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홍우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홍우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남인 계열의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다. 1605년에 태어나 1687년에 사망했으며, 효종과 현종 시기 예송 논쟁과 당쟁에 연루되었다. 그는 소현세자와 강빈의 복권을 주장하고, 윤선도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소신 있는 행보를 보였다.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한 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경신대출척으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남파문집》 등이 있으며, 사후 문간의 시호를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양 홍씨 (토홍) - 홍사용
    홍사용은 노작, 소아, 백우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민족주의적 낭만파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일제강점기 친일 활동을 하지 않았고, 휘문의숙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 문예지 창간, 극단 활동, 희곡 창작 등의 활동을 했다.
  • 남양 홍씨 (토홍) - 홍의락
    홍의락은 크로네스코리아를 설립한 기업인이자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하여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대구광역시 경제부시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이사로 활동하는 정치인이다.
  • 안성시 출신 - 안국선
    안국선은 조선 후기 소설가이자 저술가로, 『금수회의록』, 『공진회』 등의 소설과 『외교통의』, 『정치원론』 등의 저술을 통해 정치,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안광묵, 생부는 안직수, 양부는 안경수이다.
  • 안성시 출신 - 박두진
    박두진은 일제강점기 안성 출생의 청록파 시인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와 시대적 저항시를 썼으며, 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고, 후기에는 종교적 성찰과 사회 비판을 담은 작품을 남겼다.
  • 남인 - 최익현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켰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외세 침략에 저항하다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 남인 - 한백겸
    한백겸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고증학적 방법론을 통해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여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정여립의 난 연루와 임진왜란 공훈 등의 부침을 겪었으나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여 기자정전 유적을 주장하는 등 후대 실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홍우원
기본 정보
한글 이름홍우원
한자 이름洪宇遠
남파(南坡)
군징(君徵)
시호문간(文簡)
상세 정보
직업조선의 학자, 문인

2. 생애

홍우원은 1605년 7월 29일 안성군 소촌면 소현리(현 대덕면 소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을 지낸 홍영이고, 어머니는 양천 허씨로 허성의 딸이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조카딸이었다. 남인 집안 출신으로, 형제로는 홍우정, 홍우량 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단정하고 중후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10세에 이미 문예에 뛰어났다. 소년 시절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과 임해군, 영창대군 처형을 패륜으로 규정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고, 허목, 윤선도, 송시열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았다.

1622년 집안의 권고로 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1623년 인조 반정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4년 아버지 홍영의 상을 당했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가족과 함께 괴산군으로 피신했다가 1628년 안성군으로 돌아왔다. 1630년 다시 감시에 합격했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홍우정을 따라 봉화 문수산 아래로 피신하여 글을 읽었다. 1642년 안성으로 돌아온 후 1645년 왕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기 전까지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구분내용
아버지홍영(1567년 7월 26일 ~ 1624년 4월 20일)
어머니양천 허씨 부인(1569년 11월 28일 ~ 1652년 2월 1일)
할아버지홍가신(1541년 7월 17일 — 1615년 6월 14일)
할머니재령 이씨 부인(정경부인 재령 이씨, 1540년 12월 7일 — 1615년 3월 28일)
외할아버지허성(1548년 6월 13일 — ?)
외할머니전주 이씨 부인(1550–?)
형제
부인
자녀



1646년 소현세자강빈(姜嬪)의 옥사를 동정하여 인조의 노여움을 사 좌천당했다.[1] 1654년 부수찬으로 재직 중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의 석방을 상소하고, 강빈 옥사가 날조된 것이라며 신원, 복권을 주장하여 여론을 주도했다.[1] 효종은 상소를 문제삼지 않고 해를 입히지 않았다.[1] 그해 7월 김홍욱이 장살(杖殺)당하자,[1] 홍우원은 김홍욱의 사면, 복권 여론을 주도했다가 파직당하였다.[1]

1660년 효종 사후 상복 문제로 송시열, 송준길을 비판했다가 파직, 복직되어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가 의정부사인(舍人)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였다.[1] 윤선도송시열을 비판할 때, 홍우원은 윤선도에게 김홍욱을 변호한 의리를 지적하며 비판하였다.[1]

1662년 의정부사인, 사헌부장령을 거쳐, 1663년 다시 사헌부 장령, 홍문관수찬이 되어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였으나 거절당했다.[1] 권시의 복권과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다 파직당하였다.[1] 1663년 홍문관 교리가 되자 윤선도의 석방을 상소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였으나, 현종은 홍우원을 금고에 처하였다. 이후 홍우원은 학자의 주장을 취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처벌할 필요는 없다며 서인들을 규탄했고, 서인들은 반발하였다.

1669년 강원도 고성 군수(固城郡守)로 부임하여 세금 감면과 곤폐해소를 제거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 세금을 감면받았다. 1672년 노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1673년 다시 고성군수로 복직하였다.

1674년 임기를 마치고 체직되어 돌아왔다. 숙종이 즉위한 뒤, 부교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남인이 집권하자 응교로 복직되고, 공주목사로 나갔다. 동부승지, 부제학 겸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거쳤다. 1675년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고성 군수가 되었다가 2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대사헌, 공조참판, 예문관 제학 등을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1676년 의정부우참찬, 행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숙종으로부터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았다. 그해 다시 예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대동미 조세를 감량할 것 등을 진언하여 성사시켰다. 강화유수·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77년 강도유수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숭정대부의 자급에 올랐다.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직무에 나아갔다. 좌참찬이 되고, 1678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1678년 공조판서로 재직 중 윤휴 등과 함께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부당함을 간하여 군포 납부의 폐단을 시정하였고, 각 아문의 둔전을 혁파하고 4군영문의 재정은 은포로 징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남인 강경파인 청남(淸南)을 형성하여 서인과 철저한 대립관계에 있었고, 허적·민희 등 남인내 온건파인 탁남(濁南)과도 대립했다. 남인임에도 허적, 허목 등과 서인 김육대동법의 취지를 이해하여 당색을 초월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서인 김홍욱, 송시열 등이 주도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에도 당색을 초월하여 지지를 보냈다.[1]

1679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예조판서로 전임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적의 동류로 몰려 심문을 받았다. 그는 평소 허적서인들을 변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청남이었다. 윤휴, 허목 등과 함께 남인 당내 청남 파벌의 지도자였으나, 허견의 역모 사태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허견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되고, 김우명 처벌을 상주하러 정청에 참여했다가 명성왕후가 뛰쳐나오자 윤휴가 대비를 조관하라고 말한 일에 연루되어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금부에서 고문을 당한 뒤 파직당하고, 함경북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길주로 이배되었으며, 나이가 많아 함경남도 문천으로 이배되었다. 김수항, 민정중이 그의 비리를 캐려 했으나 실패하자, 몇 해 전 상소 중 《주역》 단사를 인용한 것을 문제삼았다.

배소에서도 학문에 전념하였고, 조경, 허목, 윤휴 등 남인계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1683년 의정부우의정 김석주가 특별히 석방을 건의하여 숙종이 승인하였으나 민정중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685년 호조판서 박신규가 석방을 주청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87년 7월 27일 배소에서 유배생활 중 병을 얻어 죽었다.

2. 1. 생애 초반

홍우원은 1605년 7월 29일 안성군 소촌면 소현리(현 대덕면 소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을 지낸 홍영이고, 어머니는 양천 허씨로 허성의 딸이며 허엽의 손녀이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조카딸이었다. 남인 집안 출신으로, 형제로는 홍우정, 홍우량 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단정하고 중후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10세에 이미 문예에 뛰어나 명성이 있었다. 소년 시절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과 임해군, 영창대군 처형을 패륜으로 규정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고, 허목, 윤선도, 송시열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닦았다.

1622년 집안의 권고로 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1623년 인조 반정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4년 아버지 홍영의 상을 당했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가족과 함께 괴산군으로 피신했다가 1628년 안성군으로 돌아왔다. 1630년 다시 감시에 합격했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홍우정을 따라 봉화 문수산 아래로 피신하여 글을 읽었다. 1642년 안성으로 돌아온 후 1645년 왕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기 전까지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구분내용
아버지홍영(1567년 7월 26일 ~ 1624년 4월 20일)
어머니양천 허씨 부인(1569년 11월 28일 ~ 1652년 2월 1일)
할아버지홍가신(1541년 7월 17일 — 1615년 6월 14일)
할머니재령 이씨 부인(정경부인 재령 이씨, 1540년 12월 7일 — 1615년 3월 28일)
외할아버지허성(1548년 6월 13일 — ?)
외할머니전주 이씨 부인(1550–?)
형제
부인
자녀


2. 1. 1. 출생과 가계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1605년 7월 29일 안성군 소촌면 소현리(蘇峴里, 현 대덕면 소현리)에서 출생하였다. 증조부는 증 의정부영의정 익녕부원군(益寧府院君) 홍온이며, 할아버지는 형조판서를 지낸 홍가신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을 지내고 사후 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홍영이고, 어머니는 양천 허씨로 허성의 딸이며 허엽의 손녀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은 어머니 양천 허씨의 배다른 삼촌이 된다. 형은 태백오현 중 한 명인 학자 두곡 홍우정이며, 동생은 청백리에 오른 홍우량이다.

홍경신은 그의 종조부였고, 무관으로 활동한 홍시주는 9촌 조카뻘이 되는 친척이었다. 홍시주는 그의 시대로부터 두 세대 뒤에 실학자 유득공의 외증조부이자 시인 이옥의 외증조부가 된다. 그의 집안은 남인 당색이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단정하고 중후하여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0세에 이미 문예가 이루어져 명성이 있었다. 소년 시절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과 임해군, 영창대군 처형을 패륜, 부도덕으로 규정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허목, 윤선도, 송시열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구분내용
아버지홍영(1567년 7월 26일 ~ 1624년 4월 20일)
어머니양천 허씨 부인(1569년 11월 28일 ~ 1652년 2월 1일)
할아버지홍가신(1541년 7월 17일 — 1615년 6월 14일)
할머니재령 이씨 부인(정경부인 재령 이씨, 1540년 12월 7일 — 1615년 3월 28일)
외할아버지허성(1548년 6월 13일 — ?)
외할머니전주 이씨 부인(1550–?)
형제
부인
자녀


2. 1. 2. 소년기와 청년기

1605년 7월 29일 안성군 소촌면 소현리(蘇峴里, 현. 대덕면 소현리)에서 남인 홍언필홍섬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단정하고 중후하여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10세에 이미 문예가 이루어져 명성이 있었다. 소년 시절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과 임해군, 영창대군 처형을 패륜, 부도덕으로 규정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허목, 윤선도, 송시열 등과 두루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1622년(광해군 14년) 집안의 권고로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이 벌어졌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4년(인조 2년) 5월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고,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터지자 모친과 가족들을 데리고 충청북도 괴산에 피신해 있다가 1628년 4월 안성으로 되돌아왔다. 1630년 다시 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형인 두곡 홍우정을 따라 모친과 함께 봉화 문수산 아래로 피신하였으며 피신 중에도 글을 읽었다. 1642년 다시 안성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있다가 1645년(인조 23) 왕세자의 세자책봉을 축하하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2. 2. 관료 생활

1646년(인조 24년) 소현세자강빈(姜嬪)의 옥사(獄事)를 동정하여, 강빈 옥사 때 유배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풀어 주고 강빈의 옥사도 날조된 것이니 신원(伸寃)해야 된다고 주장했다가 인조의 진노를 사서 좌천당했다.[1]

1654년(효종 5년) 6월 17일 부수찬으로 재직 중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의 석방을 상소하였다.[1] 강빈 옥사가 날조된 것이라며 신원, 복권을 주장하자 조야의 여론이 강빈의 신원을 찬동하게 되었다.[1] 효종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대가 능히 말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라며 상소를 문제삼는 의견을 물리치고 해를 입히지 않았다.[1]

그해 7월 서인황해도 관찰사 김홍욱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가 허위이며 복권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杖殺)당했다.[1] 1654년말 홍우원은 홍문관수찬이 되었는데,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의 사면, 복권 여론을 주도했다.[1] 강빈(姜嬪) 옥사가 허위임을 직언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상소했다가 파직당하였다.[1]

1660년(현종 1) 효종 사후 상복 문제로 기년설(朞年說, 1년복)을 주장한 송시열, 송준길을 비판했다.[1] 사수찬겸부소회소(辭修撰兼附所懷疏)를 올려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禮論)을 논박했다가 파직, 복직되어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가 의정부사인(舍人)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였다.[1] 윤선도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소현세자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고 비판했다.[1] 홍우원은 윤선도에게 김홍욱을 변호하며 의리를 지키다가 순절한 선비를 엮지 말라고 지적하였다.[1]

1662년(현종 3년) 의정부사인, 사헌부장령을 거쳐, 1663년 다시 사헌부 장령, 홍문관수찬이 되어 자의왕후 조씨(慈懿王后 趙氏)의 복상문제로 윤선도가 유배되자 석방을 주장하였으나 거절당했다.[1] 탄옹 권시윤선도의 석방을 요청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홍우원은 소를 올려 권시는 잘못이 없으며, 권시의 복권과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다 파직당하였다.[1]

1663년 홍문관 교리가 되자 윤선도의 석방을 상소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였으나, 현종은 홍우원을 금고에 처하였다. 이후 홍우원은 학자의 주장을 취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처벌할 필요는 없다며 서인들을 규탄했고, 서인들은 반발하였다. 김홍욱은 효종 말년에 복권되었는데, 홍우원은 다른 서인들과 함께 김홍욱에게 표창을 청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가 윤선도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던 점을 문제삼아 그의 김홍욱 포상 주장 참여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1669년(현종 10) 4월 통례원상례를 거쳐 7월 강원도 고성 군수(固城郡守)로 부임하였다. 고성군수로 재직하며 동해빈민(東海濱民)의 세금 감면과 가난과 기근을 이유로 곤폐해소(困弊解消)를 제거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 왕이 받아들여 세금을 감면받았다. 1672년 10월 노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칩거하였다. 1673년 강원도관찰사 안진(安縝)의 청으로 다시 고성군수로 복직하였다.

1674년(현종 15년) 임기를 마치고 체직되어 돌아왔다. 8월에 현종이 갑자기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한 뒤, 숙종이 바로 부교리로 임명하여 불렀는데, 홍우원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1674년(숙종 원년) 현종 말년 2차 예송 논쟁(禮訟論爭)에서 승리한 남인이 집권하자 응교로 복직되고,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 겸 대사성(副提學兼大司成), 이조참의 등을 거쳤다. 1675년(숙종 1)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고성 군수가 되었다가 2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대사헌, 공조참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등을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1676년(숙종 2) 의정부우참찬, 행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상소하여 학문에 힘쓰고 욕심을 절제하라는 경계를 올렸고, 숙종으로부터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았다. 그해 다시 예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흉년임을 들어 대동미(大同米) 조세를 감량할 것, 납물교생(納物校生)의 면역(免役)을 중지할 것, 납속자(納粟子)에 대한 불신을 없앨 것 등을 진언하여 성사시켰다. 강화유수·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77년(숙종 3) 외직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강도유수(江都留守)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실록을 찬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자급에 올랐다.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직무에 나아갔다.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1678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1678년 공조판서로 재직 중 윤휴 등과 함께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부당함을 간하여 군포 납부의 폐단을 시정하였고, 각 아문(衙門)의 둔전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총융청·수어청·어영청 등 4군영문의 재정은 은포(銀布)로 징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남인 강경파인 청남(淸南)을 형성하여 서인과 철저한 대립관계에 있었고, 허적(許積)·민희(閔熙) 등 남인내 온건파인 탁남(濁南)과도 대립했다. 남인임에도 허적, 허목 등과 서인 김육대동법의 취지를 이해하여 당색을 초월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서인 김홍욱, 송시열 등이 주도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에도 당색을 초월하여 지지를 보냈다.[1]

1679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예조판서로 전임되었다.

2. 2. 1. 강빈 옥사와 복권 여론

1646년(인조 24년) 소현세자강빈(姜嬪)의 옥사(獄事)를 동정한 그는 강빈 옥사 때 유배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풀어 주고 강빈의 옥사도 날조된 것이니 이를 신원(伸寃)해야 된다고 주장했다가 인조의 진노를 사서 좌천당했다.[1]

1654년(효종 5년) 6월 17일 부수찬으로 재직 중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1] 이어 강빈 옥사도 날조된 것이니 이를 신원, 복권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조야의 여론이 강빈의 신원을 찬동하게 되었다.[1] 효종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대가 능히 말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여 그 상소를 문제삼는 의견을 물리치고 특별하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1]

그러나 그해 7월 서인황해도 관찰사 김홍욱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가 허위이며 복권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杖殺)당했다.[1] 1654년말 홍우원은 홍문관수찬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의 사면, 복권 여론을 주도했다.[1] 소현세자의 빈 강빈(姜嬪) 옥사는 허위임을 다시 직언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상소했다가 파직당하였다.[1]

1660년(현종 1) 효종 사후 상복을 놓고 효종을 차남으로 간주하고 기년설(朞年說, 1년복)을 주장한 송시열, 송준길의 설을 잘못이라고 비판했다.[1] 바로 사수찬겸부소회소(辭修撰兼附所懷疏)를 올려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禮論)을 논박했다가 파직, 곧 복직되어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의정부사인(舍人)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였다.[1] 그해 윤선도송시열의 예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1] 그 중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불러왔다.[1] 윤선도송시열을 비판한 근거로는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근거로 삼았다.[1] 홍우원은 윤선도에게 김홍욱을 변호하며 의리를 지키다가 순절한 선비를 엮지 말라고 지적하였다.[1]

1662년(현종 3년) 의정부사인, 사헌부장령을 거쳐, 1663년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홍문관수찬이 되어 자의왕후 조씨(慈懿王后 趙氏)의 복상문제로 윤선도가 유배되자 그의 석방을 주장하였으나 거절당했다.[1] 그 뒤 탄옹 권시윤선도의 석방을 요청했다가 심한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홍우원은 소를 올려 권시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권시의 복권과 윤선도의 석방을 적극 주장하다 파직당하였다.[1] 그는 윤선도의 말이 비록 과격하였으나 그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에 대한 설은 분명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또 선왕의 사부(師傅)이니 마땅히 방환하는 은혜를 내려야 한다 하였으나 오히려 역으로 공격당하고 파직되었다.[1]

2. 2. 2. 1차 예송 논쟁

홍우원은 1663년 홍문관 교리가 되자 윤선도의 석방을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주장을 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였으나, 현종은 홍우원을 금고에 처하였다. 이후 홍우원은 학자의 주장을 취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처벌할 필요는 없다며 서인들을 규탄했고, 서인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김홍욱은 효종 말년에 복권되었는데, 이후 홍우원은 다른 서인들과 함께 김홍욱에게 표창을 청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가 윤선도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던 점을 문제삼아 그의 김홍욱 포상 주장 참여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1669년(현종 10) 4월 통례원상례를 거쳐 그해 7월 강원도 고성 군수(固城郡守)로 부임하였다. 고성군수로 재직하며 동해빈민(東海濱民)의 세금 감면과 가난과 기근을 이유로 곤폐해소(困弊解消)를 제거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 왕이 받아들여 세금을 감면받았다. 고성군수 재직 시 치적을 쌓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1672년 10월 노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칩거하였다. 1673년 강원도관찰사 안진(安縝)의 청으로 다시 고성군수로 복직하였다.

1674년(현종 15년) 임기를 마치고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해 8월에 현종이 갑자기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한 뒤, 숙종이 바로 부교리로 임명하여 불렀는데, 홍우원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2. 2. 3. 2차 예송과 남인의 집권

1674년(숙종 원년) 현종 말년 2차 예송 논쟁(禮訟論爭)에서 승리한 남인이 집권하자 응교로 복직되고,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 이어서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 겸 대사성(副提學兼大司成), 이조참의 등을 거쳤다. 1675년(숙종 1)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고성 군수가 되었다가 1675년 2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대사헌, 공조참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등을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허목, 윤휴 등과 함께 동인(東人) 이발(李潑)의 죄를 감해 주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도승지 민종도(閔宗道)가 반대상소를 올려 무산시켰다. 이에 민종도의 반대상소를 반박하는 변민종도소척소(辨閔宗道疏斥疏)를 올렸다. 이어 송준길의 추탈을 청하는 청추탈송준길계(請追奪宋浚吉啓)를 올려 송시열이 귀양갔을 때 송준길(宋浚吉)도 함께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송준길의 추탈을 청하는 상소를 세 차례에 걸쳐 올렸고 결국 송준길은 삭탈관작을 당하였다.

2. 2. 4. 개혁 정책 추진

1676년(숙종 2) 의정부우참찬, 행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상소하여 학문에 힘쓰고 욕심을 절제하라는 경계를 올렸고, 숙종으로부터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았다. 그해 다시 예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흉년임을 들어 대동미(大同米) 조세를 감량할 것, 납물교생(納物校生)의 면역(免役)을 중지할 것, 납속자(納粟子)에 대한 불신을 없앨 것 등을 진언하여 성사시켰다. 이어서 강화유수·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77년(숙종 3) 외직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강도유수(江都留守)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실록을 찬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자급에 올랐다. 얼마 뒤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직무에 나아갔다. 이후 좌참찬(左參贊)이 되고, 1678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1678년 봄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체직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조판서로 재직 중 윤휴 등과 함께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부당함을 간하여 군포 납부의 폐단을 시정하였고, 이어 각 아문(衙門)의 둔전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총융청·수어청·어영청 등 4군영문의 재정은 은포(銀布)로 징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허목, 윤휴(尹鑴), 권대운(權大運), 이원정, 이봉징, 이서우 등과 함께 남인 강경파인 청남(淸南)을 형성하여 서인과 철저한 대립관계에 있었고, 허적(許積)·민희(閔熙) 등 남인내 온건파인 탁남(濁南)과도 대립했다. 그는 남인임에도 허적, 허목 등과 서인 김육대동법의 취지를 이해하여 당색을 초월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또한 서인 김홍욱, 송시열 등이 주도한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 여론에도 당색을 초월하여 지지를 보냈다.[1]

1679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바로 두 번 사직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니 마침내 사은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사직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그 해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다시 두 번 사직상소를 올려 두 번째 사직소를 올린 뒤에 허락받아, 마침내 안성(安城)으로 돌아왔다.

2. 3. 생애 후반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적의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 연시연' 행사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허적의 동류로 몰려 심문을 받았다. 그는 평소 허적서인들을 변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청남이었다. 윤휴, 허목 등과 함께 남인 당내 청남 파벌의 지도자였으나, 허견의 역모 사태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다. 허견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되고, 김우명 처벌을 상주하러 정청에 참여했다가 명성왕후가 뛰쳐나오자 윤휴가 대비를 조관하라고 말한 일에 연루되어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금부에서 고문을 당한 뒤 파직당하고, 함경북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길주로 이배되었으며, 나이가 많아 함경남도 문천으로 이배되었다. 김수항, 민정중이 그의 비리를 캐려 했으나 실패하자, 몇 해 전 상소 중 《주역》 단사를 인용한 것을 문제삼았다.

배소에서도 학문에 전념하였고, 조경(趙絅), 허목, 윤휴, 이관징(李觀徵), 이서우, 이수경, 이원정, 정지호(鄭之虎), 조위봉(趙威鳳), 안진(安縝), 정시우(鄭時羽), 한중징(韓仲澄), 조창문(趙昌門)과 자질(子姪) 등 남인계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1683년(숙종 9년) 의정부우의정 김석주가 특별히 석방을 건의하여 숙종이 승인하였으나 민정중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685년 호조판서 박신규가 석방을 주청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87년(숙종 13년) 7월 27일 배소에서 유배생활 중 병을 얻어 죽었다.

2. 3. 1. 경신환국과 유배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적의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 연시연' 행사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허적의 동류로 몰려 심문을 받았다. 그는 평소 허적서인들을 변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청남이었다. 윤휴, 허목 등과 함께 남인 당내 청남 파벌의 지도자였던 그가 허견의 역모 사태에 가담하거나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허견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되고, 윤휴, 허목 등과 김우명 처벌을 상주하러 정청에 참여했다가, 윤휴가 정청에 명성왕후가 뛰쳐나오자 대비를 조관하라고 말한 일에 연루되어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금부에서 고문을 당한 뒤 파직당하고, 함경북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길주로 이배되었으며, 다시 나이가 많다고 하여 함경남도 문천으로 이배되었다. 김수항, 민정중이 그의 비리를 캐려고 하였으나 얻은 바가 없자, 몇 해 전에 올린 상소 중에 《주역》 단사를 인용한 것을 문제삼았다.

배소에서도 학문에 전념하였고, 조경(趙絅), 허목, 윤휴, 이관징(李觀徵), 이서우, 이수경, 이원정, 정지호(鄭之虎), 조위봉(趙威鳳), 안진(安縝), 정시우(鄭時羽), 한중징(韓仲澄), 조창문(趙昌門)과 자질(子姪) 등 남인계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1683년(숙종 9년) 의정부우의정 김석주가 특별히 그의 석방을 건의하여 숙종이 승인하였으나 민정중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1685년 호조판서 박신규가 상소를 올려 그의 석방을 주청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687년(숙종 13년) 7월 27일 현지 배소에서 유배생활 중 병을 얻어 죽었다.

2. 3. 2. 유배 생활과 최후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허적(許積)의 할아버지 '허잠의 시호 연시연' 행사장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허적의 동류로 몰려 심문당했다. 청남이었던 그는 평소 허적서인들을 변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었다. 윤휴, 허목 등과 함께 남인 당내의 청남 파벌의 지도자였던 그가 허견의 역모 사태에 가담하거나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허견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되고, 윤휴, 허목 등과 김우명 처벌을 상주하러 정청에 참여했다가, 윤휴가 정청에 명성왕후가 뛰쳐나오자 대비를 조관하라고 말한 일에 연루되어 괘씸죄가 추가되었다.

금부에서 고문당한 뒤 파직당하고, 함경북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길주로 이배되었으며, 다시 나이가 많다고 하여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이배되었다. 김수항, 민정중(閔鼎重)이 그의 비리를 캐려고 하였으나 얻은 바가 없자, 몇 해 전에 올린 상소 중에 《주역》 단사를 인용한 것을 문제삼았다.

배소에서도 학문에 전념하였고, 조경(趙絅), 허목(許穆), 윤휴, 이관징(李觀徵), 이서우, 이수경, 이원정 정지호(鄭之虎), 조위봉(趙威鳳), 안진(安縝), 정시우(鄭時羽), 한중징(韓仲澄), 조창문(趙昌門)과 자질(子姪) 등 남인계의 인사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1683년(숙종 9년) 의정부우의정 김석주(金錫胄)가 특별히 그의 석방을 건의하여 풀어 주고자 하여 숙종이 승인하였으나 민정중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1685년 호조판서 박신규(朴信圭)가 상소를 올려 그의 석방을 주청하였으나 서인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현지 배소에서 유배생활 중 1687년(숙종 13년) 7월 27일 병을 얻어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저서로는 《남파문집》 13권이 있다. 바로 안성의 남파서원(南坡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2. 4. 사후

1688년(숙종 14년) 2월 16일 시신을 경기도 안성군 소만리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하였고[2], 뒤에 안성군 안성읍 봉남동(鳳南洞) 마곡(馬谷)으로 이장하였다.

사후 문간(文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1689년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복작(復爵)되고, 1690년(숙종 16년) 9월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추증되었다. 1692년 안성군 유림들의 공의로 안성 소촌면 소현리(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에 백봉서원(白峯書院, 다른 이름은 봉양서원(鳳陽書院))이 건립되어 제향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관작과 시호가 추탈되었다가 1697년 복권되었으나, 1701년 무고의 옥 때 다시 추탈되었다. 1795년(정조 19년) 10월 정조 때 가서야 최종적으로 복권된다.

1782년(정조 6) 그의 4대손 홍복전(洪福全)이 백봉서원(白峯書院)의 유림들의 도움으로 그의 문집인 《남파문집》 13권을 간행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건립된 계고당(稽古堂)에도 제향되었다가 1871년(고종 8)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그가 배향된 계고당은 건물이 해체되고, <계고당기(稽古堂記)>와 다수의 서적이 보관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친필(親筆)인 계고당 현판은 보존되고, 영정(影幀) 등은 산실 되었으나, 그 일부가 안성산업대학교 도서관(安城 産業大學校 圖書館)으로 이관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서원 철거 후에도 안성군 유생들은 백봉서원 터에 단을 만들어 제사하는 봉양단(鳳陽壇)을 세우고 향사하였다.

3. 저서 및 작품

홍우원은 남파문집, 백흑난, 목근침설 등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이상의 신도비명, 윤선도 신도비명 및 시장, 정묘중간 남양 홍씨 세보 서 등의 작품을 썼다.

3. 1. 저서


  • 《남파문집》 13권
  • 《백흑난》
  • 《목근침설》 (수필)

3. 2. 작품

제목원제
이상의 신도비명李尙毅神道碑銘|이상의 신도비명한국어
윤선도 신도비명윤선도신도비명한국어
윤선도 시장諡狀|윤선도 시장한국어
정묘중간 남양 홍씨 세보 서丁卯重刊南陽洪氏世譜序|정묘중간 남양 홍씨 세보 서한국어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아버지홍영(洪榮)1567년 7월 26일1624년 4월 20일
할아버지홍가신1541년 7월 17일1615년 6월 14일
할머니재령 이씨 부인1540년 12월 7일1615년 3월 28일
어머니양천 허씨 부인1569년 11월 28일1652년 2월 1일
외할아버지허성(許筬)1548년 6월 13일?
외할머니전주 이씨 부인1550년?
누나남양 홍씨 부인1592년?
홍우정(洪宇定)1593년1654년
홍우관(洪宇寬)1596년?
누나남양 홍씨 부인??
홍우굉(洪宇宏)1603년?
남동생홍우량(洪宇亮)1608년?
첫째 부인연안 이씨 부인1605년?
장녀남양 홍씨 부인1630년?
장남홍면(洪冕)1635년?
둘째 부인권씨 부인1615년?
차녀남양 홍씨 부인1639년?
차남홍침(洪䒞)1640년?


5. 평가

홍우원은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이 곧아 파직되었을 때마다 조정에서 그를 다시 등용할 것을 국왕에게 요청하였다. 안성의 백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서인 당원들은 그가 조정에 있을 때 성급하게 행동하여 정직하다는 평판을 얻었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아 그의 됨됨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그의 졸기에 덧붙이기도 했다.

6. 기타

그는 백흑난이라는 글을 통해 흑과 백의 대화를 통해 흑을 더럽다고 하는 백을 조롱하기도 하였다.

참조

[1] 문서 소현세자빈의 복권을 놓고 [[남인]] 내에서는 [[송시열]] 등이 [[조선 효종|효종]]의 종통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악의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2] 문서 신도비에 그의 묘의 위치를 집 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