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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포사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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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포사다스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트로츠키주의 정치 운동가로, 1962년 미셸 파블로와의 갈등으로 제4인터내셔널에서 분리되어 포사다스주의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그는 핵전쟁을 통한 세계 혁명, UFO와 외계인의 공산주의 연대, 노동자 국가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주장했다. 쿠바 혁명에 참여했으나, 관타나모 미군 기지 문제로 쿠바 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1970년대에 편집증적인 행보로 쇠퇴하여 그의 사후 해체되었다. 포사다스의 급진적인 이론과 운영 방식은 비판을 받았으며, 현재는 우루과이의 혁명 노동자당만이 그 영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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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포사다스
기본 정보
이름후안 포사다스
본명단테 에밀리오 피오토
출생1912년 1월 20일, 아르헨티나
사망1981년 5월 14일 (향년 69세), 이탈리아 로마
국적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직업
직업정치인
혁명가
작가
이론가
사상
사상트로츠키주의, 포사다스주의
경력
주요 활동라틴 아메리카 트로츠키주의 운동 지도
제4인터내셔널 활동
정당
소속 정당노동자-공산주의 국제주의자당 (Partido Obrero Comunista Internacionalista)

2.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후안 포사다스는 아르헨티나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축구 선수로 활동하다 노동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 정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이후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헌신하며 여러 단체를 거쳤다.[1]

2. 1. 초기 생애

포사다스는 이탈리아 남부 마테라 출신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으며, 최소 9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극심한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1]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와 형제자매들은 이웃에게 구걸하고 몇 푼을 벌기 위해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영양실조는 그에게 영구적인 건강 문제를 남겼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영향을 미쳤다.[1]

젊은 시절에는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es에서 축구 선수로 명성을 얻었다. 1930년대에는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으며, 코르도바에서 구두 제작자 및 가죽 노동자 노조를 조직했다.

이 시기에 Partido Socialista Obrero|Partido Socialista Obreroes 소속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선거 후보로 나섰다. 그 후 1941년에 제4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파르티도 데 라 레볼루시온 소셜리스타에 합류했지만, 당은 빠르게 쇠퇴했다. 1947년 포사다스와 단테 미나졸리는 트로츠키주의에 헌신한 소규모 노동계급 운동가 모임인 그룹 쿠아르타 인터나시오날(GCI)을 설립했다.[1]

3.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포사다스주의의 형성

1962년, "포사다스주의자"들은 비상 회의를 소집한 후 자체적인 제4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2] 1964년 3월에는 "제4 인터내셔널 제7차 대회"라는 이름으로 첫 정기 국제 회의가 열렸다. 회의 후 발표된 성명에 따르면, 이 회의는 "유럽"에서 개최되었으며 "아프리카, 유럽, 라틴 아메리카의 13개국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 참석했다.[2]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나중에(1970년대 초) 제4 인터내셔널 (포사다스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포사다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은 조직의 성격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1966년에 도입된 변화는 다른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크게 달랐다. 포사다스는 1975년 "제10차 세계 대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2]

"단 하나의 논쟁도 없었다. 그것은 논쟁을 옆으로 치워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논쟁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동질적인 대회였다. [...] 만약 운동이 획일적이지 않고 중앙 집중적으로 획일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불안정, 의심, 관련 없는 문제나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걱정을 열어두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주의를 분산시킨다."[sic][2][8]

3. 1. 제4인터내셔널 활동

포사다스는 1950년대 초 제4인터내셔널 국제 사무국 분파를 위해 제4인터내셔널 라틴 아메리카 국을 조직했다.[2] 그의 지도 아래, 이 운동은 특히 쿠바의 철도 노동자, 볼리비아의 주석 광부, 브라질의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얻었다.

1953년 제4인터내셔널이 분열되었을 때, 포사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미셸 파블로와 제4인터내셔널 국제 사무국 편에 섰다. 그러나 1959년까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ISFI 지도부에 혁명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며 다투었다. 또한 핵전쟁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 포사다스는 "전쟁–혁명"이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를 해결"할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가 잿더미에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핵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가졌다.

1966년 포사다스는 루이스 나구일과 함께 삼대륙 회의의 지침에 따라 설립된 "파괴적 기구"인 농민 노동자 동맹을 지휘했다.[3]

포사다스와 ISFI 사이의 갈등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포사다스로 알려진 호메로라는 인물은 ISFI에 보낸 편지에 필명으로 사용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4] 그 편지에서 포사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 전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제4인터내셔널의 ''라틴 아메리카 국''(BLA)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유럽인들이 수동적인 세력이 되었다는 등 과감한 비판을 했다.[5] BLA와 ISFI 모두 화해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962년 4월 포사다스는 회의를 소집하고 BLA 지도자들이 이끄는 ISFI의 집행위원회를 완전히 재편성하는 대담한 행동을 했다.[6] ISFI는 6월에 이 행동에 대응하여 BLA를 제4인터내셔널에서 제명했다.[2] 1962년 라틴 아메리카에 집중된 포사다스와 그의 국제 추종자들은 ISFI에서 분리되어 (제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와 재통합하여 제4인터내셔널 통합 사무국을 결성하기 전) 새로운 단체를 설립했다.[7]

3. 2. 포사다스주의의 분리

1953년 제4인터내셔널 분열 당시 미셸 파블로의 파벌에 섰던 포사다스와 그 추종자들은 핵전쟁 문제 등으로 분쟁을 일으켰다. 1962년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포사다스주의 제4인터내셔널로 불리는 새로운 그룹을 형성했다.[2] 1964년 열린 첫 정기 국제회의는 "제4인터내셔널 7차 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2]

쿠바의 혁명적 노동자당 트로츠키주의(POR(T))는 1962년 분열 당시 포사다스 편에 붙어 트로츠키주의 쿠바 지부를 장악했으며,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목소리를 키웠다. POR(T)는 관타나모 미군 기지의 강제 철수를 주장하였고 갈수록 호전적이 되었다. 쿠바 공산당 측 관리들이 이들의 본부를 습격하여 트로츠키의 저서 "영구혁명"을 출판하던 인쇄기들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카스트로 측도 이들을 "극좌파", "유해하다"고 비판하였고 활동이 금지되었다. 체 게바라 처형 이후 이들은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였다.

1970년대에 편집증적으로 회원들을 추방하던 포사다스로 인해 영향력이 감소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다. 현재까지 활동하는 정당은 사실상 우루과이의 혁명 노동자당이 유일하다.[2]

포사다스는 1950년대제4인터내셔널의 국제 사무국 분파를 위해 제4인터내셔널의 라틴 아메리카 국을 조직했다.[2] 그의 지도 아래, 이 운동은 특히 쿠바의 철도 노동자, 볼리비아의 주석 광부, 브라질의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얻었다.

1953년 제4인터내셔널이 분열되었을 때, 포사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미셸 파블로와 제4인터내셔널 국제 사무국 편을 들었다. 그러나 1959년까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ISFI 지도부에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며 다투었다. 그들은 또한 핵전쟁 문제에 대해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 포사다스는 "전쟁–혁명"이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를 해결"할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가 잿더미에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핵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취했다.

포사다스는 루이스 나구일과 함께 삼대륙 회의의 지침에 따라 설립된 "파괴적 기구"인 농민 노동자 동맹을 1966년에 지휘했다.[3]

포사다스와 ISFI 사이의 갈등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포사다스로 알려진 호메로라는 인물은 ISFI에 보낸 편지에 필명으로 사용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4] 그 편지에서 포사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 전 세계의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제4인터내셔널의 ''라틴 아메리카 국''(BLA)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유럽인들이 수동적인 세력이 되었다는 등 과감한 비판을 했다.[5] BLA와 ISFI 모두 화해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962년 4월 포사다스는 회의를 소집하고 BLA 지도자들이 이끄는 ISFI의 집행위원회를 완전히 재편성하는 대담한 행동을 했다.[6] ISFI는 6월에 이 행동에 대응하여 BLA를 제4인터내셔널에서 제명했다.[2] 라틴 아메리카에 집중된 포사다스와 그의 국제 추종자들은 1962년 ISFI에서 분리되어 (제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와 재통합하여 제4인터내셔널 통합 사무국을 결성하기 전) 새로운 단체를 설립했다.[7]

1962년, "포사다스주의자"들은 비상 회의를 소집한 후 자체적인 제4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2] 포사다스주의자들의 첫 정기 국제 회의는 1964년 3월에야 열렸다. 이 회의는 "제4 인터내셔널 제7차 대회"로 발표되었다. 회의 후 발표된 성명에 따르면, 해당 대회는 더 자세한 설명 없이 "유럽"에서 개최되었으며, "아프리카, 유럽, 라틴 아메리카의 13개국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 참석했다고 주장했다.[2]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나중에 (1970년대 초) 제4 인터내셔널 (포사다스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포사다스주의 제4 인터내셔널은 조직의 성격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1966년에 도입된 변화는 다른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크게 달랐다. 포사다스는 1975년 그들의 "제10차 세계 대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2]

"단 하나의 논쟁도 없었다. 그것은 논쟁을 옆으로 치워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논쟁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가장 동질적인 대회였다. [...] 만약 운동이 획일적이지 않고 중앙 집중적으로 획일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불안정, 의심, 관련 없는 문제나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걱정을 열어두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주의를 분산시킨다."[sic][2][8]

4. 포사다스주의의 주요 특징

포사다스트로츠키주의에 기반한 독자적인 사상인 포사다스주의를 주창했다. 포사다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핵전쟁 낙관론''': 핵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자본주의 진영보다 먼저 공산진영이 선제 핵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세계 혁명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2][10]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인 "핵전쟁 낙관론"을 참고.
  • '''외계 문명과의 조우''': UFO를 목격한 사례를 두고, 발전된 외계인은 공산주의에 도달했을 것이므로 그들에게 협력을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인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참고.
  • '''노동자 국가에 대한 관점''':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을 "변형된 노동자 국가"로 보는 주류 트로츠키주의적 관점을 따랐다. 그러나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등도 "노동자 국가"로 분류하며 독자적인 관점을 보였다.[2] 이는 1969년 저서 "혁명 국가"에 집대성되었다.[13]
  • '''과학적 진보에 대한 관심''': 과학적 진보가 공익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소련의 우주 탐사를 지지하고, 돌고래와 인간의 소통에 기대를 품는 등 과학 기술 발전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4. 1. 핵전쟁 낙관론

냉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핵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긴 포사다스는 자본주의 진영이 핵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공산진영이 선제적으로 핵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양국을 파괴한 뒤에는 세계 혁명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10] 그는 핵전쟁 문제에 대해 "전쟁–혁명"이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를 해결"할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가 잿더미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1964년 "제7차 세계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 우리는 원자력 전쟁 전, 원자력 전쟁 중, 그리고 원자력 전쟁 직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단계에 대비하고 있다. 원자력 전쟁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왜냐하면 원자력 전쟁은 동시적이기 때문이다. 동시성은 같은 날, 같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시간이나 날이 아닌 기간으로 측정해야 한다. 오직 노동 계급만이 스스로를 유지하며 즉시 단결하고 중앙 집권화해야 할 것이다.[2]

이 입장은 1966년 국제 사무국 회의에서 더욱 구체화되었으며, 포사다스가 작성한 선언문이 채택되었다.[2]

> 파괴가 시작된 후, 대중은 모든 국가에서 - 짧은 시간 안에, 몇 시간 안에 - 나타날 것이다. 자본주의는 동굴에 숨어 가능한 모든 것을 파괴하려 시도하는 것 외에는 원자력 전쟁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다. 반대로, 대중은 나올 것이고, 나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며, 적을 물리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기구, 경찰, 군대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즉시 노동자의 권력을 조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9][2]

포사다스는 미국, 소련, 영국이 1963년에 서명한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쟁은 불가피하고 바람직하며, "노동자 국가"가 승리하고 사회를 재건하는 사회주의의 조건을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11][12]

4. 2. 외계 문명과의 조우

1968년 포사다스는 UFO 목격 사례를 두고,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를 방문할 만큼 발전된 외계인은 공산주의에 도달했을 것이므로 그들에게 협력을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외계 존재들이 다른 행성을 방문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기술을 개발했다면, 이는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극복했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또한, 지배욕과 같은 충동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포사다스는 외계 존재와의 협력에 적극적이었으며, "다른 행성의 존재들이 지구에 올 때 빈곤을 억제하는 데 협력하고 개입하도록 호소해야 한다"고 썼다.[15]

포사다스는 외계인에 대해 "공격적인 충동이 없고, 살기 위해 죽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단지 관찰하러 온다. 보고서, 이야기, 관찰, 진술 속에 존재하는 환상을 고려하더라도 그러한 존재들을 예측할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16]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1968년 소책자 ''Les Soucoupes Volantes, le processus de la matiere et de l'energie, la science et le socialisme'' (''비행접시, 물질과 에너지의 과정, 과학과 사회주의'')이다. 이 책에서 그는 외계 생명체의 존재와 UFO를 공산주의와 연결시켰다. 당시 UFO 목격은 다른 행성에서 생명체가 발전했음을 나타내며, 이는 공산주의 이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14]

4. 3. 노동자 국가에 대한 관점

포사다스는 1950년대 초 제4인터내셔널 국제 사무국 분파를 위해 제4인터내셔널 라틴 아메리카 국을 조직했다.[2] 그의 지도 아래 이 운동은 쿠바 철도 노동자, 볼리비아 주석 광부, 브라질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얻었다.

1953년 제4인터내셔널이 분열되었을 때, 포사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미셸 파블로와 제4인터내셔널 국제 사무국 편을 들었다. 그러나 1959년까지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ISFI 지도부에 혁명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며 논쟁을 벌였다. 또한 핵전쟁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 포사다스는 "전쟁–혁명"이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를 해결"할 것이며 사회주의 사회가 잿더미에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핵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취했다.

1966년 포사다스는 루이스 나구일과 함께 삼대륙 회의 지침에 따라 설립된 "파괴적 기구"인 농민 노동자 동맹을 지휘했다.[3]

포사다스와 ISFI 사이의 갈등은 더욱 악화되었다. 오늘날 포사다스로 알려진 호메로라는 인물은 ISFI에 보낸 편지에 필명으로 사용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4] 그 편지에서 포사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 전 세계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제4인터내셔널 ''라틴 아메리카 국''(BLA)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유럽인들이 수동적인 세력이 되었다는 등의 과감한 비판을 했다.[5] BLA와 ISFI 모두 화해를 위해 노력했지만, 1962년 4월 포사다스는 회의를 소집하고 BLA 지도자들이 이끄는 ISFI 집행위원회를 완전히 재편성하는 대담한 행동을 했다.[6] ISFI는 6월에 이 행동에 대응하여 BLA를 제4인터내셔널에서 제명했다.[2] 라틴 아메리카에 집중된 포사다스와 그의 국제 추종자들은 1962년 ISFI에서 분리되어 (제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와 재통합하여 제4인터내셔널 통합 사무국을 결성하기 전) 새로운 단체를 설립했다.[7]

포사다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립된 소련 공화국들을 일반적으로 국유화된 생산 수단을 근거로 "변형된 노동자 국가"라고 묘사하는 주류 트로츠키주의적 개념을 고수했다. 그러나 다른 트로츠키주의 운동과 달리, 포사다스는 더 나아가 (때로는 형용사를 명확히 하지 않고)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말리, 기니, 콩고 브라자빌 등"의 다른 정권들도 "노동자 국가"라고 선언했다.[2]

이러한 분류에 대한 정당성과 이러한 정권의 진보적인 역할에 대한 설명은 포사다스의 1969년 저서 "혁명 국가"에 집대성되었다.[13]

5. 쿠바 혁명과 포사다스주의

1953년 제4인터내셔널 분열 당시 미셸 파블로의 파벌에 섰던 포사다스와 그 추종자들은 핵전쟁 문제 등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1962년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포사다스주의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1] 쿠바의 혁명적 노동자당 트로츠키주의(POR(T))는 1962년 분열 당시 포사다스 편에 붙어 트로츠키주의 쿠바 지부를 장악했으며, 쿠바 혁명 성공 이후 관타나모 미군 기지의 강제 철수를 주장하며 더욱 과격한 목소리를 냈다.[1] 쿠바 공산당 측 관리들은 이들의 본부를 습격하여 트로츠키의 저서 "끊임없는 혁명"을 출판하던 인쇄기들을 파괴했으며,[1] 피델 카스트로는 이들을 "극좌파", "유해하다"고 비판하며 활동을 금지했다.[1] 체 게바라 처형 이후 이들은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다.[1]

1970년대에 포사다스는 편집증적으로 회원들을 추방하여 영향력이 감소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다.[3] 현재까지 활동하는 정당은 사실상 우루과이의 혁명 노동자당이 유일하다.[3]

5. 1. 쿠바 혁명 참여

미셸 파블로의 파벌에 섰던 포사다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1962년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포사다스주의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1] 1964년 열린 첫 정기 국제회의는 "제4인터내셔널 7차 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1]

쿠바 혁명으로 인해 쿠바의 포사다스 그룹인 혁명적 노동자당(트로츠키주의자) 또는 POR(T)는 중요성을 얻었으며, 이 혁명에서 그들은 작은 역할을 했다.[4] 포사다스 게릴라들은 1959년에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와 함께 싸웠다.[4] 1962년 포사다스주의자들이 제4 인터내셔널에서 분리되었을 때, 그들은 쿠바 지부를 장악했고, 1960년대 쿠바에는 다른 트로츠키주의 그룹이 없었다.[4]

1961년 POR(T)는 쿠바 정부가 관타나모에 있는 미국 군사 기지를 강제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국가 언론에 따르면, 포사다스주의자들은 관타나모 마을의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근처 군사 기지로 행진했다.[5] POR(T)는 그 주장을 부인했지만, 친카스트로였고 포사다스주의자들을 극좌로 비난한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이를 반복했다.[5] 당시 인민 사회당과 관련된 쿠바 관리들은 포사다스 그룹의 본부를 급습하여 트로츠키의 ''끊임없는 혁명''(1930)을 인쇄하던 중이던 인쇄기를 부쉈다.[5]

게바라는 이 사건에 대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6]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2급 관리의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판을 부쉈습니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혁명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혁명 정부가 소부르주아적이라고 주장하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는 또 다른 혁명을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단계에서 필요한 규율을 해치는 것이었습니다."[6]

쿠바의 포사다스 지부는 점점 더 과격해졌고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7] 카스트로는 1966년 1월에 열린 트리콘티넨탈 회의에서 그들을 "유해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7] 쿠바의 포사다스주의자들은 카스트로가 게바라를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운동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7] 반대로, 게바라가 볼리비아 당국에 의해 처형된 후, 포사다스는 1967년에 체 게바라가 어떻게 죽었는지 불분명하다고 주장했다.[7]

5. 2. 쿠바 정부와의 갈등

미셸 파블로의 파벌에 속했던 후안 포사다스는 핵전쟁 문제 등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1962년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포사다스주의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이 분열로 쿠바 혁명적 노동자당 트로츠키주의(POR(T))는 포사다스 편에 서서 쿠바 트로츠키주의 지부를 장악했다.[1]

POR(T)는 쿠바 혁명에서 작은 역할을 했지만, 혁명 성공 이후 관타나모 미군 기지의 강제 철수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 언론에 따르면, 이들은 관타나모 마을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미군 기지로 행진하려 했다.[2] 그러나 POR(T)는 이 주장을 부인했고, 미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이를 반복하며 포사다스주의자들을 극좌로 비난했다.[2]

쿠바 공산당 관리들은 POR(T) 본부를 습격하여 트로츠키의 저서 "끊임없는 혁명"을 출판하던 인쇄기를 파괴했다.[1] 체 게바라는 이 사건이 2급 관리의 실수였다고 해명하면서도, POR(T)가 혁명 정부를 소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압력을 가하고 또 다른 혁명을 요구하는 등 혁명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2]

피델 카스트로는 1966년 1월 트리콘티넨탈 회의에서 POR(T)를 "유해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활동을 금지했다.[1] 쿠바의 포사다스주의자들은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운동을 벌이다 사망했다.[1]

6. 쇠퇴와 현재

미셸 파블로의 파벌에 섰던 포사다스와 그 추종자들은 핵전쟁 문제 등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1962년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포사다스주의 제4인터내셔널로 불리는 새로운 그룹을 형성했다.[1] 1964년 열린 첫 정기 국제회의는 "제4인터내셔널 7차 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1]

쿠바의 혁명적 노동자당 트로츠키주의(POR(T))는 1962년 분열 당시 포사다스 편에 붙어 트로츠키주의 쿠바 지부를 장악했으며,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목소리를 키웠다.[1] POR(T)는 관타나모 미군 기지의 강제 철수를 주장하였고 갈수록 호전적이 되었다.[1] 쿠바 공산당 측 관리들이 이들의 본부를 습격하여 트로츠키의 저서 "영구혁명"을 출판하던 인쇄기들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카스트로 측도 이들을 "극좌파", "유해하다"고 비판하였고 활동이 금지되었다.[1] 체 게바라 처형 이후 이들은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였다.[1]

1970년대에 편집증적으로 회원들을 추방하던 포사다스로 인해 영향력이 감소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다.[1] 현재까지 활동하는 정당은 사실상 우루과이의 혁명 노동자당이 유일하다.[1] 포사다스주의 신문, 예를 들어 영국의 혁명 노동자당 (트로츠키주의자)가 발행한 ''Red Flag''는 소련 우주 비행사와 중국 로켓 발사를 칭찬하는 헤드라인과 지역 산업 분쟁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1]

포사다스는 또한 자신의 글을 "만세 포사다스!"라고 외치며 끝내는 습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존심이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 이는 실제로 포사다스가 문서를 "작성"하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1] 이 문서들은 일반적으로 소수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들과 함께하거나 더 큰 활동에서 행해진 연설의 기록이었다.[1] 초기에는 포사다스가 연설을 "''¡Viva la Revolución Mundial!''" 및 "''¡Viva la Cuarta Internacional!''" ("세계 혁명 만세! 제4 인터내셔널 만세!")로 끝낸 후, 다른 누군가가 전통적으로 "''¡Viva el camarada Posadas!''" ("포사다스 동지 만세!")라고 외쳤고, 이 모든 내용이 인쇄물에 제대로 보고되었다.[1]

7. 비판과 평가

영국의 혁명 노동자당이 발행한 ''Red Flag''와 같은 포사다스주의 신문들은 소련 우주 비행사와 중국 로켓 발사를 칭찬하는 헤드라인과 함께 지역 산업 분쟁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포사다스는 자신의 글을 "만세 포사다스!"라고 외치며 끝내는 습관에서 알 수 있듯이 자존심이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실제로 포사다스가 문서를 "작성"하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이 문서들은 일반적으로 소수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들과 함께하거나 더 큰 활동에서 행해진 연설의 기록이었다. 초기에는 포사다스가 연설을 "''¡Viva la Revolución Mundial!''" 및 "''¡Viva la Cuarta Internacional!''" ("세계 혁명 만세! 제4 인터내셔널 만세!")로 끝낸 후, 다른 누군가가 전통적으로 "''¡Viva el camarada Posadas!''" ("포사다스 동지 만세!")라고 외쳤고, 이 모든 내용이 인쇄물에 제대로 보고되었다.

제4 인터내셔널 포사다스의 급진적인 포사다스 이론과 자기중심적인 운영으로 인해 창설 직후 많은 반발이 있었다.[17] 아르헨티나의 활동가인 호안 베네반트는 이 단체를 포사다스가 "교황" 역할을 하는 교회에 비유했다. 브라질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여러 회원국이 탈퇴했다. 여러 회원국을 잃고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포사다스는 자신의 원칙을 계속 실천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은 그의 연구를 풍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는데, 테레사 헤이터의 자서전 ''부르주아의 헤이터''에서 그녀는 포사다스를 "트로츠키주의에서 벗어난 가장 미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포사다스에 관한 최근 연구로는 A. M. 기틀리츠의 저서 ''믿고 싶다: 포사디즘, UFO, 종말 공산주의''가 있다. 저자는 포사다스의 역사와 궁극적인 붕괴를 검토하고, 이 주제에 대한 현재의 관심 증가의 중요성을 분석한다. 기틀리츠는 앞선 학자들처럼 포사다스를 트로츠키주의의 "미친 하위 분야"로 접근하는 주제를 가지고, 20세기 후반의 이전 컬트적 성격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포사다스에 대한 현재의 생각을 탐구하며 이를 확장한다.

참조

[1] 뉴스 "J. Posadas, the Trotskyist Who Believed in Intergalactic Communism: An Interview with A.M. Gittlitz." https://jacobinmag.c[...] Jacobin 2020-04-05
[2] 서적 International Trotskyism, 1929-1985 : a documented analysis of the movement https://www.worldcat[...] Duke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Who’s Who in Subversion in Latin America." https://www.jstor.or[...] Life Line Foundation 1967-07-19
[4] 문서 The Flying International. Pluto Press
[5] 문서 Gittlitz
[6] 문서 Gittlitz
[7] 문서 Gittlitz
[8] 서적 Revista marxista latinoamericana : órgano del SI de la IV Internacional. http://worldcat.org/[...] Luis Naguil 1976
[9] 학술지 Saor Dhoire http://dx.doi.org/10[...] 1973-11
[10] 서적 Hayter of the Bourgeoisie https://books.google[...] Sidgwick and Jackson
[11] 서적 Ted Grant: Permanent Revolutionary https://books.google[...] Wellred Publications
[12] 서적 The Latin American Revolution: Politics and Strategy from Apro-Marxism to Guevarism https://books.google[...] W. Morrow
[13] 서적 Revolutionary state and transition to socialism https://www.worldcat[...] Scientific, Cultural and Political Editions 2014
[14] 문서 J. Posadas: Flying Saucers ... and the Socialist Future of Mankind (26 June 1968). 2022-04-30
[15] 뉴스 Area 51 memes view aliens as comrades to be freed, not invaders https://theweek.com/[...] 2021-07-29
[16] 문서 Flying saucers, the process of matter and energy,
[17] 문서 Flying Saucers, the Process of Matter and Energy, Science, the Revolutionary and Working-Class Struggle, and the Socialist Future of Mankind. Plut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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