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슈 페리(1794-1858)는 미국의 군인으로, 미영 전쟁(1812-1815)에 참전하고 브루클린 해군 공창 소장과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증기선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며 해군 강화에 기여했다. 1852년 동인도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어 일본 개항 임무를 맡아, 1853년과 1854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군함을 이끌고 방문하여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알코올 중독, 류마티스열, 통풍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으며, 일본과의 외교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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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샤크 (1821) 아프리카 전대 USS 풀턴 (1837) 뉴욕 해군 조선소 USS 미시시피 (1841) 모기 함대 USS 프레지던트 (1800)
참전 전투
리틀 벨트 사건 1812년 전쟁 USS 프레지던트 (1800) 대 HMS 벨비데라 (1809) 제2차 바르바리 전쟁 노예 무역 진압 리틀 베레비 전투 일본 개항 미멕 전쟁 프론테이라 전투 제1차 타바스코 전투 탐피코 원정 베라크루스 공성전 제1차 툭스판 전투 제2차 툭스판 전투 제3차 툭스판 전투 제2차 타바스코 전투
1833년에는 브루클린 해군 공창의 조선소장을 맡았으며, 1837년에는 미국 해군 최초의 증기선 중 하나인 제2 풀턴 호의 함장이 되었다. 1840년에는 함대사령관으로 승진했고, 1841년에는 브루클린 해군 공창의 사령관이 되었다. 페리는 증기선을 중심으로 한 해군력 강화를 추진하고 해군 사관 교육에도 힘써 '증기선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2. 1. 가문 및 초기 생애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는 1794년4월 10일로드아일랜드주 사우스킹스타운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명한 해군 가문인 페리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미국 해군의 대령이자 사략선 선장이었던 크리스토퍼 레이먼드 페리 (1761–1818)였고, 어머니는 사라 월리스 (옛 성 알렉산더, 1768–1830)였다. 그의 형제자매로는 형인 올리버 해저드 페리를 비롯하여 레이먼드 헨리 존스 페리, 사라 월리스 페리, 안나 마리 페리, 제임스 알렉산더 페리, 나다니엘 해저드 페리, 제인 투이디 페리(윌리엄 버틀러와 결혼)가 있었다.
어머니 사라는 아일랜드다운주 출신으로,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의 삼촌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부계 조부모는 외과의사 제임스 프리먼 페리와 머시 해저드였다. 머시 해저드는 플리머스 식민지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정치 지도자이자 매사추세츠주플리머스의 주지사를 지낸 토머스 프렌스의 후손이다. 또한 페리 가문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초기 정착민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들은 메이플라워 콤팩트에 서명한 윌리엄 브루스터 장로와 조지 소울의 후손이다. 윌리엄 브루스터는 필그림 식민지의 지도자이자 영적 지도자였다.
페리는 1809년, 14세 9개월의 어린 나이에 사관후보생으로 임명받아 형 올리버 해저드 페리를 따라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 1812년부터 시작된 미영 전쟁에는 두 형과 함께 참전하여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후 해군 내에서 경력을 쌓아 1833년에는 브루클린 해군 공창의 조선소장이 되었다. 1837년에는 미국 해군 최초의 증기선 중 하나인 제2 풀턴 호의 건조를 감독하고 진수 후 초대 함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해군 대령으로 승진했다. 1840년 6월에는 브루클린 해군 공창의 사령관이 되어 준장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증기선을 해군의 주력으로 삼으려는 강화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시에 해군 장교 교육에도 힘써 증기선 해군의 아버지(Father of the Steam Navy)라는 별칭을 얻었다.
2. 2. 해군 경력
1809년사관후보생으로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처음에는 형 올리버 해저드 페리가 지휘하는 리벤지 호에 배속되었다. 이후 프레지던트 호에 옮겨 존 로저스 제독의 보좌관으로 복무했다. ''프레지던트'' 호는 미영 전쟁 발발 직전 영국 왕립 해군 군함 리틀 벨트 호를 공격하는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미영 전쟁(1812-1815)이 발발하자 페리는 계속 ''프레지던트'' 호에 탑승하여 벨비데라 호와의 교전에 참여했다.[7] 이 전투에서 로저스 제독이 발사한 첫 포탄이 함선 내에서 폭발하여 페리를 포함한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8] 이후 스티븐 디케이터가 지휘하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호로 전출되었으나, 이 배가 코네티컷주뉴런던 항구에 갇히면서 전쟁 후반기에는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전쟁을 종식시킨 겐트 조약 체결 후, 페리는 지중해에서 여러 선박에서 복무하며 제2차 바르바리 전쟁 동안 윌리엄 베인브리지 제독 휘하에서 활동했다. 1819년부터 1820년까지는 라이베리아 해역을 순찰하는 USS 사이언에 탑승하여 아프리카 해역에서 복무했다. 이후 서인도 제도로 파견되어 해적과 노예 무역 진압 임무를 수행했다.
1821년부터 1825년까지는 12문의 대포를 장착한 스쿠너 샤크 호를 지휘하며 노예 무역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공동 순찰을 지원하기 위해 서아프리카 기지에 배치되었다.[9]1822년 3월 25일, 페리는 ''샤크'' 호를 타고 키웨스트로 항해하여 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플로리다 키스를 미국의 영토로 선언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스페인령 플로리다가 미국으로 이관된 후, 키웨스트 섬을 구매한 미국 사업가 존 W. 시몬턴이 해군 기지 설립을 로비한 결과였다. 페리는 키웨스트를 당시 해군 장관 스미스 톰슨을 기려 '톰슨 섬'으로, 항구를 해군 위원회 회장을 기려 '포트 로저스'로 명명했으나, 이 이름들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1833년부터 1837년까지 뉴욕 해군 기지(이후 브루클린 해군 기지)의 부관으로 근무하며 임기 말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페리는 해군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여 수병 훈련을 위한 도제 제도를 지지했으며,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교육 과정 설립에도 기여했다. 그는 해군 현대화, 특히 증기선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 대령 진급 후 해군의 두 번째 증기 프리깃함인 풀턴 호의 건조를 감독했으며, 완공 후 직접 지휘했다. 그는 미국의 첫 해군 공병대를 조직하고, 1839년부터 1841년까지 뉴저지주 샌디 훅에서 ''풀턴'' 함을 지휘하며 미국 최초의 해군 사격 학교를 운영하는 등 증기선 해군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증기선 해군의 아버지'''(Father of the Steam Navy)로 불렸다.[10]
1841년에는 준장 직함을 받고 해군부 장관에 의해 뉴욕 해군 기지(브루클린 해군 공창)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1] 당시 미국 해군에는 대령보다 높은 상설 계급이 없었기에 준장 직함은 상당한 의미를 지녔으며, 페리는 이 직함을 평생 유지했다. 브루클린 재직 중에는 A 구역의 비니거 힐에 거주했다.[12]1843년에는 웹스터-애슈버턴 조약에 따라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임무를 맡은 아프리카 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844년까지 활동했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페리는 데이비드 코너 제독이 지휘하는 홈 스쿼드론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미시시피 호의 함장을 맡았다. 그는 멕시코 도시 프론테라를 점령하고 타바스코에 대한 시위를 벌였으며, 제1차 타바스코 전투에서는 비야에르모사에서 패배하기도 했으나 1846년 11월 탐피코 점령 작전에 참여했다.
함선 수리를 위해 버지니아주 노퍽으로 잠시 귀환했던 페리는 1847년 초 베라크루스 상륙 작전이 벌어질 무렵 함대로 복귀했으며, 이때 코너 제독의 후임으로 홈 스쿼드론 사령관으로 승진했다.[51] 그의 함대는 해상에서 베라크루스 포위전을 지원했다.[13] 베라크루스 함락 후 윈필드 스콧 장군이 내륙으로 진격하는 동안, 페리는 남은 멕시코 항구 도시들을 공략했다. 그는 모스키토 함대를 소집하여 1847년 4월 툭스판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시를 점령했다. 같은 해 6월에는 1,173명의 상륙 부대를 이끌고 제2차 타바스코 전투를 감행하여 육상 공격으로 산 후안 바우티스타(오늘날의 비야에르모사)를 점령했다.[14]1847년, 페리는 멕시코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뉴욕 신시내티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매슈 C. 페리 제독, 미국 우표 (1953년 발행)
1847년, 페리는 제2차 타바스코 전투에서 산 후안 바우티스타(비야에르모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1852년3월 동인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페리는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로부터 일본을 개항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임무에는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하는 포함외교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었다.[76][15] 이는 증가하는 미국과 청나라 간의 교역, 일본 근해에서의 미국 포경선 활동, 아시아 지역에서의 잠재적 석탄 보급 기지를 둘러싼 서구 열강과의 경쟁 등 복합적인 배경 속에서 추진되었다.[77][15]
페리는 1853년7월 (가에이 6년) 군함 4척을 이끌고 에도만 입구의 우라가에 나타나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며 개항을 요구했다. 막부 측의 사정을 고려하여 협상 시한을 다음 해까지로 유예하는 데 동의했으나,[55]1854년2월 (가에이 7년)에는 약속했던 1년의 유예 기간을 깨고 군함 10척과 1,6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에도만에 나타나 개항을 강하게 압박했다.[55]
결국 1854년3월 31일, 페리는 요코하마에서 일본 막부와 가나가와 조약(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여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개항시켰다. 이후 나하로 이동하여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페리의 이러한 강압적인 개항 요구는 '흑선내항'으로 불리며, 포함외교를 통해 250년간 이어져 온 일본의 쇄국 정책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1. 배경
1852년3월 동인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페리는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로부터 일본을 개항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임무에는 필요하다면 포함외교나 무력 외교를 사용하는 것도 포함되었다.[76][15]
당시 미국은 청나라와의 교역량이 증가하고 있었고, 일본 근해에는 미국의 포경선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아시아의 잠재적 석탄 보급 기지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이 독점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작용했다.[77][15]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미국은 새로운 통상 파트너로서 일본에 주목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일본은 표류하여 상륙한 외국 선원들을 억류하거나 처형하기도 했는데,[16][17][18] 이들의 안전한 송환 문제 역시 미국 측의 주요 요구 사항 중 하나였다.[15]
당시 미국 사회에 퍼져 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사상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서구 문명의 혜택을 아시아 국가에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77][19]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를 문명적으로 뒤처진 지역으로 간주하며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강요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났다.[19]
한편,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페리 함대의 내항 가능성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었지만, 약 250년간 유지해 온 쇄국 정책을 변경하는 데 소극적이었다.[77][19] 일본 내부에서는 이러한 외부 압력과 국가 주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두고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19]
3. 2. 제1차 일본 원정 (1853년)
1852년3월, 페리는 동인도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로부터 일본을 개항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필요하다면 포함외교를 동원해서라도 미국의 통상 요구를 관철하라는 지시였다.[76][15] 이는 증가하는 미국과 청나라 간의 교역량, 일본 근해에서 활동하는 미국 포경선의 안전 문제, 그리고 아시아 지역 잠재적 석탄 보급항을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믿고 이를 아시아 국가들에 전파해야 한다는 소위 '명백한 운명'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77][19] 일본 막부는 네덜란드를 통해 페리 함대의 내항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250년간 유지해 온 쇄국정책을 쉽게 바꿀 생각은 없었다.[77][19]
1852년11월 24일, 페리는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버지니아주노퍽을 출발했다. 그의 함대는 증기 프리깃함 USS 미시시피를 포함한 4척의 군함으로 구성되었으며[20], 마데이라, 세인트헬레나, 케이프타운, 모리셔스, 실론, 싱가포르, 마카오, 홍콩 등 여러 항구를 거쳤다. 홍콩에서는 중국학자 새뮤얼 웰스 윌리엄스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 친서를 중국어로 번역했고, 상하이에서는 네덜란드계 미국 외교관 안톤 L. C. 포트만을 통해 네덜란드어 번역본도 준비했다. 또한 상하이에서 USS 서스케하나 및 USS 플리머스와 합류했다.
페리는 기함을 USS 서스케하나로 옮긴 뒤, 1853년5월 17일부터 5월 26일까지 류큐 왕국(현재의 오키나와현)의 나하에 머물렀다. 그는 사쓰마 번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슈리성에서 류큐 국왕 쇼 타이를 만나 통상 관계 수립을 압박했으며, 류큐 왕국이 미국과의 무역에 개방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6월 중순에는 오가사와라 제도로 이동하여 현지 주민들을 만나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20]
1853년7월 8일, 페리 함대는 마침내 일본 에도만(현재의 도쿄만) 입구에 있는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그의 행동은 일본이 이전에 서양 배들과 접촉한 것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일본의 계층적 문화에 대한 그의 지식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가 도착하자 페리는 그의 배들에게 일본 함대 옆을 지나 수도 에도로 향하고, 대포를 우라가 마을을 향하도록 지시했다.[21] 페리는 외국인에게 개방된 유일한 일본 항구인 나가사키로 가거나 떠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21]
페리는 일본에게 백기를 제시하고 그들이 싸우기로 선택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들을 위협하려 했다.[22][23] 그는 또한 자신의 73문의 대포에서 공포탄을 발사했는데, 이는 미국 독립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리의 배는 매 쉘마다 엄청난 폭발적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 대포인 새로운 페이샹포(Paixhans shell guns)를 장착하고 있었다.[24][25] 그는 또한 지역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배 보트들에게 해안선과 주변 해역에 대한 측량 작업을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페리 제독(가운데)과 다른 고위 미국 해군 장교들의 모습을 담은 일본 목판화
한편,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병으로 무력해졌고, 이로 인해 국가의 수도에 대한 전례 없는 위협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정부의 우유부단함이 나타났다. 7월 11일, 로주 아베 마사히로는 시간을 벌었고, 미국인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것만으로는 일본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우라가에 전달되었고, 페리는 1853년7월 14일에 상륙할 수 있었던 구리하마 해변으로 그의 함대를 약간 남서쪽으로 이동하도록 요청받았다.[26] 참석한 대표들에게 편지를 전달한 후, 페리는 홍콩으로 떠났고, 일본의 답변을 위해 다음 해에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27]
3. 3. 제2차 일본 원정 (1854년)
페리의 1854년 일본 재방문을 위한 함대
1854년 가나가와에서의 페리 일행과 일본 측 대표단
1854년 가나가와 조약 체결을 기념하여 페리에게 수여된 메달
페리가 류큐 왕국에서 가져온 고쿠코지 종의 복제품. 원본은 1987년 오키나와에 반환되었다.
일본으로 재방문하기 전, 페리는 함대를 이끌고 타이완(당시 명칭 포르모사)의 지룽 앞바다에 열흘간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석탄 매장량을 조사하고, 타이완이 미국의 아시아 무역 및 군사 활동에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점령을 제안했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54년2월 13일, 페리는 이전 방문에서 에도 막부와 합의했던 1년의 유예 기간 약속을 어기고 반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기함 서스케하나 호를 포함한 군함 10척과 1,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재의 요코하마시가나자와구 앞바다에 나타나 입항을 강요했다. 이는 일본 측에 공포심을 심어주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미국의 의도적인 무력 시위였다.[28] 페리 함대에는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함께 복무했던 프랭클린 뷰캐넌(서스케하나 호 선장), 조엘 애벗(마케도니안 호 선장), 헨리 A. 아담스(참모장), 제이콥 자일린(해병대 지휘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초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3월 8일 페리는 막부로부터 상륙 허가를 받아 현재의 요코하마 인근인 가나가와에 상륙했다. 3월 31일, 미국과 일본 막부 사이에 가나가와 조약(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다. 페리는 미국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일본 측에서는 하야시 아키라(林韑, 당시 직함은 다이가쿠노카미)가 대표로 서명했다. 조약 체결 후 축하 행사에서는 일본 측의 가부키 공연과 미국 측의 군악대 연주 및 민스트럴 쇼가 열렸다.[28] 페리는 조약 상대방인 하야시 아키라를 천황의 대표로 오인했으며,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쇼군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조약을 맺었다.[29]
조약 체결 후 페리는 개항하기로 합의된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방문했다. 이후 페리 함대는 류큐 왕국의 나하로 이동하여 7월 11일에는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했다.
3. 4. 귀국 및 평가
미국으로 돌아온 페리는 미국 의회로부터 일본 원정의 공로를 인정받아 2만달러의 포상금을 받았다.[31] 그는 이 돈의 일부를 사용하여 탐험 보고서인 ''미국 함대의 중국 및 일본 해역 원정기'' (Narrative of the Expedition of an American Squadron to the China Seas and Japan) 세 권을 준비하고 출판했다. 극동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았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였다.[31]
말년에는 알코올 의존증, 통풍, 류마티즘 등으로 고생했으며, 공식 기록은 없으나 가발을 착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1858년3월 4일뉴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63세였다. 그의 묘소는 출생지인 로드아일랜드주뉴포트의 아일랜드 묘지(Island Cemetery)에 딸 안나와 함께 안치되어 있다.
페리의 일본 원정은 포함외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원정 계획 단계에서부터 일본인에게 "공포에 호소하는 편이, 우호에 호소하는 것보다 많은 이점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며[60], 1854년 일본을 다시 찾았을 때는 군함 10척과 1,6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무력을 과시했다.[28]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은 250년간 지속된 일본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리고 가나가와 조약 체결을 이끌어냈지만, 그 방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페리의 개항 요구는 결과적으로 일본이 서구 열강과 관계를 맺고 일본의 근대화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점이 되었다. 페리 자신은 일본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원정기에서 일본 수공업자들의 기술력을 칭찬하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다면 빠르게 발전하여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 "일본의 수공업자들은 세계의 어떤 수공업자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숙련되어 있다. 만약, 타 국민과의 교류로부터 일본 국민을 고립시키고 있는 쇄국 정책이 완화된다면, 타국의 물질적 진보의 성과를 배우는 그들의 호기심, 그것(과학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민첩함에 의해, 그들(의 공업력)은 곧 가장 혜택받는 나라들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인이 문명 세계의 기술을 습득하면, 강력한 경쟁자로서, 미래의 기계 공업의 경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 매슈 C. 페리, 1856년, 페리 원정기에서
기술 습득과 모방: "그들(일본인)은 외국인에 의해 도입된 개량을 관찰하는 것이 매우 빠르고, 그것을 즉시 습득하여 매우 솜씨 있고 정확하게 모방한다. (중략) 목재 및 대나무 가공에 있어서 그들을 능가하는 국민은 없다. 그들은 또한 세계를 능가하는 하나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목재 제품의 옻칠 기술이다. 다른 여러 국민들은 수년에 걸쳐 이 기술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호기심과 이해력: 일본의 관리들은 늘 그렇듯이 그들의 호기심을 다소 자제했지만, 증기선의 구조와 장비 전체에 대해 깊은 이해와 관심을 보였다. 증기 기관이 작동하는 동안, 그들은 모든 부분을 자세히 조사했지만, 공포에 질린 표정이나 그 기계에 대해 전혀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기대되는 놀라움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중략) 또한 일본의 화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기계의 여러 부분을 그렸고, 그 구조와 운동의 원리를 알려고 했다. 함대의 두 번째 방문 당시, 존스 씨(함대에 동승한 천문학자)는 기관 전체를 정확한 균형으로 그린 완벽한 그림을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기계의 세부 부품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다른 나라에서 그려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훌륭한 그림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여성의 지위: "기혼 부인이 항상 혐오스러운 오하구로를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일본 부인의 용모는 나쁘지 않다. 젊은 여자는 좋은 모습을 하고, 어느 쪽이든 아름답고, 행동거지는 매우 활발하며, 자주적이다. 그것은 그녀들이 비교적 높은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품위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중략) 중국 부인과는 달리, 일본 부인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지식이 진보하고 있고, 여성 특유의 예능에도 능숙할 뿐만 아니라, 일본 고유의 문학에도 정통한 경우가 많다." "일본 사회에는 다른 동양 민족을 능가하는 일본인의 미덕을 분명히 보여주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여성이 배우자로 인정받고 단순한 노예로 대우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기독교 교리의 영향 아래 있는 여러 나라와 같은 높이는 아니지만, 일본의 어머니, 아내, 딸은 중국의 여성처럼 가축도 아니고 가내 노예도 아니며, 터키의 하렘에 있는 여성처럼 변덕스러운 음락을 위해 사들여진 것도 아니다."
미술: "원정대의 장교들이 가져온 그림이 있는 서적과 회화 중 몇 점이 현재 우리 앞에 있다. 일본인이 그것에 나타내는 미술의 성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주목할 만한 국민은 다른 점과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진보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눈에 띈다."
인내력: "안세이 대지진으로 발생한 재해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특징인 인내력이 드러났다. 그 특징은 그들의 강인한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낙담하지 않고, 불행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며, 남자답게 일에 매달리고, 의기소침하는 일도 거의 없는 듯했다."
5. 유산 및 기념
페리는 일본 역사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 학생의 90%가 그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42] 그의 우라가 내항(1853년) 당시 막부에 대한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교섭 태도는 함포 외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매슈 페리의 일본 목판화는 실제 외모와 상당히 유사하게, 체격이 크고 깨끗하게 면도했으며 턱이 불룩한 모습으로 묘사된다.[43] 일부 초상화는 그의 눈을 파랗게 그렸는데, 이는 당시 서양인에 대한 '파란 눈의 야만인'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일본 문화에서 파란 눈이 괴물이나 반역자 같은 위협적인 인물과 연관되었던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43] 일부 초상화에서는 그를 텐구로 묘사하기도 했으나, 동행한 선원들의 초상화는 평범하게 그려졌다.[43] 일본 내 기념
요코스카시구리하마: 1901년 7월 14일, 페리가 처음 상륙한 장소에 페리 기념비가 세워졌다.[47] 이 기념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보존되어 현재 페리 공원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48] 공원 안에는 1854년의 사건들을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인 "페리 기념관"도 있다. 구리하마 페리 축제도 열린다.
하코다테시: 페리는 가나가와 조약 체결 후 1854년 개항 예정이던 하코다테항을 사전 조사차 방문했다. 이를 기념하여 내항 150주년을 앞두고 "페리 제독 내항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와쿠니 해병대 항공 기지: 매튜 C. 페리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다.
미국 내 기념
뉴포트: 그의 출생지로, 트리니티 교회에 기념 명판이 있으며, 투로 공원에는 존 퀸시 애덤스 워드가 설계하고 1869년 페리의 딸이 헌정한 페리 동상이 있다. 그는 뉴포트의 아일랜드 묘지에 부모와 형제들 곁에 묻혔다. 해군 전쟁 대학 박물관과 뉴포트 역사 협회에는 그의 삶에 관한 전시물과 연구 자료가 있다.
뉴저지주 트렌턴: 페리 거리(Perry Street)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9]
페리의 깃발페리의 깃발(왼쪽 상단)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공식적으로 종결시킨 항복 의식에서 전시하기 위해 애나폴리스에서 도쿄로 운송되었다.
1853년 일본 내항 당시 기함 서스쿼해나호에 게양되었던 페리의 성조기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1945년9월 2일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 때, 더글러스 맥아더의 요청으로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도쿄로 공수되어 게양되었다. 맥아더는 페리의 혈족이기도 했다.[45] 현재 이 깃발 원본은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의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전시 중이다.[45] 박물관에서는 깃발 보존을 위해 보호용 뒷면을 덧대어, 별이 왼쪽 위에 오도록 전시하고 있지만, 실제 항복 조인식 사진을 보면 당시에는 별이 오른쪽 위에 오도록 제대로 게양되었음을 알 수 있다.[46] 기타 유산
외교 선물: 페리가 가나가와 조약 서명 후 미국으로 가져온 예술품, 도자기, 직물, 악기 등 일본의 유물들은 현재 스미소니언 협회에 소장되어 있다.[44]
문화적 영향: 1853년 페리 내항 이후 일본의 서구화 과정을 일본인의 시각으로 그린 뮤지컬 ''퍼시픽 오버처스''가 제작되었다.
전래된 기관차 모형: 가에이 연간 도래 증기차 '''증기 기관차 모형''': 4분의 1 크기의 모형 기관차를 원형 레일 위에서 실제로 달리게 하여 당시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단, 증기 기관차 모형 운전과 관련해서는 에피미 푸챠틴이 나가사키에서 선보인 것이 약간 빨랐다(1853년8월 24일). 이에 참석한 사가번의 혼지마 토우타에몬과 나카무라 키스케였다. 나카무라는 이시구로 칸지, 다나카 히사시게 (카라쿠리기에몬)와 협력하여 약 2년 후 1855년8월 1일에 모형 증기 기관차를 제작하여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에게 선보였다.) 페리가 헌상한 모형은 1872년 조사 결과 막부 해군에서 보관 중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밝혀졌다.[66]
-- '''모스 전신기''': 전선을 약 1km 길이로 연결하여 공개 시연을 보였으며, "YEDO, YOKOHAMA"(에도, 요코하마)라는 문구를 타전했다. 순식간에 먼 거리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에 당시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이 엠보싱 모스 전신기는 통신 종합 박물관을 거쳐 현재 우정 박물관에 중요 문화재로 소장되어 있다(전시품은 복제품).[67]
미 해군 함선: 미국 해군의 루이스 앤드 클라크급 건화물 탄약 운반선 9번함의 이름은 USNS 매슈 페리 (T-AKE-9)로 명명되었다. 또한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은 그의 형제인 올리버 해저드 페리 제독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종교 및 선교 활동과의 관계
페리의 일본 개항은 일본과의 통상, 캘리포니아와 중국(청나라) 간 태평양 항로의 기항지(특히 석탄 보급지) 확보, 난파된 포경선 선원의 처우 개선 등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으나, 기독교 선교 활동으로 이어지는 명백한 신의(Manifest Destiny)에 기반한 신념 역시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이 오리건 분쟁 해결, 텍사스 합병, 캘리포니아 편입 등을 통해 태평양 연안 국가로 성장한 것은 이러한 '명백한 신의'의 발현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로 진출하려는 미국의 팽창주의적 사고와 연결되었다.[57]
당시 서구 열강은 군사적, 정치적 우위를 바탕으로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경제적 지배력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독교의 해외 선교는 서구의 군사적, 정치적 활동을 문화적으로 뒷받침하며 서구의 가치관을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57]
페리 자신도 미국 성공회 신자로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으며, 항해 중에도 매일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일본 개항 임무를 선교의 문을 여는 영광스러운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페리의 첫 일본 원정 중이던 1853년7월 10일, 기함 서스케하나 호에서는 미국 성공회 소속 종군 목사 조지 존스(George Jones)의 주도로 일본 내항 후 첫 개신교 정식 예배가 거행되기도 했다.[57][53]
페리의 외교 활동은 이후 타운센드 해리스에게 계승되었다. 해리스는 1856년시모다에 총영사로 부임하여 1858년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이 조약 제8조에는 미국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거류지 내 교회 설립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 내 선교 활동의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이듬해인 1859년에는 미국 성공회의 존 리긴스와 채닝 윌리엄스, 장로교의 제임스 헵번, 네덜란드 개혁파의 새뮤얼 로빈스 브라운, 듀안 시몬스, 귀도 퓔베키 등 미국인 개신교선교사들이 일본에 입국하게 되었다.[57]
1941년 12월 7일(일본 시간 8일), 대일본제국 해군에 의한 진주만 공격 당시, 백악관에 31개 주의 성조기를 게양했다. 이는 페리처럼 다시 일본을 개항시키겠다는 의미였다[72]。
일본 항복 문서 조인 당시, 도쿄 만에 주둔한 미국 USS 미주리(BB-63)에서 항복 문서 조인에 임한 일본국 정부 대표 시게미츠 마모루는 '''두 개의 다른 성조기'''가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페리가 내항했을 때 서스케해나호에 게양했던 31개 주의 성조기가 현존했기에, 맥아더는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의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가져와 당시 미국의 주를 나타내는 48개 주의 성조기와 함께 게양하여, 제2의 일본 개항을 연출했다[72][73]。 맥아더는 92년 전,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에 내항했을 때 기함 포우하탄이 정박했던 지점과 위도·경도가 완전히 같은 장소에 미주리호를 정박시켰다.
페리가 일본에 강제 개항을 요구했을 당시의 성조기가 장식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흑선 내항 자체가 미국의 의향에 따라 일본(에도 막부)이 강제 개항되었다는 의미이며, 사실상 미국에 의한 일본 점령으로 간주하고, 두 번째 일본 점령을 달성했다는 설 등이 있다[72]。
일본 항복 조인을 마친 맥아더는 미국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오늘, 총성은 멈추고, 비참한 비극은 끝났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의 우리는 92년 전 동포, 페리 제독과 비슷한 모습으로 도쿄에 서 있다." - 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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