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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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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 공작은 프랑스 군인이자 원수로, 30년 전쟁, 네덜란드 전쟁, 대동맹 전쟁 등에서 활약했다. 그는 1627년 결투로 사망한 아버지의 사후 고모에 의해 콩데 공과 함께 양육되었고, 콩데 공 휘하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뤽상부르는 네덜란드 전쟁과 대동맹 전쟁에서 윌리엄 3세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흑미사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1695년 사망했으며, 생시몽 공작과 볼테르로부터 뛰어난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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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뤽상부르 공작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
르 뒤크 드 피네-뤽상부르
출생일1628년 1월 8일
출생지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일1695년 1월 4일
사망지베르사유, 프랑스
별칭노트르담의 태피스트리
직함페르 드 프랑스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 서명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 서명
군사 경력
소속프랑스 왕국
복무 기간1643년–1694년
최종 계급프랑스 원수
주요 참전 전투/전쟁30년 전쟁
프롱드
프랑코-스페인 전쟁
드볼루션 전쟁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세네프 전투
발랑시엔 공성전
카셀 전투
생드니 전투
9년 전쟁
플뢰뤼스 전투
뢰제 전투
스텐케르케 전투
뇌르빈덴 전투
가족 관계
배우자피네-뤽상부르 여공 마들렌 드 클레르몽-토네르
아버지프랑수아 드 몽모랑시-부트빌
어머니엘리자베트 앙젤리크 드 비엔
자녀목록 참조

2. 어린 시절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부트빌은 그가 태어나기 6개월 전 결투로 베브롱 후작과 싸우다 처형되었다.[1] 그의 고모 콩데 공비 샤를로트 마르그리트 드 몽모랑시는 그를 맡아 자신의 아들 앙기앵 공작과 함께 교육했다.[1] 어린 몽모랑시(당시에는 부트빌이라고 불림)는 사촌에게 애착을 가졌으며, 프롱드의 혼란 속에서 그의 성공과 실패를 함께했다.[1] 1659년, 몽모랑시는 프랑스로 돌아와 사면을 받았다. 콩데는 샤티용 공작부인 (몽모랑시의 누이)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추종자이자 사촌인 몽모랑시를 프랑스에서 가장 유력한 상속녀인 마들렌 드 뤽상부르(Madeleine de Luxembourg, 텡그리 공주이자 피네 공작 영지 상속녀, 1661)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1] 이후 몽모랑시는 뤽상부르 공작과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다.[1]

3. 콩데 공 휘하에서의 활약

몽모랑시 가문의 방계 출신인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부트빌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투 금지령을 어기고 여러 번 결투를 벌인 죄로 프랑수아가 태어나기 반년 전인 1627년 6월 22일에 처형되었고, 프랑수아는 샤를로트에게 거두어져 앵기앵 공작 (후의 콩데 공)과 함께 양육되었다. 이윽고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콩데 공 아래에서 군무를 쌓아갔다.

30년 전쟁 중에는 콩데 공을 따라 로크루아 전투, 프라이부르크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됭케르크 포위, 랑스 전투 등에 참전했다. 프롱드의 난에서는 콩데 공이 루이 14세에게 반역했을 때도 행동을 함께 한 결과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1653년부터의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는 스페인군에 소속되어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튀렌과 싸웠다.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콩데 공과 함께 사면받고 프랑스로 귀국, 1661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이은 마들렌 드 클레르몽-토네르와 결혼하여 피네-뤽상부르 공작이 되었다. 네덜란드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1668년 콩데 공의 프랑슈-콩테 평정에 참여했고, 1672년 네덜란드 침공 전쟁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되어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오버레이설 주를 제압했다.[1]

3. 1. 30년 전쟁

몽모랑시 가문의 방계 출신인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부트빌의 아들로 태어났다. 30년 전쟁 중에 콩데 공이 스페인령 네덜란드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 참전했고, 콩데 공의 신성 로마 제국 방면 원정에도 종군하여 1644년 프라이부르크 전투, 1645년 뇌르틀링겐 전투에도 참여했다. 콩데 공이 네덜란드로 돌아가자 종군하여 1646년 됭케르크 포위, 1648년 랑스 전투에도 참전했다.[1]

3. 2. 프롱드의 난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부트빌의 아들로 태어난 몽모랑시뤽상부르는 아버지의 결투로 인해 태어나기 반년 전인 1627년 6월 22일에 아버지가 처형되었고, 샤를로트 마르그리트 드 몽모랑시에게 거두어져 앙기앵 공작 (후의 콩데 공)과 함께 양육되었다.[1] 몽모랑시뤽상부르는 콩데 공에게 애착을 가지며 프롱드의 난에 가담하여 루이 14세에게 반역한 콩데공과 함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1] 1653년부터의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는 스페인군에 소속되어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튀렌과 싸웠다.[1]

4. 장군으로서의 뤽상부르

몽모랑시 가문의 방계 출신인 프랑수아 드 몽모랑시-부트빌의 아들로 태어난 뤽상부르는 결투 금지령을 어기고 여러 번 결투를 벌인 죄로 아버지가 처형된 후, 샤를로트에게 거두어져 앵기앵 공작(후의 콩데 공)과 함께 양육되었다. 30년 전쟁 중 콩데 공 아래에서 군무를 쌓으며 로크루아 전투, 프라이부르크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등에 참전했다. 콩데 공이 네덜란드로 돌아간 후에도 종군하여 됭케르크 포위, 랑스 전투에 참전했다.

프롱드의 난 때 콩데 공이 루이 14세에게 반기를 들자 함께 행동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1653년부터의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는 스페인군에 소속되어 튀렌이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싸웠다.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콩데 공과 함께 사면받아 프랑스로 귀국한 뤽상부르는 1661년 뤽상부르 가문의 혈통을 이은 피네-뤽상부르 공작 부인과 결혼하여 프랑스 왕국 귀족(Pairie de France)에 선출, 피네-뤽상부르 공으로 서임되었다. 네덜란드 계승 전쟁에서는 1668년 콩데 공의 프랑슈-콩테 평정에 참여했다.

1672년 네덜란드 침략 전쟁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되어 네덜란드로 침공, 오버레이설 주를 제압했다. 네덜란드가 제방을 붕괴시켜 홍수선을 넓히고 네덜란드 총독윌리엄 3세(후의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과 연합하여 저항하자 전선이 정체되었고, 뤽상부르는 독일 전선으로 보내진 튀렌을 대신하여 위트레흐트주의 프랑스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겨울에 수로가 얼자 위트레흐트주에서 동진하여 홀란트주 제압을 시도했지만, 얼음이 빨리 녹아 철수했다. 1673년 윌리엄 3세의 북상을 막지 못하고 나르덴을 빼앗겼으며, 윌리엄 3세의 독일 남하에도 대응하지 못하여 본을 탈환당한 후 네덜란드에서 철수했다.

1674년 네덜란드 방면 담당이 되어 콩데 공과 함께 스네프 전투에서 윌리엄 3세를 격파했고, 1675년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다. 1676년 콩데 공의 후임으로 라인강 전선을 방어했고, 1677년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 오를레앙 공작필리프 1세(루이 14세의 동생)와 발랑시엔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생토메르 포위에 들어갔을 때, 구원하러 온 윌리엄 3세와 카셀 전투에서 승리하여 생토메르도 함락시켰다. 1678년 생-드니 전투에서도 승리했고, 네이메헌 조약으로 종전되자 윌리엄 3세와 회견한 후 철병했다.

1688년 대동맹 전쟁에서는 1690년 네덜란드 방면군을 지휘하던 위미에르 공작과 교체되어 네덜란드군을 이끄는 발데크 후작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를 플뢰뤼스 전투에서 대파했다. 1691년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된 빌럼 3세와 다시 대치했다.

1691년 부플뢰르의 몬스 포위 지원, 할레 점령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만, 1692년 나뮈르를 포위, 함락시키고 (1차 나뮈르 포위전) 스텐케르크 전투에서 윌리엄 3세와 교전하여 승리했다. 1693년 위를 함락시키고 네르윈덴 전투에서 윌리엄 3세를 격파, 샤를루아를 함락시켜 삼브르 강 전역, 위까지의 뫼즈 강 유역을 확보했다.

1694년에는 서로 행군을 반복했을 뿐 진전 없이 귀국했고, 1695년 베르사유에서 66세로 사망했다.

4. 1. 상속 전쟁 (1667-1668)

상속 전쟁(1667~1668)이 시작될 때, 콩데는 지휘권을 갖지 못했고, 그 결과 뤽상부르도 지휘권을 갖지 못했지만, 두 번째 작전에서 그는 프랑슈콩테 정복 작전에서 콩데의 중장으로 복무했다. 그 후 4년간의 평화 기간 동안, 뤽상부르는 루부아의 호감을 얻었다.

4. 2. 네덜란드 전쟁 (1672-1678)

상속 전쟁 이후, 뤽상부르는 루부아의 호의를 얻어 1672년 네덜란드 침략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진압하는 고위급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우오든(Woerden)에서 오라녜 공(후의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을 패배시켰으나 네덜란드 홍수선(Dutch Water Line)에 멈추어야 했다. 1673년 위트레흐트와 마스트리히트에서 적군 70,000명의 정면에서 단지 20,000명에 불과한 아군을 성공적으로 퇴각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그의 위치는 장군 중에서는 최고 계급이 되었다.[3]

1674년 뤽상부르는 창설된 가르드 뒤 코르(Garde du Corps)의 지휘관이 되었고, 1675년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1676년 라인군(army of the Rhine)의 최고사령관이 되었으나, 필립스부르크에서 로렌 공작을 붙잡는 데 실패했다. 1677년 발랑시엔을 급습하고 카셀 전투에서 오라녜 공을 패배시켰다. 1678년 생드니에서 오라녜 공을 다시 패배시키고 네이메헌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뤽상부르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루부아의 시기를 받아 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1680년 바스티유에서 몇 달 동안 보낸 후 풀려났으나, ''capitaine des gardes'' 궁전 직위는 양도해야 했다.[3]

4. 3. 흑미사 사건 연루

뤽상부르 공작은 네덜란드 침략 전쟁에서 오라녜 공 윌리엄 3세를 여러 번 격파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종전 후 궁정 스캔들에 휘말렸다. 라 부아쟁이 일으킨 흑미사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1679년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3] 1680년 석방되었으나, 한동안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3] 투옥 원인은 육군 장관 루부아와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억측이라는 설도 있다.[3]

5. 대동맹 전쟁 (1688-1697)

1690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국왕 루이의 군대 사령관 루이 드 크레방 위미에르 공작을 대신해 위임되었다.[1] 1690년 7월 1일 뤽상부르는 플뢰뤼스에서 윌리엄 동맹군 사령관과 발데크 공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나, 전략적으로 이 전투는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1][2] 이듬해 1691년 9월 18일 로이체에서 다시 한번 승리했다.[1]

다음 전역에서 그는 왕을 도와 1692년 나무르 공방전과[1] 스텐케르케에서 윌리엄을 패배시켰다.[1] 1693년 7월 29일 네르빈덴에서 옛 적에게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얻었으나,[1] 그의 군대가 겪은 막대한 손실로 인해 작전이 중단되었고,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킨 후 루이 14세는 룩셈부르크에게 프랑스 국경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여, 전략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2]

1688년에 발발한 대동맹 전쟁에서 1690년까지는 활약하지 못했으나, 위미에르 공작과 교체되어 네덜란드 방면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네덜란드군을 이끄는 발데크 후작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남하하여 독일 방면의 아군과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강행군으로 선수를 쳐 발데크와 대치하여 플뢰뤼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독일군과의 합류를 저지했다.[3] 이듬해 1691년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된 빌럼 3세가 잉글랜드에서 대륙에 상륙하여, 다시 윌리엄 3세와 대치했다.[3]

1691년 전역은 부플뢰르의 몬스 포위 지원, 할레 점령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1692년 나뮈르를 포위, 함락시키자 (1차 나뮈르 포위전), 서쪽으로 이동하여 할레 근교에서 윌리엄 3세와 교전했다 (스텐케르크 전투).[3]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피해가 커서 겨울 캠프에 들어갔고,[3] 1693년 동진하여 리에주를 노리면서 도중에 위를 함락시키고 북상하여 윌리엄 3세를 격파 (네르윈덴 전투), 서쪽으로 돌아가 샤를루아를 함락시켜 삼브르 강 전역, 위까지의 뫼즈 강 유역을 확보했다.[3]

1694년에는 서로 행군을 반복했을 뿐 진전 없이 귀국했다.[3]

6. 죽음

그해 겨울 베르사유로 돌아온 뤽상부르는 병에 걸려 죽었다. 마지막 순간 뤽상부르를 간호하던 유명한 예수회 신부 부르달루(Bourdaloue)는 그의 죽음을 보고 "나는 그의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뤽상부르의 품행은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매우 나빴으나 장군으로써 그는 콩데의 훌륭한 제자였다. 전역(campaign)의 관리는 콩데와 비슷하게 나태했지만 좋은 영감(inspirations)을 포착해 그가 보인 전투의 움직임으로 윌리엄의 열정과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병사들의 끈기에 대항해 참아내며 견뎌낼 수 있었다.

루이 14세 치세의 군사 역사에서 제2시대는 뤽상부르의 죽음과 카티나의 불명예로 끝났다. 카티나와 뤽상부르는 콩데와 튀렌에 비해 한 수 아래지만, 탈라르와 빌레루아에 비하면 우수했다. 그는 신랄한 위트를 가지고 있었다. "난 결코 꼽추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I never can beat that cursed humpback)라고 윌리엄이 그를 평가하며 말하자, 뤽상부르는 "그는 절대 내 뒤를 보지 못할 것이다"(he has never seen my back.)라고 대꾸했다. 뤽상부르는 4명의 자식을 남겼는데, 그 중 한 명이 프랑스 원수가 된 마르샬 드 몽모랑시(Marechal de Montmorency)이다.

7. 평가

뤽상부르는 당대 기준으로 매우 나쁜 품행을 보였지만, 장군으로서는 콩데의 훌륭한 제자였다. 전역 관리는 콩데와 비슷하게 나태했지만, 전투에서 뛰어난 영감을 발휘하여 윌리엄 3세와 네덜란드 및 잉글랜드 병사들의 끈기에 맞서 싸웠다.[1]

루이 14세 시대의 군사 역사에서 제2시대는 뤽상부르의 죽음과 카티나의 불명예로 끝났다. 카티나와 뤽상부르는 튀렌과 콩데에 비해 한 수 아래지만, 탈라르와 빌레루아보다는 우수했다. 그는 신랄한 재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나는 결코 꼽추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라는 윌리엄 3세의 말에 "그는 절대 내 뒤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대꾸한 일화가 그의 기형에서 유래한 것이다.[1]

생시몽은 뤽상부르에 대해 "적 앞이나 전투에서 그보다 더 훌륭하고, 신중하며,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담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치열한 포격 속에서도, 위험하고 위급한 순간에도 관찰하고 예측할 수 있는 냉철함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그 외의 모든 시간 동안 그는 게으름 그 자체였다"라고 덧붙였다.[1]

네덜란드 침략 전쟁과 대동맹 전쟁에서 군략을 발휘하여 윌리엄 3세가 이끄는 동맹군에게 승리를 거듭하고 많은 도시를 함락시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스테네르케 전투에서는 불리한 지형에서 기습을 받았음에도 3번이나 반격하여 승리하여 프랑스에서 개선할 때 민중에게 환영받고 병사들에게도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전투마다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전략에서는 윌리엄 3세에게 미치지 못했고, 네덜란드 침략 전쟁에서는 점령했던 네덜란드에서 철수했으며, 대동맹 전쟁에서도 동맹군의 증원으로 고전했다.[1]

볼테르는 저서 『루이 14세의 세기』에서 뤽상부르를 콩데 공과 닮았다고 지적하며, "뤽상부르는 콩데에게 전술을 배웠지만, 성격 면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기백, 신속한 일 처리, 날카로운 식별력, 지식욕에 불타면서도, 몽롱하고 다소 산만한 두뇌, 여색을 좋아하고, 풍채가 좋지 않은데도 늘 연애를 하고, 때로는 진심으로 흠모받기도 한다. 여러 면에서 현자라기보다는 영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인물이다"라고 평했다.[1]

8. 결혼과 자녀

1661년 3월 17일,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는 마들렌 드 클레르몽토네르와 결혼했다. 마들렌은 샤를 앙리 드 클레르몽과 피네-뤽상부르 여공작 마르그리트 (룩셈부르크-리니 가문)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뤽상부르 공작부인, 텡그리 공녀, 리니 백작부인, 당구 남작 부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는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샤를 프레데릭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2년1726년피네-뤽상부르 공작, 샤를 2세 프랑수아 프레데릭 드 몽모랑시-뤽상부르의 아버지, 1757년 프랑스 원수
피에르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3년1700년생-미셸 도르캉 수도원장
폴 시지스몽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4년1731년샤티용 공작, 뤽스 백작, 아프레몽 남작. 숙모 엘리자베트-앙젤리크(샤티용 공작 가스파르 4세 드 콜리니 부인)를 통해 샤티용 공작위를 상속받음.
앙젤리크 퀴네공드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66년1736년룩셈부르크 양, 루이 앙리 드 부르봉, 바타르 드 수아송과 결혼, 루이 드 부르봉의 사생아, 슬하에 두 자녀를 둠.
크리스티앙 루이 드 몽모랑시-뤽상부르1675년1746년팅그리 공, 뤽스 백작, 프랑스 귀족, 1734년 프랑스 원수


참조

[1] 서적 500 Great Military Leaders [2 volumes] https://books.google[...] ABC-CLIO
[2] 서적 ルイ十四世の世紀(一), ルクセンブルクの歴史, イギリス革命史(上)
[3] 서적 ルイ十四世の世紀(一), イギリス革命史(上)
[4] 서적 ルイ十四世の世紀(一), イギリス革命史(下)
[5] 서적 ルイ十四世の世紀(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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