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데리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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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킬데리쿠스 1세는 435년경에 태어난 살리 프랑크족의 왕으로, 메로베우스의 아들이며 클로비스 1세의 아버지이다. 그는 방탕한 사생활로 인해 추방당하기도 했으나, 458년경 프랑크족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했다. 킬데리쿠스는 고트족, 색슨족 등과 전투를 벌였으며, 481년 또는 482년에 사망하여 투르네에 매장되었다. 그의 무덤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황금 벌 장식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제1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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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데리쿠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킬데리쿠스 1세 |
원래 이름 | Childericus I (라틴어) |
Childéric | Childéric (프랑스어) |
Flavius Childericus | Flavius Childericus (라틴어) |
출생 | 440년경 |
사망 | 481년경 |
사망 장소 | 투르네 (벨기에) |
매장 장소 | 투르네 (벨기에) |
![]() | |
정치 | |
작위 | [[파일:Heraldic eastern crown.svg|가운데|30px|link=프랑크인의 왕]]살리 프랑크인의 왕 |
재위 | 457년–481년/482년경 |
전임자 | 메로베우스 |
후임자 | 클로비스 1세 |
가문 | |
왕조 | 메로베우스 왕조 |
아버지 | 메로베우스 |
배우자 | 튀링겐의 바시나 |
자녀 | 클로비스 1세 아우도플레다 란틸데 알보플레디스 |
2. 생애
킬데리쿠스 1세의 즉위 날짜는 기록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456년 12월 아비투스 황제가 사망한 이후로 추정된다.[5] 507년의 부예 전투는 확실한 날짜인데, 투르의 그레고리의 다른 기록들은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5]
킬데리쿠스는 주로 갈로-로마 장군 아에기디우스와 관련된 루아르 강 주변의 로마 군사 작전과 관련되어 있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킬데리쿠스는 프랑크족이 그의 방탕함과 신하의 딸들을 유혹한 행위에 불쾌감을 느껴 8년 동안 튀링기아로 추방되었다.[7] 그동안 아에기디우스 자신이 프랑크족의 왕 칭호를 사용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킬데리쿠스는 자신의 주최자의 아내인 바시나 여왕과 합류하여 아들 클로비스 1세를 낳았다.[8]
가이 헐설은 이 이야기를 로마 정치와 연결시키는데, 아에기디우스는 마요리아누스의 지명자였다고 설명한다. 헐설은 킬데리쿠스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부하로 로마 군 경력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9][10]
투르의 그레고리는 463년에 킬데리쿠스와 아에기디우스가 테오도리쿠스 2세의 서고트족을 오를레앙에서 루아르 강으로 성공적으로 격퇴했다고 기록했다. 아에기디우스가 사망한 후, 킬데리쿠스와 ''코메스'' ("백작") 폴은 루아르 지역을 색슨족의 약탈로부터 방어했다. 킬데리쿠스와 폴은 아도바크리우스라는 지도자의 지휘 하에 색슨족과 싸웠다. 이 색슨족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루아르 지역 어딘가에 있는 섬에 기반을 둔 것으로 묘사된다.
투르의 그레고리는 킬데리쿠스가 알레만니족에 대항하여 "오도바크리우스"와 협력했다고 보고한다.
2. 1. 초기 생애와 추방
킬데리쿠스 1세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포함한 몇몇 사료에서 메로베우스 1세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5] 그레고리우스는 메로베우스가 실비아 카르보나리아, 투르네, 캉브레, 남쪽으로는 솜강까지 로마령 갈리아 영토를 최초로 정복한 초기 프랑크족 왕 클로디오의 후손이라고 언급했다.킬데리쿠스는 방탕한 생활과 신하들의 딸을 유혹한 것에 대한 프랑크족의 혐오로 8년간 튀링겐으로 추방당했다.[46] 이 기간 동안 튀링겐의 왕 바신과 그의 아내 바시나에게 의탁했다. 한편, 아이기디우스는 프랑크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47]
2. 2. 귀환과 통치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데리쿠스는 방탕한 생활과 신하들의 딸을 유혹한 것에 대한 프랑크족의 혐오로 8년간 투링기아로 추방당하였다.[46] 추방에서 돌아온 킬데리쿠스는 망명국의 국왕 아내인 바시나 왕비와 같이 돌아왔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비스 1세를 가졌다.[47]킬데리쿠스는 루아르강 일대 로마의 군사 활동과 주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그는 갈로로마인 장군 아이기디우스가 관여된 기록들에서 등장한다. 463년, 킬데리쿠스와 아이기디우스는 오를레앙에서 서고트족의 테오도리크 2세 군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24][20] 아이기디우스가 죽은 후, 킬데리쿠스는 앙제의 코메스였던 파울루스와 함께 색슨족 약탈자들로부터 루아르 지역을 방어했다.[30] 이 색슨족들은 에우리크 휘하의 고트족들과 손을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킬데리쿠스와 파울루스는 '아도바크리우스'라는 이름의 지도자가 이끄는 색슨족과 교전하였다. 하지만 이 색슨족의 기원은 불분명하며, 이들은 루아르 지역 어딘가에 있는 섬들을 본거지로 하고 있다고 묘사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킬데리쿠스가 이탈리아에 침입한 알레만니족에 대항하여, 당시에 이탈리아의 왕으로 추측되는 '오도바크리우스'와 손을 잡았다고도 하였다.[19]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내 | 바시나 | 튀링겐의 왕 바신의 아내[22] |
아들 | 클로비스 1세 | 511년 사망. 바시나의 아들. |
딸 | 아우도플레다 |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아내이자 동고트족의 왕비. |
딸 | 란테킬드 | 아리우스파 신자였으나 클로비스 1세와 같이 가톨릭으로 개종. |
딸 | 알보플레다 | 클로비스 1세가 세례를 받고 얼마 안 되어 사망. |
4. 죽음과 무덤
킬데리쿠스는 481년 또는 482년에 사망하여 투르네에 매장된 것으로 여겨진다.[50] 1653년, 투르네의 12세기 생 브리스 교회 근처에서 킬데리쿠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51][52] 무덤에서는 금과 석류석 칠보 장신구, 금화, 황금 소 조각상, 왕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 등 수많은 귀중품이 출토되었다.[51] 특히, 왕의 망토에 부착된 약 300개의 금으로 만든 벌 모양 장식도 발견되었는데,[51] 이 벌 모양 장식은 훗날 나폴레옹에게 영감을 주어 프랑스 제1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이 발견을 라틴어로 출판하도록 했고, 유물은 합스부르크가로 보내졌다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루이 14세는 이 보물에 큰 감명을 받지 못하고 혁명기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된 왕가 도서관에 보관하였다.
1831년 11월 5일 밤, 킬데리쿠스의 보물 중 약 80kg이 도난당해 금으로 녹여졌다. 황금 벌 두 개를 포함한 몇몇 조각들은 센강에 숨겨진 곳에서 회수되었다. 하지만 현재 유물에 대한 기록은 발견 당시에 제작된 판화와 합스부르크가에서 만든 일부 복제품만이 존재할 뿐이다.[53]
5. 역사적 의의와 평가
킬데리쿠스 1세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시조 메로베우스의 아들로, 프랑크족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45] 그는 로마 제국 쇠퇴기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프랑크족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몇몇 사료에 따르면, 킬데리쿠스는 방탕한 생활로 인해 프랑크족에게서 8년간 추방당했다가[46]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투링기아로 추방되었을 때 그곳의 왕비 바시나와 함께 돌아왔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훗날 프랑크 왕국을 크게 확장하는 아들 클로비스 1세를 낳았다.[47]
킬데리쿠스 1세는 갈리아 지역에서 서고트족, 색슨족, 알레만니족 등과 전투를 벌이며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오도아케르와 협력하여 알레만니족의 이탈리아 침공을 저지하기도 했다.[20][31]
나폴레옹은 킬데리쿠스 1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벌 모양 장식에서 영감을 받아 프랑스 제1제국의 상징으로 삼았다.[54][12][34] 이는 킬데리쿠스 1세가 프랑스 역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위치를 보여준다.
5. 1. 로마 제국과의 관계
킬데리쿠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쇠퇴기 속에서 활동하면서도, 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랭스 주교 레미기우스는 킬데리쿠스가 로마 제국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제2 갈리아 벨기카의 통치자로 로마의 칭호를 받았다고 언급했다.[23]463년,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2세가 로마 황제세베루스 3세의 명령으로 수아송 관구로 침공을 시작하자 킬데리쿠스 1세는 수아송 관구의 장군 아이기디우스를 지원하여 테오도리크 2세의 동생을 전사시키고 테오도리크 2세를 격퇴했다.[24][20] 아이기디우스가 죽은 후 킬데리쿠스 1세는 앙제의 코메스였던 파울루스를 지원했다.[30] 파울루스는 로마인과 프랑크족과 함께 고트족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획득했다.[29] 오도아케르가 지휘하는 색슨족이 앙제를 점령했지만, 킬데리쿠스 1세는 469년에 앙제를 되찾았다.[30] 앙제를 해방시킨 킬데리쿠스 1세는 루아르 강의 대서양 쪽 하구 섬까지 색슨족을 쫓아가 학살했다.[30] 476년에서 481년 사이에 킬데리쿠스 1세는 오도아케르와 연합하여 이탈리아 침공을 계획한 알레만니족에 대항했다.[20][31]
5. 2. 프랑크족의 발전과 킬데리쿠스
킬데리쿠스 1세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포함한 몇몇 사료에서 메로베우스 왕조의 시조인 메로베우스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5]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메로베우스가 실비아 카르보나리아와 투르네, 캉브레, 그리고 남쪽으로는 솜강까지 로마령 갈리아 영토를 정복한 초기 프랑크족 왕 클로디오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벨기카 세쿤다 속주와 거의 비슷하며, 훗날 성 레미기우스가 킬데리쿠스의 아들 클로비스 1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킬데리쿠스가 이 로마 속주의 최고 행정관이었음을 암시한다.킬데리쿠스는 루아르강 일대 로마의 군사 활동과 주로 연관되어 있으며, 갈로로마인 장군 아이기디우스와 관련된 기록에서 등장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데리쿠스는 방탕한 생활과 신하들의 딸을 유혹한 것에 대한 프랑크족의 혐오로 8년간 투링기아로 추방당하였다고 한다.[46] 그동안 아이기디우스는 프랑크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킬데리쿠스는 추방에서 돌아온 후, 망명국의 왕비 바시나와 함께 돌아왔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비스를 낳았다.[47]
가이 할샐은 이 이야기를 아이기디우스가 마요리아누스에게 임명받았다는 로마의 정치 상황과 연결시켰다. 할샐은 킬데리쿠스가 아틸라를 격퇴시킨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 밑에서 로마의 군사 경력을 시작했을 것이라 추측하며, 그의 군사 경력 대부분이 프랑크족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Ulrich Nonn은 킬데리쿠스가 클로디오가 정복한 로마화된 지역들을 기반으로 한 '살리 프랑크족' 혹은 '벨기에 프랑크족'의 지도자였고, 아이기디우스의 지배 하에 있던 동맹들이었지만, 마침내 그와 그의 제국 후원자가 죽자 그의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킬데리쿠스의 아들 클로비스 1세는 이후에 아이기디우스의 아들 시아그리우스와 충돌했는데, 시아그리우스는 로마인들의 왕이라 기억되었고, '벨기카 세쿤다' 남쪽의 수아송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463년에 킬데리쿠스와 아이기디우스는 루아르의 오를레랑에서 테오도리크 2세가 이끈 서고트족 병력을 물리쳤다. 아이기디우스가 죽은 후, 킬데리쿠스와 파울루스 백작은 색슨족 약탈자들로부터 루아르를 지켰는데, 이 색슨족들은 에우리크 휘하의 고트족들과 손을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킬데리쿠스와 파울루스는 아도바크리우스라는 지도자가 이끄는 색슨족과 교전하였다. 이 색슨족의 기원은 불분명하며, 루아르 지역 어딘가에 있는 섬들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다고 묘사된다.
킬데리쿠스는 알레만니족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왕으로 추측되는 오도아케르와 손을 잡았다고 한다.
5. 3. 나폴레옹과의 연관성
나폴레옹은 카페 왕조의 백합 문장을 능가할 문장을 찾던 중, 킬데리쿠스 1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벌 모양 장식을 프랑스 제1제국의 상징으로 결정했다.[54][12][34] 1804년 6월 생클루 성에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캉바세레스의 제안으로 벌을 상징으로 승인했으며,[54] 이 디자인은 루브르 박물관장 비방 드농이 제작했다.[54]나폴레옹은 킬데리쿠스 1세의 벌에 깊은 인상을 받아 부르봉 왕가의 플뢰르 드 리스보다 나은 상징을 찾고 있었고, 결국 킬데리쿠스 1세의 벌을 프랑스 제1제정의 상징으로 정했다.[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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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년이라는 시기는 톨리비아크 전투를 기점으로 추정하여 나온 것이며,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이 전투가 클로비스 재위 15년 때 벌어졌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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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프랑크족의 역사', II.9. 후대 중세 사료들에서는 이에 대해 항상 동의한 것은 아니며, 대표적으로 킬데리쿠스가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메로베우스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제시되었다. Étienne Renard (2014). "Le sang de Mérovée. 'Préhistoire' de la dynastie et du royaume mérovingiens". Revue belge de Philologie et d'Histoire 92–94 pp. 999–10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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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링기아라는 용어는 현존하는 그레고리우스의 문서에서 클로디오의 본래 본거지가 위치했던 라인강의 로마쪽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이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이 지역은 통에런의 키비타스 퉁그로룸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여러 현대 학자들은 투링기아라는 이름이 오늘날 튀링겐(투링기아)라고 부르는 지역에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는, 바이마르에서 '바시나'라는 이름이 있는 숫가락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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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the Fr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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