈윅 (1942년 출생) |
제이미 루퍼트 부캐넌-자딘 (1994년 출생) | 에드워드 "퍼시" 웨더올 (1957년 출생) | 아담 케즈윅 (1973년 출생) |
버트람 웨더올 (1989년 출생) | 에다 로즈 케즈윅 (2008년 출생) | 벤자민 윌리엄 케즈윅 (1972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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