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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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규봉은 경북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에서 투수로 활약한 야구 선수이다. 1977년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실업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프로 데뷔 첫 해 최다 세이브를 기록하며 활약했으나, 팔꿈치 부상으로 1986년 은퇴했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국가대표로도 활약했으나, 197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중 부상과 고소공포증으로 인해 국가대표팀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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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국가대표 좌완 투수로 '일본 킬러'라 불렸던 이선희는 KBO 리그 원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15승을 거두며 맹활약했으나, 한국시리즈에서의 만루 홈런 허용과 이후 부진으로 '비운의 투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6시즌 통산 28승 36패, 평균자책점 3.35를 기록하고 은퇴했다.
황규봉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선수명 | 황규봉 |
원어명 | Hwang Kyu-Bong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
수비 위치 | 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
드래프트 순위 | 원년 멤버 |
첫 출장 | KBO /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대 MBC전 |
마지막 경기 | KBO / 1986년 10월 23일 대구 대 해태전 |
선수 경력 | |
코치 경력 | |
국가대표 경력 | |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1973 마닐라 |
월드 게임 | 1981 샌타클래라 |
메달 정보 | |
메달 종류 | 남자 야구 아시아 선수권 대회 |
은메달 | 1973 마닐라 단체전 월드 게임 |
은메달 | 1981 샌타클래라 단체전 |
2. 선수 생활
경북고등학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투수였고 정구왕 전 청보 외야수와 초등학교(성주), 중학교(성주중) 동창이며[1] 두 선수(황규봉, 정구왕) 모두 선수 부족 탓에 대구 경상중학교로 전학을 가는 과정에서 1년을 유급했다. 경북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실업 야구 팀인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1981년까지 몸담았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따라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멤버로 입단하였는데, 영남대 상업은행이[2] 황규봉 스카우트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프로 원년인 1982년에 최다 세이브(11세이브)를 기록했고, 권영호, 이선희와 함께 15승(권영호, 이선희 11선발승, 황규봉 7선발승)을 거두었다. 이만수는 "내리막길에 접어들 시기에 10승을 넘게 기록해서 대단한 투수였다"고 회고했다.[3] 선수들 사이에서는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선수층이 옅은 현실에서 무리한 투구를 한 탓인지[4] 다음 해 6승(5선발승)으로 추락했고, 1984년 10승(4선발승)을 거쳐 1985년 14승(모두 선발)을 기록했으나 팔꿈치 부상 때문에[5] 1986년 3승(모두 선발)으로 추락하며 은퇴했다.
1973년 고려대학교 1학년 때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지만, 대회 도중 숙소 화재로 3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어 한동안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떠났다.[15] 1976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나,[15] 1977년 8월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져 다시 국가대표팀을 떠났다.[16] 1979년 9월 다시 마운드에 섰고, 1980년 8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17]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이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뛸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번호였던 1번을 이해창이 달고 있어 14번을 달았다.[18] 이 등번호로 유명한[19] 유백만은 한국화장품(1977년)에서 감독(유백만)-선수(황규봉), 삼성(1983~1985년)에서 코치(유백만)-선수(황규봉)로 함께했다.
2. 1. 아마추어 시절
경북고등학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투수였고 정구왕 전 청보 외야수와 초등학교(성주), 중학교(성주중) 동창이다.[1] 두 선수(황규봉, 정구왕)는 선수 부족 탓에 대구 경상중학교로 전학을 가는 과정에서 1년을 유급했다. 경북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실업 야구 팀인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1981년까지 몸담았다. 영남대 상업은행이[2] 황규봉 스카우트 경쟁을 펼치기도 했으나,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따라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멤버로 입단했다.한편, 고려대 1학년 때인 1973년 필리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됐지만 대회 도중 숙소에서 불이 나 3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은 뒤 한동안 성인 국가대표팀을 떠났다.[15]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나[15] 1977년 8월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져 또다시 국가대표팀을 떠났다가[16] 1979년 9월 다시 마운드에 섰고 1980년 8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17]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이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뛸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번호였던 1번을 이해창이 달고 있었던 터라[18] 14번을 달았다.[19]
2. 2. 프로 시절 (삼성 라이온즈)
경북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실업 야구 팀인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1981년까지 몸담았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따라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멤버로 입단하였는데, 영남대 상업은행이[2] 스카우트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프로 원년인 1982년에 최다 세이브(11세이브)를 기록했고, 권영호, 이선희와 함께 15승(권영호, 이선희 11선발승, 황규봉 7선발승)을 거두었다. 원년 멤버 중 한 명인 이만수는 황규봉에 대해 "내리막길에 접어들 시기에 10승을 넘게 기록해서 대단한 투수였다"고 회고했다.[3] 선수들 사이에서는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하지만 선수층이 옅은 현실에서 무리한 투구를 한 탓인지[4] 다음 해 6승(5선발승)으로 추락했고, 1984년 10승(4선발승)을 거쳐 1985년 14승(모두 선발)을 기록했으나, 팔꿈치 부상 때문에[5] 1986년 3승(모두 선발)으로 추락하며 은퇴했다.
2. 3. 국가대표 경력
1973년 고려대학교 1학년 때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지만, 대회 도중 숙소에서 불이 나 3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어 한동안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떠났다.[15] 1976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나,[15] 1977년 8월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져 다시 국가대표팀을 떠났다.[16] 1979년 9월 다시 마운드에 섰고, 1980년 8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17]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이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뛸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번호였던 1번을 이해창이 달고 있어 14번을 달았다.[18]3. 은퇴 이후
1986년까지 선수로 활동하고 은퇴한 황규봉은 같은 해 11월 26일부터 3년 계약 형식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역대 1호 프로 선수 출신 투수코치로 활동했다.[6][7] 이후 일본과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았으나, 귀국 후에는 야구계를 떠나 개인 사업을 했다. 하지만, 사생활 문제로 구단으로부터 미운털이 찍혔다.[9]
현역 은퇴 후 사업 실패와 가족과의 불화가 겹치며 부산에서 홀로 지냈다. 대부분의 야구계 인사들과도 연락을 끊어서, 경상중학교 시절부터 같이 선수 생활을 했던 이선희 외에는 그의 근황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황규봉의 삼성 2군 투수코치 이동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 1989년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던 정동진 감독 두 사람의 사이가 더욱 안 좋아졌고[10] 정동진 감독은 편송언 사장과 마찰을 빚었던 것 외에도 1990년 한국시리즈 패배의 책임 때문에[11] 1년 임기를 남겨둔 채[12] 1990년 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황규봉의 부고 소식도 그의 매제와[13] 이선희를 통해 알려졌을 정도였고, 부고가 알려진 시점에는 야구 팀들이 전지훈련을 떠나는 시기여서 빈소를 찾는 사람들이 적었다고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2015년 11월 허리 통증으로 검진을 받았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곧바로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2016년 1월 18일 대장암으로 인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4]
4. 평가 및 이력
경북고등학교 야구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투수였고, 정구왕 전 청보 외야수와는 초등학교(성주) 및 중학교(성주중) 동창이다.[1] 황규봉과 정구왕은 선수 부족 문제로 대구 경상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이 과정에서 1년 유급했다. 경북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실업 야구 팀인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1981년까지 활동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에 따라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멤버로 입단했는데, 영남대와 상업은행이[2] 황규봉 영입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로 원년인 1982년에 최다 세이브(11세이브)를 기록했고, 권영호, 이선희와 함께 15승(권영호, 이선희 11선발승, 황규봉 7선발승)을 거두었다. 이만수는 황규봉에 대해 "내리막길에 접어들 시기에 10승을 넘게 기록해서 대단한 투수였다"고 회고했다.[3] 선수들 사이에서 황규봉은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얇은 선수층 속에서 무리한 투구를 한 탓에[4] 다음 해 6승(5선발승)으로 성적이 떨어졌다. 1984년 10승(4선발승)을 거쳐 1985년 14승(모두 선발)을 기록했으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5] 1986년 3승(모두 선발)으로 추락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같은 해 11월 26일부터[6] 3년 계약 형식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역대 1호 프로선수 출신[7] 투수코치로 활동한 후, 일본과[8]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그러나 귀국 후에는 야구계를 떠나 개인 사업을 했지만, 사생활 문제로[9] 구단의 눈 밖에 났다.
현역 은퇴 후 사업 실패와 가족과의 불화가 겹치면서 부산에서 홀로 지냈다. 대부분의 야구계 인사들과도 연락을 끊었으며, 경상중학교 시절부터 함께 선수 생활을 했던 이선희 외에는 그의 근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황규봉의 사생활 문제로 인한 2군 투수코치 이동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 1989년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던 정동진 감독의 사이가 더욱 나빠졌다.[10] 정동진 감독은 황규봉의 2군행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 마찰을 빚었고, 1990년 한국시리즈 패배의 책임을 지고[11] 1년 임기를 남겨둔 채[12] 1990년 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황규봉의 부고 소식은 그의 매제와[13] 이선희를 통해 알려졌을 정도였으며, 부고가 알려진 시점에는 야구 팀들이 전지훈련을 떠나는 시기여서 빈소를 찾는 사람들이 적었다고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건강 악화가 겹친 그는 2015년 11월 허리 통증으로 검진을 받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곧바로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2016년 1월 18일 대장암으로 인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4]
한편, 고려대학교 1학년 때인 1973년 필리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됐지만, 대회 도중 숙소 화재로 3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었다. 이후 한동안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가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복귀했다.[15] 1977년 8월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져 다시 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가,[16] 1979년 9월 다시 마운드에 섰고, 1980년 8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17]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이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번호였던 1번을 이해창이 달고 있어서[18] 14번을 달았다. 이 등번호(14번)로 유명한[19] 유백만은 황규봉과 함께 한국화장품(1977년, 감독-선수), 삼성(1983~1985년, 코치-선수)에서 호흡을 맞췄다.
5. 학력
6. 통산 기록
연도 | 소속 | 나이 | 승리 | 패전 | 승률 | 평균자책점 | 출장 | 선발 | 완투 | 완봉 | 세이브 | 홀드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탈삼진 | 몸맞는 공 | 보크 | 폭투 | 실점 | 자책점 | 타자수 | WHIP |
---|---|---|---|---|---|---|---|---|---|---|---|---|---|---|---|---|---|---|---|---|---|---|---|---|---|
1982 | 삼성 | 29 | 15 | 11 | .577 | 2.47 | 47 | 16 | 8 | 2 | 11 | 0 | 222.1 | 188 | 11 | 34 | 3 | 99 | 6 | 1 | 4 | 78 | 61 | 865 | 1.00 |
1983 | 30 | 6 | 4 | .600 | 3.67 | 30 | 14 | 5 | 1 | 3 | 0 | 130.0 | 136 | 10 | 36 | 4 | 45 | 10 | 0 | 4 | 66 | 53 | 548 | 1.32 | |
1984 | 31 | 10 | 2 | .833 | 3.25 | 30 | 8 | 2 | 1 | 4 | 0 | 108.0 | 109 | 4 | 24 | 1 | 48 | 8 | 0 | 2 | 42 | 39 | 452 | 1.23 | |
1985 | 32 | 14 | 7 | .667 | 3.04 | 34 | 24 | 4 | 0 | 4 | 0 | 165.2 | 158 | 12 | 38 | 2 | 55 | 4 | 2 | 1 | 66 | 56 | 679 | 1.18 | |
1986 | 33 | 3 | 5 | .375 | 3.96 | 13 | 8 | 1 | 0 | 2 | 0 | 50.0 | 48 | 4 | 20 | 0 | 10 | 1 | 0 | 2 | 26 | 22 | 208 | 1.36 | |
KBO 통산 : 5년 | 48 | 29 | .623 | 3.08 | 154 | 70 | 20 | 4 | 24 | 0 | 676.0 | 639 | 41 | 152 | 10 | 257 | 29 | 3 | 13 | 278 | 231 | 2752 |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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