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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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덕왕은 신라의 제38대 왕으로, 김양상(金良相)이 본명이다. 혜공왕 사후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전에는 상대등을 역임했다. 경덕왕 때 관제 개혁이 있었으나 혜공왕 때 김양상과 원성왕 등의 주도로 취소되었다. 선덕왕은 후사 없이 사망하여 왕위 계승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동해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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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선덕왕 |
| 휘 | 김양상(金良相) |
| 존호 | 선덕대왕 |
| 신라 제 몇 대 왕 | 제37대 |
| 재위 기간 | |
| 재위 시작 | 780년 |
| 재위 종료 | 785년 2월 26일 |
| 생애 | |
| 출생 | 미상 (734년 이전) |
| 사망 | 785년 3월 2일 |
| 가족 관계 | |
| 부친 | 김효방(金孝芳) |
| 모친 | 사소부인(四炤夫人) |
| 왕후 | 구족부인(具足夫人) |
| 정치 경력 | |
| 상대등 재임 기간 | 779년 9월 ~ 780년 4월 (음력) |
| 기타 | |
| 종교 | 불교 |
| 이전 왕 | 혜공왕(惠恭王) |
| 다음 왕 | 원성왕(元聖王) |
| 관련 항목 | 제37대 신라 국왕 |
2. 생애
764년 경덕왕 23년에 아찬(阿飡)을 거쳐 혜공왕 10년(774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4] 780년 혜공왕과 일족이 김지정(金志貞)에게 피살되자 김경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살해하였다.[1]
그의 본명은 김양상이었다. 그는 내물 마립간의 11대손이었으며, 성덕왕의 딸 사소 부인의 소생인 ''해찬'' 김효방의 아들이었다. 그는 ''각간'' 김양품의 딸인 부인 구족과 결혼했다.[1]
혜공왕 때 상대등을 지냈다.
785년 음력 1월 13일 병으로 붕어하였다. 자녀와 후손 여부는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되었고,[1] 유해는 동해에 뿌려졌다.[1] 왕릉은 미상이다.
신라 김씨 족보에는 선덕왕이 사다함의 증손이라고 하나, 사다함은 17세에 요절했고 삼국사기에도 결혼 기록이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왕은 김양상, 김경신에게 살해되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김지정의 난은 당시 실권을 장악한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을 겨냥했다는 학계의 일부 해석이 있다.[1]
경덕왕 때 관제 개혁이 있었는데, 혜공왕 때 상대등 김양상, 이찬 김경신 등의 대신들의 주도로 관제 개혁을 모두 취소하였다.
김양상은 자신의 아버지를 개성왕으로 추증하여 사당을 만들고,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도 만들었다. 이는 후에 원성왕 김경신에 의하여 모두 허물어졌다.
선덕왕은 후사 없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내물왕의 후손 김경신과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金仁問)의 7대손 김주원(金周元)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785년 음력 1월 13일 병으로 붕어하였다. 자녀와 후손 여부는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하였다.[1]
3. 즉위 전 활동
혜공왕 10년(774년) 9월에 이찬(2등 관등)의 관직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당시 신라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왕을 보좌하여 율령 정비를 추진하려는 세력과, 왕권을 억제하고 중앙 귀족 연합 체제로 복귀하려는 세력 간의 다툼이 반복되었으며, 769년의 귀족 연합 세력의 반란, 770년의 율령파의 반란이 진압된 상황이었다. 양상이 상대등에 임명된 후에도 775년 6월, 8월에 귀족 연합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고 진압되었다.[4] 왕권이 신장되면서 억제되었지만, 상대등의 입장은 귀족 연합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양상은 이러한 입장에서 777년 4월에는 왕에게 정치 비판 상소를 올렸다.
4. 치세
780년, 골품제의 이찬 김지정이 혜공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혜공왕은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양상(후일 선덕왕)에게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으나, 반란군은 궁궐을 함락시키고 혜공왕과 왕비를 살해했다. 김양상은 이후 신라의 새로운 통치자로 즉위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선덕왕이 혜공왕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혜공왕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1]
즉위 직후 김경신(金敬信)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782년 윤정월에 당나라에 조공했다. 발해의 세력 강화에 대비하여 북쪽 방면의 수비에 힘썼으며, 781년 7월에는 패강|패강중국어(대동강) 이남 지역에 사신을 보내 안무하고, 782년 2월에는 한산주(경기도광주시)의 주민을 패강|패강중국어진(황해북도평산군 또는 금천군)으로 이주시켰다.
제사에 있어서는 왕계의 변혁으로 인해 자신의 부친을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추봉하고 오묘(五廟)를 보존했으며, 사직단(社稷壇)을 축조했다고 전해진다.[5]
재위 6년째인 785년 정월, 당나라 덕종으로부터 '검교태위·계림주자사·녕해군사·신라왕'으로 책봉되었으나, 병으로 쓰러져 정월 13일에 사망하여 선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조에 따라 화장되었으며, 동해에 산골되었다. 왕릉은 미상이다.
5. 사망
6. 논란
무열왕 계통에서 보면, 내물왕의 10세손인 선덕왕은 방계에 지나지 않아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왕족의 유력한 일원으로서 중앙 귀족층의 대표 격인 상대등에 임명되어 왕의 정치를 보좌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상대등과 왕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던 신라 정계에서 상대등이 왕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태는 일종의 이변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 내부에서도 '하대'로 시대가 변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왕위 찬탈이 잇따르게 되었다. 선덕왕 자신은 왕이 된 지 5년여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혜공왕 시대부터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그쳤고, 본격적인 회복은 차대인 원성왕의 치세로 미뤄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6]
신라 김씨 왕통의 시조 전승에는 김알지, 김세한, 미추 이사금 외에 나물 이사금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신라 하대에 왕계가 무열왕 직계에서 방계로 전락한 것과 선덕왕(나물 이사금 10세손)·원성왕(나물 이사금 12세손)이 나물 이사금 계통임을 주장한 것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
6. 1. 김흠순, 김원훈과의 관계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풍월주 김흠순(金欽純)의 아홉째 아들 김원훈(金元訓)이 중시(中侍)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금관가야 왕족의 직계후손이 신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 그래서 선덕왕은 신라 하대 최대의 미스터리 인물로 꼽힌다.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조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는 원훈 각간이다.[1]
《화랑세기》 필사본을 보면, 19세 풍월주 김흠순의 아홉째 아들 원훈이 중시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김흠순은 김유신 장군의 친동생으로, 백제와의 전쟁, 고구려 정벌, 삼국통일 후 당나라 방문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김흠순의 아들 중 넷째 원수, 여섯째 원선, 아홉째 원훈이 중시가 되었는데, 이는 김유신, 김흠순 형제 가문이 신라 하대의 유력 가문이었음을 보여준다.[1]
선덕왕의 계보는 김흠순(김유신의 친동생)의 아홉째 아들 김원훈 - 김효방(개성대왕) - 김양상(선덕왕)으로 이어진다.[1]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은 원본과 관련없는 위서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위 주장은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1]
6. 2. 원성왕과의 관계
원성왕은 성덕대왕과 선덕왕의 아버지인 개성대왕의 사당을 헐고, 자기 조상 현창 사업을 하면서 증조부부터 아버지까지 왕으로 추봉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내물왕 후손(10대손과 12대손)임에도 선덕왕과는 조상이 겹치지 않는다. 이는 선덕왕과 원성왕이 혈연적으로 관계가 없거나 아주 멀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라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1]
《삼국사기》에는 선덕왕과 원성왕 모두 내물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원성왕이 선덕왕의 동생이라고 했다가 손자뻘로 나오는 등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이 오류를 바로잡는 키워드는 선덕왕의 아버지인 효방 해간이다. 해간은 신라 17관위 중 네 번째 벼슬이므로, 김효방을 찾아보면 된다. 김효방의 기록은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왕 조에 "김씨이며 이름은 양상(亮相=良相)이다. 아버지는 효방(孝方) 해간(海干=해찬=파진찬)이니 개성대왕(開成大王)으로 추봉되었는데 원훈(元訓) 각간의 아들이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할아버지가 원훈이라는 사실이 추가되어 있다.[1]
《삼국사기》에는 원훈이라는 인물이 중시가 될 때와 물러날 때 두 번 등장한다. 이 김원훈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효방이다.[1]
《화랑세기》 필사본을 활용한 해석도 있다. 19세 풍월주 김흠순전에 아홉째 아들 원훈이 중시 벼슬에 오른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흠순은 김해 김씨 김유신 장군의 친동생이다.[1]
김흠순(흠춘(欽春)이라고도 한다)은 형 김유신에 가려졌지만, 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하고 고구려 정벌 시 대당총관을 역임했으며, 삼국통일 후 당나라에 다녀오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말년에 각간을 역임했다. 김흠순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넷째 원수, 여섯째 원선, 아홉째 원훈이 중시가 되었다. 중시는 신라의 관직명으로 651년(진덕여왕 5년)에 설치되었으며,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같다. 상대등과는 달리 왕의 직속 부하 성격이 강했다. 김유신, 김흠순 형제 가문은 신라 하대의 유력 가문이었다.[1]
원수, 원선, 원훈이 김흠순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화랑세기 필사본뿐이다. 선덕왕의 계보를 보면 김흠순(김유신의 친동생)의 아홉째 아들 김원훈 - 김효방(개성대왕) - 김양상(선덕왕)이다.[1]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할 당시 화랑세기가 존재했고 참고했다고 하는데, 경주 김씨인 김부식이 고의적으로 기록을 누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주장도 있으나, '''화랑세기 필사본은 원본과 관련 없는 위서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위 주장은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1]
7. 가계
선덕왕한국어의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즉위 당시 고령의 나이였고 장수한 것으로 추정된다.[1] 신라 김씨 족보에 의하면 증조부는 사다함이고, 할아버지는 원훈이며, 아버지는 효양이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으며, 사다함은 선덕왕한국어보다 2백 년 이전에 활동하던 인물이라 증조부와 증손자로 보기에는 연대 차이가 크다.[1]
선덕왕한국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8. 평가
무열왕 계통에서 보면, 나물왕의 10세손인 선덕왕은 방계에 지나지 않아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왕족의 유력한 일원으로서, 중앙 귀족층의 대표 격인 상대등에 임명되어 왕의 정치를 보좌할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상대등과 왕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던 신라의 정계에서 상대등이 왕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태는 일종의 이변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 내부에서도 '하대'로 시대가 변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왕위 찬탈이 잇따르게 되었다. 선덕왕 자신은 왕이 된 지 5년여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혜공왕 시대부터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그쳤고, 본격적인 회복은 차대인 원성왕의 치세로 미뤄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신라 김씨 왕통의 시조 전승에는 김알지, 세한, 미추 이사금 외에 나물 이사금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신라 하대에는 왕계가 무열왕 직계에서 방계로 전락한 것과 선덕왕(나물 이사금 10세손)·원성왕(나물 이사금 12세손)이 나물 이사금 계통임을 주장한 것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6]
참조
[1]
뉴스
[삼국유사 오디세이] 10. 원성왕의 무혈쿠테타
https://www.kyongbuk[...]
2020-07-22
[2]
문서
삼국유사
[3]
문서
삼국사기
[4]
문서
恵恭王
[5]
문서
삼국사기
[6]
서적
井上訳注
1980
[7]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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