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수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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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탑수스 전투는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원로원파 간에 벌어진 전투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내전 중 중요한 사건이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아프리카로 건너가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격돌했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기병을 활용한 독특한 전술로 승리했으며, 누미디아는 멸망하고 스키피오는 전사했다. 이 전투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로 한 걸음 더 다가섰고, 이후 카토의 자결로 원로원파는 붕괴되었다. 탑수스 전투는 서방에서 전투 코끼리가 대규모로 사용된 마지막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로마 공화정의 종말과 제정 시대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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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수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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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 탑수스 전투 |
일부 | 카이사르의 내전 |
![]() | |
날짜 | 기원전 46년 4월 6일 (율리우스력) |
장소 | 탑수스(튀니지) |
결과 | 카이사르 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평민파 |
교전 2 | 귀족파 누미디아 |
지휘관 | |
지휘관 1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지휘관 2 | 메텔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유바 1세 티투스 라비에누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함대 지휘관) 베르길리우스 (탑수스 수비대 지휘관) |
병력 규모 | |
병력 1 | 50,000−70,000 (최소 12개 군단), 기병 5,000 |
병력 2 | 70,000−90,000 (최소 12개 군단), 기병 14,500 유바의 동맹군 (전투 코끼리 60마리 포함) |
부대 정보 | |
부대 1 | 레기오 제5 (5군단) 레기오 제7 (7군단) 레기오 제8 (8군단) 레기오 제9 (9군단) 레기오 제10 (10군단) 레기오 제13 (13군단) 레기오 제14 (14군단) 레기오 제25 (25군단) 레기오 제26 (26군단) 레기오 제28 (28군단) 레기오 제29 (29군단) 레기오 제30 (30군단) 갈리아 보조 기병대 게르만 보조 기병대 가에툴리아 보조 기병대 |
부대 2 | 원로원파 군대 유바 군대 |
피해 규모 | |
피해 1 | 약 1,000명 |
피해 2 | 약 10,000명 |
2. 전투 전 상황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고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살해당했지만,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토를 중심으로 라비에누스, 아프라니우스 등 여러 장군들과 원로원파 의원들은 아프리카에 모여 카이사르에게 대항하기 위한 힘을 모으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그리고 누미디아의 왕 유바 1세도 이들의 동맹 세력이었다.[4]
카이사르는 동방과 그리스 원정을 마치고 잠시 로마에 들렀다가 기원전 47년 12월 말 아프리카에 상륙했다. 초기에는 몇 번의 소규모 전투만 벌어졌고,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자신의 진영인 우티카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 카이사르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자, 마침내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2. 1. 카이사르의 내전 발발과 폼페이우스의 죽음
기원전 49년, 로마 공화국의 마지막 내전이 시작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자신의 정치적 적들이 그를 체포하고 기소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4] 갈리아에서의 적대 행위가 끝난 후 군대를 해산하라는 로마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제13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는데, 이는 명백한 로마법 위반이었다. 옵티마테스는 군대를 조직하지 못했고, 로마 시 자체를 카이사르로부터 방어할 능력이 없었기에 폼페이우스의 지휘 아래 그리스로 도망쳤다. 카이사르가 이끄는 포풀라레스는 그 뒤를 따랐지만,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고 디라키움 전투에서 패배했다. 여전히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카이사르는 전열을 정비하여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 휘하의 옵티마테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폼페이우스는 그 후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카이사르가 당황스럽게도 폼페이우스는 암살당했다.[4]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집트에서 원로원파의 총대장이었던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후에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소 카토)를 중심으로,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및 폼페이우스 형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미노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등 원로원파는 아프리카 속주의 우티카를 거점으로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연계하여 카이사르파에 저항하였다.
싸움을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남은 옵티마테스는 마우레타니아의 아프리카 속주에서 재집결했다. 그들의 지도자는 마르쿠스 카토 (젊은 카토)와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였다. 저항의 다른 핵심 귀족 인물로는 티투스 라비에누스,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섹스투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형제 (폼페이우스의 아들)가 있었다. 누미디아의 유바 1세 왕은 귀중한 현지 동맹이었다.
2. 2. 아프리카에서의 원로원파 결집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당했다. 하지만 라비에누스, 아프라니우스등 나머지 장군들과 원로원파 의원들은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토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에 모여 카이사르에게 대항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도 합류하였다. 누미디아의 왕 유바 1세도 중요한 동맹군이었다.[4] 원로원파는 신속하게 대군을 편성하여 대략 10개 군단과 동맹 누미디아 4개 군단, 유명한 누미디아 기병 6,000명을 포함한 15,000명의 기병을 보유하게 되었다.[5]2. 3.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상륙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당했지만,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토를 중심으로 한 원로원파는 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동맹을 맺고 10개 군단과 누미디아 4개 군단, 15,000명의 기병을 포함한 대군을 편성하여 저항했다.[5]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12월 말, 시칠리아 릴리바에움에 6개 군단을 집결시키고 아프리카로 향했다.[5] 로마에서 4개 군단이 추가로 오고 있었다.[6] 12월 28일, 카이사르는 하드루메툼 근처에 상륙했지만, 폭풍으로 인해 병력이 흩어져 보병 3,000명과 기병 150명만 남게 되었다.
하드루메툼은 강력한 옵티마테스 수비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카이사르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병력과 물자가 부족했던 카이사르는 남쪽으로 이동하며 적 기병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루스피나에 도착하여 작전 기지로 삼았다.
기원전 46년 1월 1일, 카이사르는 렙티스(Leptis)로 이동하여 증원군과 합류했다. 1월 4일에는 식량 조달을 위해 루스피나를 출발, 루스피나 전투에서 옵티마테스 군대와 교전하여 승리했다.[7] 이후 카이사르는 루스피나 주변에서 방어 시설을 강화하며 증원군을 기다렸다.
살루스티우스가 세르키나 섬에서 옵티마테스의 곡물 공급을 확보하고, 제13군단과 제14군단이 루스피나에 도착하면서 카이사르는 공세로 전환했다. 그는 루스피나 근처 소규모 전투에서 옵티마테스의 기병대를 격파하고, 누미디아의 유바 1세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옵티마테스에게 중요한 물 공급원이었던 우지타(Uzitta)로 진격하여 전투를 강요하려 했다. 유바 1세가 합류하여 병력이 13개 군단으로 늘어났지만,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의 진지를 공격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우지타까지 요새선을 건설하고 투석기 등으로 공격하여 옵티마테스 병사들의 전향을 유도했다.
제7군단과 제8군단이 도착하여 병력이 12개 군단으로 늘어난 카이사르는 보급 문제로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식량을 구했다. 그는 키스피우스와 아퀼라가 이끄는 함대를 보내 하드루메툼과 탑수스를 봉쇄하고, 아가르와 제타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확보했다. 옵티마테스는 우세한 기병을 이용하여 카이사르를 괴롭혔다.
3. 전투
기원전 46년 4월 6일(다른 사료에는 2월 6일) 양군은 탑수스에서 맞붙었다. 카이사르의 양쪽 끝 코끼리 부대는 적의 코끼리를 효과적으로 무력화하였고, 성난 코끼리는 아군의 진형을 흐뜨려 놓았다.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적의 기병도 카이사르 정예 보병과 중앙을 재빨리 돌파한 기병에 의해 포위되어 전멸했다. 전열이 무너지자 메텔루스의 보병도 흩어지고 달아나 버렸다. 카이사르는 지체 없이 적을 추격하는 한편 누미디아 증원군을 상대하러 진출했는데, 누미디아군은 탑수스 전투의 승패가 갈리자 모두 도망쳤고, 누미디아 왕 유바는 이미 카이사르에게 기울어진 도시들이 피난을 거부하여 자살했다.
2월 초, 카이사르는 탑수스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이중 환호선으로 둘러쌌다. 그의 함대는 이미 도착하여 바다에서 탑수스를 봉쇄하고 있었다. 도시 밖에는 목닌 늪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육로 접근은 두 곳으로 제한되었다. 카이사르는 남쪽 접근로에 요새를 건설하고 세 개의 코호트 병력으로 방어했다. 메텔루스 시피오가 이끄는 옵티마테스 군은 카이사르의 남쪽 요새를 공격하지 않고 동쪽 접근로로 행군하기로 결정했다. 시피오는 아프라니우스와 소수의 병사들에게 요새 맞은편에 자리를 잡도록 명령했고, 유바와 라비에누스에게는 누미디아 기병대를 늪 남쪽에 야영하도록 명령했다. 주력 부대는 동쪽 접근로까지 행군하여 카이사르 군 맞은편에 야영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시피오는 작업 인력을 보호하기 위해 나머지 군대를 전투 대형으로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옵티마테스 군의 병사들이 하루 종일 행군하느라 피로하다는 것을 알고, 휴식을 취한 자신의 군대를 배치하여 그들과 맞섰다.
3. 1. 양측의 병력 배치
기원전 46년 4월 6일(다른 사료에는 2월 6일) 양군은 탑수스에서 맞붙었다. 카이사르는 종래의 진형과는 다르게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보병과 갈리아 병사를 나누어 배치했다. 특히 가장 먼 왼쪽과 오른쪽에는 전투 코끼리 전담부대를 배치했다. 이에 맞서는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정석대로 보병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오른쪽과 왼쪽에 기병과 코끼리를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승부를 결판지어야 했기 때문에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한 것이다.카이사르는 12개 군단(신규 징집 군단 5개 - 제25, 26, 28, 29, 30 군단 / 베테랑 군단 7개 - 제5, 7, 8, 9, 10, 13, 14 군단), 다수의 궁수, 투석병, 3,000~5,000명의 기병을 포함하여 총 60,000~7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탑수스에 도착했다. 반면 옵티마테스는 로마 군단 8개와 누미디아 군단 3개(약 55,000명의 군단병), 14,000~16,000명의 기병, 약 20,000명의 경보병, 60마리의 코끼리를 포함하여 총 9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2]
카이사르 군은 5개 군단 30,000명 (제9, 제10, 제13, 제14 및 갈리아 병사로 구성된 제5 각 군단) 및 기병 4,000명 (게르마니아 및 갈리아 기병) 이었던 반면, 원로원파는 로마 군단 보병 35,000명, 동맹 제국 기병 9,000명을 모았다. 또한 누미디아 왕국군(보병 부대 25,000명, 기병 6,000명, 전차 120마리)을 합쳐 카이사르 군을 능가하는 총 60,000명 이상의 군세를 보유했고, 자신의 기반이기도 하며 군수도 카이사르 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4]
3. 2. 전투 경과
기원전 46년 4월 6일(다른 사료에는 2월 6일) 양군은 탑수스에서 맞붙었다. 카이사르는 종래의 진형과는 다르게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보병과 갈리아 병사를 나누어 배치했다. 특히 가장 먼 왼쪽과 오른쪽에는 전투 코끼리 전담 부대를 배치했다. 이에 맞서는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정석대로 보병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오른쪽과 왼쪽에 기병과 코끼리를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승부를 결판지어야 했기 때문에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한 것이다.카이사르의 양쪽 끝 코끼리 부대는 적의 코끼리를 효과적으로 무력화하였고, 성난 코끼리는 아군의 진형을 흐뜨려 놓았다.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적의 기병도 카이사르 정예 보병과 중앙을 재빨리 돌파한 기병에 의해 포위되어 전멸했다. 전열이 무너지자 메텔루스의 보병도 흩어지고 달아나 버렸다. 카이사르는 지체 없이 적을 추격하는 한편 누미디아 증원군을 상대하러 진출했는데, 누미디아군은 탑수스 전투의 승패가 갈리자 모두 도망쳤고, 누미디아 왕 유바는 이미 카이사르에게 기울어진 도시들이 피난을 거부하여 자살했다.
스키피오는 군단을 중앙에 세 줄로 배치하고, 기병과 경보병을 측면에 배치했다. 그는 코끼리를 측면 앞에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최근에 모집한 두 개의 군단을 남겨 도시를 계속 포위하게 했다. 또한 그는 군단을 세 줄로 배치했다. 제7군단과 제10군단은 오른쪽에, 제8군단과 제9군단은 왼쪽에, 제13군단과 제14군단은 중앙에 새로 모집한 세 군단과 함께 배치했다(그는 제13군단과 제14군단의 양쪽에 신병 군단을 배치했다. 신병과 베테랑 군단을 섞는 것은 카이사르의 특징 중 하나였다). 그는 투석병, 궁수 및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고, 제5 알라우다 군단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코끼리에 대항하기 위해 측면 뒤에 예비대로 유지했다. 카이사르의 위치는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으며, 그가 오른쪽을 지휘했다. 두 군대는 한쪽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서로 마주 보며 한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적 군단의 배치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병사들이 요새에서 이동하면서 초조하게 움직였다.[1]
제7군단의 나팔수가 공격을 알렸고, 카이사르는 그의 오른쪽이 돌격하는 것을 보고 전반적인 진격을 명령했다. 카이사르의 오른쪽에 있던 궁수들은 그들에게 맞서는 코끼리를 공격하여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하고, 방향을 돌려 자기편을 짓밟게 만들었다. 다른 측면의 코끼리는 카이사르의 왼쪽 측면을 향해 돌격했다. 카이사르의 경보병과 기병은 코끼리의 길을 비켜 그 길을 측면 뒤에 배치된 제5 알라우다 군단의 분견대(5개 코호트)로 향하게 했다. 5개 코호트는 그러한 용맹함으로 돌격을 견뎌냈고, 그 후 군단은 상징으로 코끼리를 수여받았다. 제5군단의 군단병들은 필룸을 코끼리의 눈과 약점에 찔렀고, 그들을 놀라게 하여 방향을 돌려 자기 부대로 도망가게 했다. 그들은 자기편의 오른쪽 측면에 충돌했다. 코끼리를 잃은 후,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지세를 잃기 시작했고, 그의 왼쪽이 먼저 무너지고 나머지가 따라 무너졌다. 카이사르의 기병은 적을 능가하여 요새화된 야영지를 파괴하고 적을 퇴각하게 했다. 전투 중에 탑수스의 수비대는 돌격하여 카이사르의 포위 공사를 공격했지만, 카이사르가 포위를 계속하기 위해 남겨둔 두 군단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렇게 한 후 이 군단병들은 남쪽으로 행군하여 아프라니우스와 유바의 야영지 반대편에 요새화된 병력을 강화했고, 함께 아프라니우스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들은 그 후 누미디아인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유바의 동맹군은 그 자리를 떠났고 전투는 결정되었다. 카이사르는 옵티마테스의 야영지로 가서 이미 함락된 것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통제력을 잃었고, 그들은 적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1]
약 1만 명의 적이 살해되었고, 카이사르가 그들을 살려두라는 반복적인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분노한 병사들에 의해 칼에 찔렸다. 플루타르코스는 일부 자료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자신의 부대에 전진 명령을 내리기 직전에 간질 발작을 일으켜 혼란과 명령 불복종을 야기했다고 보고한다.[1]
탑수스 남서쪽에는 석호가 펼쳐져 있었고, 탑수스로 향하기 위해서는 석호의 북쪽 및 동쪽에 있는 길고 좁은 육지를 통과해야 했다. 북쪽 루트에 라비에누스 부대를 합류시킨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본대, 동쪽 루트에 유바 1세가 이끄는 누미디아 군을 배치하여 탑수스 전에 진을 치고 있던 카이사르 군을 협공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카이사르 군에 내응하기로 했던 마우레타니아가 누미디아 본국을 침공했기 때문에 유바 1세는 군의 절반을 마우레타니아 군을 격퇴하는 데 할애해야 했다. 이에 따라 누미디아 군의 도착이 늦어졌고, 카이사르 군은 메텔루스 스키피오 군을 향해 진군했다.[2]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전차 및 기병을 좌우 양익에 배치하고, 보병 부대를 중앙에 배치한 반면, 카이사르는 기병을 중앙, 보병 부대를 양익에 배치하는 진형을 갖추었으며, 좌우 양익의 원로원파 전차 부대에는 제5 군단을 배치했다.[2]
기원전 46년4월 6일, 카이사르 군의 진군 나팔(제10 군단 병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에 의해 전투가 시작되었고, 제5 군단은 카이사르의 지시에 따라 돌진하는 전차의 다리를 도끼로 노려 다리를 잘린 전차는 속수무책으로 무력화되었다(서양에서의 대규모 전차 사용은 이 전투가 마지막이었다). 원로원파 보병 부대는 제10 군단을 비롯한 카이사르 군에게 제압당했고, 라비에누스 지휘 하의 기병 부대도 카이사르 군 기병 부대 및 보병 부대의 포위에 의해 궤멸되었으며, 메텔루스 스키피오 이하 수뇌진은 전장에서 도주했다.[2]
카이사르 군은 메텔루스 스키피오 군을 격파하자, 석호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누미디아 군을 공격했지만, 약간의 교전만 있었을 뿐 유바 1세는 더 이상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역시 전장에서 탈출했다.[2]
4. 전투의 결과
이 전투로 아프리카에서 평화가 찾아왔지만, 카이사르에 대한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티투스 라비에누스, 폼페이우스의 아들들, 바루스 등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의 바에티카에서 또 다른 군대를 모았다. 내전은 계속되어 문다 전투로 이어졌다. 탑수스 전투는 서방에서 전투 코끼리가 마지막으로 대규모로 사용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11]
4. 1. 원로원파의 몰락
이 전투로 누미디아는 멸망했고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전사했다.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은 히스파니아로 도망쳤다. 우티카에 남아있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지 않고 자살했다. 카이사르는 이제 거의 모든 폼페이우스파를 제거하고 로마 유일의 권력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11]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키피오는 로마 히스파니아로 도망치려다 히포 레기우스 해전에서 패배하고 칼로 자결했다. 유바 1세는 자마로 도망쳤지만 주민들이 성문을 닫아걸어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자결하여 누미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히포레기우스(현: 안나바) 근교에서 살해당했고, 아프라니우스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지만,[12] 폼페이우스 형제와 라비에누스 등은 히스파니아로 도망쳤다.
카이사르 군은 타프수스, 하드루멘툼(현: 수스)을 함락시킨 후, 카토가 지키는 우티카를 포위했다. 카토는 노예를 해방하여 병력으로 충당하고 타프수스의 패잔병도 수용하여 철저 항전 태세를 보였지만, 우티카 주민들의 협력을 얻지 못해 카이사르 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 카토는 후에 "우티카의 카토(카토 우티켄시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46년 4월 13일, 카이사르가 우티카를 점령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은 종결되었다. 점령 2일 후, 카이사르는 우티카를 떠나 로마에서 개선식을 치른 후, 라비에누스 등 원로원파가 남아있는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4. 2. 카이사르의 권력 강화
이 전투로 누미디아는 멸망했고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전사했다.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은 히스파니아로 도망쳤다. 우티카에 남아있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살했다. 카이사르는 이제 거의 모든 폼페이우스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로마 유일의 권력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11]탑수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는 탑수스 공성전을 재개하여 함락시켰다. 그는 우티카로 향했고, 그곳에서 동맹들의 패배 소식을 들은 카토는 자살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분개하며 플루타르코스는 "카토, 너는 나에게 네 생명을 구하는 영광을 질투했듯이, 나는 너의 죽음을 질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스키피오는 로마 히스파니아로 도망치려다 히포 레기우스 해전에서 패배한 후 자결했다.[11]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탑수스 전투는 군사 전략 및 전술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제7군단, 제10군단, 제8군단, 제9군단, 제13군단, 제14군단을 활용하여 신병과 베테랑 군단을 섞는 특유의 전략을 사용했다.[1]
카이사르는 투석병, 궁수, 기병을 측면에 배치하고, 제5군단을 코끼리에 대응하기 위한 예비대로 활용했다. 전투 초기, 카이사르의 궁수들은 적 코끼리를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렸고, 제5군단은 코끼리의 공격을 막아내어 군단의 상징으로 코끼리를 수여받았다.[1]
전투 결과, 약 1만 명의 적군이 살해되었으며,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통제력을 잃고 적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전투 직전 간질 발작을 일으켰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
5. 1. 군사적 측면
스키피오는 군단을 중앙에 세 줄로 배치하고, 기병과 경보병을 측면에 배치했다. 그는 코끼리를 측면 앞에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최근에 모집한 두 개의 군단을 남겨 도시를 계속 포위하게 했다. 또한 그는 군단을 세 줄로 배치했다. 제7군단과 제10군단은 오른쪽에, 제8군단과 제9군단은 왼쪽에, 제13군단과 제14군단은 중앙에 새로 모집한 세 군단과 함께 배치했다(그는 제13군단과 제14군단의 양쪽에 신병 군단을 배치했다. 신병과 베테랑 군단을 섞는 것은 카이사르의 특징 중 하나였다). 그는 투석병, 궁수 및 기병을 측면에 배치했고, 제5군단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코끼리에 대항하기 위해 측면 뒤에 예비대로 유지했다. 카이사르의 위치는 그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으며, 그가 오른쪽을 지휘했다. 두 군대는 한쪽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서로 마주보며 한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적 군단의 배치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병사들이 요새에서 이동하면서 초조하게 움직였다.[1]제7군단의 나팔수가 공격을 알렸고, 카이사르는 그의 오른쪽이 돌격하는 것을 보고 전반적인 진격을 명령했다. 카이사르의 오른쪽에 있던 궁수들은 그들에게 맞서는 코끼리를 공격하여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하고, 방향을 돌려 자기편을 짓밟게 만들었다. 다른 측면의 코끼리는 카이사르의 왼쪽 측면을 향해 돌격했다. 카이사르의 경보병과 기병은 코끼리의 길을 비켜 그 길을 측면 뒤에 배치된 제5군단의 분견대(5개 코호트)로 향하게 했다. 5개 코호트는 그러한 용맹함으로 돌격을 견뎌냈고, 그 후 군단은 상징으로 코끼리를 수여받았다. 제5군단의 군단병들은 필룸을 코끼리의 눈과 약점에 찔렀고, 그들을 놀라게 하여 방향을 돌려 자기 부대로 도망가게 했다. 그들은 자기편의 오른쪽 측면에 충돌했다. 코끼리를 잃은 후,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지세를 잃기 시작했고, 그의 왼쪽이 먼저 무너지고 나머지가 따라 무너졌다. 카이사르의 기병은 적을 능가하여 요새화된 야영지를 파괴하고 적을 퇴각하게 했다. 전투 중에 탑수스의 수비대는 돌격하여 카이사르의 포위 공사를 공격했지만, 카이사르가 포위를 계속하기 위해 남겨둔 두 군단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렇게 한 후 이 군단병들은 남쪽으로 행군하여 아프라니우스와 유바의 야영지 반대편에 요새화된 병력을 강화했고, 함께 아프라니우스의 야영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들은 그 후 누미디아인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유바의 동맹군은 그 자리를 떠났고 전투는 결정되었다. 카이사르는 옵티마테스의 야영지로 가서 이미 함락된 것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통제력을 잃었고, 그들은 적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1]
약 1만 명의 적이 살해되었고, 카이사르가 그들을 살려두라는 반복적인 명령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분노한 병사들에 의해 칼에 찔렸다. 플루타르코스는 일부 자료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자신의 부대에 전진 명령을 내리기 직전에 간질 발작을 일으켜 혼란과 명령 불복종을 야기했다고 보고한다.[1]
6. 기타
탑수스 전투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 원로원파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비롯한 스키피오 가문의 장군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승리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총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맞서 카이사르는 '스키피오 살비토'라는 무능한 인물을 전군의 통솔자인 것처럼 전선에 내세웠다.[13]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카토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삶을 칭송하는 「카토」를 썼고,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반 카토론」을 썼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모두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14]
- 북아프리카 전투를 앞두고, 카이사르의 최측근 부대였던 로마 제10군단 병사들이 파르살루스 전투 이전에 카이사르가 약속했던 보너스와 승진을 요구하며 종군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교섭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카이사르는 제10군단 병사들에게 평소 부르던 '콤밀리테스(comilites, 전우)' 대신 '퀴리테스(quirites, 시민)'라고 부르며 해고를 암시했고, 약속했던 임금도 '다른 카이사르 군(제10군단 이외)을 이끌고 북아프리카 전쟁을 끝낸 후에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제10군단 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간청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에 종군했지만, 카이사르는 임금 인상 없이 종군을 성사시켰다. 다만, 각 병사에게 1000 드라크마씩의 일시금을 지급하고 이탈리아 내 토지를 우선 분배하여, "결국 돈으로 꾀어냈다"는 비판을 받았다.[15]
- 안토니우스는 파르살루스 전투 등에서 세운 자신의 공적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며 로마에 머물러,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16]
6. 1. 일화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비롯한 과거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들이 북아프리카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원로원파는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총대장으로 삼았다. 카이사르는 "스키피오 살비토"라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을 전군의 통솔자처럼 전선에 세웠다.[13]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카토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삶을 칭송하는 '''「카토」'''를 썼고, 카이사르는 이에 대한 반론인 '''「반 카토론」'''을 썼지만, 두 작품 모두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14]
- 북아프리카에서의 전투를 앞두고, 카이사르 군에서 가장 측근으로 여겨지던 로마 제10군단 병사들이 파르살루스 전투 전에 카이사르가 약속한 보너스와 승급을 요구하며 종군 거부를 일으켰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교섭에 나섰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 동부 속주에서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제10군단 병사들에게 보통 '''「콤밀리테스」'''(전우)라고 부르는 대신, '''「퀴리테스」'''(시민)라고 부르며 카이사르 군으로부터의 해고를 암시했다. 또한 약속한 임금도 '''「다른 카이사르 군(제10군단 이외)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을 끝낸 후에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제10군단 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간청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에 종군했지만, 카이사르는 1 세스텔티우스의 임금 인상도 없이 종군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각 병사에게 1000드라크마씩의 일시금을 지급했고, 이탈리아 내의 토지를 우선 분배하여, "결국 돈으로 꾀어냈다"는 악평을 받게 되었다.[15]
- 안토니우스는 이 전투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파르살루스 전투 등에서의 자신의 공적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했다며 로마에 머물렀다.[16]
참조
[1]
웹사이트
Caesar's legions – Livius
https://www.livius.o[...]
[2]
문서
The date is that of the Roman calendar prior to the reforms of Julius Caesar. By the [[Julian calendar]], it is February 7, 46 BC.
[3]
웹사이트
Battle of Thapsus | Roman history
https://www.britanni[...]
Encyclopaedia Britannica
[4]
웹사이트
Rebellion and Civil War – Julius Caesar, Consul and Conqueror
https://sites.google[...]
unknown publisher
2020-10-26
[5]
문서
The veteran V, five newly raised legions; the XXV, XVI, XVII, XIX, XXX and some cohorts of the veteran X, his favourite legion.
[6]
문서
The veteran VII, VIII, IX and X.
[7]
문서
"Labienus and Petreius, Scipio's lieutenants, attacked him, defeated him badly, […] Petreius, thinking that he had made a thorough test of the army and that he could conquer whenever he liked, drew off his forces, saying to those around him, 'Let us not deprive our general, Scipio, of the victory.' In the rest of the battle it appeared to be a matter of Caesar's luck that the victorious enemy abandoned the field when they might have won."
https://penelope.uch[...]
[8]
웹사이트
Battle of Thapsus, April 46 BC
http://www.historyof[...]
[9]
문서
"In short all Scipio's soldiers, though they implored the protection of Caesar, were in the very sight of that general, and in spite of his entreaties to his men to spare them, without exception put to the sword."
[10]
문서
Life of Caesar 53.5
https://penelope.uch[...]
[11]
간행물
African Affairs
2012-12
[12]
서적
皇帝伝 カエサル 75
[13]
서적
英雄伝 カエサル 52
[14]
서적
英雄伝 キケロ 39
[15]
서적
英雄伝 カエサル 51
[16]
서적
英雄伝 アントニウス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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