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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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서주는 신라가 삼국 통일 후 685년에 전국 행정체제를 정비하면서 설치된 행정 구역이다. 757년 명주로 개칭되었으나, 하서주라는 명칭도 계속 사용되었다. 하서주는 발해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북해통이라는 교통로가 정비되었고, 신라 말기에는 김주원과 그의 후손들이 이 지역의 영주가 되면서 명주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서주에는 9개의 군과 25개의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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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주 | |
---|---|
기본 정보 | |
유형 | 주 |
국가 | 신라 |
시대 | 고대 |
수도 | 명주군 |
설치 | 505년 |
해체 | 미상 |
행정 구역 | 9군 25현 |
2. 역사
신라는 통일 전쟁과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여 삼한을 통일한 후 685년(신문왕 5년)에 전국의 행정 체제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1] 757년(경덕왕 16년) 12월, 전국 행정구역 명칭을 개혁하면서 명주(溟州)로 개칭되었으나, 이후에도 하서주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1] 신라군은 이화혜정(伊火兮停)과 하서주서(河西州誓)·청흑(靑黑)·청적(靑赤)의 만보당(萬步幢)이 주류를 이루었다.[1]
2. 1. 삼국시대
실직국을 중심으로 강릉 일대는 예맥이 정주하고 있었고 그 이남에는 진한의 파조국과 음즙벌국이 자리잡고 있었다.[1] 서기 50~102년 사이에 실직국이 급속히 영역을 확장해 진한의 음즙벌국과 분쟁을 벌이다 오히려 신라에 대패해 신라 내의 자치국이 되었고 신라는 이를 발판으로 동해안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 하에 넣었다.[1] 이 지역은 481년에 고구려의 남침으로 일시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신라의 영역에 속했다.[1]505년 지증왕 6년에 고구려로부터 동해안을 탈환한 신라는 이전 실직국을 치소로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했다.[2] 실직주는 진흥왕에 의해 대거 북쪽으로의 진출이 이루어짐에 따라 얼마 안가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이어, 556년 안변을 치소로 비열홀주(比烈忽州), 그로부터 12년 후인 568년 달홀주(達忽州)로 변화했다.[2]
하슬라라 불리는 지금의 강릉 지역에는 639년 선덕여왕 8년에 북소경(北小京)이 설치되었다.[3] 북소경은 658년 태종 무열왕 5년 통일전쟁을 앞에 두고 폐지되고 하슬라주, 또는 하서주로 돌아갔다.[3]
2. 2. 하서주
신라는 통일 전쟁과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여 삼한을 통일한 후 685년(신문왕 5년)에 전국의 행정 체제를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1]757년(경덕왕 16년) 12월, 전국 행정구역 명칭을 개혁하면서 명주(溟州)로 개칭되었으나, 이후에도 하서주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1] 신라군은 이화혜정(伊火兮停)과 하서주서(河西州誓)·청흑(靑黑)·청적(靑赤)의 만보당(萬步幢)이 주류를 이루었다.[1]
2. 3. 북해통(北海通)
발해는 건국 이후 주로 대륙 쪽으로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한동안 한반도 지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 기간 동안 신라와 발해는 말갈족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할 수 없었다. 두 나라가 국경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발해의 등주 공격을 기회로 말갈족을 토벌하며 함흥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730년 경에 발해가 북청에 남경남해부를 설치하여 간신히 한반도의 북쪽 일부를 차지하면서부터였다.[1] 두 나라가 국경을 맞닿게 되면서 교류를 위해 교통망을 정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발해는 8세기 전반에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천정군에 이르는 신라도(新羅道)를 개설했다.한편, 신라에서는 소지마립간 때 전국의 교통망을 정비하며 동해안에도 도로망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신라 시대에 이르러 동해통이라는 국제 도로망으로 재정비되었다. 경주의 간문역(艮門驛)에서 출발한 북해통은 안강을 거쳐 흥해에 이른 다음 동해안을 따라 천정군에서 신라도와 연결되었다. 북해통과 신라도를 주요 교통로로 하여 신라와 발해는 사신 왕래 등 활발한 교류를 했다. 764년에는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두 도로를 이용해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오기도 했다.
2. 4. 명주국(溟州國)
785년 선덕왕 사후 왕위 쟁탈전에서 원성왕에게 패한 김주원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하서주로 도피했다. 그는 2년 후 하서주도독과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졌고, 그 이후 그의 후손인 강릉 김씨 일족은 그 지역의 영주가 되었다.[1]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은 아버지의 왕위 계승 실패를 평생 한으로 삼다가 결국 김헌창의 난을 일으켜 패사하였고, 이후 명주국과 신라 중앙정부는 소원한 관계가 이어져 명주국은 반독립국 상태로 이어졌다.[1]김헌창의 후손인 김순식은 922년(고려 태조 5년) 고려에 귀순하여 왕건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받고 대광(大匡)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후손 중에 일각은 강릉 왕씨를 칭하고 강력한 호족 세력이 되었다.[1]
3. 행정구역
하서주한국어는 9개 군과 25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명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이 대부분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영토였음에도 고구려식 지명이 사용된 점이 특이하다.
3. 1. 하서주 소속 군현
하서주한국어에는 9개 군 25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명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을 대부분 고구려 시기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이 원래 신라 영토였음에도 원 지명은 고구려 식이다.[2][3]군 | 원래 군명 및 다른 이름[2][3] | 현재 지명 | 소속 현 | 원래 현명 및 다른 이름[2][3] | 현재 지명 |
---|---|---|---|---|---|
명주(溟州) | 고구려/신라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4] 또는 하서(河西) 또는 하서아(河西阿) | 강원도 강릉시 | 정선현(旌善縣) | 잉매현(仍買縣)[5] | 정선군 정선읍, 북평면 |
속제현(梀隄縣)[6] | 속토현(束吐縣)[7] | 평창군 용평면 | |||
지산현(支山縣) | 지산현(支山縣) | 강릉시 연곡면 | |||
동산현(洞山縣) | 혈산현(穴山縣) | 양양군 현남면 | |||
곡성군(曲城郡) | 굴화군(屈火郡)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 연무현(緣武縣)[8] | 이화혜현(伊火兮縣) | 청송군 안덕면 |
야성군(野城郡) | 야시홀(也尸忽郡) | 경상북도 영덕군 | 진안현(眞安縣) | 조람현(助欖縣)[9] 또는 재람(才攬) | 청송군 진보면 |
적선현(積善縣) | 청이현(靑已縣) | 청송군 청송읍 | |||
유린군(有隣郡) | 우시군(于尸郡)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해아현(海阿縣) | 아혜현(阿兮縣) | 포항시 북구 청하면 |
울진군(蔚珍郡) | 우진야현(于珍也縣) 또는 고우이군(古于伊郡)[10] | 경상북도 울진군 | 해곡현(海曲縣) | 파단현(波旦縣) 또는 파풍(波豐) | 울진군 원남면 |
내성군(奈城郡) | 내생군(奈生郡)[11]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김삿갓면, 산솔면 | 자춘현(子春縣) | 을아단현(乙阿丹縣) | 단양군 영춘면 |
백오현(白烏縣) | 욱오현(郁烏縣) 또는 우오현(于烏縣) | 평창군 평창읍 | |||
주천현(酒泉縣) | 주연현(酒淵縣) | 영월군 주천면 | |||
삼척군(三陟郡) | 실직국(悉直國) 신라 실직주(悉直州) | 강원도 삼척시 | 죽령현(竹嶺縣) | 죽현현(竹峴縣) 또는 나생어(奈生於) | 정선군 임계면 |
만경현(滿卿縣)[12] | 만약현(滿若縣) 또는 만혜(𬇕)[13] | 삼척시 근덕면 | |||
우계현(羽溪縣) | 우곡현(羽谷縣) | 강릉시 옥계면 | |||
해리현(海利縣) | 파리현(波利縣) | 삼척시 원덕읍 | |||
수성군(守城郡) | 수성군(䢘城郡) 또는 가아홀(加阿忽)[14]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 동산현(童山縣) | 승산현(僧山縣) 또는 소물달(所勿達) | 고성군 현내면 |
익령현(翼領縣) |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 | 양양군 | |||
고성군(高城郡) | 고구려 달홀(達忽) 신라 달홀주(達忽州) | 강원도 고성군 구읍리 | 환가현(豢猳縣) | 저수혈현(猪䢘穴縣) 또는 오사압(烏斯押) | 고성군 종곡리 |
편험현(偏嶮縣) | 평진현현(平珍峴縣) 또는 평진파의(平珍波衣) | 고성군 운전리 | |||
금양군(金壤郡) | 휴양군(休壤郡) 또는 금뇌(金惱) | 강원도 통천군 구읍리 | 습계현(習磎縣) | 습비곡현(習比谷縣) 또는 탄(呑) | 통천군 장대리 |
제상현(堤上縣) | 토상현(吐上縣) | 통천군 벽암리 | |||
임도현(臨道縣) | 도림현(道臨縣) 또는 조을포(助乙浦) | 고성군 염성리 | |||
파천현(派川縣) | 개연현(改淵縣) | 통천군 패천리 | |||
학포현(鶴浦縣) | 곡포현(鵠浦縣) 또는 고의포(古衣浦) | 통천군 군산리 |
참조
[1]
논문
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
2001
[2]
서적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신라)
[3]
서적
삼국사기 제37권 잡지 제6 (고구려)
[4]
서적
선덕여왕(善德王) 때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태종왕(太宗王) 5년에 하슬라 지역이 말갈과 맞닿아 경을 없애고 주(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어 지키게 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로 고쳤다. (삼국사기 제35권 잡지 제4.)
[5]
서적
본서 지리지 고구려조에서는 내매현(乃買縣)이라고 한다.
[6]
서적
원주에 의하면, 속(梀)은 동(棟)이라고도 쓴다.
[7]
서적
본서 지리지 고구려조에서는 동토현(東吐縣)이라고 한다.
[8]
서적
원주에 따르면, 연(緣)은 연(椽)이라고도 쓴다.
[9]
서적
본서 지리지 고구려조에는 조람군(助攬郡)으로 써있다.
[10]
서적
고려사 지리지 제3권 울진현조에서 고울이군(古亐伊郡)[또는 고우이군(古于伊郡)]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한다.
[11]
서적
본서 지리지 고구려조에서는 우수주에 포함되어 있다.
[12]
서적
원주에 따르면, 경(卿)은 향(鄕)으로도 쓴다.
[13]
문서
氵+万
[14]
서적
고려사 지리지 제3권 간성현조에는 가라홀(加羅忽)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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