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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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주 김씨는 1504년 문과에 급제한 김우한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해주를 본관으로 하며, 일설에는 구 안동 김씨에서 분관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김우한의 후손인 김정 등이 관직에 올랐고, 문과 급제자 2명, 무과 급제자 29명을 배출했다. 조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판서 김정을 파조로 하는 종파, 김세호의 개성파, 김정두의 장성파, 김천삼의 나주파 등으로 분파되었다. 2015년에는 6,652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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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문신 김저는 우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공민왕 때 배원정책을 지지, 신돈을 비판하다 유배를 다녀왔으며, 공민왕 시해 후 은거,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제거를 모의하다 처형되었다.
| 해주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한자 표기 | 海州金氏 |
| 로마자 표기 | Haeju Kimssi |
| 나라 | 한국 |
| 관향 | 황해남도 해주시 |
| 시조 | 김사렴(金士廉) |
| 중시조 | 김우한(金佑漢) |
| 집성촌 | 평안남도 영원군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남상계리 평안북도 태천군 강서면 용봉동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진석동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 안의동 충청북도 청주시 오창읍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
| 주요 인물 | 김문동 김우한 김정 김정두 |
| 통계 (2015년) | 6,652명 |
2. 역사
《김씨 분관록》, 《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 김우한(金佑漢)은 1504년(연산군 10)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따르면 김우한(金佑漢)은 일명 김우근(金佑謹)이며, 교서관 겸관(校書館 兼官), 형조 정랑(刑曹正郞), 평안도 대동 찰방(大同 察訪)을 지냈다.[1]
본관을 해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며,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해주로 되어 있다. 일설에는 구 안동 김씨에서 분관하였다고 한다.[2]
2. 1. 시조
《김씨 분관록》, 《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 '''김우한'''(金佑漢)은 1504년 (연산군 10)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따르면 '''김우한'''(金佑漢)은 일명 김우근(金佑謹)이며, 교서관 겸관(校書館 兼官), 형조 정랑(刑曹正郞), 평안도 대동 찰방(大同 察訪)을 지냈다.[1]본관을 해주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며,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해주로 되어 있다. 일설에는 구 안동 김씨에서 분관하였다고 한다.[2] 다른 설에는 시조 '''김우한'''(金佑漢)의 선계(先系)는 고려 말 안렴사(按廉使)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한 '''김사렴'''(金士廉)이라고 한다.[3]
그러나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에 따르면 원조 '''김사렴'''(金士廉)은 본관이 안동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상장군 김방경의 후손이다.
2. 2. 선계 논란
일설에 시조 '''김우한'''(金佑漢)의 선계는 고려말 안렴사(按廉使)를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한 '''김사렴'''(金士廉)이 원조라 한다.[3]그러나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에 원조 '''김사렴'''(金士廉)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상장군 김방경의 후손이라 한다.
3. 본관
해주는 황해도 남해안에 위치한 도청소재지이다. 고조선 시대에 대방군에 속하여 고죽(孤竹)으로 불렸다. 고구려 때에는 내미홀(內米忽) 또는 지성(池城)‧장지(長池) 등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748년(신라 경덕왕 7)에 폭지군(瀑池郡)으로 개칭했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태조가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를 사명(賜名)했다고 전해지며, 성종 때 와서는 별호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983년(성종 2)에 해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1)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해주부가 설치되었고, 1896년 도제 실시로 황해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45년 해주시로 개편되었다. 1954년 북한의 관제 정비로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
4. 주요 인물
wikitext
| 이름 | 설명 |
|---|---|
| 김우한 | 연산군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겸관, 형조 정랑, 대동찰방에 이어 목사를 지냈다.[4] |
| 김정 | 김우한의 손자, 김종지 아들, 1524년(중종 19)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교서관교리,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다. |
| 김정두(金鼎斗) | 김면성의 아들, 현감을 지냈다. |
| 김양호(金良浩) |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
4. 1. 조선
1504년(연산군 10)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낸 '''김우한'''(金佑漢)을 시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따르면 '''김우한'''은 김우근(金佑謹)이라고도 불렸으며, 교서관 겸관(校書館 兼官), 형조 정랑(刑曹正郞), 평안도 대동 찰방(大同 察訪)을 지냈다.[1]본관을 해주(海州)로 하게 된 연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그의 본관이 해주(海州)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구 안동 김씨에서 분관하였다고도 한다.[2]
해주 김씨는 조선시대에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 이름 | 설명 |
|---|---|
| 김우한(金佑漢) | 연산군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겸관(校書館兼官), 형조 정랑,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이어 목사(牧使)를 지냈다.[4] |
| 김정(金鼎) | 김우한(金佑漢)의 손자, 김종지(金宗砥) 아들, 1524년(중종 19)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다. |
| 김정두(金鼎斗) | 김면성(金勔成)의 아들, 현감(縣監) |
| 김양호(金良浩)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4. 2. 과거 급제자
해주 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명, 무과 급제자 29명, 사마시 8명을 배출했다.[5]
5.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태조의 이복 동생 의안대군의 아들 순천군의 배우자는 삼한국대부인 김씨이다.
6. 분파
| 파명 | 파조 | 비고 |
|---|---|---|
| 종파(宗派) | 김세연 | 김정의 아들 |
| 개성파(開城派) | 김세호 | 김정의 아들 |
| 장성파(長城派) | 김천월 | 김정두의 아들 |
| 나주파(羅州派) | 김천삼 | 김정두의 아들 |
7. 집성촌
| 지역 |
|---|
| 평안남도 영원군 일원 |
|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남상계리 |
| 평안북도 태천군 강서면 용봉동 |
|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진석동 |
|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일원 |
|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 안의동 |
|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
8. 인구
참조
[1]
문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2]
문서
구 안동김씨 족보
[3]
문서
김사렴(金士廉)
[4]
문서
김문동(金文東)
[5]
웹인용
보관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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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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