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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노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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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비노 다케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였다. 도호 상업학교 시절부터 강견과 강타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큐군, 니시닛폰 파이레츠, 니시테츠 라이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 수위 타자상과 수위 홈런상을 동시에 수상했으며, 니시테츠 라이온스 황금 시대에 기여했다. 1959년 은퇴 후에는 니시테츠 라이온스 코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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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노 다케시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선수명히비노 다케시
로마자 표기Takeshi Hibino
국적일본
출신지아이치현
생년월일1920년 4월 22일
사망일1975년 9월 16일 (향년 55세)
신장173cm
체중71kg
투구
타석
수비 위치포수
프로 입단 연도1939년
첫 출장1939년
마지막 경기1959년
니시닛폰 파이레츠 시대의 히비노 다케시
니시닛폰 파이레츠 시대
선수 경력
코치 경력
코치니시테쓰 라이온스 (1960 ~ 1961)

2. 선수 시절

도호 상업학교 시절부터 강한 어깨와 타격으로 주목받았으며,[1][4] 1939년 한큐군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니시닛폰 파이레츠를 거쳐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활약하며 주전 포수로서 팀의 황금 시대를 이끄는 데 기여했다.[1][4] ‘느림보의 히비노’(鈍足の日比野|돈소쿠노 히비노일본어)라는 별명도 있었지만,[1][4] 중요한 순간에는 과감한 주루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1][4] 특히 1954년 일본 시리즈1958년 일본 시리즈 등 큰 경기에서 중요한 활약을 펼쳤으며, 1958년 시리즈에서는 베테랑으로서 팀의 극적인 역전 우승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1] 1959년 현역에서 은퇴했다.[4][1]

한편, 난카이 호크스의 명포수 노무라 가쓰야가 타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속삭임 전술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히비노의 플레이를 참고했기 때문이라는 일화가 있다.[4][1] 또한 히비노는 NPB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18개 구단을 상대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2][3]

2. 1. 한큐군·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1939년 ~ 1942년, 1946년 ~ 1949년)

도호 상업학교 시절부터 강한 어깨와 강한 타격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1] 1939년 한큐군에 입단하여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느림보의 히비노’(鈍足の日比野|돈소쿠노 히비노일본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1] 한큐 시절에만 2루타 69개, 3루타 4개를 기록했으며,[1]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감한 주루 플레이를 선보였다.[1] 1941년 5월 20일에 발생한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무효 경기(한신전) 역시 히비노가 2루 도루를 시도할 때 발생한 유격수의 실책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이었다.[1] 포수다운 단단한 신체와 강한 팔 힘을 지녔으며,[1] 1939년, 1941년, 1946년에는 팀 내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1] 1947년에는 한신 고시엔 구장에 럭키 존이 설치된 해에 최초로 럭키 존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1]

2. 2. 니시닛폰 파이레츠 시절 (1950년)

1950년 신생 구단인 니시닛폰 파이레츠가 창단되자, 한큐군에서 선수들을 모으던 우타카 이사오를 따라 히비노도 니시닛폰 파이레츠로 이적하였다.[1][4]

2. 3. 니시테쓰 라이온스 시절 (1951년 ~ 1959년)

1951년, 전년도에 창단하여 소속되었던 니시닛폰 파이레츠가 니시테쓰 클리퍼스와 합병하여 니시테쓰 라이온스가 될 때, '리그 선수 보유권' 문제를 이유로 한때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히비노 영입을 시도했다.[1] 하지만 우타카 이사오의 노력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이적하게 되었다.[1][4] 니시테쓰에서도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팀의 황금 시대 구축에 기여했다.[1][4]

주니치 드래곤스와 맞붙은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정규 시즌 112경기에 출전하여 홈런 3개에 그쳤지만, 시리즈 7경기 동안 3개의 홈런을 몰아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는 시리즈에서 양 팀을 합쳐 나온 홈런 5개 중 3개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며, 이 활약으로 시리즈 수위 타자상과 수위 홈런상을 동시에 수상했다.[4]

그 후, 와다 히로미가 주전 포수로 성장하면서 히비노의 출전 기회는 점차 줄어들었다.[4] 주로 승리가 유력한 경기 후반에 투입되어 경기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아 '구원 포수'로 불리기도 했다.[1]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팀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3연패를 당한 뒤 열린 4차전 도중, 와다 히로미를 대신해 포수 마스크를 썼고 이후 시리즈 남은 경기의 대부분을 책임졌다.[4][1] 히비노가 포수를 맡은 후 에이스 이나오 가즈히사의 투구가 눈에 띄게 안정감을 찾았고, 이는 팀이 3연패 뒤 4연승이라는 극적인 역전 우승을 거두는 중요한 발판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4][1]

195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4][1]

3. 은퇴 이후

1959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1] 은퇴 후에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코치를 2년 간 맡았으며, 1962년부터는 같은 팀의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1975년에 향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난카이 호크스의 포수였던 노무라 가쓰야가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속삭임 전술’은 히비노를 참고하여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4. 노무라 가쓰야와의 관계

난카이 호크스의 포수였던 노무라 가쓰야가 타자에게 말을 걸어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속삭임 전술을 사용하게 된 것은 히비노 다케시를 참고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5. 상세 정보

도호 상업학교 시절부터 강한 어깨와 강한 타격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4] 프로 입단 후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느림보의 히비노’(鈍足の日比野|돈소쿠노 히비노일본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4], 한큐 시절 2루타 69개, 3루타 4개를 기록하고[4] 중요한 순간에는 과감한 주루를 선보였다.[4] 1941년 5월 20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발생한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무효 경기는 히비노가 2루에 있을 때의 낙구와 관련된 사건이었다.[4] 포수로서 단단한 신체와 강한 팔 힘을 가졌으며[4], 1939년, 1941년, 1946년에는 팀 내 최다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4] 1947년 한신 고시엔 구장에 러키 존이 설치되었을 때 첫 홈런을 기록한 선수이기도 하다.[4]

1950년 니시닛폰 파이레츠 창단 멤버로 이적하였고, 팀 합병 후에는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옮겨 팀의 황금 시대 구축에 기여했다.[4] 특히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정규 시즌 3홈런에 그쳤으나, 시리즈 7경기에서 3홈런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수위 타자상과 수위 홈런상을 수상했다.[4]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3연패 후 4차전부터 포수 마스크를 쓰고 이나오 가즈히사의 호투를 이끌어내며 팀의 4연승 역전 우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은퇴 후에는 니시테쓰에서 코치와 스카우트를 역임했으며, 1975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난카이 호크스의 명포수 노무라 가쓰야가 타자의 집중력을 흔드는 속삭임 전술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히비노를 참고했기 때문이라는 일화가 있다.[4]

5. 1. 선수 경력

도호 상업학교 시절부터 강한 어깨와 강한 타격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1]. 1939년 한큐군에 입단하여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느림보의 히비노’(鈍足の日比野일본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1], 한큐 시절에만 2루타 69개, 3루타 4개를 기록했고[1]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감한 주루 플레이를 선보였다[1]. 1941년 5월 20일에 발생한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무효 경기(한신전)는 히비노가 2루 도루를 시도할 때 발생한 유격수의 실책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이었다[1]. 포수다운 단단한 신체와 강한 팔 힘을 지녔으며[1], 1939년, 1941년, 1946년에는 팀 내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1]. 1947년 한신 고시엔 구장에 러키 존이 설치된 해에는 최초의 러키 존 홈런을 치기도 했다[1].

1950년 새로 창단된 니시닛폰 파이레츠로 이적했는데, 이는 우다카 이사오가 한큐 소속 선수들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951년, 니시닛폰 파이레츠가 합병될 당시 '리그 선수 보유권' 문제로 한때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히비노 영입을 시도했으나, 우다카의 노력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니시테쓰에서도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팀의 황금 시대를 이끄는 데 기여했다[1].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스를 상대로 정규 시즌 112경기에서 3홈런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7경기 동안 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이는 양 팀을 합쳐 나온 홈런 5개 중 3개에 해당) 수위 타자상과 수위 홈런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후 와다 히로미가 주전으로 부상하면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지만, 팀이 앞서고 있는 경기의 마무리 시점에는 마스크를 쓰고 나와 '구원 포수'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 경기 도중 와다 히로미를 대신해 출전하여 남은 시리즈 경기 대부분의 포수 마스크를 썼다. 히비노가 포수를 맡은 이후 이나오 가즈히사의 투구가 극적으로 좋아졌다는 평가가 있으며, 이는 팀이 3연패 뒤 4연승으로 역전 우승을 차지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59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2년간 니시테쓰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며, 1962년부터는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1975년에 향년 55세로 사망했다.

참고로, 히비노는 NPB에 소속되었던 총 21개 구단 중 18개 구단을 상대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2]. 이는 이와모토 요시유키가 기록한 20개 구단에 이어 NPB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3]. 또한, 난카이 호크스의 명포수 노무라 가쓰야가 타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속삭임 전술을 사용하게 된 것은 히비노의 플레이를 참고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5. 2. 지도자 경력

1959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1960년부터 1961년까지 2년 동안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코치를 지냈다. 1962년부터는 스카우트로 활동했다. 1975년에 사망했다.

5. 3.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일본 시리즈 수위 타자상 : 1회 (1954년)
  • 일본 시리즈 수위 홈런상 : 1회 (1954년)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스를 상대로 정규 시즌 112경기 3홈런에 그쳤으나, 시리즈 7경기에서 3홈런(양팀 합계 5홈런)을 기록하며 위 상들을 수상했다.[4]

5. 4. 개인 기록

도호 상업학교 시절부터 강한 어깨와 강한 타격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4][1] 1939년 한큐군에 입단하여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느림보의 히비노’(鈍足の日比野|돈소쿠노 히비노일본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4][1] 한큐 시절에만 2루타 69개, 3루타 4개를 기록했고,[4][1]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감한 주루 플레이를 선보였다.[4][1] 1941년 5월 20일에 발생한 프로 야구 최초의 무효 경기(한신전)는 히비노가 2루에 있을 때의 낙구 또는 2루 도루 시 유격수 실책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이었다.[4][1] 포수다운 단단한 신체와 강한 팔 힘을 지녔으며,[4][1] 1939년, 1941년, 1946년에는 팀 내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4][1] 1947년에는 한신 고시엔 구장에 러키 존이 설치된 해에 최초의 러키 존 홈런을 치기도 했다.[4][1]

1950년 새로 창단된 니시닛폰 파이레츠로 우다카 이사오가 한큐에서 선수들을 데려가면서 히비노도 함께 이적했다.[1] 이듬해인 1951년, 니시닛폰 파이레츠가 합병될 당시 ‘리그 선수 보유권’ 문제로 한때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영입하려 했으나, 우다카의 노력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이적했다.[4][1] 니시테쓰에서도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팀의 황금 시대에 기여했다.[4][1]

주니치 드래곤스와 맞붙은 195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정규 시즌 112경기에서 홈런 3개에 그쳤지만, 시리즈 7경기에서 3개의 홈런을 터뜨리는(양 팀 합계 홈런 5개) 활약을 펼쳐 수위 타자상과 수위 홈런상을 수상했다.[4][1] 그 후 와다 히로미의 활약 또는 부상으로[4][1]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으나, 승리하는 경기의 마무리에는 마스크를 쓰며 ‘구원 포수’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1]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 도중부터 와다를 대신해 출전하여 남은 경기 대부분을 책임졌다. 이때부터 이나오 가즈히사의 투구가 극적으로 좋아지면서, 팀이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대역전극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4][1]

1959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4][1] 은퇴 후에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2년간 니시테쓰에서 코치를 지냈고, 1962년부터는 스카우트를 맡았다.[4][1] 1975년에 향년 55세로 사망했다.[4][1]

난카이 호크스의 명포수 노무라 가쓰야가 타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속삭임 전술’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히비노를 참고한 것이었다는 일화가 있다.[4][1]

또한, 히비노는 일본 야구 기구(NPB)에 가입했던 총 21개 구단 중 공식전에서 18개 구단을 상대로 경기에 출전했으며,[2] 이는 이와모토 요시유키의 20개 구단에 이어 NPB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3]

기록내용비고
통산 1000경기 출장1953년 4월 2일역대 14번째
올스타전 출장2회1955년, 1956년


5. 5. 연도별 타격 성적


도소

속경









2

3











자희







4












O
P
S
1939년한큐75272242234960364265--3225--034--.202.277.264.5421940년42117995182002070--1215--05--.182.289.202.4911941년82328287216371381290--5--34--116--.220.304.282.5871942년8929226111446015314103--27--118--.169.249.203.4521946년7825022326609248527015--22--013--.269.335.381.7161947년104340322237514129727006--10--211--.233.260.301.5621948년11642238529101140111848222--33--119--.262.322.306.6291949년12745941934107110914560126--32--214--.255.311.346.6571950년니시닛폰107390348401001321014747023--39--0188.287.359.422.7821951년니시테쓰9435630731831206113391110--36--3269.270.353.368.7211952년782892542069708100401112--22--1184.272.332.394.7261953년863122721654100476320115--25--0366.199.266.279.5451954년1123603171373110393362213027--32711.230.297.293.5901955년113321280216512018029321032612265.232.302.286.5881956년12428525318596016827341221800308.233.284.269.5531957년591029432220024130130500134.234.273.255.5281958년3146412500055002120091.122.163.122.2851959년1315150100010000000030.067.067.067.133통산 : 18년1530495644193361048142656137050619191111039811633656.237.303.310.613


5. 6. 등번호

참조

[1] 서적 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 [永久保存版] 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 1936-198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1
[2] 문서 日比野の没後に創設された東北楽天ゴールデンイーグルスを除けば、対戦歴がないのは共に自身が在籍した西日本と西鉄の2球団。
[3] 문서 指導者時代も含むと、藤本定義と藤村富美男の19球団が岩本に次いでNPB歴代2位タイ(彼らの没後に創設の東北楽天を除けば、藤本は西日本との、藤村は高橋ユニオンズとの対戦歴がない)。
[4] 서적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영구보존판) - 새로 태어나는 용자의 기억 1936-1988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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