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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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비튼은 1494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추기경으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교회법을 익혔다. 그는 프랑스 사절로 활동하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을 강화하고, 친잉글랜드파를 견제했다. 1538년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 삼촌의 뒤를 이어 세인트앤드루스 대교구장이 되었다. 메리 1세의 섭정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프로테스탄트 설교자 조지 위샤트를 화형에 처한 사건으로 인해 1546년 암살당했다. 그는 마리온 오길비와의 사이에서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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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비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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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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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추기경, 세인트 앤드루스 대주교, 스코틀랜드 수석 주교 |
임기 시작 | 1539년 |
임기 종료 | 1546년 |
이전 | 제임스 비튼 |
다음 | 존 해밀턴 |
서임 | 주교 서임: 1538년 7월 26일 ~ 8월 13일 사이 추기경 서임: 1538년 12월 20일 |
추기경 서임자 | 교황 바오로 3세 |
지위 | 추기경 사제 |
출생 이름 | 데이비드 비튼 |
출생 | 1494년 경 |
출생지 | 파이프, (아마도) 밸푸어, 스코틀랜드 |
사망 | 1546년 5월 29일 (52세 경) |
사망지 | 세인트 앤드루스 성, 파이프, 스코틀랜드 |
국적 | 스코틀랜드 |
종교 | 로마 가톨릭 교회 |
부모 | 존 비튼과 이소벨 모니페니 |
자녀 | 8명 |
이전 직책 | 세인트 앤드루스 대주교 보좌 주교 (1537–1539) |
추가 정보 | |
대체 이름 | 비튼(Beton), 베툰(Bethune), 비툰(Beatoun) |
2. 초창기
데이비드 비튼은 스코틀랜드의 추기경이자 세인트앤드루스 대교구장이었다.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고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에 맞서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33년부터 1542년까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의 프랑스 사절로 활동하며, 발루아의 마들렌과 기즈의 메리와의 혼담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4]
정치적으로 비튼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을 중시했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요구와 관련된 친잉글랜드파를 경계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성공회를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제임스 5세가 헨리 8세처럼 수도원 재산을 약탈할 것을 우려했다.
제임스 5세와 헨리 8세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 가톨릭교회가 교황청에 대한 충성을 멈추고 자신에게 복종하길 원했다. 헨리 8세는 제임스 5세에게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제임스 5세는 거부했다. 1542년 두 왕국 간의 적대 행위가 발발했고, 비튼은 솔웨이 모스 전투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비난받았다.[4]
2. 1. 출생 및 가문
데이비드 비튼은 1494년 스코틀랜드 파이프 주 밸푸어에서 존 비튼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6세에 파리로 유학을 떠나 시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했다.[5]그는 파이프 주 발푸어의 존 비튼(베튠)과 그의 아내 메리 사이에서 태어난 11명의 자녀 중 여섯째이자 막내 아들이었다. 메리는 발무토의 데이비드 보스웰 경의 딸이었다. 발푸어의 베튠 가문은 프랑스 귀족 가문인 베튠 가문의 스코틀랜드 분파인 베튠 씨족의 일원이었다.[3]
2. 2. 교육 및 초기 경력
데이비드 비튼은 1494년 스코틀랜드 파이프 주 밸푸어에서 존 비튼의 아들로 태어났다.[3][4]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6세에 파리로 유학을 가서 시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했다.[5]1519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그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했다. 1520년 그의 삼촌인 글래스고 대주교 제임스 비튼은 데이비드 비튼을 캄버슬랭의 교구 사제 겸 장학 위원으로 임명했다. 1522년 그의 삼촌이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가 되면서 아브로스 수도원의 수도원장 직을 조카에게 물려주었다. 1525년 데이비드 비튼은 프랑스에서 돌아와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아브로스 수도원의 영주 수도원장 자리에 앉았다. 1528년 국왕은 그를 추밀원장으로 임명했다.[5]
2. 3. 추기경 및 대주교 임명
데이비드 비튼은 1538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첼리오 언덕에 있는 성 스테파노 성당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5] 그는 1537년 12월 프랑수아 1세 국왕의 추천으로 랑그도크 미르푸아 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여름 서품을 받았다.[5] 1539년 삼촌이자 후원자인 제임스 비튼 세인트앤드루스 대교구장이 선종하자, 데이비드 비튼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5] 1544년에는 스코틀랜드의 교황특사로 임명되었다.[5]3. 정치 활동
데이비드 비튼은 1519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에 의해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1525년 프랑스에서 돌아와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아브로스 수도원의 영주 수도원장 자리에 앉았고, 1528년에는 국왕에 의해 추밀원장으로 임명되었다.[5] 1537년 12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추천으로 미르푸아 주교가 되었고, 이듬해 여름 서품을 받았다. 1538년에는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1539년 2월에는 삼촌의 뒤를 이어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가 되었다. 1544년에는 스코틀랜드의 교황 특사가 되었다.[5]
비튼은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친잉글랜드 성향에 반대했다. 1542년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솔웨이 모스 전투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4]
3. 1. 프랑스와의 외교
1533년부터 1542년까지 데이비드 비튼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 국왕의 프랑스 사절로 활동하였다.[4] 그는 발루아의 마들렌과 기즈의 메리 등 제임스 5세의 혼인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4]정치적으로 비튼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을 유지하는 데 힘썼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친잉글랜드파를 경계하며 배척하였다. 그는 제임스 5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정책을 따라 수도원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할까 봐 염려하였다.
3. 2. 친영파 및 개신교 탄압
데이비드 비튼은 정치적으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 유지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요구와 관련된 친잉글랜드파 정치적 태도에 반대했다.[4] 그는 헨리 8세에 의해 성공회라는 신흥 종교가 대두되어 잉글랜드 교회 전체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는 제임스 5세가 헨리 8세의 정책을 따라 수도원들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할까 봐 염려하였다.제임스 5세와 그의 삼촌인 잉글랜드의 헨리 8세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는데,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 가톨릭교회가 교황청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스스로에게 복종시키려 했다. 헨리는 제임스에게 자신의 영토에서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는 자신의 방식을 따르도록 설득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두 번 대사관을 보냈다. 제임스 국왕은 헨리의 계획에 말려드는 것을 거부하고 헨리와의 만남을 위해 왕국을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1542년 두 왕국 사이에 적대 행위가 발발했다. 추기경은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의 패배를 초래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4]
4. 메리 1세의 치세
제임스 5세가 1542년 12월 사망하고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비튼은 섭정이 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위조 유언장 의혹과 왕위 계승자인 샤텔로 백작 제임스 해밀턴의 섭정 지위 확보 때문이었다. 비튼은 솔웨이 모스 전투 패배에 대한 비난을 받으며 섭정 해밀턴 백작에 의해 조지 새턴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비튼이 권력을 잃자, 친잉글랜드파는 섭정에게 잉글랜드와 결혼 조약 체결 및 프로테스탄트 설교자 임명을 요청했다. 1543년 7월 그리니치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잉글랜드 중심 정책에 반발하여 많은 이들이 프랑스와의 동맹(Auld Alliance) 유지를 선호했다. 결국 1543년 12월 11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그리니치 조약이 거부되었고, 이는 거친 구애로 알려진 8년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1543년, 비튼은 결혼에 반대하는 "비밀 협약"을 작성한 후 권력을 회복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두 차례 침공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비튼을 비난했다. 1546년 3월, 비튼은 조지 위샤트를 이단 혐의로 체포, 처형했다.[7] 위샤트는 동정 여론이 많았고, 이 사건은 비튼 암살의 계기가 되었다.
4. 1. 섭정 시도와 실패
1542년 12월 제임스 5세가 서거하자, 비튼은 선왕의 유언장을 근거로 미성년의 메리 1세 여왕의 섭정이 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유언장은 위조되었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샤텔로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섭정으로 공인되었다.[6] 비튼은 조지 세톤, 제6대 세톤 영주의 감시 하에 달키스 궁전과 블랙니스 성에 갇혔다. 추기경 수장 체포에 따라 교황 금지령이 내려져, 국내 모든 교회가 문을 닫고 성사 집행이 중단되었다.[7]비튼이 권력을 잃자, 친잉글랜드파는 섭정 해밀턴 백작에게 잉글랜드와 결혼 조약을 맺고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을 임명하게 했다. 1543년 7월 그리니치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조약 내용 중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많은 이들이 프랑스와의 오랜 동맹 유지를 선호하여 조약에 반대하였다. 조약에 대한 저항으로 친프랑스파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는 비튼의 석방으로 이어졌다. 그리니치 조약은 1543년 12월 11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거부되었고, 이는 8년간의 앵글로-스코틀랜드 분쟁(거친 구애)으로 이어졌다.[8] 1543년 비튼은 결혼에 반대하는 "비밀 협약"을 작성한 후 권력을 되찾았다.[9] 이후 두 차례의 잉글랜드 침략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비튼을 비난했다.
1545년 12월, 비튼은 프로테스탄트 설교자 조지 위샤트의 체포, 재판, 처형을 주선했고, 1546년 3월 1일 위샤트는 목 졸려 죽은 후 불태워졌다.[7] 위샤트는 많은 동정자를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비튼 추기경은 암살되었다.[5]
4. 2. 투옥과 복권
1542년 12월 제임스 5세가 서거한 후, 비튼은 선왕의 유언에 따라 어린 메리 1세의 섭정이 되려 했다. 그러나 이 유언은 위조로 여겨졌고, 왕위 계승자인 샤텔로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섭정으로 공인되었다. 섭정 아란은 그 유언의 사본을 보관했는데, 그 유언은 1542년 12월 14일 국왕의 침실에서 작성되었으며, 데어시(Dairsie)의 리먼트 가문(Learmonth)의 제임스, 음식과 스코틀랜드 왕실(Food and the Scottish royal household)의 집사, 톰스턴(Thomastoun)의 헨리 켐프, 시종, 국왕의 의사인 마이클 더럼(Michael Durham), 존 테넌트(John Tennent), 그레인지(Grange)의 윌리엄 커컬디, 성 안토니의 수도원장 마스터 마이클 디사트, 리트(Leith)의 존 조던, 키크 예톨름(Kirk Yetholm)의 목사, 프랜시스 에이크먼(Francis Aikman), 향수 제조자 등이 침대 옆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이 문서를 작성한 서기, 던켈드 대성당(Dunkeld Cathedral)의 캐논인 헨리 발푸어는 공인된 공증인이 아니었다.[6]솔웨이 모스 전투에서의 패배로 비난받던 비튼은 섭정 해밀턴의 지시로 조지 새턴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조지 세톤, 제6대 세톤 영주(George Seton, 6th Lord Seton)의 감시 하에 달키스 궁전(Dalkeith Palace)과 블랙니스 성(Blackness Castle)에 갇혔다. 추기경 수장의 체포에 이어 교황의 금지령이 내려져, 국내 모든 교회가 문을 닫고 성사를 중단해야 했다.[7]
비튼이 권력을 잃자, 친잉글랜드파는 섭정에게 잉글랜드와의 결혼 조약과 프로테스탄트 설교자 임명을 요구했다. 1543년 7월 그리니치에서 체결된 조약에는 메리가 10세가 될 때까지 영국 귀족 부부와 동반하고, 이후 잉글랜드에 거주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하는 이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조약에 대한 저항은 친프랑스파의 인기를 급증시켰고 비튼의 석방을 초래했다. 그리니치 조약(Treaty of Greenwich)은 1543년 12월 11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거부되었고, 이는 거친 구애(Rough Wooing)로 알려진 8년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8] 1543년 비튼은 결혼에 반대하는 "비밀 협약(Secret Bond)"을 작성한 후 권력을 되찾았다.[9] 이후 2차례의 잉글랜드 침략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비튼을 비난했다.
1546년 3월, 비튼은 조지 위샤트를 이단 혐의로 체포, 유죄 판결 후 화형에 처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위샤트의 동조자가 많았고, 이 일로 비튼은 암살당했다. 노먼 레슬리와 그레인지의 윌리엄 커콜디 등의 사주를 받은 공모자들은 1546년 새벽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침입하여 비튼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 창문에 매달았다. 비튼의 죽음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에게는 스코틀랜드를 집어삼키려는 정책에 탄력을 주었는데, 이는 비튼이 헨리 8세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4. 3. 잉글랜드와의 갈등
1542년 12월 제임스 5세가 서거한 후, 비튼은 선왕의 유언에 따라 갓난아기 메리 1세의 섭정직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유언장은 위조되었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왕위 계승자인 샤텔로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섭정으로 인정받았다.[6] 비튼은 솔웨이 모스 전투 패배의 책임을 추궁당해 섭정 해밀턴 백작의 지시로 조지 새턴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5]비튼이 실각하자, 친(親)잉글랜드파는 섭정 해밀턴에게 어린 여왕을 대신하여 잉글랜드와 결혼 조약을 체결하고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을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1543년 7월 그리니치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잉글랜드 중심 정책에 대한 반발로 같은 해 12월 11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이는 거친 구애로 알려진 8년간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분쟁으로 이어졌다.[8] 1543년, 비튼은 결혼에 반대하는 "비밀 협약"을 작성한 후 권력을 회복했다.[9] 이후 잉글랜드의 두 차례 침공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비튼을 비난했다.
1546년 3월, 비튼은 자신에 대한 비난 여론을 돌리기 위해 개인 비서 존 로더가 기소한 조지 위샤트를 이단 혐의로 체포, 처형했다.[7] 위샤트는 동정 여론이 많았고, 이 사건은 비튼 암살의 계기가 되었다. 노먼 레슬리와 그레인지의 윌리엄 커콜디 등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은 1546년 새벽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침입, 비튼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벽 창문에 매달았다. 비튼의 죽음은 스코틀랜드를 장악하려던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에게 큰 이점이었다.
4. 4. 조지 위샤트 처형
1546년 3월, 비튼 추기경은 자신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개인 비서인 존 로더가 기소한 조지 위샤트를 이단 혐의로 체포하고 유죄 판결을 내려 화형에 처했다.[7]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조지 위샤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사건은 결국 비튼 추기경의 암살로 이어졌다.[5] 노먼 레슬리와 그레인지의 윌리엄 커콜디 등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은 1546년 새벽, 비튼 추기경이 머물던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침입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비튼의 시신을 훼손하여 성벽 창문에 매달았다.5. 암살
1546년 3월, 비튼 추기경은 조지 위샤트를 이단 죄목으로 화형에 처했다.[10] 위샤트의 죽음은 당시 스코틀랜드 내에 그의 동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비튼 추기경 암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노먼 레슬리와 그레인지의 윌리엄 커콜디 등은 비튼 추기경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고, 위샤트의 죽음에 분노한 이들과 함께 암살을 모의했다. 1546년 5월 29일 새벽, 이들은 비튼 추기경이 거주하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침입하여 그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의 창문에 매달았다.[11]
비튼 추기경의 죽음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에게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비튼 추기경은 헨리 8세의 스코틀랜드 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5. 1. 암살 배경
1542년 12월 제임스 5세가 서거한 후, 비튼은 선대 국왕의 유언장을 근거로 아직 미성년이었던 메리 1세의 섭정이 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유언장은 위조되었다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견해였으며, 결국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샤텔로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섭정으로 공인되었다. 비튼 추기경은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섭정 통치자인 제임스 해밀턴 백작의 지시에 따라 조지 새턴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10] 비튼 추기경이 권력을 잃자 친잉글랜드파는 어린 여왕을 대신해서 섭정인 제임스 해밀턴 백작에게 잉글랜드와 결혼 조약을 맺고 프로테스탄트교 목회자들을 법적으로 공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543년 비튼 추기경이 다시 권력을 잡자 잉글랜드와 맺었던 조약은 파기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이단자로 기소되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두 차례나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비튼 추기경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10]1546년 3월 비튼 추기경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개인 비서인 존 로더가 기소한 조지 위샤트를 이단 혐의로 체포하여 화형에 처하였다.[10]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조지 위샤트의 동조자들이 많았는데,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비튼 추기경은 암살당하게 되었다. 노먼 레슬리와 그레인지의 윌리엄 커콜디 등의 사주를 받은 공모자들은 1546년 새벽녘에 비튼 추기경이 거주하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침입하여 그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다음 성의 창문에 매달았다.[10] 비튼 추기경의 죽음은 스코틀랜드를 집어삼키려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에게 큰 이익이 되었는데, 비튼 추기경은 헨리 8세의 대(對)스코틀랜드 정책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10]

데이비드 비튼 추기경에 대한 음모는 1544년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10]
5. 2. 암살 실행
1546년 3월, 비튼 추기경은 개인 비서인 존 로더가 기소한 조지 위샤트를 이단 죄목으로 체포하여 화형에 처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조지 위샤트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비튼 추기경은 암살당하게 되었다.[10] 로테스의 영주 노먼 레슬리와 그레인지의 윌리엄 커콜디 등의 사주를 받은 공모자들은 1546년 새벽녘에 비튼 추기경이 거주하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침입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그들은 그의 시신을 훼손한 다음 성의 창문에 매달았다.[11]레슬리 가문은 비튼의 파이프 지역에 대한 관심 확대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커크칼디의 삼촌인 그레인지의 제임스 커크칼디는 프로테스탄트적 공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1543년 비튼의 영향으로 왕국의 재무관에서 해임되었다. 그들은 위샤트의 살해에 분노한 파이프의 지주 중 한 명인 파크힐의 존 레슬리에 합류했다.[10] 레슬리와 커크칼디는 1546년 5월 29일 새벽에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여 문지기를 죽였다. 레슬리, 커크칼디, 발마디의 피터 카마이클은 단검으로 추기경을 찔러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 창문에 매달았다.[11]
5. 3. 암살의 영향
1542년 12월 제임스 5세가 사망한 후, 비튼은 선왕의 유언에 따라 갓난아기 메리 1세의 섭정이 되려 했다. 그러나 유언장은 위조 의혹을 받았고, 샤텔로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섭정이 되었다. 비튼은 솔웨이 모스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해밀턴 백작에 의해 조지 새턴에게 감금되었다. 비튼 실각 후 친잉글랜드파는 해밀턴에게 잉글랜드와의 결혼 조약과 프로테스탄트 성직자 공인을 요구했다. 1543년 비튼은 복권되었고, 잉글랜드와의 조약은 파기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이단으로 기소되었다. 잉글랜드는 두 차례나 스코틀랜드를 침공했고, 비튼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졌다.[10]1546년 3월, 비튼은 조지 위샤트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시켰다. 위샤트 지지자들은 이에 분노하여 비튼 암살을 모의했다. 노먼 레슬리와 그레인지의 윌리엄 커콜디 등은 1546년 새벽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침입, 비튼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벽 창문에 매달았다. 비튼의 죽음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에게 스코틀랜드 정책 추진의 동력을 제공했다. 비튼은 헨리 8세의 스코틀랜드 병합 야욕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11]
비튼 암살 음모는 1544년부터 시작되었다. 암살 주모자들은 노먼 레슬리와 윌리엄 커크칼디였다. 레슬리 가문은 비튼의 파이프 지역 확장으로 피해를 입었고, 커크칼디의 삼촌 제임스 커크칼디는 프로테스탄트 동조자로 1543년 비튼에 의해 왕국 재무관에서 해임되었다. 이들은 위샤트 처형에 분노한 파이프의 지주 존 레슬리와 합류했다.[10] 1546년 5월 29일 새벽, 레슬리와 커크칼디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잠입하여 문지기를 살해했다. 레슬리, 커크칼디, 피터 카마이클은 비튼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여 성벽 창문에 매달았다.[11]
당시에는 비튼의 죽음이 잉글랜드 헨리 8세에게 이익이 된다고 널리 믿어졌다. 비튼은 헨리 8세의 스코틀랜드 정책에 주요 장애물이었다. 비튼의 죽음은 스코틀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교 승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비튼은 사망 당시 스코틀랜드 대법관,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 스코틀랜드 교황 특사였다.[12] 존 해밀턴이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직을 계승했다.
6. 마리온 오길비와의 관계
마리온 오길비는 1500년에 에어리 경 제임스 오길비의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부모가 사망한 후 앵거스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관리했다. 1520년경에 데이비드 비튼을 만나 사랑에 빠져 에티 성에서 함께 살면서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13] 마가렛 H.B. 샌더슨에 따르면, 이들의 관계는 결혼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반종교개혁을 원하는 동료 가톨릭 신자들에게 깊은 모욕감을 주었다. 추기경이 이단으로 성직자의 결혼을 옹호하는 프로테스탄트를 기소하면서도, 자신의 성직자 독신 서약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며 산다는 이중 잣대는 장기적으로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회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드러났다.[13]
6. 1. 자녀
마리온 오길비는 1500년에 에어리 경 제임스 오길비의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부모가 사망한 후 앵거스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관리했다. 1520년경에 데이비드 비튼을 만나 사랑에 빠져 에티 성에서 함께 살면서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13] 마가렛 H.B. 샌더슨에 따르면, 이들의 관계는 결혼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반종교개혁을 원하는 동료 가톨릭 신자들에게 깊은 모욕감을 주었다. 추기경이 이단으로 성직자의 결혼을 옹호하는 프로테스탄트를 기소하면서도, 자신의 성직자 독신 서약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며 산다는 이중 잣대는 장기적으로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회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드러났다.[13]추기경 비튼의 장남인 멜건드의 데이비드 비튼은 개신교로 개종했고, 이후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의 가신장이 되었다. 그의 딸 마가렛은 데이비드 린지, 크로퍼드 백작과 결혼했고, 아그네스는 기트의 알렉산더 고든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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