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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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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찬종은 1939년 경상남도 김해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와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제9대, 제10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민주공화당, 신한민주당, 신정치개혁당, 신민당, 신한국당 등 여러 정당에서 활동했으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신정치개혁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정계 은퇴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종편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정치적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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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9년 8월 27일에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위기극복 대토론회에 참석한 박찬종 전 국회의원
2019년 8월 27일에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위기극복 대토론회에 참석한 박찬종 전 국회의원
이름박찬종
출생일1939년 4월 19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김해군 주촌면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서초구 방배동
대한민국 부산(前)
대한민국 경상남도 김해(前)
국적대한민국
학력서울대 대학원
종교천주교(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배우자정기호
자녀1남 2녀
서명Park Chan-jong signature.svg
경력
주요 경력한국공인회계사협회 회장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장
신한민주당 당무위원 겸 상임위원
신한민주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
신한민주당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장
통일민주당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
통일민주당 정책위원회 위원장
신정치개혁당 총재 겸 최고위원
신민당 최고위원 겸 원내총무
신한국당 당무위원 겸 상임고문
신한국당 전임고문 겸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국민신당 전임고문 겸 최고위원
국민신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당무위원
민주국민당 당무위원 겸 최고위원
홍익대학교 초빙교수
군 복무
군 복무해군 대위 전역
정당
소속 정당자유통일당
의정 활동
지역구부산 서구·동구(9·10)
부산 중구·동구·영도구(12)
서울 서초구 갑(13·14)
의원 선수5
의원 대수9·10·12·13·14
웹사이트
웹사이트박찬종

2. 생애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고등고시 사법과, 행정과, 공인회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는 이력을 세웠다.[1] 변호사로 활동하다 197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0대, 12대, 13대, 14대까지 총 5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공화당 시절에는 당내 소신 발언으로 '여당 안의 야당 의원'으로 불렸으며, 10·26 사건 이후 당내 정풍운동을 주도하다 제명되었다. 1980년대에는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민주화추진협의회 인권옹호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에서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민주당 참여와 탈당, 신정치개혁당 창당 등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보였다. 신정치개혁당 후보로 1992년 대선에 출마하여 6.4%의 득표율로 4위를 기록했다.[3] '돈 안 드는 선거'를 내세워 "깨끗한 정치인"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1995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높은 지지율을 보였으나 DJP연합조순 후보 지지로 인해 2위로 낙선했다. 이후 신한국당에 입당했으나 1997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회창 측과의 갈등 끝에 탈당하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를 지지했다. 1996년 15대 총선 유세 중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4]

2000년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16대, 17대 총선에서 연이어 낙선한 뒤 2004년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미네르바 사건 등에서 변론을 맡아 주목받았다.[5] 이후 방송 패널 등으로 활동하며 정치 평론을 이어갔고, 2021년에는 전광훈 목사 등이 주도한 자유통일당(구 국민혁명당)에 합류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1939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태어났다. 1958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고등고시 사법과, 고등고시 행정과, 공인회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2. 2. 정치 입문 및 유신정권 활동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자, 이듬해인 1973년에 실시된 제9대 총선에 다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당시 중선거구제로 변경된 선거법에 따라 2위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하였다. 1976년에는 38세의 나이로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이공판제도 신설에 반대하고 유신정우회 의장의 아내 비서관 채용 문제를 비판하는 등 여당 내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어 '여당 안의 야당 의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제10대 총선에서도 당선되어 재선 의원이 되었다.

10·26 사건 이후에는 공화당 내에서 정풍운동을 주도하며, 권력을 이용해 부를 축적한 인사나 기회주의적인 정치인들의 자진 사퇴 또는 당직 제외를 강력히 요구했다. 동시에 국회개헌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헌법 개정 논의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당내 개혁 요구와 활동으로 인해 1980년 4월 7일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1983년에는 저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유신정권 시절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활동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밝혔다.

2. 3. 민주화 운동과 인권 변호사 활동

민주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부터 박찬종은 간이공판제도 신설에 반대하고 유신정우회 의장의 아내 비서관 채용을 비판하는 등 소신 발언을 하여 '여당 내 야당 의원'으로 불렸다. 10·26 사건 이후에는 공화당 내 정풍운동을 주도하며 권력으로 부를 축적한 인사나 기회주의적 정치인의 자진 사퇴 또는 당직 사퇴를 요구하다가 1980년 4월 7일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1980년 8월 전두환이 집권하고 10월 제5공화국 헌법이 통과되면서 국회가 해산되자, 11월 정치규제 대상 811명에 포함되었으나 곧 해금되었다. 1983년에는 저서 《부끄러운 이야기》를 통해 유신정권에 참여했던 과거를 반성하였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이 주도한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신한민주당의 인권옹호위원장을 맡아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함운경, 김민석 등 점거를 주도한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아 '운동권 학생들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알렸다. 같은 해 9월에는 '고려대학교 앞 시위 사건'과 관련하여 전두환 정권에 의해 기소되어 3년 6개월간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또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에는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사인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김영삼통일민주당김대중평화민주당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

2. 4. 1987년 이후 정치 활동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통일민주당김영삼계와 김대중계로 나뉘어 각각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으로 분열하자, 박찬종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이후 제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서초구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90년 6월, 김영삼3당 합당에 반대하는 통일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창당한 민주당에 참여했으나, 이기택 총재 중심의 당 운영에 반발하여 1991년 9월 다시 탈당했다.

1992년 2월, 박찬종은 정치 신인들과 정치개혁협의회를 구성한 뒤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3월 제14대 총선에서 서울 서초구 갑 후보로 다시 당선되었고, 12월 제14대 대선에는 신정치개혁당 후보로 출마하여 4위를 기록했다. 이 대선 과정에서 소위 '돈 안 드는 선거운동'을 펼쳐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으며, 이를 계기로 "무균질우유" 광고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대선 이후 정주영이 탈당한 통일국민당의 잔류 세력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했고, 1995년에는 김종필자유민주연합, 김동길신민당과 합당했다.

1995년, 박찬종은 신민당을 탈당하고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 초반 높은 지지율로 선두를 달렸으나, 김대중김종필의 이른바 DJP연합조순 후보를 지지하면서 결국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2번 공천을 받았으나, 이를 자진해서 반납하고 당선 가능성이 낮은 21번을 받아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선거 기간에는 박창달과 함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유력 주자로 꼽혔으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당내 조직 기반이 약해 통과가 불투명해지자 폐쇄적인 경선 규칙과 이회창 후보 측의 금권 선거 의혹 등을 비판하며 경선 마지막 날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후 이회창 후보에게 불공정 경선, 이인제 후보 포용,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조건으로 지지 의사를 밝혔으나, 이회창 후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탈당 후에는 역시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 소속으로 출마한 이인제 후보를 지원했다.

1998년 6월 제2회 지방 선거에서는 국민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와의 단일화를 위해 불출마했다. 같은 해 7월 서초구 보궐 선거에 출마했으나 8.7%의 득표율로 낙선한 뒤, 돌연 일본 유학을 떠나며 정계를 잠시 떠났다.

2000년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복귀,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부산광역시 서구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2007년, 14대 총선 당시 선거비용 관련 채무 문제로 서울구치소에 하루 동안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 사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고 밝히며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석궁 테러 사건의 수학자 김명호, BBK 사건의 김경준,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박대성), 박연차 등의 변론을 맡았으며, 특히 미네르바 사건에서 무죄 평결을 이끌어내 주목받았다.[5]

정계 은퇴 후 박찬종은 종합편성채널이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판적인 논평을 했다. 2019년에는 유튜브 채널 '박찬종TV'를 개설하여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는 등 양비론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2020년 문재인 정부 후반기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단체 등과 연대하며 극우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1년에는 전광훈 등이 주도한 국민혁명당(후에 자유통일당으로 당명 변경)에 합류했다.

2. 5. 1995년 서울시장 선거와 이후 행보

1995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선거 초반에는 2위를 달리던 조순 후보에게 20% 이상 앞서갔으나, 김대중, 김종필의 이른바 DJP연합이 조순 후보를 지지하면서 결국 2위로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지역구를 떠나 전국구 2번을 배정받았으나 이를 자진해서 반납하고 당선권 밖인 21번을 받아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다. 선거 기간 동안 박창달과 함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당내 조직 기반이 약해 경선 통과가 불투명해지자 경선 규칙의 폐쇄성과 이회창 후보 측의 금전 선거 의혹을 비판하며 경선 마지막 날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이회창 후보에게 불공정 경선 사과 등을 조건으로 지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탈당 후, 마찬가지로 신한국당을 나온 이인제 후보가 창당한 국민신당에 합류하여 그를 지원했다.

1998년 6월 제2회 지방 선거에서는 국민신당 소속으로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고려했으나,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와의 단일화를 위해 불출마했다. 같은 해 7월 서울 서초구 보궐 선거에 출마했으나 8.7%의 득표율로 낙선한 뒤, 돌연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정계를 잠시 떠났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김윤환 (1932년), 이기택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부산광역시 중구·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부산광역시 서구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정계 은퇴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2007년에는 14대 총선 당시 선거 비용 관련 채무 문제로 서울구치소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 사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밝히며 변호사 활동에 다시 매진했다. 석궁 사건의 수학자 김명호, BBK 주가 조작 사건김경준, 미네르바 사건의 박대성, 박연차 사건의 박연차 등의 변론을 맡았다. 특히 미네르바 사건에서는 무죄 평결을 이끌어내며 주목받았다.[5]

이후 종합편성채널 등 방송에 출연하여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판적인 정치 평론을 이어갔다. 2019년에는 개인 유튜브 채널 '박찬종TV'를 개설하여 활동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당시 자유한국당 등을 비판하며 양비론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2020년 문재인 정부 후반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 속에서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단체 등과 뜻을 같이하며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전광훈 등이 주도한 국민혁명당(이후 자유통일당으로 당명 변경)에 합류했다.

2. 6. 정계 은퇴 이후

2004년 제17대 총선 때 부산 서구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정계 은퇴 후 2007년, 14대 총선 당시 선거비용 관련 빚 문제로 서울구치소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사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고 밝히며 변호사 활동을 다시 활발히 시작하였다. 이후 석궁 테러 사건의 수학자 김명호, BBK 사건의 김경준, 인터넷 논객 박대성(미네르바), 박연차 등 여러 인물의 변론을 맡았다. 특히 미네르바 사건에서는 무죄 평결을 이끌어내 주목받았다.[5]

박찬종은 종합편성채널이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2019년에는 개인 유튜브 채널 '박찬종TV'를 개설하여 활동하며, 초기에는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는 등 양비론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2020년 문재인 정부 후반기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단체 등과 유사한 극우적인 정치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국민혁명당(이후 자유통일당으로 당명 변경)에 합류하였다.

3. 논란

(내용 없음)

3. 1. 지역감정 조장 발언

1996년 3월,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이었던 박찬종은 통영 유세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을 하여 큰 비난을 받았다.[6][7]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을 봐줬다면 전라도 데모대들과 정의로운 학생, 젊은이들이 전두환노태우를 구속하라며 시위를 벌여 불행한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8] 그러나 당시 정치권에서는 박찬종의 이 발언을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상식 이하의 발언으로 비판했다.[9]

또한 1997년 대선 당시 선거 유세 중에는 "김대중 후보는 74세로 나이가 많아 대통령이 되면 위험하다"는 식의 발언으로 수위를 넘는 비방을 하기도 했다.[10]

4. 경력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 및 공법과에 합격했으며, 미국공인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을 역임했다.[1]

정계에 입문한 후 국회의원 5선을 지냈다. 초기에는 민주공화당 부산시 제3지구 당위원장을 맡았으나,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신한민주당에서 인권옹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통일민주당에서는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야권통합추진회 공동대표, 민주당(1990-1991)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2]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신정치개혁당을 창당하여 총재로서 직접 후보로 출마했으며, 득표율 6.4%로 4위를 기록했다.[3] 이후 신민당 원내총무를 지냈다.

1996년 2월에는 신한국당에 합류하여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제15대 총선 당시 통영시·고성군 선거구 유세에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법 처리하지 않으면 전라도의 시위대가 시위를 계속하여 국가 위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발언으로 지역 감정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4]

이후 국민신당 창당에 참여하여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2022년 12월부터는 국민의힘 책임당원 전국연대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변호사로서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소속 법무법인직책
법무법인 안민변호사
법무법인 한우리고문변호사
법무법인 다올고문변호사
법무법인 다올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이도변호사
법무법인 유담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산우고문변호사


5. 학력

wikitext

연도출신 학교 및 학위
1952년부산대신국민학교 졸업
1955년경남중학교 졸업
1958년경기고등학교 졸업
1962년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학사
1975년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6. 역대 선거 결과

(전국구 득표)전국구 21번없음승계 전 탈당1998년7·21 재보선15대국회의원서초구 갑국민신당4,600 (8.7%)3위낙선2000년총선16대국회의원부산 중구·동구민주국민당26,881 (31.71%)2위낙선2004년총선17대국회의원부산 서구무소속12,731 (18.76%)3위낙선


참조

[1] 웹사이트 會長(회장)에 朴燦鍾(박찬종)씨 선출 會計士會定總(회계사회정총),會則(회칙)개정않기로 https://newslibrary.[...] 1976-04-28
[2]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rokps.or.kr/[...] 2023-11-16
[3] 웹사이트 기록으로 보는 대통령선거의 역사 > 연표 및 주요사건 https://theme.archiv[...] 2023-11-16
[4] 웹사이트 박찬종씨'지역감정'발언 물의 https://newslibrary.[...] 1996-02-28
[5] 웹인용 왜 그는 박찬종 前의원… 石弓교수·김경준·미네르바 이어 박연차도 무료변론 http://www.chosun.co[...] 2009-04-25
[6] 뉴스 박찬종씨'지역감정'발언 물의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6-02-28
[7] 뉴스 朴燦鍾(박찬종)씨 데모대발언 5.18단체 사과 요구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6-02-29
[8] 뉴스 박찬종씨 데모대발언 해명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6-02-29
[9] 뉴스 정치인들 지역감정 조장 여전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6-03-09
[10] 뉴스 97 대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영남 득표전 http://imnews.imbc.c[...] mbc 199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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