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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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의 음악은 당악의 수용, 서역계 악의 유입, 향악의 발전, 음성서, 범패, 그리고 국선과 팔관회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발전했다. 당악은 9세기부터 유입되어 향악과 구분되었으며, 고려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역계 음악은 가면극과 춤을 중심으로 신라 음악의 폭을 넓혔다. 향악은 삼국 시대의 음악과 당의 박판 등을 수용하며 발전했고, 음성서는 음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진감대사가 전래한 범패는 신라 불교 음악에 영향을 미쳤으며, 팔관회에서는 국선이 가무를 통해 복을 빌었다.
신라시대의 당(唐) 음악인 당악에 관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지만, 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에 '향악'이란 말이 있는 이상, 당연히 그 대칭인 당악(唐樂)도 이미 9세기에 있었을 것이다. 또 향비파·향피리의 대칭으로의 당비파·당피리가 있는데, 당비파는 문무왕 13년(637)으로 추정되는 계유명(癸酉銘)의 아미타불삼존(阿彌陀佛三尊) 사면(四面) 석상(石像)에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당악에서 사용되는 박(拍)이 신라 향악에까지 차용된 것을 보면, 본래 박을 사용하는 당악도 신라에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 범패(梵唄)에도 당음(唐音)·당풍(唐風)이 있는 이상, 음악에도 당연히 당풍·당악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의 당악은 방향(方響)·당비파·쟁·당적·당피리·퉁소·장고·박 같은 것을 사용하였고, 또 한편 앞에 언급한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은 비파·쟁·당적·퉁소·생·소·요고를 보여주는데, 이들을 종합 고려하면, 신라의 당악은 방향·당비파·쟁·당적·퉁소·당피리·생·소·요고·박을 썼을 것이다. 참고로 <<사대사자재장(西大寺資材帳)>>에 의하면 780년(보구(寶龜) 11년) 일본에서 대당악(大唐樂)은 쟁·비파·공후·방향·생·우·필률(대소(大小))·소·척팔(尺八)·횡적·동발자·갈고(鞨鼓)·갈양·요고(腰鼓)·계루·도고(倒鼓)·계고(楷鼓)·고악고(古樂鼓)·대고(大鼓)·백자(百子:박(拍))를 사용하여 신라시대의 당악에 참고가 된다.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首) 중 4수가 향악이 아니라 서역계(西域系) 음악임을 알 수 있다. 《향악잡영》에 나타난 서역계 음악은 다음과 같다.
2. 당악의 수용
당피리는 그 최저음이 황종(黃鍾, 다)이고 향피리의 최저음보다 4도 높기 때문에, 그런 높은 음역(音域)의 악기로 연주되는 당악은 향악에 비하여 청(淸)하다고 하겠다. 또 한어(漢語)의 가사를 가진 음악이 대개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이고, 박판(拍板)은 규칙적인 길이의 구절을 떼어 주기 때문에, 당악은 향악같이 복잡하지 않고 정아하다고 하겠다. 당악이 새로 들어온 이후로(12세기 중엽 경덕왕 때로 추정), 재래음악은 그것이 서역계악(西域系樂)이건 한국의 악이건 모두 향악이라고 불렸다(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의 예와 같이). 그것은 마치, 서양음악이 새로 밀려 들어온 후로 재래음악을 중국계의 음악이건 한국의 음악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국악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당악이 들어온 이후로 당악은 향악과 대(對)를 이루고, 각각 좌방악(左方樂)과 우방악(右方樂)이라고도 칭해졌고, 당악은 서(西)에, 향악은 동(東)에 위치하여 당악과 향악이 엇갈려 연주되는 풍습이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2. 1. 당악기의 사용
신라시대에는 당악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최치원의 《향악잡영》에 '향악'과 대칭되는 '당악'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 그리고 당비파·당피리와 같은 당악기들이 발견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당비파는 문무왕 13년(637)으로 추정되는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 석상에 보이며, 당악에서 사용되는 박(拍)이 신라 향악에까지 차용된 것을 보면 당악이 신라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범패에도 당음, 당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음악에도 당풍, 당악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의 당악은 방향, 당비파, 쟁, 당적, 당피리, 퉁소, 장고, 박 등을 사용했고,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에는 비파, 쟁, 당적, 퉁소, 생, 소, 요고가 보인다. 이를 종합하면, 신라의 당악은 방향, 당비파, 쟁, 당적, 퉁소, 당피리, 생, 소, 요고, 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780년 일본의 대당악은 쟁, 비파, 공후, 방향, 생, 우, 필률(대소), 소, 척팔, 횡적, 동발자, 갈고, 갈양, 요고, 계루, 도고, 계고, 고악고, 대고, 백자(박)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라시대 당악 연구에 참고가 된다.
당피리의 최저음은 황종(다)으로 향피리의 최저음보다 4도 높아, 당악은 향악에 비해 맑은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어 가사를 가진 음악은 대개 일자일음식이고, 박판은 규칙적인 길이의 구절을 구분하므로, 당악은 향악처럼 복잡하지 않고 정아했을 것이다. 당악이 유입된 이후(12세기 중엽 경덕왕 때로 추정) 재래음악은 서역계 악기든 한국의 악기든 모두 향악으로 불렸으며, 이는 서양음악 유입 후 재래음악을 국악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당악은 향악과 함께 좌방악과 우방악으로 불렸고, 당악은 서쪽에, 향악은 동쪽에 위치하여 엇갈려 연주되는 풍습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2. 2. 당악과 향악의 구분
신라시대에 당나라의 음악인 당악이 유입된 이후, 기존의 음악들은 서역계 음악이든 한국 고유의 음악이든 모두 향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서양 음악 유입 이후 한국 전통 음악을 국악으로 통칭하는 것과 유사하다. 당악과 향악은 각각 좌방악(左方樂)과 우방악(右方樂)으로 불렸으며, 서로 번갈아 연주되는 풍습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에 '향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9세기경에는 이미 당악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에 당비파가 새겨져 있고, 당악에 사용되는 박(拍)이 신라 향악에도 차용된 점, 범패(梵唄)에 당음(唐音)·당풍(唐風)이 있는 점 등을 통해 당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당악은 방향(方響)·당비파·쟁·당적·당피리·퉁소·장고·박 등을 사용하였고, 계유명 아미타불삼존 사면석상에는 비파·쟁·당적·퉁소·생·소·요고가 새겨져 있어, 이를 종합하면 신라의 당악은 방향·당비파·쟁·당적·퉁소·당피리·생·소·요고·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피리의 최저음은 황종(黃鍾, 다)으로 향피리의 최저음보다 4도 높아, 당악은 향악에 비해 맑은 소리를 낸다. 또한, 한어(漢語) 가사를 가진 음악은 대개 일자일음식(一字一音式)이고 박판(拍板)으로 규칙적인 길이의 구절을 나누기 때문에, 당악은 향악보다 정아(正雅)하다고 할 수 있다.
3. 서역계악
북을 요란하게 치는 서역계 음악은 저와 북을 쓰지 않고 가야금 하나 또는 거문고·횡적·막목(莫目) 세 가지를 쓰는 삼국악(三國樂)과 다르다. 이는 남쪽으로 뛰고 북쪽으로 뛰는(南奔北躍) 서역계의 건무(健舞)와 중국의 한아(閑雅)한 춤만큼의 차이이며, 삼국시대의 그 목이 길고 몸이 날씬한 금동불상(金銅佛像)과 통일신라 시대의 목이 짧고 몸이 두툼한 불상만큼의 차이이다.
3. 1. 서역계 음악의 특징
서역계 음악은 주로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형태로, 북을 요란하게 사용하는 등 역동적인 특징을 지녔다. 이는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기존 신라 음악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신라 음악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최치원(崔致遠, 857-?)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首) 중 4수가 향악이 아니라 서역계(西域系) 음악임을 알 수 있다. 《향악잡영》에 나타난 서역계 음악은 다음과 같다.
북을 요란하게 치는 서역계 음악은 저와 북을 쓰지 않고 가야금 하나 또는 거문고·횡적·막목(莫目) 세 가지를 쓰는 삼국악(三國樂)과 다르다. 이는 남쪽으로 뛰고 북쪽으로 뛰는(南奔北躍) 서역계의 건무(健舞)와 중국의 한아(閑雅)한 춤만큼의 차이이며, 삼국시대의 그 목이 길고 몸이 날씬한 금동불상(金銅佛像)과 통일신라 시대의 목이 짧고 몸이 두툼한 불상만큼의 차이이다.
4. 향악의 발전
통일신라시대에도 가야금 한 가지 악기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 예전 신라악 이외에 고구려악이나 백제악도 존속하였다. 고려 때와 조선조 때까지도 백제악인 방등산(方等山)·정읍(井邑)이 연주되었고, 고구려악인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洲)가 <고려사>에 전하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악은 삼현(三絃)·현금(玄琴)·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 삼죽(三竹, 대금·중금·소금(小芩))·박판(拍板)·대고(大鼓)·가무(歌舞)였는데, 신라악은 고구려의 현금·서역의 5현비파(향비파)·당의 박판을 여기저기서 섭취한 것이었다. 그런 신라의 관현반주는 가야금 하나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던 예전의 신라악에 비하면 큰 발전이라고 하겠다. 한편 박판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서, 또 현금 곡명(玄琴曲名)의 춘조곡(春朝曲)·추석곡(秋夕曲)·유곡청성곡(幽曲淸聲曲)·입실상곡(入實相曲) 등으로 미루어서, 그런 신라악은 종전 것과 달리 덜 복잡하고 더 아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하겠다.
4. 1. 신라 관현악의 발전
통일신라시대에도 가야금 한 가지 악기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 예전 신라악 이외에 고구려악이나 백제악도 존속하였다. 고려 때와 조선조 때까지도 백제악인 방등산(方等山)·정읍(井邑)이 연주되었고, 고구려악인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명주(溟洲)가 <고려사>에 전하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악은 삼현(三絃)·현금(玄琴)·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 삼죽(三竹, 대금·중금·소금(小芩))·박판(拍板)·대고(大鼓)·가무(歌舞)였는데, 신라악은 고구려의 현금·서역의 5현비파(향비파)·당의 박판을 여기저기서 섭취한 것이었다. 그런 신라의 관현반주는 가야금 하나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던 예전의 신라악에 비하면 큰 발전이라고 하겠다. 한편 박판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서, 또 현금 곡명(玄琴曲名)의 춘조곡(春朝曲)·추석곡(秋夕曲)·유곡청성곡(幽曲淸聲曲)·입실상곡(入實相曲) 등으로 미루어서, 그런 신라악은 종전 것과 달리 덜 복잡하고 더 아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하겠다.거문고는 고구려에서 쓰던 악기로 백제에서도 쓰였으며, 신라에서는 언제부터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효소왕(孝昭王, 643-702) 때 천존고(天尊庫)에 보존되었다는 것이 최고기록이고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때에는 민간에 퍼지게 되었다.
5. 음성서
신라 때 예부에 속하여 음악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경덕왕 때 대악감이라 고쳐 부르고 혜공왕 때 다시 음성서로 불렸다. 관직은 장(長, 혹은 경(卿)) 2인이 있고, 대사(大舍, 혹은 주부(主簿)) 2인, 사(史) 4인을 두었다.
6. 신라의 범패
진감대사가 830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범패를 전래하였다. 이보다 17년 늦게 당에서 귀국한 일본 승려 자각대사가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중국 산동반도 등주현의 적산원이라는 신라인 절에서 행해진 강경의식, 일일강의식, 송경의식에는 신라풍, 당풍, 당 이전의 고풍 등 세 가지가 있었다. 진감대사가 전래한 범패는 당나라의 새로운 불교 음악 양식으로 보인다.
6. 1. 범패와 신라 불교 음악
진감대사가 830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범패를 전래하였다. 이보다 17년 늦게 당에서 귀국한 일본 승려 자각대사가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중국 산동반도 등주현의 적산원이라는 신라인 절에서 행해진 강경의식, 일일강의식, 송경의식에는 신라풍, 당풍, 당 이전의 고풍 등 세 가지가 있었다. 진감대사가 전래한 범패는 당나라의 새로운 불교 음악 양식으로 보인다. 범패는 신라 불교 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독특한 음계와 창법을 사용하여 신라 음악의 다양성을 더하는 데 기여했다.7. 신라의 선풍과 국선의 음악
팔관회(八關會)는 하늘을 섬기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신라의 전통적인 의식으로 선랑, 국선(國仙), 선가(仙家)가 주재하였다. 이 팔관회 의식에서는 국선(화랑)이 가무를 아뢰어 용천(龍天)을 기쁘게 하여 복을 비는 제도였기 때문에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성대하게 하였다. 신라 진흥왕 때에 생겨서 숭상받은 국선 또는 화랑(花郞)은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때에도 성행하다가 고려 예종 때부터 점점 쇠퇴하였다.
7. 1. 팔관회와 국선
팔관회(八關會)는 하늘을 섬기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고풍(古風)으로 선랑, 국선(國仙), 선가(仙家)가 주재하였다. 이 팔관회 의식에서는 국선이 가무를 아뢰어 용천(龍天)을 환열(歡悅)시켜 복을 비는 제도였기 때문에 백희가무(百戱歌舞)를 성히 하였다. 신라 진흥왕 때에 생겨서 숭상받은 국선 또는 화랑(花郞)은 팔관회와 더불어 고려 때에도 성행하다가 고려 예종 때부터 점점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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