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임진왜란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곳으로,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한산도에 위치해 있다. 주요 시설로는 제승당, 행적비, 한산정, 충무사, 유허비, 한산대첩기념비, 거북등대 등이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해전도, 유물 등이 전시된 제승당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속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한산도 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와 등대가 건립되어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시조와 한시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통영시의 문화유산 - 통영해저터널
    1932년 완공된 동양 최초의 해저 터널인 통영해저터널은 일제강점기에 통영과 미륵도를 잇는 주요 연결 통로로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보행자 전용 터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통영시의 문화유산 - 통영오광대
    통영오광대는 경상남도 통영 지역에서 전승되는 가면극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으며, 사자춤을 포함하는 특징을 지닌 중요무형문화재이다.
  • 경상남도의 사적 - 김해 봉황동 유적
    김해 봉황동 유적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위치하며, 조개더미 성격의 유적으로 붉은 토기, 가야 토기 파편, 화천 등이 출토되어 한반도 남부 지역 선사시대와 중국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경상남도의 사적 - 진주성
    진주성은 고려 시대부터 왜구 방어의 요충지였고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경상남도 진주시에 위치한 석성으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제1차 진주성 전투와 많은 민관군이 순절한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역사를 지니며 현재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어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등 다양한 문화재와 유적을 포함하여 관리되고 있다.
  • 임진왜란 -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군중에서 직접 쓴 친필 일기로, 전쟁 상황과 개인적인 소회, 사회상 등이 기록된 7권의 일기이며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 임진왜란 - 임진록
    임진록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실존 및 허구적 인물이 등장하여 전쟁의 전개와 사건을 다루는 한국 고전 소설이며, 민중의 고통과 저항, 국난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영웅 서사시로 평가받고, 동명의 게임 시리즈로도 알려져 있다.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영문 이름Historic Site Related to Yi Sun-sin on Hansando Island, Tongyeong
제승당
제승당
유형사적
지정 번호113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주소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한산일주로 70 (두억리)
시대조선시대 1592년
소유자경상남도
면적528,034m2

2. 역사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패배로 폐허가 된 후 142년이 지난 1739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다시 건물을 세우고 유허비를 세웠다.[2]

2. 1. 임진왜란 시기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은 한산대첩을 통해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이후 한산섬에 제승당을 짓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4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중심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제승당은 이순신의 지휘 아래 제해권을 유지하며 국난 극복에 기여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참패하면서 제승당도 함께 소실되었다.

2.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9년 정부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해 왔다. 1975년 정부는 영역을 확장하여 보수를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에는 한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2]

3. 주요 시설

제승당 경내에는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제승당을 중심으로 유허비, 행적비, 한산정(사정), 수루 등 여러 부속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다.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당시 조선 수군 본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입구인 《한산문》을 통과하면 관리사무소와 휴게소가 있으며, 《수호사》와 《대첩문》을 지나면 제승당 건물에 이르게 된다.

3. 1. 제승당

제승당(制勝堂, Jesung-dang)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한산도에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6년 10월에 중건되었으며, 내부에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을 그린 다섯 폭의 벽화가 있다.

계단을 올라 충무문을 지나면 정면에 제승당 건물이 보인다. 제승당 내부에는 영당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주요 해전인 노량해전, 사천해전, 한산대첩과 《진중생활도》를 묘사한 다섯 폭의 해전도가 걸려 있다. 이 외에도 당시 사용되었던 무기인 현자총통지자총통, 그리고 작은 거북선 모형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3. 2. 행적비

'''행적비'''는 제승당과 충무사 중간에 있으며, 이 충무공의 후손으로서 통제사, 부사 등을 역임한 분들의 선행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좌우 각각 네 개의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고 세 개의 비석을 풍우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든 건물이다.

3. 2. 1. 수루

수루는 본래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한 망루였으며, 고증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영조김천택이 엮은 《청구영언》에 실린 이순신 장군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의 배경이 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이순신, 《청구영언

:閑山島明月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3. 2. 2. 한산정

한산정은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곳이다. 사정(활 쏘는 자리)과 표적 사이의 거리는 145m이다. 당시 무과 시험은 조정에서만 시행되었으나, 이순신 장군이 장계를 올려 이곳 한산정에서 처음으로 무과 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을 통해 100여 명이 급제하였다. 한산정의 과녁은 바다를 끼고 'ㄷ'자 형태의 건너편에 위치해 있는데, 이렇게 바다 건너에 과녁이 있는 활터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3. 2. 3. 충무사

내삼문을 지나 유허비가 있는 공간을 지나면 맨 안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원래 있던 작은 사당을 헐고 1976년 10월에 현재의 사당을 건립했으며, 매년 2회 제향을 올리고 있다. 현재 봉안된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이다.

3. 2. 4. 유허비

제승당과 충무사 중간, 외삼문을 지나면 정화기념비와 함께 유허비가 있다. 이 비는 1597년(선조 30년)에 폐허가 되었던 제승당을 1739년(영조 15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다시 세우면서 함께 건립한 것이다. 건립 목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고 이곳이 제승당 터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최초 건립 후 138년이 지난 1877년(고종 14년)에는 제198대 통제사 이규석이 오른쪽에 비를 다시 세웠다. 유허비는 비석 하나를 중심으로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형태를 하고 있다.

3. 3. 한산대첩기념비

1592년 7월 8일 조선 수군은 견내량에서 일본 수군 함선 73척 중 12척을 사로잡고 47척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한산대첩이라고 부른다.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78년부터 1979년까지 국비를 들여 문어포 산 정상에 거북선 모양의 받침대 위에 세워진 높이 20m의 《한산대첩기념비》를 건립하였다.

3. 4. 거북등대

제승당 입구 바다의 암초 위에 세워져 있다. 1963년 12월에 건립되었으며, 이곳이 한산대첩 격전지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의 안전 운항을 돕는 등대 역할도 수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4. 위치 및 교통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번지에 위치한다. 통영시 시내에서 남해 방향 직선 거리로 6.7km 떨어진 한산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배를 이용해야만 접근할 수 있으며,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 등에서 출발하는 배편을 이용하면 약 25분이 소요된다. 다른 경로로는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인접한 추봉도를 거쳐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5. 문화재적 가치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본영이었던 제승당은 역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이후 1593년부터 제승당을 짓고 1597년까지 4년 동안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사용하였다. 이 기간 동안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제해권을 굳건히 지키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휘 능력과 전략 및 전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며, 한산대첩을 비롯한 임진왜란의 주요 승리를 기념하고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크게 패하면서 제승당은 안타깝게도 불타 없어졌다. 그로부터 142년이 흐른 1739년 (영조 15년)에 당시 통제사였던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짓고 이를 기념하는 유허비를 세웠다.

1959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사적 제113호로 지정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보수 작업을 진행하며 관리해왔다. 특히 1975년에는 유적지의 영역을 넓히고 대대적인 정비 및 보수를 통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에는 한산대첩의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한산대첩비가 건립되었다.[2]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2011-07-28
[2] 문서 제승당 관광 안내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