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하나부사 요시모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오가타 고안데키주쿠에서 난학을 배우고 유럽과 미국 유학 후 외무성에서 근무하며 청일수호조약 체결에 관여했다. 그는 마리아 루스호 사건 중재와 러시아와의 국경 확정 교섭을 지원했으며, 1877년 주조선 대리공사, 1880년 초대 주한 공사로 임명되어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담당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귀국 후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군 주둔을 허용했으며, 이후 러시아 주재 특명 전권공사, 농상무차관, 궁내차관 등을 역임하고 남작 작위를 받았다.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일본의 근대화와 외교에 기여했으나, 조선의 자주성을 침해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막말 오카야마번 사람 - 후쿠다 히데코
    일본의 여성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저널리스트인 후쿠다 히데코는 자유민권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여성 해방과 사회 개혁에 헌신했으며, 《세계 부인》 창간과 자서전 『나의 인생의 반』을 통해 여성 운동의 선구자로서 활동했다.
  • 하나부사씨 - 다카마쓰성 (오카야마현)
    다카마쓰성은 시미즈 무네하루가 축성하고 하시바 히데요시의 수공으로 함락된 빗추 지역의 요충지로서, 센고쿠 시대 주요 사건과 관련된 일본의 성으로, 현재는 유적 공원으로 조성되어 대중문화 작품에도 등장한다.
  • 하나부사씨 - 하나부사 요시쓰구
    하나부사 요시쓰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사로 오사카 전투에 참전, 야마다 봉행으로서 이세 신궁의 영지 관리와 소령 복귀를 위해 노력했으며, 쇼군에게 후타미 마을 기증을 상신하고 구키 씨의 횡령 소령을 복귀시키는 데 기여, 야마다 봉행소 이전을 완료한 후 사망하여 공양비가 건립되었다.
  •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 - 고노 마사하루
    고노 마사하루는 1973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가 북미국, 아시아국, 주 싱가포르 일본대사관 등에서 근무했으며, 주 러시아, 주 이탈리아 대사를 역임했다.
  • 러시아 주재 일본 대사 - 단바 미노루
    단바 미노루는 사할린 출신의 외교관으로, 외무성에서 다양한 직책을 거쳐 주 러시아 대사를 역임하며 걸프 전쟁 당시 일본의 외교적 역할을 증진하는 데 기여했고, 퇴직 후에는 에너지경제연구소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20세기 동아시아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기본 정보
이름하나부사 요시타다
한자 표기花房義質
로마자 표기Hanabusa Yoshitada
출생일1842년 2월 10일
출생지오카야마, 일본
사망일1917년 7월 9일
사망지도쿄, 일본
국적일본 제국
직업외교관
작위
작위자작
훈장
훈장대훈위 이화대수장

2. 생애

오가타 고안데키주쿠에서 난학을 배우고, 1867년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듬해 귀국하였다. 1870년부터 외무성에서 근무하였으며, 같은 해 청일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1872년 일본 요코하마 항에 정박 중이던 페루 선적의 마리아 루스호 사건이 발생하자,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의 서기관으로 사건 처리를 보좌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되어 에노모토 다케아키 전권공사를 도와 일본과 러시아 간 국경 확정 교섭을 지원했다.

1877년 주조선 대리공사에 임명되었고, 1878년 조선 정부가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하자 군함과 함께 부산에 파견되어 세관 철거를 요구, 12월 4일 조선 정부가 세관을 철거하게 하였다. 1880년 일본 정부가 조선 한성에 공사를 상주시키기로 결정하자, 하나부사가 초대 공사로 임명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공사관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인솔하는 일본군과 함께 조선에 건너와 제물포 조약을 체결, 사건의 손해 보상과 한성에 일본군 주둔 등을 조선 정부가 인정하게 했다.

1883년부터 1886년까지 러시아 주재 특명 전권공사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였다. 이후 농상무차관, 황실회계심사국장, 궁내차관, 추밀고문관, 일본 적십자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젊은 시절의 하나부사 요시타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1842년 2월 10일 일본 오카야마현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카야마시 초대 시장을 지낸 하나부사 탄렌이었다. 그는 오가타 고안데키주쿠에서 난학을 배우며 서양 학문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1] 1867년 메이지 유신 직후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근대 문물을 접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1]

2. 2. 외교관 경력

1870년 외무성에 들어가면서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같은 해 청나라에 파견되어 청일수호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참여했다.[1] 1872년 마리아 루스호 사건 당시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를 보좌하여 사건 해결에 기여했다.[1] 이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되어 전권공사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도와 일본과 러시아 간의 국경 확정 교섭을 지원했다.[1]

1877년 주조선 대리공사로 임명되어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담당하게 되었다.[1] 1878년 조선 정부가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하자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파견되어 세관 철거를 요구, 관철시켰다.[1] 1880년 초대 주한 공사로 임명되어 한성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조선 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1] 조선 정부에 별기군 창설을 제안하는 등 조선 군사력 강화에 관심을 보였다.[9]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공사관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귀국했고,[2][3][4]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인솔하는 일본군과 함께 조선에 건너와 제물포 조약을 체결시켜 사건의 손해 보상과 함께 한성에 일본군 주둔 등을 조선 정부가 인정하게 했다.[4]

1883년부터 1886년까지 러시아 주재 특명 전권공사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였다.[6]

2. 3. 임오군란과 제물포 조약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공사관을 탈출하여 일본으로 귀국하였다.[2] 그는 폭동으로 인해 인천에 정박 중이던 영국 배 플라잉 피시호를 타고 피신했다.[5] 그 후,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일본군과 함께 조선에 돌아와 제물포 조약을 체결, 사건의 손해 배상과 함께 한성(서울)에 일본군 주둔 등을 조선 정부가 인정하게 하였다.[4]

2. 4. 임오군란 이후

1883년부터 1886년까지 러시아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였다.[1] 귀국 후에는 농상무차관, 황실회계심사국장, 궁내차관, 추밀고문관, 일본 적십자사 사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6] 1896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10]

3. 작위 및 서훈

수여일작위 및 훈장비고
1896년 6월 5일남작화족(華族)에 포함[10]
1907년자작승작[8]
1882년(메이지 15년) 4월 25일훈삼등 욱일중수장[15]
1882년(메이지 15년) 9월 28일훈이등 욱일중광장[16]
1889년(메이지 22년) 11월 25일대일본제국헌법반포기념장[17]
1890년(메이지 23년) 12월 26일훈일등 수보장[18]
1898년(메이지 31년) 12월 28일욱일대수장[19]
1909년(메이지 42년) 4월 18일황태자도한기념장[21]
1915년(다이쇼 4년) 11월 10일대례기념장[22]
1907년(메이지 40년) 11월 29일이화대훈장대한제국 훈장 수여 허가[23]


4. 가족 관계


  • 아버지: 하나부사 단렌(오카야마 시장)[24]
  • 동생: 마쓰다 시게나오 (해군 소장)[24]
  • 동생: 하나부사 나오사부로 (법학박사, 초대 내각통계국장)[24]
  • 아들: 하나부사 다로 (해군 소장, 귀족원 의원)[24]
  • 다섯째 딸: 토요코는 사메지마 구레시게의 아내[24]

5. 평가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일본의 근대화와 외교 관계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조선과의 관계에서 그의 활동은 일본의 영향력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77년 주조선 대리공사로 임명된 후, 1878년 조선 정부가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하자 군함과 함께 파견되어 세관 철거를 요구했고, 결국 조선 정부는 세관을 철거했다.[1] 1880년에는 초대 주조선 공사로 임명되어 한성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인천 개항을 조선 정부에 인정시켰다.[1]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탈출하여 귀국했고, 이후 제물포 조약 체결을 통해 조선에 일본군 주둔을 인정시키는 등 일본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다.[2][3][4][5]

그러나 그의 외교 정책은 조선의 자주성을 침해하고 일본 제국주의 확장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6. 기타

도쿄 메구로에 있는 하나부사야마(花房山)는 하나부사가 1911년 자작으로 승작했을 때 별저를 지은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현재의 시나가와구 가미오사키 3정목 부근).[10]

참조

[1] 서적 The Spirit of Independence: a Primer of Korean Modernization and Reform Google Books 2001
[2] 서적 Kore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Google Books 1999
[3] 서적 Japan Encyclopedia Google Books 2005
[4] 서적 Dictionnaire historique du Japon Google Books 2002
[5]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Google Books 2006
[6] 웹사이트 花房義質関係文書 http://www.ndl.go.jp[...] 2008-06-12
[7] 웹사이트 Nobility, Peerage and Ranks in Ancient and Meiji-Japan http://www.unterstei[...]
[8] 웹사이트 花房義質関係文書 http://www.ndl.go.jp[...] 2008-06-12
[9] 웹사이트 壬午鶏林事変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2-08-13
[10] 간행물 官報 1883-06-06
[11]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12] 간행물 官報 1883-08-24
[13] 간행물 官報 1886-10-21
[14] 간행물 官報 1900-03-31
[15] 아카이브 参事院議官補西園寺公望外八名叙勲
[16] 아카이브 弁理公使花房義質勲二等ニ進叙年金下賜
[17] 간행물 官報 1889-11-30
[18] 간행물 官報 1890-12-27
[19] 간행물 官報 1899-01-04
[20] 간행물 官報 1907-09-25
[21] 간행물 官報 1909-05-24
[22] 간행물 官報 1916-12-13
[23] 간행물 官報 1907-12-06
[24] 웹사이트 人事興信録 http://jahis.law.nag[...] 1915-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