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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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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화공존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며 등장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평화 공존의 입장을 표명하며, 핵전쟁의 공포와 제3세계의 부상 등의 배경 속에서 흐름이 시작되었다. 이는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 완화를 시도했지만, 중소 분쟁으로 이어지는 등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이후에도 평화공존론은 외교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으며, 냉전 종식 이후에도 중동 문제 등 다양한 국제 문제 해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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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공존론

2. 역사적 배경

평화공존이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서로 다른 사회·경제 체제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으며, 이념 체제가 다른 국가 간의 관계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 외교 정책을 말한다.

양 체제의 평화공존 가능성은 동서 양 진영의 지도자들에 의해 가끔 강조되었지만, 이는 각국의 이해관계와 국제 정세 변동에 따른 외교적 발언에 불과했다. 진정한 의미의 평화공존 분위기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성되었다. 1970년은 동서 화해와 냉전 체제 종식을 위한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해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미국과 소련이 화해를 모색하면서 큰 틀이 잡혔고, 1970년년대에는 이러한 흐름이 아시아까지 확산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미국 내 혼란과 외교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1970년 2월 18일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대결의 시대에서 협상의 시대로'라는 정책 전환의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등장은 공산 진영의 지도력 약화를 초래했고, 흐루쇼프는 서방 진영과의 '냉전 대립에서 평화공존으로'라는 소련 외교의 전환을 선언했다. 서방 진영, 특히 미국의 적극적인 외교 공세로 동서 간의 현안 문제였던 '제2차 세계 대전의 사실상 종결'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동서 간의 평화공존 노력은 군사적 자체 평가와 세계 여론을 고려하여 전쟁 방지를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예시로는 1970년 서독과 소련 간 조약 및 서독과 폴란드 조약, 1971년 9월 17일 브란트-브레즈네프 회담에서 동·서독 동시 유엔 가입 협의와 유엔 안보 회의 개최, 닉슨의 중국 방문, 1972년 닉슨의 소련 방문과 SALT I 가조인, 다나카 일본 수상의 중국 방문과 중국·일본 간의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합의 등이 있다.

2. 1. 냉전 시대의 평화공존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소련은 이념 대립으로 인해 냉전 구도를 형성했다. 초기에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는 평화공존론을 소련 외교 정책으로 확립하며, 핵전쟁의 위험성을 줄이고자 했다.[1] 흐루쇼프는 제네바 정상회담과 같은 국제 평화 회의에 참석하고, 1959년 미국을 방문하는 등 국제 외교를 통해 평화공존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1]

1970년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대결의 시대에서 협상의 시대로' 정책 전환을 선언하며 동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서독과 소련, 폴란드 간의 조약 체결, 브란트-브레즈네프 회담(1971년 9월 17일), 닉슨의 중국 방문, 미·소 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 가조인(1972년 5월) 등은 동서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2. 2. 중소 분쟁과 평화공존론

중화인민공화국은 1954년 인도와의 협상 과정에서 평화공존 5원칙을 제안했다.[3] 1955년 반둥 회의에서 이 원칙이 재확인되었으며, 중국은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반란 지원 중단, 화교와의 거리두기 등 정책 변화를 보였다.[3]

평화공존 5원칙은 다음과 같다.

원칙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과 상호 이익
평화로운 공존



그러나 핵전쟁의 공포와 군사비 부담, 제3세계의 부상 등으로 평화공존론이 제시된 상황에서, 중국은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미국과 소련 중심의 국제 질서 강화로 인식했다. 또한, 중국을 승인하지 않고 타이완의 장제스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에 접근하는 소련에 대한 반발도 커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소 분쟁이 심화되었고, 1969년에는 중소 국경 분쟁까지 발생했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은 노선을 완화하고, 1982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평화공존 5원칙을 명시하며 국제 관계에서 이 원칙을 준수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의 평화공존 개념은 자유 무역 장려,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 중시, 타이완 문제에 대한 외부 개입 반대 등의 특징을 보인다.

2. 3. 쿠바와 평화공존론

체 게바라는 1964년 12월 11일 유엔 연설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국가 간의 평화 공존은 착취자와 피착취자, 억압자와 피억압자 간의 공존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 체 게바라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 정부 지도자로, 피그스 만 침공 이후 미국의 재침공이 핵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먹이로 삼는 하이에나와 재칼"로 묘사했다.[2]

3. 현대 외교에서의 평화공존

냉전 종식 이후에도 평화공존 개념은 외교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4년 크리스마스 담화에서 중동의 평화 공존을 촉구했다.[5]

21세기에 들어 러시아는 미국의 일극 지배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중화인민공화국, 베네수엘라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이란, 시리아와 같은 반미 성향의 이슬람교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미국에 대항하려 하고 있다. 이란 또한 핵 개발과 미사일 개발을 통해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미국의 일극 지배 체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요인내용
중·러의 강대화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력 강화
개발도상국의 부상인도, 브라질 등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과 영향력 확대
미국의 경제적 어려움미국의 쌍둥이 적자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
동맹국들의 약화일본, 영국 등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의 경제력 및 군사력 약화
중동 문제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불안정 심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세계는 두 개의 진영으로 분단되어 서로를 파멸시키기 위한 수단을 개발하고 있지만, 전쟁은 피할 수 있다. 시대에는 평화 공존만이 유일한 합리적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4. 한반도와 평화공존

한반도는 분단 국가로서, 평화공존 정책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민주당은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공존을 구축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정책을 추진하며, 햇볕정책, 6.15 남북공동선언, 10.4 남북정상선언 등이 그 예시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여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여 남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남북 관계 개선과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의 핵 개발, 군사 도발 등을 이유로 평화공존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1]

4. 1. 남북 관계와 평화공존

대한민국은 분단 국가로서 평화공존 정책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민주당은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강조하며, 평화공존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햇볕정책, 6.15 남북공동선언, 10.4 남북정상선언 등은 남북 간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의 핵 개발, 군사 도발 등을 이유로 평화공존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통해 남북 화해와 협력을 추진,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 성과를 거두었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 남북미 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 관계 개선과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키려 노력했다.[1]

4. 2. 국제 관계와 평화공존

Peaceful coexistence영어이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서로 다른 사회·경제 체제가 평화적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으며, 이념 체제가 다른 국가 간의 관계를 처리할 때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 외교 정책을 말한다.[1]

양 체제의 평화공존 가능성은 일찍부터 동서 양 진영의 지도자들에 의해 강조되어 왔으나, 이는 당시의 자국 이해관계와 국제 정세 변동에 대처하기 위한 외교적 발언에 불과하였다.[1] 진정한 의미의 평화공존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197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1] 1970년은 거시적 안목에서 동서 화해를 지향하고 냉전 체제를 지양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해였다.[1]

1962년 미국과 소련이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화해를 지향하면서 큰 틀이 잡혔고, 이후 냉전 체제 지양의 물결이 점차 주변으로 파급되어 1970년대에는 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1]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이 불러일으킨 미국 내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의견 대립을 해소하고, 아시아 여러 국가, 유럽, 공산권과의 관계를 포함한 외교 전반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내외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였다.[1] 그 결과 1970년 2월 18일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대결의 시대에서 협상의 시대로'라는 정책 전환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였다.[1]

스탈린 사망과 흐루시초프의 등장은 공산 진영의 지도력 약화를 초래하여 흐루시초프 스스로가 서방 진영과의 '냉전 대립에서 평화공존으로'라는 소련 외교의 전환을 선언하게 하였다.[1] 이에 호응한 서방 진영, 특히 미국의 적극적인 외교 공세로 동서 간의 현안 문제였던 '제2차 세계대전의 사실상 종결'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1] 물론 전쟁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동서 간의 평화공존 공세는 양측의 군사적 자체 평가와 세계 여론 때문에 전쟁 방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물적 증거를 남기고자 애쓴 흔적을 남기고 있다.[1]

동서 평화공존의 행동적 표현인 동시에 전쟁 방지를 위한 동서 간의 노력을 입증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1]

순서사건내용
1970년 서독과 소련과의 조약, 서독과 폴란드 조약
브란트·브레즈네프 회담(1971년 9월 17일)동·서독 동시 유엔 가입 협의와 유엔안보회의 개최
닉슨의 중국 방문
닉슨의 소련 방문과 SALT I(1972년 5월)
다나카 일본 수상의 중국 방문과 중국·일본 간의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합의


5. 비판과 과제

북한의 핵 개발과 지속적인 군사 도발은 평화공존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1] 특히 대한민국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며 안보 강화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어, 평화공존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1]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정치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1] 또한, 주변 강대국 간의 갈등과 경쟁 심화는 한반도 평화공존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과제가 있다.[1]

참조

[1] 간행물 The Rhetoric of Peaceful Coexistence: Khrushchev in America, 1959 1971
[2] 웹사이트 At the United Nations http://www.marxists.[...] Ocean Press 1964-12-11
[3] 뉴스 Mao Welcomes Marcos and His Family (Published 1975) https://www.nytimes.[...] 2020-11-08
[4] 뉴스 U.S. and Others Gave Millions To Pinochet (Published 2004) https://www.nytimes.[...] 2020-11-08
[5] 뉴스 BBC NEWS - Europe - Pope delivers sombre message http://news.bbc.co.u[...] 200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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