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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통령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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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통령정부는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수립되어 1804년 프랑스 제1제정 성립으로 종말을 맞이한 프랑스의 정부 형태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1통령으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점차 독재 체제로 변모했다. 통령정부는 1799년 11월 임시 통령 정부를 거쳐, 1799년 12월 나폴레옹, 캉바세레스, 르브룅 3명의 통령 체제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1800년 국민투표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1802년 종신 통령에 올랐으며, 1804년 앙기앵 공작 사건을 거치며 황제 즉위의 기반을 다졌다. 통령정부 시기에는 경제, 법률, 행정,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와 함께 공화주의는 쇠퇴하고 제정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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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통령정부 - [의회]에 관한 문서
개요
오귀스트 쿠데르의
오귀스트 쿠데르의 "국무원 설치" 그림. 장 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샤를 프랑수아 르브룅 (왼쪽부터 오른쪽)
명칭프랑스 통령 정부
현지 명칭Consulat français
통치 기간
시작1799년 11월 9일
종료1804년 5월 18일
이전프랑스 총재정부
이후프랑스 제1제국
정치
정치 체제공화정
정부 형태공화정
구성집정관 (3인)
제1통령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제2통령장 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제3통령샤를 프랑수아 르브룅
기타
존속 국가프랑스 제1공화국

2. 총재정부의 몰락

1798년과 1799년 프랑스 군의 연이은 패배는 총재정부를 흔들었고, 결국 1799년 11월 총재정부는 붕괴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1799년 6월 18일(공화력 7년 프레리알 30일 쿠데타)을 총재정부 몰락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전황 악화, 프랑스 남부에서의 왕당파의 반란, 서부 지역(주로 브르타뉴, 메인, 노르망디)에서의 슈앙의 난, 오를레앙주의자의 음모 등으로 궁지에 몰린 총재정부는 사회 불안을 진정시키고 국경 방어에 나서기 위해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 정치에서 사용되었던 가혹한 조치(강제 차관법, 인질법)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1799년 7월, 정부는 공포 정치를 흉내 내어 부유층에게 대대적인 증세나 국채 구매 중 하나를 강요하여 1억 리브르를 발행했다.

2. 1. 프레리알 30일 쿠데타와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1798년과 1799년 프랑스 군의 연이은 패배는 총재정부를 흔들었고, 결국 1799년 11월 총재정부는 붕괴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1799년 6월 18일(프랑스 공화력으로 프레리알 30일)을 총재정부 몰락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날, 반(反)자코뱅 성향의 총재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반자코뱅 성향의 총재 폴 바라스의 도움을 받아 다른 세 명의 총재를 축출했다.

1799년 3월과 4월에 걸쳐 진행된 1799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신(新)자코뱅" 세력이 양원에서 다수를 차지했고, 이들은 5인 총재정부에 불만을 품었다. 6월 5일, 총재 장 바티스트 트레일하르의 선거에 불법성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는 자코뱅 성향의 루이 제롬 고이에로 교체되었다. 다음 날인 6월 18일, 반자코뱅 성향의 필리프 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와 루이 마리 드 라 레벨리에르 레포 역시 사임해야 했다. 이들은 자코뱅 성향의 남작 장 프랑수아 오귀스트 물랭과 비(非)자코뱅, 즉 "약한" 자코뱅 성향의 로제 뒤코로 교체되었다. 새로운 세 명의 총재는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반자코뱅 엘리트들은 5인 총재정부가 여전히 반자코뱅의 손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사적 재앙, 남부의 왕당파 봉기, 프랑스 서부 12개 주(주로 브르타뉴, 메인, 노르망디)에서 일어난 슈앙 소요, 왕당파의 음모 등으로 총재정부의 종말은 확실해졌다. 민심을 진정시키고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 당시의 인질법과 같은 테러 조치가 필요했다. 시에예스가 이끄는 새로운 총재정부는 헌법 개정을 위해 "머리"(자신의 머리)와 "칼"(자신을 지지할 장군)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시에예스는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장군을 "칼"로 삼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 장군을 선택했다. 그러나 주베르가 노비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시에예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눈을 돌렸다.[1]

기욤 브륀과 앙드레 마세나 장군이 베르겐 전투와 취리히 2차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의 동맹국들은 발미 전투 이후처럼 국경에 머물렀고, 총재정부의 운명은 회복되지 않았다. 라자르 오슈의 죽음(1797년) 이후 군대의 유일한 지배자로 떠오른 나폴레옹은 프레쥐스에 상륙하며 승리의 위엄을 과시했다.[1]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8년), 보나파르트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주도하여 프랑스 의회와 군사 권력을 장악하고 정부의 현직 총재들에게 사임을 강요했다. 11월 10일 밤, 원로원의 잔존 세력은 공화력 3년 헌법을 폐지하고, 통령정부를 제정했으며, 공화력 8년 헌법으로 보나파르트에게 유리하도록 쿠데타를 합법화했다.[1]

3. 통령정부의 수립과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통령정부가 수립되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쿠데타가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에게 유리한 듯 보였지만, 나폴레옹은 교묘하게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었다.[3]

새로운 정부는 국무원, 호민원, 입법원, 보수 원로원의 네 기관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세 입법부는 법안 심의와 의결을 담당했고, 보수 원로원은 법안 검토와 제1통령 자문을 맡았다. 행정 권한은 세 명의 통령에게 주어졌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되었다.[3]

나폴레옹은 시에예스가 원했던 '대선거인' 직위를 거부하고, 제1통령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는 점차 다른 두 통령과 의회를 약화시키며 권력을 독점했고, 결국 시에예스의 헌법을 사실상 독재 체제로 변모시켰다.[3]

1800년 2월 7일 국민 투표에서 새 헌법이 99.9%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 이는 나폴레옹의 인기와 더불어, 프랑스 국민들이 안정을 갈망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후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 승리, 왕당파 음모 진압, 뤼네빌 조약 체결, 1801년의 정교 협약 체결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3]

1802년 3월 아미앵 조약 체결 후, 나폴레옹은 종신통령직을 제안했고, 1802년 8월 2일 국민투표에서 99.7%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4][5][6] 이로써 나폴레옹은 사실상 종신 권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앙시앵 레짐의 여러 제도를 부활시키고, 중앙 집권적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 창설, 정교 협약 체결, 간접세 부활 등을 통해 국가 기구를 강화하고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비판 세력을 억압하고 군부를 약화시키는 한편, 대중에게는 평화와 질서, 경제적 안정을 제공함으로써 지지 기반을 확고히 했다.[11]

3. 1. 새 정부의 구성

1799년 11월 10일부터 12월 12일까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Roger Ducos|로제 뒤코영어 3인이 임시통령직을 수행했다. 이후 1804년 5월 18일까지는 나폴레옹이 제1통령, Jean Jacques Régis de Cambacérès|장 자크 캉바세레스영어가 제2통령, Charles-François Lebrun, duc de Plaisance|샤를 프랑수아 르브룅영어이 제3통령을 맡았다.

제2통령 캉바세레스,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제3통령 르브룅


처음에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시에예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듯 보였다. 시에예스는 공화국을 위한 새로운 정부 시스템을 주장했고, 쿠데타는 그의 시스템을 실현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피에르 클로드 프랑수아 도누의 계획을 시에예스의 계획과 대립시키고, 자신의 야망에 도움이 될 부분만 취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상황을 이용했다.[3]

새로운 정부는 세 개의 의회로 구성되었다. 법안을 작성하는 국무원, 법안에 대해 토론하지만 투표할 수는 없는 호민원, 호민원의 토론을 검토한 후 법안에 대해 투표하지만 토론할 수는 없는 입법원이었다. 보수 원로원은 이 세 의회와 동등한 정부 기관으로, 법안 초안을 확인하고 제1통령에게 조언했다. 최종 행정 권한은 10년 임기로 선출된 세 명의 통령에게 주어졌다. 보통 선거는 유지되었지만, 원로원이 의회 구성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명사 명단에 의해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네 개의 정부 기관은 12년 헌법 하에서도 유지되었지만, 각 기관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다.

나폴레옹은 최고 행정관이자 국가 원수로서 단일 '대선거인'을 두려는 시에예스의 원래 생각을 거부했다. 시에예스는 이 자리를 자신을 위해 남겨두려 했지만, 나폴레옹은 그 자리를 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맡을 통령의 권위를 강화했다. 나폴레옹은 동등한 삼두정치의 일원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제1통령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다른 두 명의 통령인 캉바세레스와 르브룅, 그리고 의회를 약하고 종속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권력을 통합함으로써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의 귀족적인 헌법을 사실상의 독재로 바꿀 수 있었다.[11]

1800년 2월 7일, 국민 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이 확정되었다. 이 헌법은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제1통령에게 넘겨주고, 다른 두 통령에게는 형식적인 역할만 남겼다.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의 99.9%가 이 안에 찬성했다.

이러한 거의 만장일치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나폴레옹은 많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인기가 있었다. 혼란의 시기 이후, 많은 프랑스인들은 승리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 대한 그의 눈부시지만 실패한 평화 제안, 방데프랑스어에 대한 그의 신속한 무장 해제, 그리고 정부의 안정, 질서, 정의 및 절제에 대한 그의 언급에 안도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프랑스가 다시 진정한 정치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으며, 유능한 정부가 마침내 책임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11]

3. 2.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 과정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초기에는 나폴레옹보다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시에예스는 공화국을 위한 새로운 정부 시스템을 주장했고, 쿠데타는 그의 시스템을 실현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피에르 클로드 프랑수아 도누의 계획을 시에예스의 계획과 대립시키고, 자신의 야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만 취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강화했다.[3]

새로운 정부는 세 개의 의회로 구성되었다. 법안을 작성하는 국무원, 법안에 대해 토론하는 호민원, 호민원의 토론을 검토한 후 법안에 대해 투표하는 입법원이었다. 보수 원로원은 이 세 의회와 동등한 정부 기관이었으며, 법안 초안을 확인하고 제1통령에게 직접 조언했다. 최종 행정 권한은 10년 임기로 선출된 세 명의 집정관에게 주어졌고, 보통 선거는 유지되었지만 원로원이 의회 구성원을 선택할 수 있도록 명사 명단에 의해 유명무실해졌다. 12년 헌법 하에서 이러한 네 개의 정부 기관은 유지되었지만, 각 기관의 권한은 크게 줄어들었다.[3]

나폴레옹은 최고 행정관이자 국가 원수로서 단일 '대선거인'을 두려는 시에예스의 원래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시에예스는 이 자리를 자신을 위해 남겨두려고 했지만, 나폴레옹은 그에게 이 자리를 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맡을 자리인 집정관의 권위를 강화했다. 나폴레옹은 동등한 삼두정치의 일원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점차 제1통령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여 다른 두 명의 집정관인 장 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와 샤를 프랑수아 르브룅, 그리고 의회들을 약하고 종속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권력을 통합함으로써 보나파르트는 시에예스의 귀족적인 헌법을 사실상의 독재로 바꿀 수 있었다.[3]

1800년 2월 7일 국민 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이 확정되었다. 이 헌법은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제1통령의 손에 넘겨주고, 다른 두 집정관에게는 형식적인 역할만 남겼다.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의 99.9%가 이 안건에 찬성했다. 이러한 결과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나폴레옹은 많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인기가 있었다. 혼란의 시기 이후, 프랑스 내 많은 사람들은 그의 평화 제안, 방데프랑스어에 대한 신속한 무장 해제, 그리고 정부의 안정, 질서, 정의 및 절제에 대한 그의 언급에 안도했다.[3]

1800년 6월 14일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잠시 패배의 조짐이 보였지만, 루이 데제와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드 켈레르만 덕분에 승리했다. 이는 나폴레옹의 인기를 더욱 높여 그의 야망을 위한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12월 24일 왕당파의 생 니케즈 거리 음모는 나폴레옹이 무고함에도 불구하고 민주 공화주의자들을 프랑스령 기아나로 추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폴레옹은 의회를 폐지하고 원로원을 헌법 문제에 있어 전능하게 만들었다.[3]

1801년 2월, 오스트리아와의 뤼네빌 조약이 체결되어 유럽에 평화를 가져왔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체를 차지했고, 나폴레옹은 민법 토론에서 야당 지도자들을 의회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1801년의 정교 협약은 가톨릭 교회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국가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킴으로써 헌법적 민주주의 교회를 억압하고, 농민들의 양심을 모으고, 왕당파의 가장 큰 무기를 빼앗을 수 있게 해주었다.[3]

1802년 3월 아미앵 조약은 나폴레옹에게 국가로부터의 보상으로 10년이 아닌 종신 집정관 자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명분을 제공했다. 1802년 8월 4일(테르미도르 16일)에 제정된 제10년 헌법은 황제가 되기 위한 보나파르트의 길을 열었다.[3]

1802년 8월 2일에는 두 번째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이번에는 보나파르트를 "종신 제1통령"으로 확정하는 것이었다.[4] 투표 결과 99.7%의 찬성률을 보였다.[5][6]

보나파르트는 권력을 강화하면서, 앙시앵 레짐의 많은 기술을 차용했다. 옛 군주제처럼, 그는 전권대사를 다시 도입했고, 과도하게 중앙 집권화되고, 엄격하게 실용적인 행정 및 관료적 방법, 그리고 국가의 대학에 대한 복종적인 박식주의 정책을 사용했다. 그는 국가 기관, 지방 정부, 사법 제도, 금융 기관, 은행, 법전, 그리고 규율 있는 노동력의 양심적 전통에 필요한 자금을 구축하거나 통합했다.[11]

프랑스는 보나파르트 하에서 높은 수준의 평화와 질서를 누렸으며, 이는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전에는 파리가 종종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받았고 불과 빛이 부족했지만, 보나파르트 치하에서는 식량이 저렴하고 풍부해졌으며, 무역이 번창하고 임금이 높아졌다.[11]

보나파르트는 레지옹 도뇌르프랑스어(레지옹 도뇌르 훈장)를 창설하고, 정교 협약프랑스어(정교 협약)을 체결했으며, 혁명의 배신으로 여겨지는 간접세를 부활시켰다. 뱅자맹 콩스탕과 스탈 부인과 같은 비판적인 인물들을 추방함으로써 정부 내의 반대를 대부분 잠재울 수 있었다. 생도맹그 원정은 공화군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끊임없는 전쟁은 군 지도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분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동지" 보나파르트를 질투했다. 보나파르트의 권위에 대한 마지막 주요 도전은 왕당파 음모에 연루된 모로에게서 비롯되었고, 그 역시 망명길에 올랐다.[11]

원로원과 공화주의 장군들의 반대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 대중의 대다수는 보나파르트의 권위에 비판적이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은 용납되지 않았다.[11]

4. 통령정부의 정책과 개혁

제1통령(제1집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스스로를 국가 원수라고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공화주의 프랑스의 수장으로서 지위를 굳건히 하고, 정치의 보수화, 권위주의화, 전제 정치화,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이 기간 동안 후세에 남을 여러 제도들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로버트 B. 홀트만(Robert B. Holtman)은 당시를 "프랑스 전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0]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공화국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려던 공화파, 특히 모로, 마세나 등 군 내부의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했다. 마렝고 전투(1800년 6월 14일)는 루이 샤를 앙투안 데제와 프랑수아 에티엔 케르만 등의 구원으로 역전승하여 나폴레옹의 인기를 높였다. 1800년 12월 24일 왕당파의 암살 시도를 구실로 무고한 민주적 공화주의자들이 프랑스령 기아나로 유배되었다. 의회는 무력화되었고, 원로원이 헌법 사항에 대한 만능 기관이 되었다.

1801년 2월, 호엔린덴 전투에서 모로가 승리하여 오스트리아와 뤼네빌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 대륙에 평화가 회복되었고, 프랑스는 거의 모든 이탈리아를 보호하게 되었다. 아미앵 조약(1802년 3월 25일) 체결로 나폴레옹은 평화 실현에 대한 국가적 보상으로 종신 통령이 될 구실을 얻었고, 공화력 10년 헌법으로 제정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02년 8월 2일, 나폴레옹을 종신 제1통령으로 승인할지를 묻는 두 번째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12] 99.8%의 찬성표를 얻었다.[13][14]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는 고도의 안정 질서를 유지하며, 후생 수준이 향상되었다. 파리에서는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임금이 오르고 식량이 저렴하고 풍부해졌다. 조제핀, 탈리앙 부인, 줄리에트 레카미에 등의 살롱에는 벼락 부자들의 호화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나폴레옹은 뱅자맹 콩스탕이나 스탈 부인 등 비평가들을 추방하여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생 도맹그 출병에서 공화국 군이 괴멸하고, 군 수뇌부도 전쟁에 싫증을 느꼈지만, 모로가 왕당파 음모에 연루되어 망명하면서 나폴레옹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사라졌다. 프랑스 국민 대다수는 숙청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폴레옹의 권위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다.

장-미셸 모로 작품, 루이 앙투안 드 부르봉 (앙기앵 공작)의 초상


프랑스 왕당파는 보나파르트의 불안정한 정치 권력을 틈타 그를 납치 및 암살하고 루이 앙투안 드 부르봉(앙기앵 공작)을 초청하여 쿠데타를 이끌어 루이 18세를 왕위에 옹립하는 부르봉 왕정 복원을 추진하는 음모를 꾸몄다. 윌리엄 피트 더 영거의 영국 정부는 100만 파운드를 지원하고, 조르주 카두달과 장-샤를 피슈그뤼 장군에게 해상 수송을 제공하여 왕당파 음모에 기여했다. 1804년 1월 28일, 피슈그뤼는 보나파르트의 장군이자 자신의 전 제자였던 모로를 만났다. 다음 날, 영국 비밀 요원 쿠르송이 체포되어 고문 끝에 피슈그뤼, 모로, 카두달이 통령정부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자백했다. 프랑스 정부는 카두달의 하인 루이 피콧을 체포 및 고문하여 음모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조아생 뮈라 장군은 파리 시의 문을 폐쇄했고, 피슈그뤼와 모로는 다음 달에 체포되었다.

이후 체포를 통해 왕당파 음모가 앙기앵 공작의 적극적인 참여를 포함할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당시 공작은 바덴 선제후국에서 망명자로 살고 있었지만, 프랑스 국경 근처 에텐하임에 임대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와 조제프 푸셰의 권고에 따라, 제1통령은 공작을 처리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프랑스 군인 200명이 국경을 넘어 바덴에 있는 공작의 집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했다.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에 앙기앵은 "보나파르트와 프랑스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증오를 맹세했고, 그들에게 전쟁을 걸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7]

보나파르트는 세 차례의 암살 음모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반란 자금 지원을 겪은 후, 독일 자택에서 압수된 앙기앵과 경찰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를 전시 음모 혐의로 군사 법정에 회부했다. 앙기앵은 뱅센 성에서 7명의 대령으로 구성된 법정의 재판을 받았다.

앙기앵은 법정 심문에서 영국으로부터 연간 4,200 파운드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영국에 군대 복무를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라인 강에서 기다려야 하며, 그곳에서 즉시 역할을 해야 할 것이고, 실제로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진술했다.[8]

앙기앵은 1791년 10월 6일 법률 제2조("내란으로 국가를 혼란시키고 시민을 서로 또는 합법적인 권위에 대항하여 무장시키는 모든 음모 및 모의는 사형에 처한다")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뱅센 요새의 참호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는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해외에서는 분노를 일으켰다. 보나파르트를 지지하거나 중립적이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지만, 보나파르트는 처형을 허용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옳은 일을 했다고 믿었다.

4. 1. 경제 개혁

1800년에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국채 이자를 정화로 지급하도록 하였다. 1803년에는 금·은 복본위제로 복귀하였다. 또한 총재 정부에서 폐지되었던 간접세를 부활시켰다.[10]

4. 2. 법률 및 행정 개혁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스스로를 국가 원수라고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공화정 프랑스의 수장으로서 지위를 굳건히 하고, 정치의 보수화, 권위주의화,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10] 이 시기 동안 여러 제도들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역사가 로버트 B. 홀트만은 이 시기를 "프랑스 전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0]

총재 정부가 폐지했던 간접세를 부활시켰고,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여 국채 이자를 정화로 지급하게 했다. 1803년에는 금·은 복본위제로 복귀했다.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03년 2월, 프랑수아 제라르 그림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공화국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려던 공화파, 특히 모로, 마세나 등 군 내부의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했다. 마렝고 전투(1800년 6월 14일)는 접전 끝에 루이 샤를 앙투안 데제와 프랑수아 에티엔 케르만 등의 구원 덕분에 역전승으로 끝나 나폴레옹의 인기를 높였다. 왕당파에 의한 1800년 12월 24일의 사건을 구실로 무고한 민주적 공화주의자들이 프랑스령 기아나로 유배되어 숙청되었다. 의회는 무력화되었고, 원로원이 헌법 사항에 대한 만능 기관이 되었다.

1801년 2월, 호엔린덴 전투에서 모로의 승리로 무장 해제된 오스트리아와 뤼네빌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 대륙에 평화가 회복되었고, 프랑스는 거의 모든 이탈리아를 보호하게 되었으며, 민법전 논쟁에서 반대파 지도자들이 의회에서 숙청되었다. 1801년의 정교 협약은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책적 관심에 따라 기획된 것으로, 국민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켜 합헌적 · 민중적 교회를 회유하고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무엇보다 왕당파로부터 최대의 무기를 빼앗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 보충 규정인 유기적 조례(Articles Organiques)는 사실상 교회를 국가에의 복종 하에 재건하고, 그 재원을 몰수하면서도, 그 국교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권력을 강화하면서 앙시앵 레짐의 수법을 도입하여 전제를 시작했다. 구 왕정처럼, 매우 중앙 집권적이고 공리적인 행정 관료 체계를 구축하고, 국립 대학에서 권위주의적이고 번쇄한 스콜라 철학을 강의하는 등, 재집권화를 실시하여, 국가 기관 · 지방 자치 · 사법 제도 · 재정 기관 · 금융 · 법전 편찬 · 숙련 노동력의 전승 등에 필요한 재원을 개편 · 집약했다.

나폴레옹은 국가 기관을 증강하는 가운데, 엘리트층을 향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하고, 정교 협약을 체결하고, 간접세를 부활하는 등, 반혁명적으로 보이는 정책도 시행하게 되었다.

4. 3. 종교 정책

Articles Organiques프랑스어라는 보충 규정은, 전우나 측근에게는 반동으로 보이지 않도록 명목상으로가 아닌 사실상 교회를 국가에 복종시키고 재원을 몰수하면서도 국교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교회의 이익이 아닌 정책적 관심에 따라 기획된 것으로, 국민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켜 합헌적 · 민중적 교회를 회유하고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무엇보다 왕당파로부터 최대의 무기를 빼앗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10]

나폴레옹은 국가 기관을 강화하면서 엘리트층을 위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창설하고, 정교 협약을 체결하고, 간접세를 부활하는 등 반혁명적으로 보이는 정책도 시행했다.

5. 앙기앵 공작 사건



나폴레옹의 정권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당파는 나폴레옹을 납치·암살하고, 앙기앵 공작루이 앙투안 앙리에게 루이 18세를 왕위에 옹립하는 부르봉 왕정 복고의 시작이 될 쿠데타를 지도하도록 요청하는 음모를 꾸몄다. 영국의 소 피트 정권은 이 왕당파의 음모에 100만파운드을 지원하고, 조르주 카두달과 장샤를 피슈그뤼 장군 등의 일당이 영국에서 프랑스로 귀국할 때 존 웨슬리 라이트 선장의 함선을 제공했다. 1804년 1월 28일, 피슈그뤼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자 옛 부하였던 장 빅토르 마리 모로와 만났다. 다음 날, Courson이라는 영국의 밀사가 체포·고문당해 피슈그뤼, 모로, 카두달 등이 통령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자백했다. 프랑스 정부는 카두달의 하인 Louis Picot프랑스어을 체포·고문하여 이 음모의 상세한 내용을 알아냈다. 조아생 뮈라는 피슈그뤼와 모로 체포 후 다음 달까지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파리 성문을 폐쇄하도록 명령했다.

일련의 체포로 왕당파의 음모는 부르봉가의 적자로 부르봉 왕정 복고에서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는 앙기앵 공작이 적극적으로 관여할 예정임이 밝혀졌다. 앙기앵 공작은 당시 프랑스의 망명 귀족으로서 바덴 선제후국의 프랑스 국경 부근 에텐하임에 살고 있었지만, 나폴레옹 정권의 외무상 탈레랑과 경찰상 푸셰 등의 "자객은 어디에나 있다"는 경고에 따라 제1통령 나폴레옹은 앙기앵 공작을 처형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고, 200명의 프랑스 병사가 바덴의 저택을 포위하여 앙기앵 공작을 납치했다.

프랑스로 송환되던 중 앙기앵 공작은 "보나파르트도 프랑스 국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에게 전쟁을 걸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5]

세 번의 암살 음모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폭동 준비로 나폴레옹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독일 저택에서 압수한 물품과 경찰 자료를 바탕으로 앙기앵 공작은 모반을 계획한 죄로 고발되어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고, 뱅센 성에서 대령 7명으로 구성된 법정의 심리를 받도록 명령받았다.

앙기앵 공작은 법정 심문에서 영국으로부터 연간 4200GBP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프랑스 국가가 아닌 당가에 적대하는 현 정권과 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영국군에 출사를 신청했지만 좋은 답변을 얻지 못했고, 우선 스스로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라인강 주변에서 대기해야 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라고도 말했다.[16]

앙기앵 공작은 1791년 10월 6일 법률 제2조, 즉 "내전으로 헌정을 문란하게 하고 시민을 무장시켜 다른 시민 또는 합법적 권위에 적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음모를 주모 또는 공모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에 해당한다고 유죄 판결을 받고, 뱅센 성의 참호 안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내에서는 거의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국외에서는 파란을 일으켜 나폴레옹에게 호의적이거나 중립적이었던 사람도 대부분 적대적으로 변했다. 나폴레옹은 처형을 허가한 책임을 평생 짊어졌지만, 자신은 결국 옳은 일을 했다고 믿었다.

6. 통령 목록

제1통령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제2통령로제 뒤코
제3통령통령 (1799년 12월 12일 ~ 1804년 5월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제1통령장 자크 캉바세레스
제2통령샤를 프랑수아 레브런
제3통령



7. 각료 목록

부처시작종료장관
외무부1799년 11월 11일1799년 11월 22일샤를프레데릭 라인하르
1799년 11월 22일1804년 5월 18일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법무부1799년 11월 11일1799년 12월 25일장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1799년 12월 25일1802년 9월 14일앙드레 조제프 아브리알
1802년 9월 14일1804년 5월 18일클로드 앙브루아즈 레니에
육군부1799년 11월 11일1800년 4월 2일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1800년 4월 2일1800년 10월 8일라자르 카르노
1800년 10월 8일1804년 5월 18일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재무부1799년 11월 11일1804년 5월 18일마르탱 미셸 샤를 고댕
경찰부1799년 11월 11일1804년 5월 18일조제프 푸셰
내무부1799년 11월 12일1799년 12월 25일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1799년 12월 25일1801년 1월 21일뤼시앵 보나파르트
1801년 1월 21일1804년 5월 18일장 앙투안 샤프탈
해군 및 식민지부1799년 11월 12일1799년 11월 22일마르크 앙투안 부르동 드 바트리
1799년 11월 22일1801년 10월 3일피에르 알렉상드르 로랑 포르페
1801년 10월 3일1804년 5월 18일드니 데크레스
국무장관1799년 12월 25일1804년 5월 18일위그 베르나르 마레
재무부1801년 9월 27일1804년 5월 18일프랑수아 바르베 마르부아
육군 행정1802년 3월 12일1804년 5월 18일장 프랑수아 에메 드제앙



통령 정부의 각료는 다음과 같다.[17]

8. 제1제정으로의 이행

나폴레옹 암살 음모가 끊이지 않자, 나폴레옹 사후 공화정이 붕괴되고 부르봉 복고 왕정, 군사 독재 또는 자코뱅파 독재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생겨났다. 푸셰는 나폴레옹에게 세대 교체를 확고히 하고 사후 정변의 싹을 없애기 위해 세습 칭호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그러한 칭호를 인정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설득된 끝에 그 권력이 신권에 의하지 않고, 인민의 위탁에 기초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를 인정했다.

1804년 5월 18일, 프랑스를 제정으로 이행시키고 나폴레옹을 황제로 하는 의안이 원로원을 통과했으며, 1804년 12월 2일, 대관식이 거행되어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즉위하고 프랑스 제1 제정이 성립했다.

참조

[1] 서적 The Napoleonic Revolution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France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Creation of the Consular Government Bedford/St. Martin's
[4] 웹사이트 From Life Consulship to the hereditary Empire (1802–1804) http://www.napoleon.[...] Napoleon.org 2012-01-09
[5] 서적 Napoleon https://archive.org/[...] Arcade
[6] 서적 A Brief History of Europe from 1789–1815 https://archive.org/[...] Macmillan
[7] 문서 Cronin 1994
[8] 문서 Cronin 1994
[9] 서적 Gouvernements, ministères et constitutions de la France depuis cent ans: Précis historique des révolutions, des crises ministérielles et gouvernementales, et des changements de constitutions de la France depuis 1789 jusqu'en 1890 ... https://books.google[...] Marchal et Billard 2014-05-03
[10] 서적 The Napoleonic Revolution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11] 간행물 Creation of the Consular Government Bedford/St. Martin’s
[12] 웹사이트 From Life Consulship to the hereditary Empire (1802-1804) http://www.napoleon.[...] Napoleon.org 2012-01-09
[13] 서적 Napoleon https://books.google[...] Arcade Publishing
[14] 서적 A Brief History of Europe from 1789–1815 https://books.google[...] The Macmillan Company
[15] 문서 Cronin 1994
[16] 문서 Cronin 1994
[17] 서적 Gouvernements, ministères et constitutions de la France depuis cent ans: Précis historique des révolutions, des crises ministérielles et gouvernementales, et des changements de constitutions de la France depuis 1789 jusqu'en 1890 ... https://books.google[...] Marchal et Billard 201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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