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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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은 1801년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의 통합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과 독립 운동의 격화로 인해 아일랜드의 자치 요구가 거세졌고, 1916년 부활절 봉기를 거쳐 1918년 신페인의 승리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1922년 아일랜드 섬 남부 26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현재의 영국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하고 산업 혁명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대영 제국으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 이후 탕가니카, 토골란드, 팔레스타인 등을 위임통치령으로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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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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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
일반 명칭 | 연합 왕국 |
국가 모토 | 하느님과 나의 권리 |
국가 모토 (프랑스어) | Dieu et mon droit |
국가 | 하느님, 국왕/여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 |
수도 | 런던 |
최대 도시 | 수도 |
공용어 | 영어 |
민족 | 영국인 |
정치 | |
정부 형태 | 입헌군주제, 단일 의회 |
군주 | 군주 |
군주 (1801–1820) | 조지 3세 |
군주 (1820–1830) | 조지 4세 |
군주 (1830–1837) | 윌리엄 4세 |
군주 (1837–1901) | 빅토리아 |
군주 (1901–1910) | 에드워드 7세 |
군주 (1910–1922) | 조지 5세 |
의회 | 의회 |
상원 | 상원 |
하원 | 하원 |
역사 | |
시작 사건 | 연합법 |
시작일 | 1801년 1월 1일 |
종료 사건 | 아일랜드 자유국 헌법법 |
종료일 | 1922년 12월 6일 |
이전 국가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아일랜드 왕국 |
후속 국가 | 영국 아일랜드 자유국 |
인구 | |
1911년 인구 조사 | 45,221,000명 |
경제 | |
통화 | 파운드 스털링 아일랜드 파운드 (1801–26) |
기타 | |
현재 | 영국 아일랜드 공화국 |
2. 역사
1542년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왕을 선언하면서 아일랜드 왕국이 성립되었다. 1607년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신대륙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1798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7] 1800년 더블린의 아일랜드 자치의회가 1800년 합병령(Act of Union)을 가결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합병되었고, 아일랜드 자치의회는 해산되었다.[7]
2. 1. 19세기 ~ 20세기 초: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격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아일랜드 독립 운동이 격렬해졌다. 1916년 부활절 봉기가 일어났다가 일단은 진압되었지만, 1918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독립파인 신페인이 승리하였다.[87][88] 1919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발발하였고,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성립하였다. 1922년 아일랜드 섬 남부 26주로 구성된 남아일랜드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분리 독립하면서, 1927년 영국은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현재의 영국)으로 국호를 변경했다.[90][91][92][93][94][95][96][97][98][99]2. 2. 19세기 영국의 개혁 정치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이 진압된 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독립된 아일랜드 왕국이 프랑스 혁명 세력과 손잡을 것을 우려하여 1800년 연합 조약을 통해 양국을 통합했다. 이 조약은 1801년 1월 1일에 발효되었다.[7] 아일랜드인들은 입법적 독립을 상실하는 대신 가톨릭 해방을 통해 시민적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조지 3세 국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99~1801) 동안 영국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해외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아미앵 조약으로 전쟁이 잠시 중단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지속적인 도발로 1803년 5월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 함대는 프랑스 제국 해군과 스페인 왕립 해군을 격파하여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계획을 좌절시켰다.[8]
1806년,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발표하여 대륙봉쇄령을 시행, 프랑스 통제 하의 영토를 외국 무역에 폐쇄함으로써 영국을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영국은 세계 최대의 산업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해상 지배권을 통해 식민지와 미국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1808년 스페인 봉기를 계기로 영국은 대륙에 발판을 마련, 웰링턴 공작이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항복하고 엘바 섬 공국으로 유배되면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1815년 나폴레옹이 재기하자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과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군대가 나폴레옹을 완전히 패배시켰다.[9]

한편,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압력을 가했고, 이는 1812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1814년 말 전쟁 전 경계를 회복하는 겐트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 변화와 경기 침체, 사회 불안에 직면했다. 영국 지도부는 혁명 활동을 극도로 경계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했다.[10]
1820년대부터 1830년대에 걸쳐, 의회 개혁과 군주제의 권력 약화 등 주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조지 4세는 자신의 아내 캐롤라인 왕비와 이혼하려 했으나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군주제의 위신이 실추되었다.[28]
극단적 토리당(Ultra-Tories)은 반동 정치의 주역이었으나, 1820년대 후반 개신교 비국교도와 로마 가톨릭 신자에 대한 차별 철폐를 계기로 세력을 잃었다.[14][15] 로버트 필(Robert Peel)과 웰링턴 공작은 다니엘 오코넬(Daniel O'Connell)이 이끄는 아일랜드 가톨릭 협회(Catholic Association)의 압력에 굴복, 1829년 가톨릭 해방(Catholic emancipation)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에게 투표권과 의회 의석을 부여했다.[16]
1825년부터 1867년까지, 개혁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시위가 이어졌다. 토리당은 민주주의에 반대하며 시위대를 탄압했지만, 로버트 필 (1788–1830)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의 이탈로 당내 균열이 발생했다.[25] 휘그당은 개혁을 주도하며 비국교도 프로테스탄트의 지지를 얻었다. 1828년 검정법이 폐지되었고,[29] 1829년 로마 가톨릭 구제법이 통과되었다.[30]
윌리엄 허스키슨과 필이 주도한 재정 개혁으로 관세 제도가 합리화되었고, 1846년 곡물법 폐지로 자유 무역이 확립되었다. 실력 위주의 비정치적인 공무원 제도가 도입되었고, 정부는 낮은 세금을 목표로 효율성을 추구했다.
1832년 개혁법을 통해 선거 제도가 개혁되어 매우 작은 선거구의 수가 줄고, 성장하는 산업 도시들이 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31] 그러나 여전히 많은 노동자, 사무원, 농부들은 투표권을 얻지 못했다.
차티즘은 1832년 개혁법에서 노동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대중 운동이었다. 차티스트들은 1838년 인민헌장을 발표하여 남성 참정권, 비밀 투표, 의원 재산 자격 폐지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중산층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36]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은 공리주의를 통해 영국 법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은 교육, 교도소, 빈민법, 법적 절차, 의회 대표 제도 등 다양한 분야의 개혁에 기여했다.[47]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리처드 코브덴(Richard Cobden)과 함께 곡물법 폐지 운동을 주도했으며, 참정권 확대, 토지 개혁, 세금 감면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2. 3. 빅토리아 시대 (1837-1901)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1837년부터 1901년까지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하고 영국 제국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시대이다.[49] 학자들은 빅토리아 시대가 1832년 개혁법 통과와 함께 시작되는지 여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시대는 섭정 시대 이전에 이어지고 에드워드 시대 이후에 이어진다. 빅토리아는 1837년 18세의 나이에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은 증기선, 철도, 사진술, 전신의 도입과 함께 경제적, 정치적 힘의 정점에 도달했다. 영국은 대륙 정치에 대부분 비활동적인 상태를 유지했다.여왕은 정치에 작은 역할을 했지만, 국가, 제국, 그리고 적절하고 자제된 행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49] 그녀의 통치자로서의 성공은 순진한 젊은 여성, 헌신적인 아내와 어머니, 고통받고 인내심 있는 미망인, 그리고 할머니 같은 가장의 이미지를 연이어 보여준 그녀 자신의 자기 이미지의 힘 때문이었다.[50]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1792~1815)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영국은 19세기 주요 해군 및 제국 세력으로 부상했다(런던은 1830년경부터 세계 최대 도시였다).[51] 바다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영국의 지배력은 나중에 ''팍스 브리타니카''("영국의 평화")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유럽과 세계의 상대적 평화 시대(1815~1914)를 의미한다.[52] 1851년 만국 박람회 당시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묘사되었다.[53] 자유 무역과 금융 투자라는 제국적 도구를 사용하여,[54] 유럽과 제국 밖의 많은 국가들,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영국은 영국 통치에 기반한 공식적인 제국과 영국 파운드에 기반한 비공식적인 제국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55]
오스만 제국 붕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는 영토 쟁탈전을 야기하고 영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영국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는 것을 막고,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를 위협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56] 1853년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대항하여 크림 전쟁에 개입했다. 평범한 지휘관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러시아의 항구인 세바스토폴을 함락시켜 차르 니콜라스 1세로 하여금 평화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1877년 다음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또 다른 유럽의 개입으로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협상 테이블에서였다. 베를린 회의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 가혹한 산스테파노 조약을 강요하는 것을 막았다.[57] 크림 전쟁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을 다소 불신했는데, 특히 황제가 해군력을 증강하고, 제국을 확장하고, 더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58]
19세기 후반에는 유럽 열강들 사이에 아프리카 분할이 일어났다. 1898년 파쇼다 사건을 둘러싸고 프랑스와의 전쟁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 동안 네덜란드로부터 케이프 식민지를 탈환한 이후, 케이프에서 더 멀리 이주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건설한 네덜란드 이주민들과 공존해 왔다. 영국의 제국적 비전은 이 새로운 국가들에 대한 지배를 요구했고, 아프리카어를 사용하는 "부어" 또는 "아프리카너"는 1899년부터 1902년까지의 전쟁에서 맞서 싸웠다. 강력한 제국에 무장을 압도당한 보어 코만도는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것은 영국군에게 어려운 싸움을 안겨주었지만, 그들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 우수한 장비, 그리고 종종 잔혹한 전술은 결국 영국의 승리를 가져왔다. 이 전쟁은 인권 측면에서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며 영국과 전 세계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런던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보어 공화국은 1910년 케이프 식민지와 내털과 합쳐져 남아프리카 연방이 되었는데, 이 연방은 내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교 정책은 런던의 통제를 받았고 영국 제국의 일부였다.
2. 4. 20세기 초 (1901-1923)
에드워드 시대(1901~1914)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와 대조적으로 부의 과시가 두드러졌으며, 영화, 자동차, 비행기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 1900년 노동당이 결성되는 등 사회 개혁도 이어졌다. 조지 5세는 1910년부터 1936년까지 재위하며 메리 왕비와 함께 영국 왕족에게 모범적인 행실의 현대적인 패턴을 확립했다.[77]그러나 이 시대는 번영 속에서도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아일랜드 문제, 노동 불안, 여성 참정권 운동 등으로 인해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사회적,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었다.[78]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국내 문제는 일시 중단되었다.
2. 4. 1.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하의 영국은 프랑스, 미국과 연합하여 인력, 산업, 재정, 제국, 외교를 성공적으로 동원하여 중앙 연합국을 물리쳤다.[80][81]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영국 경제는 약 14% 성장했지만, 독일 경제는 27% 감소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민간 소비는 감소했고, 군수품 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정부의 GDP 점유율은 1913년 8%에서 1918년 38%로 급증했다(1943년에는 50%).[82][83] 영국은 전쟁으로 재정 준비금을 소진하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영국은 벨기에를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여, 독일 제국군과 서부 전선에서 싸우고 해외 독일 제국을 해체하는 역할을 맡았다. 프랑스 전선은 참호전에 빠지면서 전쟁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은 사라졌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참호선에 반복적으로 공격을 가했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제한적인 성과만 거두었다. 1916년 초, 자원병 감소로 정부는 영국에 징병을 실시했다 (아일랜드에서는 모든 계층의 민족주의자들이 반대하여 시행하지 못했다). 산업은 대량의 군수품을 생산했고, 많은 여성들이 공장 일자리를 맡았다. 애슈퀴스 정부는 무능력했지만, 1916년 12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그를 대체하면서 영국은 강력하고 성공적인 전시 지도자를 얻었다.[84]
해군은 계속해서 바다를 지배했고, 1916년 주틀란트 해전에서 독일 제국 해군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독일은 봉쇄되었고 식량이 부족해졌다. 독일은 미국의 전쟁 위험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영국 주변 해역은 전시 지역으로 선포되었고, 모든 선박이 표적이 되었다. 1915년 5월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여 100명이 넘는 미국인 승객이 사망하자, 미국은 항의했고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포기했다. 1917년 봄, 독일은 경고 없이 모든 상선을 침몰시키는 것을 재개했다. 미국은 1917년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하여 인력, 자금 및 물자를 제공했다. 다른 전선에서 영국, 프랑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은 독일의 식민지를 점령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싸웠고, 갈리폴리 전투와 (초기에) 메소포타미아에서 패배했지만,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에서 터키를 축출하는 데 도움을 준 아랍인들을 자극했다. 1917년 프랑스에서의 전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전쟁 피로가 악화되고 있었다. 1917년 혁명으로 러시아가 붕괴되면서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18년 대규모 독일 봄 공세가 실패했고, 1918년 5월까지 하루 1만 명의 미국 원정군이 도착하면서 독일은 압도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독일은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동의했다. 사실상 항복이었고, 독일은 함대와 중화기를 넘겨주고 군대는 라인 강 뒤로 후퇴했다.[85]
1918년까지 군대와 왕립 공군(왕립 비행대와 왕립 해군 항공대로부터 새로 형성됨)에는 약 500만 명이 있었고, 이는 전쟁 전 군대 규모와 비슷했다. 약 300만 명의 사상자는 "잃어버린 세대"로 알려졌고, 사회에 상처를 남겼다. 일부 사람들은 영국에서 그들의 희생이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시그프리트 사순의 ''블라이터스''와 같은 시는 전쟁을 인간의 실패로 비판했다. 문학적 유산은 대량 학살, 기계화된 학살, 허위 선전 및 깊은 환멸에 초점을 맞추어 전쟁의 영광에 대한 이미지를 무너뜨렸다.[86]
2. 4. 2. 전후 처리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막대한 인적, 재정적 피해를 입었고,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었다. 국제연맹이 평화적인 분쟁 해결을 위해 설립되었지만, 이러한 기대는 실현되지 못했다.전후 영국은 독일 식민지였던 탕가니카와 토골란드 일부를 획득했다.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을 통해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를 위임받았다. 팔레스타인은 유대인 정착민을 위한 고향이 되었다. 이라크는 1932년에 완전 독립했다. 이집트 왕국은 1882년부터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1914년부터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나, 1919년 이집트 혁명 이후 1922년에 독립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1956년 수에즈 사태까지 이집트에 주둔했다.
3. 유니언 기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시대에 작성된 유니언 기는 잉글랜드를 의미하는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하얀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와 스코틀랜드를 의미하는 성 안드레아 십자(파란색 바탕에 하얀색 X자 모양의 십자)를 조합한 것이었다. 연합 왕국 건국에 맞추어 아일랜드를 나타내는 성 파트리치오 십자(하얀색 바탕에 빨간색 X자 모양의 십자)를 조합하여 현재의 유니언 잭(유니언 기)이 만들어졌다.[22]
4. 역대 군주
군주 | 재위 기간 |
---|---|
조지 3세 | 1801년~1820년 |
조지 4세 | 1820년~1830년 |
윌리엄 4세 | 1830년~1837년 |
빅토리아 | 1837년~1901년 |
에드워드 7세 | 1901년~1910년 |
조지 5세 | 1910년~192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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