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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튀니지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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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튀니지 정복은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고 보호령으로 만든 사건이다. 튀니지는 오스만 제국의 속주였으나, 프랑스는 알제리 식민지 인접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이탈리아와 영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튀니지 점령을 추진했다. 프랑스는 군사적 침공을 통해 튀니스를 점령하고 바르도 조약을 체결하여 보호령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스팍스 등지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진압되었고, 프랑스는 튀니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탈리아는 반발했으나 실질적인 대응은 하지 못했고, 이후 리비아를 점령하며 북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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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튀니지 정복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프랑스의 튀니지 정복
일부아프리카 분할
장소튀니지
날짜1881년 4월 28일 ~ 12월 23일
결과프랑스의 승리
튀니지의 프랑스 보호령화
1881년 10월 프랑스군의 튀니스 점령
1881년 10월 프랑스군의 튀니스 점령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3공화국
교전국 2튀니지
지휘관 및 지도자
프랑스포르제몰 드 보스케나르
쥘 에메 브레아르
튀니지무함마드 3세
알리 3세
병력 규모
프랑스28,000명
튀니지불명
사상자 및 피해
프랑스알 수 없음
튀니지알 수 없음

2. 배경

1574년 튀니스 정복 이후 튀니지오스만 제국의 속주로서 베이(Bey, 제후)가 통치하며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1] 1770년 프랑스 해군여단장 라펠리스 드 브로브는 해적 소탕을 명목으로 비제르테 등 튀니지 주요 도시를 포격하기도 했다.[1]

19세기 튀니지는 유럽 국가들과 무역 관계를 맺고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영사 관계를 맺었다. 이들 국가 출신 국민들이 튀니지에 거주했으며, 특히 프랑스는 19세기 중반 튀니지에 많은 차관을 제공했다.[1]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의 국제적 명성이 실추되자, 이탈리아와 영국은 튀니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영국 대사 리처드 우드 경은 1871년 튀니지를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복구하되 자치권을 보장하는 합의를 이끌어냈으나, 상업적 영향력 확대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튀니지 토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간의 갈등도 있었다.

프랑스는 알제리 식민지에 인접한 튀니지를 장악하여 이탈리아와 영국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프랑스가 튀니지를, 영국이 키프로스를 차지하기로 합의했다.[2] 이후 튀니지 크루미리 지역 반군의 항전은 프랑스에 군사 개입의 구실을 제공했다.

2. 1. 초창기 양국 관계

튀니지는 1574년 튀니스 정복 이후 베이(Bey, 제후)가 통치하는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서 큰 자치권을 누렸다.[1] 1770년에는 프랑스 해군여단장 라펠리스 드 브로브(Rafélis de Broves)가 해적 세력 소탕을 명목으로 비제르테, 포르토파리나, 모나스티르를 포격하는 사건이 있었다.[1]

19세기 튀니지는 유럽 각국과 무역 관계를 맺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과 영사 관계를 체결하여 이들 국가 출신의 국민들이 튀니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중에서 프랑스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튀니지에 많은 차관을 제공하였다.[1]

2. 2. 식민지 쟁탈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국제사회에서의 명성이 크게 훼손되었으며, 이탈리아영국은 그 틈을 타 튀니지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섰다. 이어지는 외교전에서 이탈리아 대사는 실패했으나 영국 대사 리처드 우드 경은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었다.[2] 우드 대사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1871년 튀니지를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복구시키면서 자치권은 보장하는 선에서 합의하였다.[2] 영국은 이를 발판삼아 상업활동을 통해 영향력 행사를 계속해 나갔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2] 토지 소유권 측면에서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3국 사이에 다양한 충돌이 빚어지던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기존에 확보해둔 알제리 식민지에 인접해 있던 튀니지를 장악하고 이탈리아와 영국의 영향력을 억제하고자 했다. 그 결과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프랑스가 튀니지를 접수하고, 영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키프로스를 넘겨받는 것으로 외교적 합의가 이루어졌다.[2] 이후 튀니지 크루미리 지역 일대 반군이 튀니지를 성역으로 선포하고 항전에 나서면서 군사 개입의 구실이 마련되었다.

3.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

1881년 4월, 포르제몰 드 보스케나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 28,000명이 튀니지에 상륙했다. 5월에는 쥘 에메 브레아르 지휘 아래 8,000명의 병력이 비제르테를 점령하고 튀니스로 진격했다.[1]

브레아르 장군은 5월 초 튀니스에 도착하여, 바르도 조약을 통해 튀니지 보호령을 수립하라는 프랑스 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무장 호위대와 함께 튀니스의 통치자 무함마드 3세 아스사디크에게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사도크 베이는 이에 굴복하여 5월 12일 바르도 조약에 서명했다.[2]

이후 튀니지 남부와 스팍스에서 봉기가 발생하자, 프랑스는 툴롱에서 함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다. 격렬한 전투 끝에 7월 16일 스팍스를 점령했고, 카이르완은 큰 저항 없이 10월 28일에 함락되었다.[1]

3. 1. 군사 작전

1881년 4월 28일, 포르제몰 드 보스케나르 장군이 이끄는 28,000명의 프랑스군이 튀니지에 입성했다.[1] 5월 1일에는 쥘 에메 브레아르 휘하의 8,000명 규모 부대가 비제르테 시를 점령하고 튀니스로 계속 진군하였다.[1]

브레아르 장군은 1881년 5월 3일부터 5월 6일까지 튀니스에 입성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바르도 조약을 체결하여 튀니지 보호령을 수립하라는 전보를 받은 상태였다. 5월 11일, 브레아르 장군과 총영사 테오도르 루스탕, 피에르 레옹 모로 장군은 무장 호위대를 이끌고 당시 튀니스의 제후(베이)였던 무함마드 3세 아스사디크를 만나 조약서를 전달했다.[2]

갑작스러운 요구에 놀란 사도크 베이는 몇 시간 동안 생각할 시간을 요청하고 즉시 내각을 소집했다. 일부 내각위원은 카이르완으로 피신하여 저항군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도크 베이는 결국 보호령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881년 5월 12일, 프랑스와 튀니지는 바르도 조약에 서명했다.[2]

1881년 튀니스 전초기지에 주둔 중인 프랑스 아프리카 경보병대


1881년 6월 10일, 튀니지 남부에서 반군이 봉기하고, 이어서 스팍스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툴롱에서 철갑함 6척(콜베르함, 프리들랑함, 파랑고함, 트리당함, 르방슈람, 쉬르베이양트함)을 파견하여 튀니지 해역에 있던 프랑스 해군 함대에 합류시켰다. 스팍스에는 이미 현장에 파견되어 있던 레반트 전구 소속 철갑함 3척(알마호, 렌블랑슈호, 라갈리소니에르호)과 포함 4척이 진압에 나서면서 포격전이 시작되었다.[1] 프랑스군 7명 전사, 32명 부상이라는 격렬한 전투 끝에 1881년 7월 16일 스팍스시를 점령했다.[1] 카이르완에는 프랑스군 병력 32,000명, 군마 6,000필, 보급품 및 군수물자 20,000톤이 파견되어 전투를 준비했으나, 1881년 10월 28일 별다른 충돌 없이 함락되었다.[1]

3. 2. 바르도 조약 체결

1881년 4월 28일 포르제몰 드 보스케나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 28,000명이 튀니지에 입성했다. 5월 1일에는 쥘 에메 브레아르 휘하 8,000명 규모의 부대가 비제르테 시를 점령하고, 튀니스로 계속 진군하였다.

쥘 에메 브레아르 장군은 1881년 5월 3일~5월 6일 튀니스에 입성했다. 당시 브레아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전보튀니지 보호령을 수립한다는 내용의 바르도 조약을 소지하고 있었다. 5월 11일, 무장 호위대를 대동한 브레아르 장군과 총영사 테오도르 루스탕, 피에르 레옹 모로 장군은 당시 튀니스의 제후 (베이)였던 무함마드 3세 아스사디크를 만나 조약서를 전달했다.

프랑스측의 갑작스런 요구에 놀란 무함마드 3세 아스사디크는 몇 시간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즉시 내각을 소집했다. 일부 내각위원은 카이르완으로 피신하여 저항병력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무함마드 3세 아스사디크는 결국 보호령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881년 5월 12일 프랑스와 튀니지 양국은 바르도 조약에 조인하였다.[1]

4. 결과

영국과 독일 제국은 프랑스의 튀니지 침공을 묵인했고, 이탈리아는 '튀니지 때리기'라며 반발했으나 실제 대응은 하지 못했다.[1] 튀니지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고, 프랑스는 비제르테에 대규모 해군 기지를 건설하였다.[2]

4. 1. 프랑스령 튀니지

독일 제국과 영국은 프랑스의 튀니지 침공을 묵묵히 승인했고, 이탈리아는 '튀니지 때리기'라며 반발했지만 실제 대응에 나서지는 못했다.[1]

튀니지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프랑스는 튀니지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프랑스 주재관은 튀니지 총리, 국가재무관, 총사령관을 동시에 역임하였다.[1] 1882년 폴 캉봉은 주재관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적극 활용하여 제후를 무력화시키고, 튀니지를 사실상 프랑스의 식민지로 통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1] 1898년 프랑스는 비제르테에 대규모 해군 기지를 건설하였다.[2]

한편 북아프리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탈리아는 1911년~1912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리비아를 점령했다.

4. 2. 이탈리아의 반응과 리비아 점령

영국과 독일 제국은 프랑스의 침공을 묵묵히 승인했으며, 이탈리아는 '튀니지 때리기'라며 반발하였으나 실제 대응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1]

북아프리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탈리아는 1911년부터 1912년까지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리비아를 점령했다.

5. 튀니지 독립 운동 (추가)

튀니지 독립 운동은 프랑스 식민 통치에 맞서 튀니지인들이 벌인 저항과 독립을 위한 노력을 말한다. 이 운동은 튀니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참조

[1] 서적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https://books.google[...] E.J. Brill
[2] 간행물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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