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아그리파 2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헤로데 아그리파 2세는 헤로데 대왕의 증손으로, 1차 유대 전쟁 당시 로마군과 동맹하여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기여한 인물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궁정에서 성장했으며, 48년에 예루살렘 성전 관리직을 승계하고 칼키스의 분봉 영주가 되었다. 이후 필리포스와 뤼사니아스의 총독 영주를 거쳐 유대 전쟁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원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59년경 여동생 베레니케와 함께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헤로데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였으며, 100년경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의 로마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7년 출생 - 왕충 (후한)
왕충은 후한 시대의 사상가이자 유물론 철학자로, 참위설과 음양오행설을 비판하며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를 강조하고 경험적 인식과 논리적 추론을 중시하는 사상을 담은 《논형》을 저술하여 중국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00년 사망 -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로마 제정 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이자 군인으로, 로마에 투항 후 로마 시민권을 얻어 역사서를 저술했으며, 그의 저작은 1세기 유대교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100년 사망 -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으로, 형 야고보와 함께 "천둥의 아들들"이라 불렸으며,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목격하고, 요한복음 등의 저자로 여겨지며, 소아시아에서 전도 활동을 펼치다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요한계시록을 저술하고 '사랑의 사도'로 불리며 에페소스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 이스라엘의 군주 - 아각
아각은 아말렉 왕의 칭호이자 고대 이스라엘과 아말렉 민족 간 갈등을 상징하는 성경 속 인물로, 사울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가 사무엘에게 죽임 당했으며, 에스델기에 등장하는 하만과 관련된 원한의 배경이 되었다. - 이스라엘의 군주 - 요한 히르카노스
요한 히르카노스는 하스몬 왕조 유대의 지도자로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향력 약화를 틈타 유대 독립을 공고히 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사마리아 정복, 이두매아인 강제 개종, 로마 공화국과의 우호 관계 강화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 헤로데 아그리파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
| 출생 | 27/28년 |
| 사망 | 기원후 92년 또는 100년경 |
| 사망 장소 | 로마 |
| 통치 정보 | |
| 작위 | 유다이아 일부 지역의 왕 |
| 재위 | 기원후 53년? ~ 100년경 |
| 왕조 | 헤로데 왕조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헤로데 아그리파 1세 |
| 어머니 | 키프로스 |
| 배우자 | 알려지지 않음 |
| 자녀 | 없음 |
2. 생애
아그리파 2세는 헤로데 대왕의 증손으로, 1차 유대전쟁 때 로마군과 동맹하여 헤로데 대왕이 건설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혈통에는 적대 관계였던 하스몬 왕조와 헤로데 왕조의 피가 모두 섞여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궁정에서 성장한 아그리파 2세는 48년 백부인 헤로데 2세(아그리파 1세의 형)가 죽자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직을 승계받았고, 클라우디우스의 도움으로 칼키스의 분봉 영주가 되었다. 이후 칼키스 대신 필리포스와 리사니아스의 총독 영주가 되었다. 유대 전쟁 당시에는 훗날 황제가 되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2,000명의 병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25장~26장에 따르면, 59년경 아그리파 2세는 여동생 베레니케와 함께 총독 페스투스를 가이사리아에 방문했을 때, 포로 신세였던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아그리파가 항상 베레니케를 동반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근친상간 의혹을 품게 했다. 더욱이 그의 여동생 드루실라는 총독 펠릭스의 아내였다.
100년경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의 로마에서 사망하면서, 헤로데 대왕으로부터 이어진 헤로데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
아그리파 2세는 헤로데 대왕의 증손으로, 1차 유대전쟁 때 로마군과 동맹하여 헤로데 대왕이 건설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혈통에는 적대 관계였던 하스몬 왕조와 헤로데 왕조의 피가 모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증조부는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를 차지한 헤로데 대왕이며, 증조모는 하스몬 왕조의 공주 Mariamne I|마리암네 1세영어였다. 조부는 헤로데 대왕에게 처형된 헤로데 대왕의 아들 Aristobulus IV|아리스토불루스 4세영어이고, 조모는 헤로데 대왕의 여동생 살로메의 딸 Berenice (daughter of Salome)|베로니카영어였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아그리파 2세의 아버지 아그리파 1세(기원전 10년~기원후 44년)이다.아그리파 2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궁정에서 교육받았다.[2] 부친 사망 당시 17세였던 그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로마에 머물게 되었고, 쿠스피우스 파두스가 유다이아 속주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3] 로마에 있는 동안, 그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유대인을 지지하고 사마리아인들과, 그곳의 몇몇 소요의 원인으로 여겨졌던 유다이아 속주의 총독 벤티디우스 쿠마누스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3] 48년에는 백부인 Herod of Chalcis|헤로데 2세영어가 사망하자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직을 승계하였으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도움으로 칼키스의 분봉 영주가 되었다.
2. 2. 권력 상승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궁정에서 자란 아그리파 2세는 48년 백부인 헤로데 2세(아그리파 1세의 형)가 죽자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직을 승계받았고, 클라우디우스의 도움으로 칼키스의 분봉 영주가 되었다.[4][5]53년, 아그리파 2세는 칼키스의 영주 자리를 포기해야 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그 대가로 필리포스가 다스렸던 이투레아, 트라코니티스, 바타네아, 골란티스, 아우라니티스, 파네아스 지역과 아빌라의 리사니아스 왕국을 통치하는 왕의 칭호를 부여했다.[6][7][8] 이후 57년 칼키스의 영주 자리는 그의 사촌인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돌아갔다.
55년, 네로 황제는 아그리파 2세의 영토에 갈릴리의 티베리아스와 타리케아에, 페레아의 리비아스 (율리아스)와 그 주변 14개 마을을 추가했다.
아그리파 2세는 유대 전쟁 때 훗날 황제가 되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2000명의 병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2. 3. 유대-로마 전쟁
아그리파 2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9]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 아래에서 겪었던 모욕과 학대로 인해 동족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은 안토니아 요새에서 성전 산으로 이어지는 회랑을 파괴했는데, 로마 군인들은 유대교 명절 기간 동안 그곳에서 경비를 섰고, 로마에 대한 공물 지불을 거부했다.[10] 아그리파는 백성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가해진 일시적인 부당함을 참아내고 로마의 패권에 복종하도록 촉구했다. 결국 아그리파는 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시리아의 로마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대 지역을 통과했을 때, 그는 유대군에게 패배했다.[11] 66년에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아그리파와 베레니케를 예루살렘에서 추방했다.[3]66년부터 73년까지 이어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동안, 그는 2,000명의 병력, 궁수와 기병을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하여 유대인이었지만 로마 제국에 전적으로 헌신했음을 보여주었다.[1] 그는 반군에 대항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와 함께 작전에 참여했으며 감라 포위전에서 부상을 입었다.[3] 예루살렘 함락 후, 그는 베레니케와 함께 로마로 가서 프라에토르의 지위를 받았고 추가 영토를 하사받았다.
2. 4. 요세푸스와의 관계
아그리파 2세는 역사가 요세푸스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요세푸스에게 ''유대 고대사'' 저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1] 요세푸스는 아그리파 2세에게 받은 두 통의 편지를 보존했다.[12][13][14]2. 5. 사망
포티오스 1세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3년, 즉 서기 100년에 70세의 나이로 자식 없이 사망했다.[15]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과 그의 왕국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금석학 비문들은 이 날짜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현대 학계의 합의는 그가 93/94년 이전에 사망했다는 것이다.[3] 그는 헤로데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였다.2. 6. 근친상간 혐의
아그리파가 항상 베레니케를 동반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근친상간 혐의를 품게 했다.[4] 게다가 그의 여동생 드루실라는 총독 펠릭스의 아내였다.[4]2. 7. 유대인과의 관계
아그리파 2세는 헤로데 대왕의 증손으로, 1차 유대전쟁 때 로마군과 동맹하여 헤로데 대왕이 조영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아그리파 2세의 혈통에 적대 관계였던 하스몬 왕조와 헤로데 왕조의 피가 모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증조부는 하스몬 왕조를 무너뜨린 헤로데 대왕이었고, 증조모는 하스몬 왕조의 왕녀 Mariamne I|마리암네 1세영어였다. 조부는 헤로데 대왕에게 처형된 아리스토불루스 4세였고, 조모는 헤로데 대왕의 여동생 살로메의 딸 Berenice (daughter of Salome)|베레니케영어였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아그리파 1세이다.아그리파 2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궁정에서 성장했다. 48년에는 백부 헤로데 2세(아그리파 1세의 형)가 사망하자 예루살렘 성전 관리직을 이어받았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도움으로 칼키스의 분봉 영주가 되었다. 이후 칼키스 대신 필리포스와 류사니아스의 총독 영주가 되었다. 유대전쟁 때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2000명의 병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을 볼 때,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졌다고 할 수 있다. 100년경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의 로마에서 사망하면서, 헤로데 대왕으로부터 이어진 헤로데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가 되었다.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25장과 26장에 따르면, 59년경 아그리파 2세는 여동생 베레니케와 함께 총독 페스투스를 카이사리아에 방문했을 때, 갇혀 있던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아그리파가 항상 베레니케와 동행하는 모습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가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그의 여동생 드루실라는 총독 펠릭스의 아내였다.
참조
[1]
EB1911
[2]
DGRBM
Agrippa, Herodes II
https://www.perseus.[...]
[3]
Citation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4]
JE1906
Agrippa II
http://jewishencyclo[...]
[5]
웹사이트
Herod Agrippa II
https://www.livius.o[...]
[6]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7]
서적
Herod Antipas
https://books.google[...]
Zondervan
2016-09-10
[8]
서적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Delmarva
2016-09-16
[9]
서적
De Bello Judaico
[10]
서적
[11]
서적
[12]
Josephus
[13]
Josephus
[14]
Josephus
[15]
문서
Photios cod. 3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