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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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는 1725년 로마에서 태어난 인물로, 'Old Pretender'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동생이다. 그는 1745년 형의 자코바이트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컬로든 전투 패배 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후 1747년 사제 서품을 받고 추기경이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시기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헨리는 1803년 추기경단 단장 및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가 되었으며, 1807년에 사망했다. 그는 동성애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사후에는 자신의 왕위 계승 권리를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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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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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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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오스티아 및 벨레트리의 추기경 주교 및 추기경단 단장 |
출생명 | 헨리 베네딕트 메리 클레멘트 토머스 프랜시스 자비에르 스튜어트 |
출생일 | 1725년 3월 6일 |
출생지 | 교황령 로마 무티 궁전 |
사망일 | 1807년 7월 13일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프라스카티 |
매장지 |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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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경력 | |
소속 교단 | 로마 가톨릭교회 |
서품 | 1748년 9월 1일 |
서품 집전자 | 교황 베네딕토 14세 |
주교 성성 | 1758년 11월 19일 |
주교 성성 집전자 | 교황 클레멘스 13세 |
추기경 서임 | 1747년 7월 3일 |
추기경 서임자 | 교황 베네딕토 14세 |
추기경 계급 | 추기경 주교 |
임명 | 1803년 9월 26일 |
임기 종료 | 1807년 7월 13일 |
이전 | 잔 프란체스코 알바니 |
이후 | 레오나르도 안토넬리 |
기타 직책 | 성 베드로 대성당 수석 사제 (1751–1807)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성당 추기경 사제 (1763–1807) |
이전 직책 | 프라스카티 추기경 주교 (1761–1803)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추기경 사제 (1759–1761) 코린토스 명의 대주교 (1758–1761) 산티 아포스톨리 추기경 사제 (1752–1761)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 (캄피텔리) 성당 추기경 사제 (1748–1759)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 (캄피텔리) 성당 추기경 부제 (1747–1748) |
직위 | 프라스카티사제 추기경 |
관할 구역 | 로마 사교구 |
관할 | 프라스카티 |
가계 | |
부모 |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
왕위 요구 | |
왕위 요구자 | 자코바이트 |
재위 | 1788년 1월 31일 – 1807년 7월 13일 |
재위 유형 | 왕위 주장 |
이전 | "찰스 3세" |
2. 초기 생애
1747년 6월 30일,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헨리에게 삭발례를 수여하였고, 같은 해 7월 3일 특별 공의회를 통해 산타 마리아 인 캄피텔리의 추기경-부제로 임명하였다.[1] 그해 8월 27일, 베네딕토 14세는 헨리에게 4개의 하위 서품을 주었다. 헨리는 1748년 8월 18일에 부제 서품을, 8월 25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그의 형 찰스는 헨리가 종교인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길이 스튜어트 가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헨리는 프랑스 왕실에서 받던 후원을 잃었고, 교황 비오 6세를 돕기 위해 다른 많은 자원을 희생했다. 이는 프랑스에 의해 그의 프라스카티 재산이 몰수된 것과 함께 그를 빈곤으로 몰아넣었고,[4] 그 결과 스튜어트 사파이어를 팔게 되었다. 베네치아 주재 영국 장관은 헨리가 조지 3세로부터 4000GBP의 연금을 받도록 주선했다. 영국 정부는 이를 자선 행위로 묘사했지만, 헨리와 자코바이트들은 이를 그에게 법적으로 빚진 돈의 첫 번째 할부금으로 여겼다. (오랫동안 영국 정부는 그의 할머니 모데나의 메리의 영국 지참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유언을 통해 영국 왕관 보석을 미래의 조지 4세에게 남겼다.[5][6]
=== 동성애 논란 ===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는 1725년 3월 6일 로마의 무티 궁전에서 망명 중에 태어났으며, 같은 날 교황 베네딕토 13세에게 세례를 받았다.[1]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 2세가 왕위를 잃은 지 37년, 그의 아버지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왕위 복귀 실패 10년 후였다. 그의 아버지는 반대자들에게 "올드 프레텐더"로 알려졌으며, 어머니는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의 손녀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공주였다. 헨리는 형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보다 지적이고, 철자와 문장 실력이 더 뛰어났으며, 내성적이고 신중한 성격으로 독실하고 온화한 인물로 묘사되었다.[2]
1745년, 헨리는 형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보니 프린스 찰리" 또는 "영 프레텐더")를 도와 1745년 자코바이트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 왕립군 소속으로 덩케르크를 벗어나지 못한 약 10,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해협 횡단 침공 부대를 명목상 지휘했으며, 이후 모리스 드 사크스 휘하에서 앤트워프 포위전에 참전했다. 컬로든 전투 (1746) 패배 이후, 헨리는 21세의 나이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3. 성직 경력
추기경은 사제 서품이 아닌 직위였기에, 찰스는 헨리가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기대했으나, 1748년 9월 1일 동생이 사제로 서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였다.[1] 그 달 말, 헨리는 추기경-사제가 되었고, 부제 교회를 그대로 유지했다. 1751년, 성 베드로 대성전의 수석 사제가 되었다.[1]
헨리는 플랑드르, 스페인, 나폴리, 프랑스 등지의 수도원과 기타 교회 재산으로부터 막대한 수입을 얻었다. 당시 영국 돈으로 4만 파운드에 달하는 수입이었다. 또한 스페인 아메리카에서도 수입을 얻는 직책 없는 봉급을 받았으며, 멕시코에도 영토를 소유하여 수입에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아헨 조약에 따라 헨리의 형을 추방해야 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오신과 생 아망 수도원을 하사했다.
1752년 12월, 헨리의 명칭 주교좌는 산티 아포스톨리로 변경되었고, 1758년 교황 클레멘스 13세를 선출한 교황 선거에 참여한 뒤, 추기경 성직자단 회계원으로 임명되었다. 회계원은 추기경단의 재산, 수수료, 자금 및 수입을 관리하고, 사망한 추기경을 위한 진혼 미사를 집전하며, ''Acta Consistoralia''를 등록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해 10월, 헨리는 코린토의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의 직함을 맡았지만, 산티 아포스톨리 교회는 in commendam으로 유지했다.
1761년 7월 13일, 프라스카티의 추기경-주교가 되었다.[3] 1803년 9월 26일에는 추기경 성직자단 단장으로 임명되었고,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직을 계승했다. 그는 수년 동안 프라스카티에서 살면서 일했고, 매일 오후 마차를 타고 로마로 내려갔다. 부총장으로서의 지위는 그에게 칸첼레리아 궁전을 사용할 자격을 부여했다.
4. 프랑스 혁명과 말년
바티칸은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왕인 제임스 3세와 8세로 인정했다. 1766년 그가 죽은 후, 바티칸은 1750년에 성공회로 개종한 그의 아들(헨리의 형제) 찰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티칸은 하노버 왕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792년 11월, 바티칸은 처음으로 조지 3세를 하노버 선제후 대신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왕으로 언급했다. 이로 인해 헨리는 항의했고, 그 모욕으로 인해 다시는 로마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시사했다.
반성직주의와 부르봉 왕조에 대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총재 정부는 1798년에 아일랜드 연합에게 헨리를 아일랜드 국왕(헨리 9세)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다.[4] 이는 장 조제프 아블 엉베르 장군이 메이요 주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을 일으켜 가톨릭교도들을 결집시키려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아일랜드 사제들이 봉기를 지지했는데, 이는 엉베르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반성직자 운동의 참전 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4] 프랑스는 헨리가 아일랜드에서 프랑스 추종 국가를 이끌기를 희망했지만, 개신교 공화주의 지도자 울프 톤이 이 계획을 거부했다.[4]
헨리는 1803년 프라스카티로 돌아왔다. 그 해 9월에 그는 추기경단 단장이 되었고, 그 결과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추기경 주교가 되었지만, 여전히 프라스카티의 주교 궁전에 살았다. 그는 1807년 7월 13일, 82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그의 명의 교회인 추기경 부제 임명 60주년이자 추기경 주교로 승진한 지 46주년이 되는 해였다.
5. 유산
헨리, 그의 형제,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묻혀 있다. 대성당 본당의 기둥 중 하나에는 안토니오 카노바가 설계한 왕가 스튜어트 기념비가 있다.
1940년대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비용으로 복원되었다.[7]
헨리의 죽음으로 스튜어트 왕조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권은 찰스 1세의 딸 헨리에타 앤 스튜어트의 혈통을 잇는 사르데냐 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에게 계승되었지만, 그들은 실제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청구하지 않았다.
6. 기타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가 동성애자였는지 탐구했다.[1] 당시 기록에는 헤스터 스랄[2]과 주세페 고라니|Giuseppe Goraniit[3]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고라니는 헨리의 궁궐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잘생긴 성직자들에게 주목했지만, 확정적인 증거는 부족하다고 인정했다. 앤드루 랭은 제임스가 그의 어린 아들이 여러 결혼 계획에도 불구하고 결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음을 암시했다.[1]
가에타노 모로니[4]는 헨리가 그의 집사조반니 레르카리|Giovanni Lercariit[5]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이로 인해 1752년 레르카리를 로마에서 해고하려 했던 추기경과 그의 아버지 제임스 사이에 심각한 긴장이 초래되었다. 헨리는 재정적 독립을 시도하고 레르카리 없이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대응했다.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개입으로 공개적인 스캔들을 피할 수 있었다.[6] 레르카리는 가정을 떠나기로 합의되었고, 나중에 제노바 대주교가 되었다.
제임스가 1766년에 사망한 후, 헨리는 1769년부터 페루자 출신의 귀족 안젤로 체사리니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체사리니는 헨리의 보호 아래 여러 영예를 얻고 프라스카티 대성당의 참사원이 되었으며, 1801년에는 밀레비 주교가 되었다. 헨리는 체사리니와 함께 세상을 떠났으며, 체사리니는 나중에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교회에 묻혔다. 이러한 관계에는 로맨틱한 요소가 있었을 수 있다.[7]
=== 작위 및 문장 ===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추기경 작위를 받았다.[1]수여일 작위 1747년 7월 13일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의 추기경 부제 1748년 9월 16일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의 추기경 사제 1752년 12월 18일 산티 도디치 아포스톨리의 추기경 사제 1759년 2월 12일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의 추기경 사제 1761년 7월 13일 프라스카티의 추기경 주교 1763년 1월 14일 산 로렌초 인 다마소의 코멘다타리오 (추기경 부총장의 고유 명칭) 1803년 9월 26일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추기경 주교 (추기경단 단장의 고유 명칭)
1774년 3월에는 추기경단 부단장이 되었으며, 1803년 9월 15일에는 추기경단 단장이 되었다. 그는 1758년, 1769년, 1774-75년 및 1799-1800년 교황 선거에서 추기경 선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의 문장 아래, 헨리는 왕국의 문장에 흰색 초승달(아르젠트[8])로 구분되는 문장을 사용했다.
6. 1. 동성애 논란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가 동성애자였는지 탐구했다.[1] 당시 기록에는 헤스터 스랄[2] (1741–1821)과 외교관이자 작가인 주세페 고라니|Giuseppe Goraniit[3] (1740–1819)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고라니는 자신의 의심을 어느 쪽으로도 확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인정했지만 헨리의 궁궐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잘생긴 성직자들에게 주목했다. 역사가 앤드루 랭은 제임스가 그의 어린 아들이 여러 결혼이 계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암시했다.[1]
작가 가에타노 모로니[4]는 헨리가 그의 집사조반니 레르카리|Giovanni Lercariit[5] (1722–1802)와 맺었던 긴밀한 관계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며, 헨리는 그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 이는 1752년 레르카리를 로마에서 해고하려 했던 추기경과 그의 아버지 제임스 사이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했다. 헨리는 재정적 독립을 확보하려 시도하고 레르카리 없이 볼로냐에서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대응했다.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개입으로 간신히 공개적인 스캔들을 피할 수 있었다.[6] 레르카리가 가정을 떠나기로 합의되었고, 그는 나중에 제노바 대주교가 되었다.
제임스가 1766년에 사망한 후 상황은 더 나아졌다. 1769년부터 헨리는 페루자 출신의 귀족 안젤로 체사리니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헨리의 보호 아래 여러 영예를 얻고 프라스카티 대성당의 참사원이 되었으며, 1801년에는 밀레비 주교가 되었다. 헨리는 지난 32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체사리니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체사리니는 나중에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교회에 묻혔다.
이러한 관계에는 로맨틱한 요소가 있었을 수 있다.[7]
6. 2. 작위 및 문장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추기경 작위를 받았다.[1]
수여일 | 작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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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 7월 13일 |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의 추기경 부제 |
1748년 9월 16일 |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의 추기경 사제 |
1752년 12월 18일 | 산티 도디치 아포스톨리의 추기경 사제 |
1759년 2월 12일 |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의 추기경 사제 |
1761년 7월 13일 | 프라스카티의 추기경 주교 |
1763년 1월 14일 | 산 로렌초 인 다마소의 코멘다타리오 (추기경 부총장의 고유 명칭) |
1803년 9월 26일 |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추기경 주교 (추기경단 단장의 고유 명칭) |
1774년 3월에는 추기경단 부단장이 되었으며, 1803년 9월 15일에는 추기경단 단장이 되었다.
그는 1758년, 1769년, 1774-75년 및 1799-1800년 교황 선거에서 추기경 선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의 문장 아래, 헨리는 왕국의 문장에 흰색 초승달(아르젠트[8])로 구분되는 문장을 사용했다.
참조
[1]
웹사이트
Vestments of the Cardinal Duke of York: Henry Benedict Stuart
http://www.liturgica[...]
2022-07-01
[2]
웹사이트
Henry Stuart, cardinal duke of York
https://www.britanni[...]
2022-07-01
[3]
웹사이트
Cardinals Created by Benedict XIV (1743-7)
http://www.gcatholic[...]
2020-06-16
[4]
논문
[5]
간행물
henry-benedict-maria-clement-stuart-cardinal-york
https://www.npg.org.[...]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6]
간행물
Stuart or Stewart, Henry Benedict Maria Clemont
Columbia University
[7]
웹사이트
Remembering the Stuarts
https://blogs.fcdo.g[...]
Foreign, Commonwealth and Development Office
2023-04-25
[8]
웹사이트
Marks of Cadency in the British Royal Family
https://www.heraldic[...]
2022-07-01
[9]
서적
Lines of Succession: Heraldry of the Royal Families of Europe
Little, Brown
[10]
Britannica
Mary of Modena
[11]
서적
The works of Monsieur de St. Evremond
https://books.google[...]
J. and J. Knapton, J. Darby, A. Battesw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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