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콘스탄티누스 갈루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콘스탄티누스 갈루스는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갈라 사이에서 태어난 로마 제국의 인물이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형제의 아들이자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의 이종사촌이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그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누이 콘스탄티나와 결혼시켰으나, 354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사카라라도 출신 - 토토 쿠투뇨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사회자인 토토 쿠투뇨는 산레모 가요제 우승,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 그리고 "L'Italiano"를 포함한 여러 히트곡 작곡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 마사카라라도 출신 - 엔리코 알베르토시
    엔리코 알베르토시는 이탈리아의 골키퍼로, 세리에 A에서 활약하며 칼리아리, AC 밀란 소속으로 우승을 경험했고,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으로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과 월드컵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세리에 A 통산 532경기에 출전했다.
  • 콘스탄티누스 왕조 -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황제로,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황제가 되었고,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으며,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 교리 정립에 기여했다.
  • 콘스탄티누스 왕조 -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고 사산 제국과의 전쟁과 내전을 겪었으며, 율리아누스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콘스탄티누스 갈루스
기본 정보
금화에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묘사됨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솔리두스. constantius }}라고 표시됨
출생 이름갈루스
출생325년 또는 326년
출생지마사 웨테르넨시스, 에트루리아
사망354년 (28세)
사망 장소폴라
배우자콘스탄티나
자녀아나스타시아 (외동딸)
왕조콘스탄티누스
아버지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어머니갈라
통치 정보
칭호카이사르
재위 기간351년 3월 15일 – 354년
즉위명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우스 노빌리시무스 카이사르
종교
종교기독교

2. 가계

갈루스는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첫 번째 아내 갈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갈라는 331/2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갈루스의 부계 조부모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 번째 아내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였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부계 이복 형제였고, 따라서 갈루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의 이종사촌이었다.

갈루스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나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첫 번째 아내였고, 역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형은 콘스탄티누스 1세 사망 후 숙청 과정에서 사망했다.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 바실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복 남동생은 율리아누스로 널리 알려진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솔리두스'' 주화 뒷면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티케 (오른쪽)와 로마의 티케 (왼쪽)가 ("''공화국의 영광''") 문구와 함께 묘사되어 있다.


{| class="wikitable"

|-

! colspan="6" |콘스탄티누스 왕조 가계도

|-

|

|-

|

콘스탄티우스 1세와 막시미아누스의 가계도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유트로피아막시미아누스
서방 황제
테오도라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
서방 황제
250-305-306
헬레나
250–330
콘스탄티누스 1세 가계도
콘스탄티아
293–330
∞ 리키니우스
250-308-324-325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
272-306-337
파우스타
289–326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d. 337
∞ 2.바실리나
미네르비나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감찰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1세 가계도
달마티우스
카이사르
한니발리아누스(1)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율리아누스 배교자
331-360-363
헬레나
d. 360
콘스탄티나
∞ 1.한니발리아누스
2.콘스탄티우스 갈루스
콘스탄티누스 2세
서방 황제
316-337-340
콘스탄스 1세
서방 황제
320-337-350
콘스탄티우스 2세
317-337-361
∞ 파우스티나
크리스푸스
d. 326



|}

2. 1. 콘스탄티누스 왕조 가계도

{| class="wikitable"

|-

! colspan="6" |콘스탄티누스 왕조 가계도

|-

|

|-

|

콘스탄티우스 1세와 막시미아누스의 가계도
아프라니우스 한니발리아누스유트로피아막시미아누스
서방 황제
테오도라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
서방 황제
250-305-306
헬레나
250–330
콘스탄티누스 1세 가계도
콘스탄티아
293–330
∞ 리키니우스
250-308-324-325
콘스탄티누스 1세 대제
272-306-337
파우스타
289–326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d. 337
∞ 2.바실리나
미네르비나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감찰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1세 가계도
달마티우스
카이사르
한니발리아누스(1)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율리아누스 배교자
331-360-363
헬레나
d. 360
콘스탄티나
∞ 1.한니발리아누스
2.콘스탄티우스 갈루스
콘스탄티누스 2세
서방 황제
316-337-340
콘스탄스 1세
서방 황제
320-337-350
콘스탄티우스 2세
317-337-361
∞ 파우스티나
크리스푸스
d. 326


3. 생애

3. 1. 유년기

갈루스는 아버지의 추방이 끝난 후 이탈리아의 ''마사 베테르넨시스''에서 태어났다. 갈루스의 아버지와 그의 형은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죽음 이후 제국 가족에게 일어난 숙청으로 살해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갈루스 자신은 콘스탄티누스 1세와 파우스타의 세 아들 외에 살해되지 않은 유일한 황실 남성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갈루스의 어린 이복 형제인 율리아누스와 그들의 사촌 네포티아누스였는데, 그들은 당시 매우 어렸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갈루스는 매우 잘생겼으며, 특히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을 언급했다.[1]

갈루스가 청소년기를 어디에서 보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한 가지 견해는 그가 340년까지 니코메디아에서 에우세비우스 니코메디아 주교의 보살핌을 받으며 율리아누스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고,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는 그를 따라 그곳으로 가야 했다. 341년 에우세비우스가 사망한 후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카파도키아의 마켈룸에 있는 황실에서 계속 공부하도록 보냈다고 여겨진다. 다른 견해는 자료에 대한 힌트를 통해 갈루스가 공부를 위해 에페소스로 보내진 다음 트랄레스에서 일종의 망명을 했고, 거기에서 마켈룸의 황실로 보내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폴리스'', 승리에게서 황제가 관을 받고 ''벡실룸''을 들고 있으며, ''키로''가 새겨져 있다.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그의 징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HOC SIGNO VICTOR ERISla

3. 2. 부제(Caesar) 시절 (351년 - 354년)

350년,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황위를 주장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와 싸울 준비를 하면서 동방에 자신의 대리인이 필요했다. 그는 시르미움에 있던 갈루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351년 3월 15일), "콘스탄티우스"라는 이름을 주었다.[2] 또한 자신의 누이 콘스탄티나와 결혼시켜 사촌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했다.[2]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에 거주했다.[2]

354년 연대기 사본에 묘사된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갈루스는 유다/팔레스타인에서 파트리키우스와 디오세사레아의 이삭이 이끈 유대인 반란(갈루스에 대한 유대인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2] 이 반란은 갈루스가 카이사르로 임명되기 전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장군 우르시시누스가 진압하여 모든 반란군을 처형했다.[2]

갈루스는 한 여성의 도움으로 암살 음모에서 벗어났는데, 일부 자료에서는 이 음모가 콘스탄티우스를 혼란시키기 위해 마그넨티우스가 조직했다고 주장한다.[2] 필로스토르기우스는 갈루스의 장군들이 사산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자료들은 샤푸르 2세가 동쪽의 훈족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사산 왕조와 로마 사이의 거의 평화로운 상황을 근거로 이 주장을 일축한다. 353년, 샤푸르의 메소포타미아 부관인 노호다레스가 바트나에 마을을 기습하려 했지만, 그의 군대 내 일부 인물들의 배신으로 실패했다.[2] 같은 해, 갈루스는 연안 지역을 약탈하고 있던 이사우리아인들을 상대로 동방 백작 네브리디우스를 파견했고, 그들은 셀레우키아 온 칼리키드누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네브리디우스가 접근하자 흩어졌다.[2]

페르시아 원정을 위한 군대의 식량 조달 필요성이나 가뭄으로 인해 안티오키아의 곡물 공급이 감소했고, 곡물 가격이 상승했다. 갈루스는 원로원의 의견에 관계없이 일부 법률을 강제로 통과시켰고, 이로 인해 안티오키아의 원로원 계급은 소외되었다.[2]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기근으로 인해 안티오키아 백성의 분노가 갈루스에 의해 시리아의 집정관 테오필루스로 향하게 되었고, 그가 군중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한다.[2]

암미아누스는 또한 갈루스와 콘스탄티나가 마법을 이유로 많은 부유한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고 보고한다. 그는 갈루스가 밤에 안티오키아를 익명으로 걸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카이사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율리아누스는 갈루스가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히포드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한다.

콘스탄티우스는 사촌의 충성심에 의심을 품고 갈루스 휘하의 군대를 줄이고, 프라이토리아 총독 도미티아누스를 안티오키아로 보내 갈루스에게 이탈리아로 갈 것을 촉구했다. 여러 자료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지만, 모두 갈루스가 도미티아누스와 그를 돕기 위해 온 퀘스토르 몬티우스 마그누스를 체포했으며, 두 장교가 살해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2]

몬티우스 마그누스의 체포는 갈루스의 지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로 보이는 사건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공모자들은 봉기를 위한 무기를 약속한 두 명의 ''tribuni fabricarum'' (무기 공장 장교)의 지원을 받았고,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군대와 포이니케 속주의 총독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2] 이 음모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모든 사람, 심지어 많은 무고한 사람들까지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2]

3. 3. 몰락과 죽음 (354년)

콘스탄티우스는 알레만니에 대한 원정 중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난 반역 재판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게르만족과의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 콘스탄티우스는 사촌과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그는 갈루스를 선동하여 반란과 자신의 아들을 찬탈할 기회를 만들었다고 의심되는 우르시키누스를 서쪽으로 소환했다.

다음으로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와 콘스탄티나를 메디올라눔으로 소환했다. 콘스탄티나는 오빠의 신뢰를 얻기 위해 먼저 떠났지만, 비티니아의 카에니 갈리카니에서 열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콘스탄티우스와의 유대가 약해진 갈루스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렀다.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를 유인하기 위해, ''호위대장 트리부누스'' 스쿠딜로를 보내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높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갈루스는 콘스탄티우스의 미끼를 물고 그를 만나기 위해 안티오키아를 떠났다. 갈루스는 콘스탄티노폴의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를 열고 우승자에게 관을 씌워주었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에게만 허용되는 영예였다. 이 무례함에 콘스탄티우스는 격분했다. 갈루스를 군사적 보호로부터 더욱 고립시키기 위해 콘스탄티우스는 갈루스의 경로에 있는 도시에서 수비대를 철수시켰다.

갈루스가 노리쿰의 포에토비오에 도착했을 때, 콘스탄티우스의 궁정에서 갈루스의 해임을 지지했던 장교 바르바티오가 카이사르의 궁전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했다. 그는 갈루스에게 황제의 옷을 벗겼지만,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갈루스는 폴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그는 환관 ''사크리 큐비쿨리 직위자'' 에우세비우스와 ''사건 담당관'' 아포데미우스를 포함한 콘스탄티우스 궁정의 고위 관리들에게 심문을 받았다. 갈루스는 자신의 모든 행동의 책임을 콘스탄티나에게 전가하려 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황제는 나중에 마음을 바꿔 갈루스를 살려두라고 명령했지만, 에우세비우스는 이 명령이 처형인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았다.

참조

[1] 서적 Res Gestae
[2] 서적 Res Gesta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