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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라비에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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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기원전 100년경 태어난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기사 계급 출신으로,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아 호민관을 지냈으며,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서 핵심적인 부관으로 활약했다. 갈리아 전쟁 이후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폼페이우스 편에 섰으나, 내전에서 패배하고 문다 전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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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라비에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티투스 라비에누스
라틴어 표기T. Labienus
출생기원전 100년경
출생지칭굴룸, 피케눔, 이탈리아
사망기원전 45년 3월 17일 (55세 추정)
사망 장소문다 전투
사망 원인전투 중 사망
국적로마
직업군인 및 정치가
가족
자녀퀸투스 라비에누스
경력
담당 직책호민관 (기원전 63년)
법무관 (기원전 60/59년)
레가투스 (기원전 58년 – 기원전 45년)
군사 경력
소속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58년–49년)
폼페이우스 (기원전 49년–45년)
군대로마군
참전 전투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2. 초기 생애 및 경력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피케눔 (현재 아스콜리피체노 현) 근교의 킹글룸(현재 칭골리) 출신으로, 프라에토르(법무관)가 된 해(기원전 60년)를 기준으로 역산하여 기원전 10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2][23]

라비에누스의 가문은 에퀴테스 (기사 계급)이었으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속한 폼페이우스 일문의 클리엔테스였다.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 가문과의 관계를 통해 군대 내 지위를 높여 기원전 78년부터 기원전 75년까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 군 복무를 했다.

2. 1. 출생 및 가문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피케눔 칭굴룸 출신으로, 기원전 10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1] 그의 가문은 기사 신분이었다.[1] 피케눔 지역의 유력자였던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를 통해 군 경력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1]

라비에누스는 기원전 78년부터 기원전 75년까지 킬리키아에서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휘하에서 복무하며 해적 및 산악 부족과 싸웠다.[2]

2. 2. 초기 군 경력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기원전 100년경 칭굴룸에서 태어났으며, 기원전 60년 또는 59년에 프라에토르 직을 맡았다.[1] 그의 가족은 기사 신분이었고,[1] 피케눔의 후원자였던 폼페이우스와 초기 인연을 맺고 군 경력을 쌓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라비에누스는 기원전 78년부터 기원전 75년까지 킬리키아에서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 휘하에서 해적 및 이사우리아 산악 부족과 싸우며 군 복무를 시작했다.[2] 그는 폼페이우스 가문과의 관계를 통해 군대 내에서 지위를 높였다.[23]

2. 3. 호민관 시절 (기원전 63년)

기원전 63년,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플레브스 호민관이었으며, 폼페이우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또한 폼페이우스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기에, 라비에누스와 카이사르는 때때로 협력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훗날 라비에누스와 카이사르 사이의 우정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사주를 받은 라비에누스는 가이우스 라비리우스를 기원전 100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삼촌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반역죄(페르두엘리오)로 고발했다. 이 재판의 목적은 이른바 "원로원 최종 결의"(세나투스 콘술툼 울티뭄)를 실추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포풀라레스로마 민회에 대항하여 원로원이 사용하는 비상 조치였다. 라비에누스는 공화국 초기에 사용되었던 두움비리의 낡은 절차를 라비리우스에게 적용했다. 이 절차는 일반적인 형사법을 우회하여 라비리우스는 변호 없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호민관은 신성불가침이었기 때문에 그를 살해하는 것은 신에 대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신을 달래기 위한 정화로 여겨졌다. 살해는 너무나 심각한 오염으로 여겨져 일반적인 형사 재판은 불필요하고 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즉각적인 정화가 필요했다. 두움비리는 명백한 유죄라는 구실로 고발하고 채찍질을 통해 범죄자를 정화하도록 배정되었다.

라비리우스는 백인회에 항소했고, 키케로가 그를 변호했다. 그러나 민회가 투표하기 전에, 메텔루스 켈레르는 조짐관으로서의 권한을 사용하여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고 주장하며 자니쿨룸의 깃발을 내렸다. 그것이 재판을 연기시켰다. 라비리우스는 결국 과도한 벌금을 지불할 수 없어 추방형을 선고받았다.[3]

같은 해, 라비에누스는 평민 결의를 통과시켜 폰티펙스 선거를 민중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의 지지를 받아 폰티펙스 막시무스 지위를 확보했다.

라비에누스는 정치가라기보다는 군인이었고, 주로 자신의 직위를 높은 군사 지휘관 자리를 확보하는 발판으로 이용했다. 호민관 임기를 마친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부관(부사령관)으로 갈리아에서 복무했고, 카이사르가 갈리아에 없을 때마다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3. 카이사르의 부관, 갈리아 원정 (기원전 58년 ~ 51년)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기원전 63년 호민관을 역임한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단장으로서 갈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초반에 카이사르의 두 번째 사령관으로 유일하게 언급되는 인물이다.[4] 숙련된 기병 지휘관이었던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신임을 받아,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비울 때면 항상 그에게 뒷일을 맡겼다.[5] 카이사르는 알프스 이탈리아에서 사법을 집행하거나 두 번째 브리타니아 원정(기원전 54년)을 떠날 때 라비에누스에게 이러한 권한을 주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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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에누스는 기원전 57년 벨가이족과의 전투, 기원전 54년 트레비리족과의 전투, 기원전 52년 루테티아 전투 등에서 뛰어난 전략과 용맹함을 보여주며 카이사르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루테티아 전투에서는 적을 속이는 전술로 승리하여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입증했다.

기원전 51년 9월,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임명했다.[13]

3. 1. 갈리아 전쟁 초기

기원전 58년부터 시작된 갈리아 전쟁에서 헬베티족과의 전투는 카이사르가 저서"갈리아 전기"에서 이름을 언급한 유일한 레가투스가 라비에누스였을 정도로,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라비에누스를 높이 평가했다. 라비에누스는 숙련된 기병 지휘관이었고, 카이사르의 많은 공적은 라비에누스의 보좌 덕분이었다. 다른 카이사르 휘하의 레가투스(Legatus)보다 군공과 경력이 풍부하여 카이사르 군의 필두 부사령관 격이었으며,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나 브리타니아 원정으로 갈리아를 떠났을 때, 갈리아 속주 전체의 통치를 다른 부대와 함께 라비에누스에게 일임했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없는 동안 갈리아를 무난히 다스렸다.[4]

기원전 57년, 네르비족(Nervii) 및 아르브라테스족(Atrebates) 등과의 사비스 강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제9군단 및 제10군단을 지휘하여 아르브라테스족을 격파했다.[7] 벨가에인의 본진을 점령한 후, 고전하던 카이사르가 직접 지휘하는 제7군단 및 제12군단(en)을 돕기 위해, 네르비족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제10군단에 지시하여 로마군의 승리에 기여했다.[8]

기원전 54년 인두티오마루스(Indutiomarus)가 이끄는 트레베리족과의 전투에서, 인두티오마루스는 로마군에 대한 위협 및 도발을 통해 라비에누스를 곤란하게 했지만, 라비에누스는 작전을 통해 잠시 대기하는 전술을 취했다. 트레베리족 및 인두티오마루스가 로마군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시기를 노려, 라비에누스는 휘하 기병에게 트레베리족의 진영을 급습하게 했다. 라비에누스는 인두티오마루스를 가장 먼저 살해하도록 지시했고, 로마군은 인두티오마루스를 죽이고 족장을 잃은 트레베리족은 궤멸했다.[9]

트레베리족은 인두티오마루스의 친족을 새로운 수령으로 재편성하고, 수에비족 등 게르마니아인으로부터 원군을 기다려 로마를 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라비에누스는 철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트레베리족은 후방에서 로마군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매복해 둔 복병과 급반전한 로마군에 의해 반격당해 트레베리족은 다시 패배했다. 게르마니아인은 원군을 보낼 수 없었고, 이로써 게르마니아인의 갈리아 침공을 막는 결과가 되었다. 이 해는 아두아투카 전투에서 로마군이 큰 타격을 입었기에, 로마군의 붕괴를 막는 중요한 승리였다.[10]

기원전 52년 루테티아(현: 파리)에서 파리시족과의 전투에서의 승리는 라비에누스의 뛰어난 전술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게르고비아로 향한 카이사르 군과 헤어져, 파리시족을 제압하기 위해 파견된 라비에누스는, 코호르스(보병 대대) 5개 대대를 아게디눔(Agedincum, 현: 상스)에 남겨두고, 자신은 3개 군단을 이끌고 세쿠아나 강을 건너 루테티아로 향했다. 로마군은 강의 세 지점을 건넜지만, 군대를 분할하여 강을 횡단하는 것으로 갈리아 측을 속였고, 갈리아군은 이를 추격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군을 다시 하나로 합쳐, 쫓아온 갈리아군을 포위하여 섬멸했다.[24]

루테티아에서의 승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 본군과 합류하여 알레시아 전투에 참여했다. 알레시아 포위망에서 가장 갈리아 측의 공격이 격렬했던 북서쪽 포위선의 방어를 수행하여 로마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기원전 51년, 끝까지 저항하던 트레베리족의 땅에 파견되어, 로마에 저항하는 세력을 격파했다. 같은 해 9월,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에게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통치를 위임했다.[13]

3. 2. 주요 전투에서의 활약

라비에누스는 갈리아 전쟁 초반에 카이사르의 부사령관으로 활약한 유일한 군단장이었다.[4] 그는 숙련된 기병 지휘관으로, 카이사르가 자리를 비울 때면 갈리아에 있는 군단의 지휘권을 맡았다.[5] 카이사르의 두 번째 브리타니아 원정(기원전 54년) 때에도 이 권한을 행사했다.[6]

기원전 57년 벨가이족과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제9군단과 제10군단을 지휘하여 적을 뒤에서 포위하고 섬멸하여 카이사르의 승리에 기여했다.[7][8]

기원전 54년 트레비리족과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며칠 동안 진지에 틀어박혀 있다가 적절한 순간에 기병대를 내보내 적장 인두티오마루스를 죽이고 적군을 흩어지게 했다.[9] 이후 퇴각하는 척하여 적을 유인한 후 공격하여 승리하고 게르만족의 증원을 막았다.[10]

기원전 52년 루테티아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군대를 분산시키는 척하며 적을 속인 후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술적 천재성을 보였다.[11][12]

기원전 58년부터 시작된 갈리아 전쟁에서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저서 "갈리아 전기"에 이름을 언급한 유일한 레가투스였다. 그는 수많은 전쟁 경험을 쌓은 숙련된 기병 지휘관이었고, 카이사르 군의 필두 부사령관 격이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나 브리타니아 원정으로 갈리아를 떠났을 때, 갈리아 속주 전체의 통치를 라비에누스에게 일임했다.

기원전 57년, 네르비족 및 아르브라테스족과의 사비스 강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제9군단 및 제10군단을 지휘하여 아르브라테스족을 격파하고, 네르비족의 후방을 공격하여 로마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기원전 54년 트레베리족과의 전투에서는, 라비에누스는 작전을 통해 잠시 대기하는 전술을 취했다. 트레베리족 및 인두티오마루스가 로마군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틈을 보인 시기를 노려, 라비에누스는 휘하 기병에게 트레베리족의 진영을 급습하게 하여 인두티오마루스를 죽이고, 트레베리족을 궤주시켰다. 이후 트레베리족은 게르마니아인으로부터 원군을 기다렸으나, 라비에누스는 철수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트레베리족을 유인하고, 매복해 둔 복병과 급반전한 자군에 의해 반격하여 트레베리족에게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게르마니아인의 갈리아 침공을 막는 결과가 되었다.

기원전 52년 루테티아(현: 파리)에서의 파리시족과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3개 군단을 이끌고 세쿠아나 강을 건너 루테티아로 향했다. 로마군은 강의 세 지점을 건넜지만, 군대를 분할하여 강을 횡단하는 것으로 갈리아 측을 속였고, 갈리아군은 이를 추격했지만, 라비에누스는 군을 다시 하나로 합쳐, 쫓아온 갈리아군을 포위하여 섬멸했다.[24]

루테티아에서의 승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 본군과 합류하여 알레시아 전투에 참여, 알레시아 포위망에서 가장 격렬했던 북서쪽 포위선의 방어를 수행하여 로마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기원전 51년, 끝까지 저항하던 트레베리족의 땅에 파견되어, 로마에 저항하는 세력을 격파했다.

3. 3.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임명 (기원전 51년)

기원전 51년, 카이사르라비에누스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13]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갈리아를 비울 때는 항상 라비에누스에게 뒷일을 맡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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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8년부터 시작된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가 저서"갈리아 전기"에 이름을 언급한 유일한 레가투스가 라비에누스였으며,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라비에누스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라비에누스는 숙련된 기병 지휘관이었고, 카이사르가 세운 공적 중 많은 부분이 라비에누스의 보좌에 의한 것이었다. 다른 카이사르 휘하의 레가투스에 비해서도 군공과 경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카이사르 군의 필두 부사령관 격이었으며,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나 브리타니아 원정으로 갈리아를 떠났을 때, 갈리아 속주 전체의 통치를 다른 부대와 함께 라비에누스에게 일임했다. 또한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가 없는 갈리아를 무난히 다스렸다.

기원전 52년 루테티아(현: 파리)에서의 파리시족과의 전투는 라비에누스의 전술적 뛰어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게르고비아로 향한 카이사르 군과 헤어져 파리시족을 제압하기 위해 파견된 라비에누스는, 코호르스(보병 대대) 5개 대대를 아게딘쿰(Agedincum, 현: 상스)에 남겨두고, 자신은 3개 군단을 이끌고 세콰나 강을 건너 루테티아로 향했다. 로마군은 강의 세 지점을 건넜지만, 군대를 분할하여 강을 횡단하는 것으로 갈리아 측을 속였고, 갈리아군은 이를 추격했지만, 라비에누스는 군을 다시 하나로 합쳐, 쫓아온 갈리아군을 포위하여 섬멸했다.[24]

루테티아에서의 승리 후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 본군과 합류, 알레시아 전투에도 참여하여 알레시아 포위망에서 가장 갈리아 측의 공격이 격렬했던 북서쪽 포위선의 방어를 수행하여 로마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기원전 51년 라비에누스는 끝까지 저항하던 트레베리족의 땅에 파견되어, 로마에 저항하는 세력을 격파했다.

4. 내전과 몰락 (기원전 49년 ~ 45년)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떠나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했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기병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14][15]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맞서 싸울 것을 권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6]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군이 패배하자, 라비에누스는 코르키라로 도망쳤고, 폼페이우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프리카로 건너갔다.[17] 그는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들에게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는 거짓말로 희망을 주기도 했다.[17] 기원전 46년 러스피나 전투에서는 병력을 빽빽하게 배치하여 카이사르가 보병만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카이사르 군을 포위하기도 했으나, 결국 격파에는 실패하고 전장을 떠나야 했다.[18]

이후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갔다.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에서 보구드 왕이 이끄는 군대가 폼페이우스 군 후방을 공격하자, 라비에누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맞섰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군단은 이를 후퇴로 오해하고 무너졌고, 이 과정에서 라비에누스는 전사했다.[19] 그의 머리는 카이사르에게 보내졌고, 카이사르는 옛 친구의 시신을 찾아 예우를 갖춰 매장하도록 했다.

4. 1. 카이사르와의 결별

기원전 49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기병대 지휘관으로 삼았다.[14][15][16]

라비에누스는 8년 간의 갈리아 전쟁을 포함해 무려 13년이나 카이사르 밑에서 함께 한 가장 신뢰받는 부관이었으나, 로마의 뿌리 깊은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28] 관계 때문에 대대로 자신 가문의 파트로네스였던 폼페이우스 가문을 따랐다. 그는 카이사르를 최대한 존중하여 자신의 모든 휘하 군대는 그대로 두고 자신의 아들과 노예들만 데리고 갔다. 카이사르는 오랜 로마의 신의를 지킨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라비에누스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미 떠난 그의 짐들을 마저 싸서 마차에 실어 보내주었다.[29]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이탈리아 본토에서 카이사르와 맞서라고 충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6]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후, 코르키라로 도망쳤고,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듣고 아프리카로 갔다.[17] 그는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17] 타프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갔다.

문다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보구드 왕의 군대가 폼페이우스 군대의 후방으로 접근하자, 이를 후퇴로 오해한 폼페이우스 군이 무너지면서 전사했다.[19]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그의 머리가 카이사르에게 가져가졌다.

3세기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라비에누스가 카이사르를 떠난 이유에 대해 "갈리아 전쟁에서 많은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 독립적인 작전에 관여할 수 없었고, 장래에 집정관에 취임할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26]

4. 2. 폼페이우스 휘하에서의 활동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기병대 지휘관으로 삼았다.[14][15] 라비에누스는 13년 동안 카이사르의 부관이었으나, 로마의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28] 관계 때문에 폼페이우스 가문을 따랐다. 그는 자신의 아들과 노예들만 데리고 갔고, 카이사르는 그의 짐을 마저 보내주었다.[29][25]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이탈리아 본토에서 카이사르와 맞서라고 충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6]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후, 코르키라로 도망쳤고, 폼페이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프리카로 갔다.[17] 그는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들에게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했다.

기원전 46년 러스피나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타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히스파니아로 갔다.[18]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군의 기병대를 지휘하던 중, 보구드 왕의 공격을 오인한 폼페이우스 군이 무너지면서 전사했다.[19] 그의 머리는 참수되어 카이사르에게 전해졌고,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를 완전한 예우를 갖춰 매장하도록 했다.

4. 3. 주요 전투 및 최후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를 떠나 폼페이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폼페이우스는 그를 기병대 지휘관으로 삼았다.[14][15] 라비에누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맞서 싸울 것을 권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6]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군이 패배하자, 라비에누스는 코르키라로 도망쳤고, 폼페이우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프리카로 건너갔다.[17] 그는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들에게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는 거짓말로 희망을 주기도 했다.[17] 기원전 46년 러스피나 전투에서는 병력의 힘으로 카이사르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18] 그는 병사들을 빽빽하게 배치하여 카이사르가 보병만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카이사르 군을 포위하기도 했으나, 결국 격파에는 실패하고 전장을 떠나야 했다. 이후 타프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갔다.

기원전 45년 벌어진 문다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는 전사했다.[19] 보구드 왕이 이끄는 군대가 폼페이우스 군 후방을 공격하자, 라비에누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맞섰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군단은 이를 후퇴로 오해하고 무너졌고, 이 과정에서 라비에누스는 전사했다. 그의 머리는 카이사르에게 보내졌고, 카이사르는 옛 친구의 시신을 찾아 예우를 갖춰 매장하도록 했다.

5. 대중문화 속의 라비에누스


  • 라비에누스는 영국 작가 콘 이글던의 소설 ''전쟁의 신들''에 등장하지만, 가상 인물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부관 역할을 대신하면서 역할이 크게 줄어든다. 브루투스와 카이사르의 관계는 반대로 크게 확장된다.
  • 라비에누스는 호주 작가 콜린 매컬로의 초기 소설 ''로마의 대가''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라비리우스 재판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보통 알려진 것보다 정치적 연도에서 꽤 늦게 등장한다. 이는 카이사르가 키케로가 "원로원 최종 결의"가 발효되는 동안 재판 없이 여러 카틸리나 공모자들을 처형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포고령이 시행되기 전에 그러한 행동에 대한 사전 경고로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폼페이의 아내 무키아 테르티아와의 불륜으로 폼페이의 미움을 사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무키아 테르티아는 기원전 95년 폰티펙스 막시무스이자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에볼라 폰티펙스의 딸로, 로마 귀족의 일원이었으며, 그로 인해 라비에누스는 피케눔에 있는 자신의 광대한 영지로 옮겨졌다. 그는 나중에는 매우 유능하지만 사납고 잔혹한 군인이자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갈리아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그의 잔혹함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동맹국들을 소외시키고, 결국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매컬로는 사건에 대해 다소 다른 해석을 제시하며, 카이사르가 라비에누스를 버리고,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에게로 귀순하는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가 라비에누스를 멀리한다. 소설에서 카이사르는 내전에 이르러 라비에누스가 너무 잔혹하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그의 편에 서는 것을 원치 않아 그를 내친다.
  • 라비에누스는 BBC One의 다큐 드라마 ''고대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에도 등장한다.
  • 라비에누스는 S.J.A. 터니의 연작 소설 ''마리우스의 노새''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 라비에누스는 비디오 게임 ''프라에토리안''의 캠페인에 등장한다. 그는 갈리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여러 미션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이며, 마지막 미션에서는 내전 말기에 주요 적대자로 다시 등장한다.[20] 이 게임의 사건 전개에서 라비에누스는 문다 전투에서 죽지 않고 폼페이의 야영지로 도망쳐 최후의 저항을 한다.[21]

참조

[1] 논문 Tyrrell (3)
[2] 논문 Tyrrell (4)
[3] 논문 Tyrrell (9)
[4] 논문 Tyrrell (19)
[5] 논문 Dio (41.4.3)
[6] 논문 Bellum Gallicum (5.8)
[7] 논문 BG (2.23)
[8] 논문 BG (2.26)
[9] 논문 BG (5.57)
[10] 논문 BG (6.8)
[11] 논문 BG (7.61)
[12] 논문 BG (7.62)
[13] 논문 BG (8.52)
[14] 논문 M. Tullius Cicero (Fam, 16.12)
[15] 서적 Pompey the Great
[16] 논문 Tyrrell (31)
[17] 서적 Stratagems Book II
[18] 서적 Bellum Africum Book 41
[19] 논문 Dio (43.38)
[20] 웹사이트 Praetorians – Guide and Walkthrough https://gamefaqs.gam[...] 2023-04-09
[21] 웹사이트 Praetorians HD Remaster - Just One... More... Fight (Hard) https://www.youtube.[...] 2023-04-09
[22] 서적 내란기 1.15
[23] 문서 플라에토르에 취임할 수 있는 연령 자격이 40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24] 서적 갈리아 전기 7.57-7.62
[25] 서적 카에살 34
[26] 서적 로마사 (41.4)
[27] 논문 Biography of Titus Labienus, Caesar's Lieutenant in Gaul 2007-05-10
[28] 문서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각각 Patron과 Client의 어원임
[29] 서적 로마인 이야기 5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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