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황산벌 전투는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맞서 벌인 전투이다.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키자,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나당 연합군을 결성했다.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신라는 육로를 통해 백제로 진격했고, 의자왕은 계백에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게 했다. 계백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가족을 죽이고 전투에 임했지만, 신라군의 맹렬한 공격에 백제군은 전멸하고 계백 또한 전사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백제는 멸망했으며, 신라와 당나라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황산벌 전투는 영화와 드라마, 지역 축제의 소재로도 활용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삼국통일전쟁의 전투 - 백강 전투
백강 전투는 663년 백제 부흥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금강 하구에서 벌인 전투로, 백제 부흥 운동의 종말과 동아시아 국제 정세 변화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본의 국가 체제 개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 660년 분쟁 - 제2차 고구려-당 전쟁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은 661년부터 662년까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한 전쟁으로, 당나라는 해상 침공 작전을 감행했으나 고구려의 저항과 철륵의 반란으로 실패했으며, 고구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내 이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백제가 참가한 전투 - 관산성 전투
554년 백제가 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한 관산성 전투는 나제동맹 와해와 백제의 외교적 고립 속에 발발, 백제 성왕의 전사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백제에 큰 타격을 주어 신라가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초기 과정과 성왕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의 차이가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 백제가 참가한 전투 - 평양 전투 (371년)
평양 전투 (371년)는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한 사건이며, 소수림왕 대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국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산벌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신라의 백제 정벌 |
시기 | 660년 8월 20일 (음력 7월 9일) |
위치 | 황산벌, 현재 논산시 연산면 인근 |
결과 | 신라의 승리, 백제 패망 |
원인 | 불명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신라 |
교전국 2 | 백제 |
지휘관 및 지도자 | |
신라 지휘관 | 김유신 김흠순 김품일 김천존 김반굴 관창 김법민 |
백제 지휘관 | 충상 상영 계백 |
병력 규모 | |
신라 병력 | 50,000명 |
백제 병력 | 5,000명 |
사상자 | |
신라 사상자 | 불명 |
백제 사상자 | 4,980명 |
참고 | |
기타 |
2. 배경
642년(의자왕 2)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3]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4] 당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 간의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의 5만 정예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곳에 진영을 두고 있었다. 당시 좌평 충상이 백제군을 지휘하였고, 달솔 상영과 달솔 계백은 충상의 부하 장수였다.[8]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은 모두 전멸하고, 좌평 충상, 달솔 상영을 포함한 20여 명은 신라에 항복하였다. 황산벌 전투가 있던 날 소정방의 당군은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섬멸하고 신라 정예군과 합류하였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2003년)은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패배한 5천 백제군의 전투를 다룬 한국 코미디/전쟁 영화이다. 박중훈과 정진영이 출연했다. 계백과 선덕여왕은 김유신과 계백의 생애를 다루며 백제의 멸망으로 이어진 황산벌 전투를 다룬 한국 드라마다.[1]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 풍사귀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5]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5]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으로 진격하였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炭峴)[6]으로 진격하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방면으로 진군하자, 의자왕은 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좌평 의직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은 신라 정예군을 우선 막을 것을 주장하여 분열이 일어났다.[3] 또한, 귀양 중이던 흥수는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과 탄현을 선점해 연합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한 반면, 대신들은 연합군이 각각 백강과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했다.[3]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 싸우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을 넘어 왔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 명을 뽑아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가족을 모두 살해하였다.[7]
3. 과정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9]며 병사들을 독촉했고, 이에 백제 군사는 사기가 올라 네 번의 소전투에서 신라군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盤屈)이 전장에 투입되어 1인 돌격 전술을 구사하니, 반굴은 백제 병사들을 여럿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 승기를 탄 신라군은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이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에게 반굴을 따르게 하였다. 관창은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 가서 힘껏 싸우다가 적에게 사로잡히고 계백에게 끌려갔다.[10]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그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에 감탄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11]
신라 정예군 진영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다시 돌격하였고, 계백은 백제 병사들을 계속 죽인 관창의 목을 베었다.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신라군은 백제군보다 더욱 죽을 각오로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전멸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4. 결과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독군(新羅督軍) 김문영을 참수하려 하였다. 김유신은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12] 이 말을 들은 동보량이 소정방에게 귓속말로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김문영을 풀어주었다.[12]
11월에 전공을 논하게 되었는데,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충상, 상영 등을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높은 신분인 6두품과 제7관등인 일길찬의 관직을 주고, 항복한 백제 귀족들에게도 그에 걸맞은 두품과 관직을 하사하였다.[13]
전사한 관창은 급찬에 추증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 주었으며, 그 집에는 비단 30필, 승포 30필과 곡식 100섬을 내려 주었다.[14]
5. 현대적 묘사
5. 1. 영화 및 드라마
5. 2. 지역 축제
2008년 백제 문화제 기간 중, 부여 등지에서 논산 강변 공원에서 황산벌 전투를 재현하는 행사가 열렸다.
참조
[1]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
서적
The History of Korea
ABC-CLIO
[3]
백과사전
황산벌전투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백과사전
신라의 삼국통일
https://ko.wikisourc[...]
[5]
웹사이트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
http://db.history.go[...]
[6]
문서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부근의 고개
[7]
웹사이트
계백이 출정의 의지를 다지다(660년 6월(음))
http://db.history.go[...]
[8]
뉴스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 계백의 5000 결사대 황산벌서 '최후의 전투'
http://kids.hankooki[...]
[9]
웹사이트
황산 벌판에서 싸우다(660년 6월 (음))
http://db.history.go[...]
[10]
웹사이트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660년 7월09일(음))
http://db.history.go[...]
[11]
웹사이트
계백이 관창을 돌려보내다
http://db.history.go[...]
[12]
웹사이트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660년 7월09일(음))
http://db.history.go[...]
[13]
웹사이트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660년 11월22일(음))
http://db.history.go[...]
[14]
웹사이트
급찬으로 추증되다
http://db.history.g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