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젠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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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젠 연설은 1943년 10월 4일과 6일, 하인리히 힘러가 독일의 SS 지도부에게 행한 두 차례의 연설을 의미한다. 이 연설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상황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내용으로,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힘러의 직접적인 언급이 포함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연설에서 힘러는 유대인 학살을 "총통이 부여한 무거운 책임"으로 인식하고, 이를 수행하는 SS 대원들의 "품위"를 강조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연설들을 통해 나치 정권이 유대인 학살을 "내부의 적"을 제거하는 전쟁 목표로 설정하고, 다른 군사적 패배를 보상하려 했다고 해석한다. 반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연설 내용의 일부 단어의 의미를 문제 삼으며 대량 학살의 의도를 부인하려 시도하지만, 역사적, 언어적 근거를 통해 반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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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젠 연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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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젠 연설 | |
![]() | |
정보 | |
날짜 | 1943년 |
장소 | 포젠 |
연설자 | 하인리히 힘러 |
대상 | 나치 고위 인사 |
주제 | 홀로코스트와 기타 문제 |
2. 역사적 배경
1943년 10월에 있었던 포젠 연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전환기에 이루어졌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군은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쟁의 유일한 수용 가능한 결과로 결정했다. 같은 해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1943년 7월 초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배로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계속 후퇴하게 되었다. 1943년 7월 27일 – 8월 3일 주간에 연합군의 공습은 고모라 작전에서 함부르크를 공격했고, 페네뮌데의 무장 중심지는 8월 17일–18일 밤 히드라 작전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어 V-무기 개발을 심각하게 방해했다.
동시에 서부 점령지에서 독일군에 대한 저항이 커졌고, 노르웨이 (8월 17일)와 덴마크 (8월 29일)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독일 반체제 인사들은 독일의 재조직 (크라이사우 서클)과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암살 시도 (특히 7·20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를 계획했다.
1943년 6월 11일,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점령하 폴란드에 있는 모든 유대인 게토를, 6월 21일에는 모든 소련 게토를 청산하라고 명령했다. 6월 25일 현재,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아우슈비츠-II 비르케나우에 4개의 새로운 화장터와 가스실 시설이 완공되었다.
1943년 10월 19일까지 라인하르트 작전은 종료되고 관련된 절멸 수용소가 해체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파괴에 대한 저항 행위가 발생했다.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 (1943년 8월 2일)와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1943년 10월 14일)에서 수감자 반란이 있었다.
2. 1. 연합군의 반격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군은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쟁 목표로 설정했다.[6]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이 연합군으로 넘어갔다.[6] 같은 해 7월, 연합군은 시칠리아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했다.[6]2. 2. 독일의 위기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연합군은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쟁의 유일한 결과로 결정했다.[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며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하면서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계속 후퇴하게 되었다.[6]1943년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연합군의 함부르크 폭격(고모라 작전)으로 함부르크가 파괴되었고, 페네뮌데의 무장 중심지는 히드라 작전으로 인해 V-무기 개발에 큰 차질을 빚었다.[6]
독일 내에서는 크라이사우 서클을 중심으로 독일 재조직 논의가 있었고,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7·20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도 발생했다.[6]
2. 3. 홀로코스트의 심화
1943년 봄, 존더작전 1005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의 시신을 동부 전선 전역에서 발굴하여 소각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작전을 통해 인멸하려 했던 희생자 수는 180만 명의 유대인에 달했다.[7]하인리히 힘러는 1943년 6월 11일 독일 점령하 폴란드 내 모든 유대인 게토를, 6월 21일에는 소련 내 모든 게토를 청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 25일에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아우슈비츠-II 비르케나우에 4개의 새로운 화장터와 가스실 시설이 완공되었다.[7] 7월 1일, 모든 유대인은 국가 경찰의 법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43년 8월 24일, 힘러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과 점령지의 모든 경찰 부대가 그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다.[7] 10월 19일까지 라인하르트 작전은 종료되고 관련된 절멸 수용소는 해체될 예정이었다.[7]
이러한 절멸 정책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1943년 8월 2일)와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1943년 10월 14일)에서 수감자 봉기가 일어났다.[7] 비아위스토크 게토의 유대인들은 청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8월 16–23일),[7] 덴마크인들은 체포될 예정인 대부분의 덴마크 유대인을 탈출하도록 도왔다.[7]
3. 1943년 10월 4일 연설
힘러는 1943년 10월 4일 포젠 시청에서 친위대 고위 장교들을 대상으로 연설했다.[12] 이 자리에는 33명의 ''Obergruppenführer'', 51명의 ''Gruppenführer'', 8명의 ''Brigadeführer''가 참석했다.[13]
힘러의 연설은 축음기로 녹음되었고, SS-''운터슈름퓌러'' 베르너 알프레드 벤이 텍스트로 옮긴 후 힘러가 직접 수정했다. 최종본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되었다.[9]
연설에서 힘러는 동부 전선의 상황을 설명하며, 소련의 군사적 성공을 공산주의의 잔혹함과 독일 동맹국의 약점으로 돌렸다. 그는 수백만 명의 소련 전쟁 포로와 강제 노동자의 죽음을 언급하며 슬라브족을 ''열등인종''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근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4]
힘러는 "유대인 문제"를 "가장 어려운 결정"이라고 칭하며, 유대인 절멸을 나치의 역사적 사명으로 묘사했다.[20]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수확 축제 작전을 언급하며 유대인 학살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21]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축출을 언급하며 패배주의를 경계하고, 무장 친위대의 이점을 강조했다.[22]
알베르트 슈페어는 연설 전에 회의장을 떠났고 홀로코스트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역사가들은 힘러가 슈페어를 직접 언급한 것을 그가 참석했다는 증거로 본다.[23] huhde는 삭제한다.
3. 1. 연설의 구성
힘러는 전쟁 전 연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나의 투쟁에서의 히틀러의 발언에 따라, 슬라브족을 ''열등인종''(Untermensch)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근절이 역사적이고 자연스러운 필요성이라고 주장하며, 이 과정에서 감정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4]힘러는 유대인 학살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이를 정당한 전쟁 조치로 묘사했는데, 이는 이 시점까지 나치당 대표가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15]
힘러는 연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SS(친위대) 대원의 정신 상태를 칭찬하고, 그들의 미덕과 20~30년 안에 유럽의 지배 계급이 되어야 하는 의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3. 2. "유대인 학살" 언급
[15]4. 1943년 10월 6일 연설
1943년 10월 6일, 하인리히 힘러는 포젠에서 나치당 국가지도자와 대관구지도자, 히틀러 유겐트, 국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두 번째 연설을 했다.[2]
힘러는 이 연설에서 소련 파르티잔과 러시아 해방군을 언급하며 슬라브족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강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유대인 문제"를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라 표현하며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했다.[20] 또한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언급하고 수확 축제 작전을 암시하며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의 청산 계획을 드러냈다.[21]
힘러는 베니토 무솔리니 축출과 관련해 패배주의를 경계하고 당원들의 모범을 강조했으며, 내무 장관으로서의 의무와 무장 친위대의 이점을 언급하며 독일 국경 확장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22]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의 참석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힘러가 연설에서 슈페어를 직접 언급한 것이 참석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23]
4. 1. 주요 내용
힘러는 소련의 파르티잔과 러시아 해방군에 대해 언급하며, 슬라브족을 원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 Hiwi는 혼성 부대에서만 전투원으로 고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14]힘러는 "유대인 문제"를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라고 묘사했다.[20] 그는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언급하며, 유대인 강제 노동자들을 청산하는 수확 축제 작전을 암시했다.[21] 1943년 11월 3-4일에 이 작전으로 43,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4. 2. "유대 민족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어려운 결정"
힘러는 "남자들을 근절하는 것, 즉 그들을 죽이거나 죽게 하고, 그들의 자녀 형태로 우리 아들과 손자들의 복수자들이 자라도록 허용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람들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고 강조하며, 유대 민족 전체를 학살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20]5. 추가 연설 (1944년)
1944년에도 하인리히 힘러는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고, 이를 "타협 없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규정했다.[24][25][26][27]
5. 1. 1944년 1월 26일 연설
SS 대원은 우리 혈족 구성원에게는 정직하고, 품위 있고, 충성스럽고, 동료애가 있어야 하며, 그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한 가지 기본 원칙을 절대적인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러시아인, 체코인이 어떻게 되든 조금도 관심이 없다. 다른 민족이 우리 유형의 좋은 혈통을 제공할 수 있다면, 필요하다면 그들의 아이들을 납치하여 여기서 우리와 함께 키우는 것으로 가져올 것이다. 국가가 번영하며 살든 굶어 죽든, 그들을 우리 문화의 노예로 필요로 하는 한에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그렇지 않으면 전혀 관심이 없다. 대전차 참호를 파다가 러시아 여성 1만 명이 탈진하여 쓰러지든 말든, 독일을 위한 대전차 참호가 완성되는 한에서만 관심이 있다.[24]총독부의 최대 안정화를 위해서는 "인종 전쟁"과 "완전한 해결"이 필요하며, 복수자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대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24]
5. 2. 1944년 5월 연설
히믈러는 1944년 5월 5일 존토펜에서 열린 장군 회의에서 독일 내 유대인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폭격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25] 그는 유대인 문제 해결이 독일 국내 안보에 결정적이었으며, "명령과 합리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타협 없이 해결되었다"고 말했다.[26]히믈러는 또한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들에 관해서, 그 아이들이 자라서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을 살해할 복수자가 되도록 허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며 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26] 그는 "우리가 우리 지역에서 유대인을 근절할 수 있는 엄격함을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덧붙였다.[27]
6. 역사적 평가와 논란
포젠 연설은 친위대 수장이었던 하인리히 힘러가 1943년 10월, 나치 당 간부들 앞에서 행한 연설이다.[1] 이 연설은 힘러가 "최종 해결의 설계자"로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어떻게 인식하고 추진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전쟁 기간 중 힘러의 가장 중요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된다.[3]
힘러는 연설에서 유대인 절멸을 나치의 역사적 사명으로 묘사하며, 이를 위해 통상적인 완곡어법 대신 명시적인 표현을 사용했다.[4] 그는 "내부의 적"인 유대인 인종의 절멸을 전쟁 목표로 설정하고, 이 분야에서의 성공이 다른 군사적 패배를 보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70년까지는 첫 번째 연설만이 "포젠 연설"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후 두 번째 연설이 발견되면서 두 연설 모두 유대인 대량 학살에 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5]
6. 1. 역사학자들의 평가
역사학자들은 포젠 연설을 통해 하인리히 힘러가 유대인 학살을 "총통이 부여한 무거운 책임"으로 인식하고, 이를 수행하는 SS 대원들의 ''Anständigkeit''(품위)를 강조했다고 분석한다.[28][29] 이들은 나치 정권이 유대인 학살을 "내부의 적"을 제거하는 전쟁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다른 군사적 패배를 보상하려 했다고 해석한다.사울 프리들랜더는 힘러가 히틀러의 게르만족 "동부의 생존권(Lebensraum)" 계획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집행자로서의 자아상을 가졌다고 강조한다.[28] 콘라트 크비에트는 SS가 "가장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품위"를 지켰다는 점을 언급한다.[29]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다른 작가들은 "범죄의 정상성"을 강조한다. 거의 모든 범죄자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가 살인을 저지른 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졌으며, 대부분은 기소되어 과거를 상기했을 때 놀라움, 혼란, 분노로 반응했다.[29]
한스 부흐하임은 피고인들이 ''mens rea''(유죄 의도)가 부족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힘러는 유대인 살인을 지시가 아닌 "올바른" 이념적 동기를 통해 승인했으며, 사디즘이나 이기심에서 비롯된 유사한 살인은 기소할 수 있도록 했다.[30]
디터 폴은 나치 국가의 전통적인 기관들이 1943년에 비밀리에 전후 방어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아무도 통보받지 않았고, SS가 전적으로 비난받았다고 말한다.[31] 따라서 힘러 연설에서 학살에 대한 가차없는 묘사는, 고위 SS 및 나치 간부들을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공모자이자 공범으로 공식적으로 만들려는 수단으로 해석된다.[32]
요제프 괴벨스는 1943년 3월 2일 일기에서 유대인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것에 너무 매달려 있어서 더 이상 탈출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좋다"라고 언급하며 이러한 관점을 암시한다.[33] 또한 1943년 10월 9일 일기에서는 힘러의 두 번째 연설에 대해 언급하며, 힘러가 유대인 문제에 대해 "매우 꾸밈없고 솔직한 그림을 제시한다"라고 평가했다.[34]
6. 2.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주장과 반박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하인리히 힘러가 포젠 연설에서 사용한 "Ausrottung"(근절)이라는 단어가 유대인 대량 학살이 아닌 추방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35] 그러나 "Ausrottung"은 문맥상 물리적 말살을 의미한다.[35] 힘러는 같은 연설에서 "umbringen"(죽이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유대인을 죽일 의도를 명확히 했다.[35]힘러는 또한 다른 연설에서 ''ausrotten''의 의미를 ''umbringen''(죽이다)과 동일시하며 정의했다.[35]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aus"와 "rotten"이 영어의 "out"과 "root"와 어원이 같다는 이유로 ''ausrotten''을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35] 그러나 독일어에서 ''ausrotten''은 사람이나 인종과 같은 살아있는 것에 사용될 때,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35]
게르마르 루돌프와 우도 발렌디는 첫 번째 연설 녹음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했지만,[38] 코블렌츠 연방 문서 보관소(Bundesarchiv)에서 두 번째 포젠 연설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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