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의 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홍수의 변은 1674년 숙종 즉위 후, 명성왕후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명성왕후는 어린 숙종의 왕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현종의 사촌 동생인 복선군 등 삼복 형제와 궁녀 김상업을 제거하려 했다. 명성왕후는 삼복 형제 간통 사건을 조작하여 이들을 처벌하려 했으나, 증거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후 명성왕후는 숙종을 압박하여 삼복 형제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자신의 아버지 김우명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남인 세력의 반발을 샀다. 이 사건은 경신환국으로 이어져,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남인이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종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1674년, 14세의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 숙종이 나이가 어리고 병약한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4] 명성왕후는 남편 현종의 사촌 동생이자, 현종 12년에 발생한 조선 대기근 당시 청나라 황제에게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많은 구호물자를 얻어온[1][2] 복선군(福善君)에게 아들의 왕위를 빼앗길까 걱정하였다.
1675년 3월 12일,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복 형제를 고발했다.[5] 복창군은 인선왕후의 초상 때 궁녀를 범했고, 복평군은 명성왕후가 아플 때 간호하던 궁녀를 범했다는 것이다.
2. 사건의 배경
이에 명성왕후는 복선군의 형제들인 복창군(福昌君)과 복평군(福平君)이 평소 여색을 탐하여 궁녀에게까지 희롱했던 것을 구실로 삼아, 이들 삼복 형제(복창군·복선군·복평군)와 남편 현종의 총애를 받던 궁녀이자 자신의 연적이었던 김상업(金常業)을 제거하려 했다.[3][4]
2. 1. 왕위 계승과 명성왕후의 불안
현종이 병으로 급서하자 1674년, 14세에 불과한 숙종이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병이 많은 아들 숙종의 즉위에 불안함을 느낀 현종비(妃) 명성왕후 김씨는 남편 현종의 사촌 동생이자 현종 12년에 발생한 조선 대기근 당시,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조선 왕실을 조롱하는 청 황제[1]에게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대량의 구휼품을 얻어온 공[2] 이 있는 복선군(福善君)에게 아들의 왕위를 빼앗길까 염려하였다. 이에 복선군의 형제인 복창군(福昌君)과 복평군(福平君)이 평소 여색을 탐하여 궁녀에게까지 희롱을 하였던 것을 빌미삼아 이들 세 형제(=삼복: 복창군·복선군·복평군) 및 남편 현종의 승은궁녀였던 연적 김상업(金常業)[3]의 제거를 꾀하였다.[4]
2. 2. 삼복 형제와 김우명
1674년 현종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14세의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 숙종이 나이가 어리고 병약한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4] 명성왕후는 남편 현종의 사촌 동생이자, 현종 12년에 발생한 조선 대기근 당시 청나라 황제에게서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 많은 구호물자를 얻어온[1][2] 복선군(福善君)에게 아들의 왕위를 빼앗길까 걱정하였다.
이에 명성왕후는 복선군의 형제들인 복창군(福昌君)과 복평군(福平君)이 평소 여색을 탐하여 궁녀에게까지 희롱했던 것을 구실로 삼아, 이들 삼복 형제(복창군·복선군·복평군)와 남편 현종의 총애를 받던 궁녀이자 자신의 연적이었던 김상업(金常業)을 제거하려 했다.[3][4]
3. 사건의 전개
하지만 조정 관료들은 왕실 문제라며 개입을 꺼렸고, 수사 결과도 증거 불충분이었다. 삼복 형제는 무죄를 주장했고, 명성왕후와 김우명의 증언 외에는 증거가 없었다. 숙종은 이들에게 벌을 주고 싶지 않아 하루 만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11]
이에 윤휴와 허목은 김우명을 무고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이들은 3월 13일부터 3월 14일 새벽까지 대궐 앞에서 시위하며 김우명 처벌을 요구했다.
명성왕후는 숙종을 압박하여 삼복 형제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하고, 김우명을 방면하도록 했다. 대신들은 명성왕후의 압박에 굴복하여 김우명은 풀려나고 삼복 형제는 유배형을 받았다.
영의정 허적은 명성왕후의 정치 개입을 옹호했고, 윤휴와 허목은 허적을 비판했다. 숙종은 대비의 의사를 따르기로 했고, 명성왕후는 김우명 무죄 방면과 삼복 형제 처벌을 요구했다.[9]
결국 대신들은 명성왕후의 요구대로 했고, 숙종은 삼복 형제에게 유배령을 내렸다. 김우명은 딸 덕분에 처벌은 피했지만, 여론의 비난을 받고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13] 삼복 형제는 9월 16일에 풀려났다.
3. 1. 삼복의 간통 사건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숙종 1년(1675년) 3월 12일에 차자를 올려 삼복(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형제를 고발하였다.[5] 고발 내용은 복창군이 인선왕후의 초상 때 입궁하여 현종의 승은궁녀인 김상업[6]을 범해 임신시켰고[7], 복평군은 명성왕후가 왕비 시절 중병을 앓을 때 현종의 부름으로 치료 절차를 맡아 궁에 지내면서 비자(婢子)[8] 귀례를 희롱하다 강제로 범하고 임신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정 관료들이 왕실의 일이니 간여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의혹스러웠다. 형식적으로 시작한 수사에서도 복창군과 복평군이 간통을 저지른 증거는 물론이고, 이에 대한 근거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의금부에서 신문된 복창군, 복평군, 상업, 그리고 명성왕후가 개별적으로 체포하여 대비전에서 고문한 귀례마저도 억울하다며 무죄를 호소하였다. 김우명의 고발과 '현종 역시 일찍부터 복창군과 상업의 간통 사실을 알고 내치려고 했으나 인선왕후가 상업을 신임하여 벌을 주지 못한 것 뿐'이라는 명성왕후의 증언[9] 외에는 그 어떤 물증, 증언, 증인도 찾을 수 없었고 당사자들도 강력히 부정하니 수사는 진행될 수 없었다. 평소 모후 명성왕후와 외조부 김우명의 지나친 내정간섭[10]에 시달려왔던 숙종은 부왕이었던 현종이 지극히 아꼈던 복선군 형제에게 굳이 벌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하루 만에 무죄 판결로 사건을 종결시켰다.[11] 이 즉시, 윤휴와 허목은 차자를 올려 왕족을 모함한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무고죄와 반좌율로 다스릴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3. 2. 명성왕후의 개입과 남인의 반발
1675년 3월 12일,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복 형제를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 복창군은 인선왕후의 초상 때 궁녀를 범했고, 복평군은 명성왕후가 아플 때 간호하던 궁녀를 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정 관료들은 왕실 문제라며 개입을 꺼렸고, 수사 결과도 증거 불충분이었다. 복창군, 복평군 등은 무죄를 주장했고, 명성왕후와 김우명의 증언 외에는 증거가 없었다. 숙종은 이들에게 벌을 주고 싶지 않아 하루 만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11]
이에 윤휴와 허목은 김우명을 무고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이들은 3월 13일부터 3월 14일 새벽까지 대궐 앞에서 시위하며 김우명 처벌을 요구했다.
명성왕후는 숙종을 압박하여 삼복 형제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하고, 김우명을 방면하도록 했다. 대신들은 명성왕후의 압박에 굴복하여 김우명은 풀려나고 삼복 형제는 유배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명성왕후의 월권 행위에 대한 남인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윤휴는 숙종에게 "왕대비를 조관하라."고 했고, 허목은 왕실 여인의 정치 간섭을 비판했다. 홍우원, 이제학 등은 왕대비의 행위가 월권이라 지적했고, 조사기는 "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이들의 발언은 훗날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의 빌미가 된다.
그러나 영의정 허적은 명성왕후의 정치 개입을 옹호했고, 윤휴와 허목은 허적을 비판했다. 숙종은 대비의 의사를 따르기로 했고, 명성왕후는 김우명 무죄 방면과 삼복 형제 처벌을 요구했다.[9]
결국 대신들은 명성왕후의 요구대로 했고, 숙종은 삼복 형제에게 유배령을 내렸다. 김우명은 딸 덕분에 처벌은 피했지만, 여론의 비난을 받고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13] 삼복 형제는 9월 16일에 풀려났다.
3. 3. 김우명의 죽음과 삼복 형제의 방면
명성왕후는 삼복 형제가 궁녀들과 불륜을 맺은 것은 조작이 아닌 사실이니 김우명을 즉시 무죄방면할 것과 삼복 형제들을 처형하겠다고 맹세하고, 그녀의 눈 앞에서 교지를 적을 것을 명했다.[9] 당시 의정부영의정인 허적은 모후께서 주상 전하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주상 전하를 모시는 신하된 도리로 우리가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명성왕후의 정사 개입을 합리화했다. 이를 두고 윤휴와 허목은 면전에서 아부한다며 허적을 질타하였지만, 숙종은 이를 계기로 대비의 의사를 타진하자고 하였다.
왕대비의 행위에 곤혹스러워진 대신들은 그녀의 요구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모후의 난행에 입장이 난처해진 숙종은 다음날 즉시 삼복형제에게 유배령을 내렸다.
딸 덕분에 처벌은 면하였으나 대대적인 망신을 당한 김우명은 조정에선 그의 외척 행위를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뒤에선 명성왕후를 사대부가 조선 최고의 악후(惡后)로 꼽는 문정왕후에 빗대어 비아냥거려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불편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병을 핑계하여 자리에 누워 버리곤 공개적으로 치료를 거부하여 숙종과 대신들을 압박하는 명성왕후의 행위[13]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수치심과 분노를 견디지 못한 김우명은 낙향하여 술로 여생을 보내다가 6월 18일에 사망하였는데, 일설에는 홧병으로 사망, 혹은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삼복 형제는 9월 16일에 방면되어 다시 서용되었다.
4. 사건의 결과 및 영향
이 사건은 그동안 묵인되어 왔던 청풍 김씨 외척 세력의 횡포와 명성왕후의 월권 행위에 대한 남인의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남의 영수 윤휴는 숙종에게 "왕대비를 조관하라"고 직설적으로 간언했고, 허목은 내종의 부녀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사사로운 정을 버릴 것을 간청했다. 부제학 홍우원, 이제학 등도 왕대비의 행위가 월권이라고 지적했다. 승지 조사기는 "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탄식했다. 이러한 윤휴, 허목, 홍우원, 조사기 등의 발언은 훗날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의 빌미로 작용한다.[12]
명성왕후는 자신의 가문을 향한 비난을 남인의 탓으로 돌리고, 서인 산당(송시열 일파)을 끌어들여 삼복의 변을 일으켰다. 이는 경신환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윤휴의 '대비를 조관하라'는 발언은 김수항 등에 의해 패륜으로 지목되어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명성왕후는 숙종의 계비로 송시열의 혈친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송준길의 외손녀 민씨(인현왕후)를 간택했다.[14] 이는 훗날 기사환국, 갑술환국, 무고의 옥, 신임사화 등 더 큰 비극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4. 1. 경신환국으로의 확대
3월 13일 오전에 입궐한 윤휴와 허목은 김우명을 반좌율로 처단하라며 3월 14일 새벽까지 대궐 앞에서 시위하였고, 숙종은 이를 품처하려 하였다. 현종 시대부터 세도를 부려온 김우명의 행적에 대한 탄핵이 일어났으며, 왕실의 가까운 종친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한 김우명은 의금부에 대기하여 무고죄와 반좌율(죄가 없는 이를 무고한 내용에 기준하여 처벌하는 법)로 처벌받게 될 사태가 발생했다.[12]이에 명성왕후는 숙종의 왕명을 사칭하여 한밤중에 대신들을 긴급 소집, 편전에서 소복 차림과 대성통곡으로 이들을 맞이하여 자진하겠다고 협박하며 삼복 형제와 상업 등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김우명을 방면하라는 교지에 서명해 그녀 앞에서 즉결 시행토록 할 것을 강요했다. 전 국모이자 현왕의 모후인 협박에 대신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어 결국 김우명은 방면되었으며 삼복 형제와 상업 등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져 유배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2차 예송논쟁 때의 관계 탓에 그간 묵인해왔으나 현종 때부터 자행되어 숙종 즉위와 함께 극대화된 청풍 김씨 외척 일족의 세도 행위 및 왕실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의 존재를 무시하고 불법으로 유사 수렴청정 행위를 자행하며 국사에 함부로 간여해온 명성왕후의 월권 행위에 대한 남인의 불만이 결국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청남 영수 윤휴는 숙종에게 직설적으로 "왕대비를 조관하라."는 간언을 올렸고, 허목은 내종의 부녀가 정치에 간섭함은 부당하다며 숙종에게 사사로운 정을 버릴 것을 주청했다. 부제학 홍우원, 이제학 등은 왕대비의 행위가 월권이라 지적하였다. 승지 조사기는 "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한탄했다. 이때의 윤휴, 허목, 홍우원, 조사기 등의 발언은 훗날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의 빌미로 인용된다.
아버지 김우명의 죽음과 친정의 몰락 위기, 자신을 향한 비난을 삼복 형제와 남인의 탓으로 판단한 명성왕후는 그녀의 가문에 정치적·개인적으로 원한을 갖고 있던 서인 산당(山黨: 송시열 일파)을 회유하여 삼복 형제와 남인 타도에 나섰다. 이에 이루어낸 것이 삼복의 변이며 삼복의 변은 경신환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윤휴의 '대비를 조관하라'는 발언은 김수항 등에 의해 패륜으로 지목된 이래 수시로 문제가 되어왔다.
1680년 경신환국이 이루어진 후, 명성왕후는 초비(初妃) 인경왕후를 잃은 숙종의 곁에서 정인(情人) 궁녀 장씨(훗날 희빈 장씨)를 쫓아내고, 인경왕후의 인산을 마친 지 불과 한 달 만에 송시열의 혈친이며 그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송준길의 외손녀 민씨(인현왕후)를 간택하여 숙종의 계비로 맞이하는 무리수를 두었다.[14] 이는 훗날 기사환국, 갑술환국, 무고의 옥, 신임사화 등의 비극을 초래하게 된 불씨가 되었다.
4. 2. 왕실의 권위 실추와 외척 정치의 폐해
명성왕후는 숙종의 왕명을 사칭하여 대신들을 긴급 소집, 편전에서 소복 차림으로 대성통곡하며 자진하겠다고 협박하면서까지 김우명을 방면하라고 강요했다. 이는 국사에 함부로 간여하는 월권 행위였다.[12] 윤휴는 숙종에게 "왕대비를 조관하라."는 간언을 올렸고, 허목은 내종의 부녀가 정치에 간섭함은 부당하다며 사사로운 정을 버릴 것을 주청했다. 부제학 홍우원, 이제학 등은 왕대비의 행위가 월권이라 지적하였다. 승지 조사기는 "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한탄했다.[12]영의정 허적은 명성왕후의 정사 개입을 합리화했고, 윤휴와 허목은 면전에서 아부한다며 허적을 질타하였지만, 숙종은 이를 계기로 대비의 의사를 타진하자고 하였다. 명성왕후는 삼복 형제가 궁녀들과 불륜을 맺은 것은 조작이 아니니 김우명을 즉시 무죄 방면하라고 명했다.[9]
김우명은 딸 덕분에 처벌은 면했으나, 명성왕후를 문정왕후에 빗대어 비아냥거리는 세간의 평가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명성왕후의 불편한 처지를 모면하기 위한 압박[13]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4. 3. 이후 사건들에 미친 영향
명성왕후는 아버지 김우명의 죽음과 친정의 몰락 위기, 자신을 향한 비난을 삼복 형제와 남인의 탓으로 판단하고, 서인 산당(송시열 일파)을 끌어들여 삼복의 변을 일으켰다. 삼복의 변은 경신환국으로 확대되었다.1680년 경신환국 이후, 명성왕후는 숙종의 곁에서 궁녀 장씨(훗날 희빈 장씨)를 쫓아내고, 송시열의 혈친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송준길의 외손녀 민씨(인현왕후)를 숙종의 계비로 맞이했다.[14] 이는 훗날 기사환국, 갑술환국, 무고의 옥, 신임사화 등의 비극을 초래하는 불씨가 되었다.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홍수의 변은 조선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러 가지 역사적 평가와 의의를 지닌다.
이 사건은 명성왕후의 권력 남용과 그로 인한 정치적 희생양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명성왕후는 자신의 아버지 김우명을 구하기 위해 삼복 형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유배를 보냈다.[9] 이 과정에서 김우명은 수치심과 분노로 사망했다. 명성왕후는 문정왕후에 비유되며 비난받았다.[13]
또한, 홍수의 변은 명성왕후의 월권 행위와 이에 대한 남인의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성왕후는 왕명을 사칭하여 대신들을 소집하고, 자신의 뜻대로 교지에 서명하게 하는 등 국정에 과도하게 개입했다.[12] 이에 윤휴는 "왕대비를 조관하라."고 직설적으로 간언했고, 허목은 부녀자의 정치 간섭을 비판하며 숙종에게 사사로운 정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홍우원, 조사기 등도 왕대비의 행위를 비판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훗날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의 빌미가 되었다.
5. 1. 권력 남용과 정치적 희생양
명성왕후가 정사에 개입하는 것을 허적이 옹호하자, 윤휴와 허목은 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대비의 의사를 타진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명성왕후는 삼복 형제가 궁녀들과 불륜을 맺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며, 김우명을 무죄 방면하고 삼복 형제를 처형하며, 즉각 교지를 작성하라고 요구했다.[9]대신들은 왕대비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숙종은 삼복 형제에게 유배령을 내렸다.
김우명은 딸 덕분에 처벌은 면했지만, 조정에서는 외척 행위를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또한 명성왕후는 사대부들에게 조선 최악의 악후로 꼽히는 문정왕후에 비유되며 비난받았다. 김우명은 큰 충격을 받았고, 명성왕후는 병을 핑계로 치료를 거부하며 숙종과 대신들을 압박했다.[13] 김우명은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낙향하여 술로 여생을 보내다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홧병이나 자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삼복 형제는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등용되었다.
5. 2. 조선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
3월 13일 오전에 윤휴와 허목은 김우명을 반좌율로 처단하라며 대궐 앞에서 시위하였고, 3월 14일 새벽까지 시위가 이어지자 숙종은 이를 품처하려 하였다. 현종 시대부터 세도를 부려온 김우명의 행적에 대한 탄핵이 일어났으며, 왕실의 가까운 종친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한 김우명은 의금부에 대기하여 무고죄와 반좌율(죄가 없는 이를 무고한 내용에 기준하여 처벌하는 법)로 처벌받게 될 상황이었다.[12]이에 명성왕후는 숙종의 왕명을 사칭하여 한밤중에 대신들을 긴급 소집, 편전에서 소복 차림으로 대성통곡하며 자진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리고 삼복 형제와 상업 등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김우명을 방면하라는 교지에 서명해 그녀 앞에서 즉결 시행토록 할 것을 강요했다. 전 국모이자 현왕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협박에 대신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김우명은 방면되었으며 삼복 형제와 상업 등에게는 유죄 판결이 내려져 유배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2차 예송논쟁 때의 관계로 인해 그간 묵인해왔으나, 현종 때부터 자행되어 숙종 즉위와 함께 극대화된 청풍 김씨 외척 일족의 세도 행위 및 왕실 최고 어른인 장렬왕후의 존재를 무시하고 불법으로 유사 수렴청정 행위를 자행하며 국사에 함부로 간여해온 명성왕후의 월권 행위에 대한 남인의 불만이 결국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청남 영수 윤휴는 숙종에게 "왕대비를 조관하라."는 간언을 직설적으로 올렸고, 허목은 내종의 부녀가 정치에 간섭함은 부당하다며 숙종에게 사사로운 정을 버릴 것을 주청했다. 부제학 홍우원, 이제학 등은 왕대비의 행위가 월권이라 지적하였다. 승지 조사기는 "문정왕후를 다시 보는구나"라고 한탄했다. 이때의 윤휴, 허목, 홍우원, 조사기 등의 발언은 훗날 경신환국과 갑술환국의 빌미로 인용된다.
참조
[1]
기록
[2]
실록
현종실록 12년 2월 20일 2번째기사
1671-02-20
[3]
실록
숙종실록 6년 7월 3일 1번째기사
1680-07-03
[4]
기록
[5]
실록
숙종실록 1년 3월 12일 3번째기사
1675-03-12
[6]
기록
[7]
기록
[8]
기록
[9]
실록
숙종실록 1년 3월 14일 2번째기사
1675-03-14
[10]
기록
[11]
실록
숙종실록 1년 3월 13일 2번째기사
1675-03-13
[12]
실록
숙종실록 1년 3월 14일 1번째기사
1675-03-14
[13]
실록
숙종실록 1년 5월 10일 1번째기사
1675-05-10
[14]
기록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