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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로쿠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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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이로쿠의 변은 1565년, 미요시 가문과 마쓰나가 히사히데, 미요시 산닌슈가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한 사건이다. 미요시 가문은 권력을 강화하려는 요시테루와 대립했고, 요시테루는 미요시 가문을 견제하며 막부 권위 회복을 시도했다. 1565년,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는 요시테루가 머물던 니조 어소를 공격하여 그를 살해했다. 이후, 요시테루의 동생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쇼군으로 옹립되면서 미요시 가문은 몰락하고 전국 시대의 혼란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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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로쿠의 변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전투 이름에이로쿠의 변
분쟁전국 시대
날짜에이로쿠 8년 5월 19일 (1565년6월 17일)
장소니조 어소
결과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사망, 미요시 3인방이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
교전 세력
공격 측[[파일:Japanese crest Sanngai Hisi ni itutu Kuginuki.svg|16px]] 미요시 군
방어 측[[파일:Ashikaga mon.svg|16px]] 막부
지휘관 및 지도자
미요시 군미요시 요시쓰구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소이
이와나리 토모미치
마쓰나가 히사미치
막부 군아시카가 요시테루
병력 규모
미요시 군약 10,000명
막부 군수백 명
피해 규모
미요시 군불명
막부 군전멸

2. 배경

에이로쿠의 변은 1565년(에이로쿠 8년) 5월 19일, 무로마치 막부의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교토니조 고쇼(二条御所)에서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 미요시 산닌슈(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마사야스, 이와나리 도모미치) 등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아와의 슈고다이였던 미요시 가문은 기나이로 진출하여 센고쿠 시대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특히 미요시 나가요시는 주가인 호소카와 가문과 막부를 압도하며 한때 기나이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여러 차례 교토에서 쫓겨나 오미 국 등지로 피신해야 했고,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나가요시와 요시테루는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며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했다. 1558년 화해 이후에는 형식적으로 쇼군 요시테루 아래 미요시 가문이 실권을 행사하는 협력 체제가 구축되었으나, 양측의 긴장 관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1561년부터 나가요시의 동생들과 적자가 연이어 사망하고 1564년 나가요시 본인마저 병사하면서 미요시 가문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나가요시의 양자 미요시 요시쓰구가 뒤를 이었지만, 가문의 실권은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 등 중신들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미요시 가문의 쇠퇴를 틈타 쇼군 요시테루는 막부 권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다이묘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막부 기구를 정비하며 쇼군의 권위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특히 1564년에는 막부의 요직인 정소 집사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는 등 쇼군 중심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5]

요시테루의 이러한 권력 강화 시도는 미요시 가문의 실권자들에게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 등은 쇼군 요시테루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과거 요시테루가 나가요시 암살을 시도했다는 의혹[6]이 있을 정도로 양측의 관계는 불안정했으며, 결국 이러한 갈등이 에이로쿠의 변으로 이어졌다. 사건의 구체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7][8][9]이 존재하나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 1. 미요시 가문의 대두와 권력 장악

아와의 슈고다이였던 미요시 가문은 주가인 호소카와 가문 내 간레이 직 계승 분쟁에 관여하면서 기나이로 진출하였다. 미요시 모토나가호소카와 하루모토를 간레이로 옹립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오히려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하루모토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결국 1532년(교로쿠 5년), 모토나가는 이이모리 산성 전투에서 이즈미국 사카이의 혼간지 세력(잇코잇키)에게 공격받아 겐폰지에서 자결하였다(교로쿠·덴분의 난).[14]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과 10세에 가독을 이었으나, 처음에는 호소카와 하루모토 아래에서 힘을 키우며 셋쓰 국 고시미즈 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후 착실하게 세력을 키운 나가요시는 하루모토 및 막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549년(덴분 18년), 나가요시는 하루모토의 측근 미요시 마사나가를 에구치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하루모토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데리고 오미 국 사카모토로 도주하여 장인인 롯카쿠 사다요리에게 의지했다.

1550년(덴분 19년), 나가요시가 이타미 성을 함락시키며 셋쓰를 평정하자, 교토 히가시야마에서 나카오 성을 쌓고 저항을 준비하던 전 쇼군 요시하루는 병사하였다. 쇼군 요시테루는 나카오 성에서 호소카와 하루모토, 롯카쿠 사다요리 군대와 함께 버텼으나, 나가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오미 국 가타타로 후퇴하였다.

1552년(덴분 21년), 사망한 롯카쿠 사다요리의 뒤를 이은 롯카쿠 요시카타의 중재로 요시테루와 나가요시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오미 국 구치키에 머물던 요시테루는 교토로 돌아왔고, 나가요시는 쇼군을 직접 모시는 오토모슈(御供衆)의 지위를 얻어 단순한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에서 쇼군의 직신으로 격상되었다.

미요시 나가요시 초상(견본 착색, 쇼레이 소킨 찬, 쥬코인 소장, 중요 문화재)


그러나 이듬해인 1553년(덴분 22년), 요시테루는 와카사 국에서 세력을 회복한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다시 손을 잡고 나가요시에게 등을 돌렸다. 나가요시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진격하자, 요시테루는 별다른 저항 없이 다시 오미 구치키로 도주하였다. 많은 막부 신료들이 나가요시 측에 가담하면서 막부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나가요시는 쇼군을 내세우지 않고 셋쓰 국 아쿠타가와야마 성을 거점으로 기나이 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권력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센고쿠 시대에 쇼군의 권위를 빌리지 않고 교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어려웠다. 요시테루가 오미로 쫓겨난 뒤에도 롯카쿠 가문이나 이세의 하타케야마 가문 등이 계속해서 교토를 위협했다. 결국 1558년(에이로쿠 원년), 나가요시는 오미 롯카쿠 요시카타의 공세를 계기로 쇼군 요시테루와 다시 화해하고, 막부의 고쇼반슈(御相伴衆)의 일원이 되었다. 이로써 미요시 가문은 기나이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형식적으로는 쇼군 요시테루의 신하로서 막부 정치 체제 안에 편입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2. 2. 미요시 가문의 쇠퇴와 쇼군의 권위 회복 시도

미요시 나가요시 정권 말기에 이르러, 정권을 지탱하던 유력한 일족들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미요시 가문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1561년(에이로쿠 4년) 동생 소고 가즈마사가 병사한 것을 시작으로, 1562년(에이로쿠 5년)에는 아와(阿波)의 군세를 이끌던 동생 미요시 요시카타가 하타케야마 다카마사와의 구메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듬해인 1563년(에이로쿠 6년)에는 나가요시의 적자 미요시 요시오키마저 2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심지어 1564년(에이로쿠 7년)에는 마지막까지 나가요시를 지탱하던 동생 아타고 후유야스마저 참소를 믿은 나가요시 자신에 의해 제거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결국 같은 해 7월, 나가요시 본인도 병으로 사망하면서 미요시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가요시의 뒤는 양자인 미요시 요시쓰구(나가요시의 조카, 소고 가즈마사의 아들)가 이었다.

한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미요시 가문의 세력 약화를 기회로 삼아 쇼군의 권위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전국의 센고쿠 다이묘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막부의 역직을 수여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특히 1564년(에이로쿠 7년)에는 미요시 가문의 힘을 이용하여[15] 오랫동안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만도코로 시쓰지(政所執事) 이세 사다타카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자신의 의종형제인 셋쓰 하루카도를 임명하여, 이전까지 쇼군의 의사가 잘 반영되지 않았던 만도코로를 장악하고 막부의 중요 결정에 대한 쇼군의 영향력을 크게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요시테루는 아시카가 요시미쓰 이후 가장 총명한 쇼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쇼군 중심의 친정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처럼 쇼군 요시테루의 권력이 강화되자, 미요시 가문 내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나가요시 사후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마사야스, 이와나리 도모미치)는 명목상의 당주인 미요시 요시쓰구를 내세우면서, 점차 강화되는 쇼군의 권력이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들은 쇼군 요시테루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2. 3. 요시테루와 나가요시의 관계, 그리고 암살의 배경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미요시 가문과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세 사다타카 토벌에서 보이듯, 요시테루는 자체 군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군사력을 동반한 기내 통치자로서의 권력 회복은 사실상 미요시 나가요시의 유화적 태도 덕분에 가능했다.

나가요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쇼군 가문을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요시테루는 여러 차례 나가요시 암살을 시도했는데,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약화시키는 행동이었다. 쇼군 요시테루를 배제하려는 생각은 미요시 산닌슈나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처음 제안한 것이 아니라, 아와 국 슈고 호소카와 모치타카가 처음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쇼군 중심의 정치를 고집했던 요시테루가 많은 막부 관료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음을 시사한다.

시코쿠 아와의 수호대였던 미요시 씨는 주가인 아와 수호 호소카와 가문의 후계 다툼에 개입하며 기내로 진출했다. 미요시 모토나가는 사카이 쿠보 아시카가 요시쓰나와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옹립하여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관령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대립했다. 다카쿠니 멸망 후 하루모토는 쇼군 측으로 돌아섰고, 1532년(교로쿠 5년) 잇코잇키의 공격을 받은 모토나가는 사카이의 겐폰지에서 자결했다(교로쿠·덴분의 난).

모토나가의 아들 나가요시는 10세에 가독을 이어받아 처음에는 호소카와 하루모토 아래 있었으나, 셋쓰 고시미즈 성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 결국 하루모토와 대립하게 된다. 덴분 18년(1549년), 나가요시가 하루모토의 측근 미요시 마사나가를 에구치 전투에서 토벌하자, 하루모토는 쇼군 요시테루와 전 쇼군 요시하루를 데리고 오미 사카모토로 도주하여 롯카쿠 사다요리에게 의지했다. 요시하루는 1550년 5월 아나오에서 사망했다. 나가요시가 이타미 성을 함락시키고 셋쓰를 평정한 후 상경하려 하자, 요시테루는 6월 나카오 성에 들어가 호소카와 하루모토, 롯카쿠 사다요리 군과 대치했으나, 11월 나가요시의 공격으로 오미 가타타로 후퇴했다.

덴분 20년(1551년), 이세 사다타카 등 일부 막부 신하들이 요시테루를 데리고 나가요시와의 화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미요시 측에 항복했다. 21년(1552년), 롯카쿠 사다요리 사후 뒤를 이은 롯카쿠 요시카타의 중재로 쇼군 측과 미요시 측의 화의가 성립되어, 오미 구치키에 머물던 요시테루는 교토로 돌아왔다. 나가요시는 오토모슈에 포함되어 쇼군의 직신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와카사로 피신했던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세력을 회복하여 탄바를 공격하자, 요시테루는 22년(1553년) 반 미요시파 측근의 주도로 하루모토와 결탁하여 다시 나가요시에게 적대했다. 하지만 나가요시가 상경하자 요시테루는 패퇴하여 다시 구치키로 피신했고, 막부는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이후 나가요시는 쇼군 가문을 내세우지 않고 아시카가와야마 성을 거점으로 기내 지배를 추진했다.

하지만 쇼군과의 대립은 교토 지배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요시테루가 구치키로 이동한 후에도 롯카쿠 씨나 하타케야마 씨의 공격을 받았다. 에이로쿠(영록) 원년 (1558년), 나가요시는 롯카쿠 요시카타가 지원하는 요시테루,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싸웠으나, 전황이 유리했음에도 롯카쿠의 중재를 받아 화목했다. 요시테루는 5년 만에 교토로 돌아왔고, 나가요시는 어상반중에 포함되어 유력 다이묘로서 대우받게 되었으며, 막부는 쇼군과 미요시 씨가 협력하는 형태로 부활했다. 적대하던 미요시 소이도 나가요시를 따랐다.

이 무렵부터 나가요시는 정권을 지탱하던 유력 일족을 잇달아 잃었다. 에이로쿠 4년(1561년) 동생 소고 카즈토요가 병사했고, 5년(1562년)에는 아와 군을 이끌던 동생 미요시 지키큐가 하타케야마 타카마사와의 구메다 전투에서 전사했다. 6년(1563년)에는 적자 미요시 요시히로도 22세로 병사했으며, 7년(1564년)에는 동생 아타케 후유야스에게 혐의를 씌워 자해하게 했다. 나가요시 자신도 쇠약해져 같은 해 7월 사망했고, 소고 카즈토요의 아들이자 나가요시의 양자인 미요시 요시츠구가 뒤를 이었다.

미요시 가문의 세력이 약화되는 동안, 쇼군 요시테루는 전국 다이묘 간의 분쟁을 조정하거나 막부 직책을 부여하며 쇼군 권위 회복을 꾀했다. 에이로쿠(영록) 2년 (1559년)에는 미노의 사이토 요시타츠,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 에치고의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켄신)가 잇달아 상경했다. 또한, 에이로쿠 7년(1564년)에는 적대하던 정소 집사 이세 사다타카를 패사시키고, 자신의 의종형제인 셋쓰 하루카도를 새로운 정소 집사로 임명하여 막부 결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쇼군 친정을 추진하려 했다.

사건의 목적과 동기를 이해하려면, 사건 발생 전 미요시 씨와 쇼군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덴분 연간 말부터 에이로쿠 초년까지 양측은 무력 충돌을 반복했으며, 나가요시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건도 자주 발생했다. 덴분 20년(1551년) 3월, 봉공중 진시 겐코가 이세 사다타카 저택 연회에서 나가요시를 베어 부상을 입힌 사건이나, 같은 해 5월 나가요시의 장인인 가와치 수호대 유사 나가노리가 자객에게 살해된 사건 모두 쇼군이 배후라는 의혹이 있었다.[6]

그러나 에이로쿠 원년(1558년) 말 화해 이후, 변이 일어나는 에이로쿠 8년(1565년)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협조 체제가 유지되었다. 다만, 막부 권력 강화를 목표로 한 쇼군 측은 이 체제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로쿠 2년(1559년)경 쇼군 측에서 미요시 씨와 이세 씨를 분열시키거나 이세 사다타카를 고립시키려는 공작을 벌였을 가능성이 지적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오타 규이치가 기록한 『신장공기』에도 쇼군 측이 미요시 씨에게 모반을 꾀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미요시 측에 메이오의 정변 이후 70년간 이어진 쇼군 가문의 분열(아시카가 요시타네계와 아시카가 요시즈미계)을 해소하려는 적극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설[7]과, 미요시 세력의 니조 고쇼 포위는 무로마치 시대에 반복된 이른바 '고쇼마키'(다이묘 등이 쇼군 저택을 포위하여 정적 실각 등을 강요하는 행위)의 하나일 뿐이며, 실제로는 요구 사항 관철을 목적으로 했으나 중재 과정에서의 불일치나 과도한 요구, 쇼군 측의 강경한 자세로 인해 충돌로 발전했고 쇼군 살해는 당초 계획에 없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8][9] 하지만 양쪽 설 모두 모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도 있어, 미요시 측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3. 에이로쿠의 변 (永禄の変)

1565년 5월 19일(에이로쿠 8년),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가 교토니조 어소를 습격하여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제1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은 요시테루를 폐하고 그의 사촌인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할 목적이었다.

요시테루 측은 미요시 가문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검술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진 요시테루는 직접 저항했으나, 결국 정오 무렵 전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요시테루의 생모 게이주인을 비롯한 많은 측근들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쇼군 암살 사건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으며, 일본 센고쿠 시대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 니조 성 (二条御所) 습격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폐하고 그의 사촌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쇼군으로 옹립하기 위해 1565년 5월 19일(에이로쿠 8년) 오전 8시경, 군대를 이끌고 요시테루가 머물던 니조 어소를 포위 공격했다. 요시테루 측은 미요시 가문의 습격에 대비해 성곽을 개축하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수적으로는 열세였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요시테루는 사건 전날인 5월 18일 피신하려 했으나, 봉공중 등 측근들이 쇼군의 권위 실추를 이유로 반대하며 함께 죽을 각오를 보여 요시테루는 어쩔 수 없이 어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음 날인 5월 19일, 미요시와 마쓰나가 등은 기요미즈데라 참배를 명분 삼아 약 1만 명의 군사를 모아 어소로 몰려가, 쇼군에게 소송(요구)이 있다며 거짓 중개를 요청했다. 봉공중의 진시 하루이에가 중개를 위해 오가는 사이, 미요시 군의 조총대는 사방의 문으로 침입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쇼군 측의 저항은 격렬하여 잇시키 테루키, 우에노 테루키요 등 십여 명이 미요시 군 수십 명을 베었다. 그 사이 진시 하루이에는 적의 침입을 허용한 책임을 지고 어전에서 할복했다. 요시테루는 측근들과 마지막 술잔을 나눈 뒤, 주종 30여 명과 함께 싸움에 나섰다. 검호 쓰카하라 보쿠덴에게 병법을 배운 요시테루는 직접 나기나타를 휘두르다 칼로 바꿔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정오 무렵에는 요시테루를 비롯해 진시 후지노부(하루이에의 아들), 아라카와 하루노부, 아라카와 테루무네, 히코베 하루나오, 히코베 테루노부, 스기하라 하루모리, 오가사와라 타네모리, 누마타 미츠나가, 호소카와 타카요시, 타케다 테루노부, 셋쓰 이토치요마루(셋쓰 하루카도의 아들) 등 주종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공가 야마시나 토키츠구의 일기 『겐츠기쿄키』에는 이날 낮에 쇼군이 "생해(生害, 살해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시테루의 생모 게이주인(고노에 히사미치의 딸,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정실)은 자결했고, 정실 다이요인(고노에 타네이에의 딸)은 친정인 고노에가로 보내졌다. 프로이스에 따르면, 미요시 측은 요시테루가 총애하던 측실 고지주쿄쿠(진시 하루이에의 딸)의 살해를 요구했으며, 그녀는 혼란 중에 도망쳤으나 붙잡혀 시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한편, 미요시 씨와 가까웠던 막부 신하 이세 사다스케는 요시테루를 돕지 않고 어소 내에 있던 무로마치 막부 역대의 중요 보물이 든 당궤를 몰래 고쇼 밖으로 반출했다[3]。 또한, 사건 직후 봉공중이나 봉행중이 미요시 나가야스에게 인사를 방문하는 등, 요시테루의 집권으로 회복된 듯 보였던 막부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결과가 되었다.

이 쇼군 암살 사건으로 쇼군의 권위는 다시 크게 실추되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상(도사 미쓰요시 필, 교토시립예술대학 예술자료관 소장)

3. 2. 요시테루 암살 이후

요시테루 암살 직후,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은 요시테루의 동생이자 나라 고후쿠지의 승려였던 가쿠케이(覚慶, 훗날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유폐시켰다.[3] 그러나 가쿠케이는 두 달 뒤인 7월 28일, 요시테루의 측근이었던 잇시키 후지나가, 호소카와 유사이 등의 도움으로 나라를 탈출했다.[3] 이후 오미 고카군 (현재의 시가현 고카시)의 와다 고레마사에게 몸을 의탁하였다.[4]

한편, 미요시 산닌슈는 요시테루의 사촌이자 사카이 구보 혈통인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義親, 훗날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아와지국에서 새로운 쇼군으로 내세웠다.[3] 또한 미요시 세력은 요시테루의 이복동생인 로쿠온인의 주지 주코를 살해하였다.[4]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가쿠케이를 살해하지 않고 유폐한 데에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와에 있던 아시카가 요시쓰나(요시동)·요시치카(요시히데) 부자를 옹립하려는 시코쿠 세력의 기나이 진출에 대비하여,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쇼군 후보(가쿠케이)를 확보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4]

가쿠케이의 탈출 이후,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활발히 움직였다. 하타케야마 아키타카(畠山政頼)의 중신 야스미 무네후사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거병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고, 요시테루의 외삼촌인 다이카쿠지 몬제키 기슌은 에치젠아사쿠라 요시카게, 와카사의 다케다 요시무네, 오와리오다 노부나가 등에게 협력을 요청했다.[4]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끌어들이려는 움직임도 보였다.[4]

가쿠케이는 오미 야지마(시가현 모리야마시)의 롯카쿠 요시카타에게 잠시 의탁했다가[4], 최종적으로는 에치젠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몸을 맡겼다.[3] 이듬해인 에이로쿠 9년(1566년) 2월, 가쿠케이는 환속하여 이름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秋)로 바꾸고[3], 4월에는 차기 쇼군 후보로서 종5위하 사마노카미 관직에 임명되었다.[4]

변란 당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인물 중 일부는 생존했다는 기록도 있다. 잇시키 마타사부로(一色又三郎)는 요시아키에게서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아키나리(昭成)로 개명하고 요시아키를 섬겼다.[5] 오가사와라 다네모리(小笠原稙盛) 역시 살아남아 미요시 측이 옹립한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섬겼으나, 후에 요시아키가 쇼군이 되자 과거의 행적 때문에 소령을 몰수당한 것으로 추정된다.[10]

4. 에이로쿠의 변 이후

아시카가 요시테루 암살 직후,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은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 고후쿠지의 승려였던 가쿠케이(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유폐했다. 그러나 가쿠케이는 두 달 뒤인 7월 28일, 잇시키 후지나가,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에치젠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의탁하는 등 쇼군 계승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미요시 산닌슈는 요시테루의 사촌인 아시카가 요시치카(후의 요시히데)를 아와지국에서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요시 가문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발생하여, 에이로쿠 8년(1565년) 11월에는 미요시 산닌슈가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실각시키고 가문의 실권을 장악했다. 산닌슈는 쓰쓰이 준케이 등과 손잡고 히사히데 토벌에 나서는 등 기나이 각지에서 충돌이 격화되었다.

이처럼 에이로쿠의 변 이후 요시아키요시히데라는 두 명의 쇼군 후보가 등장하고, 미요시 가문의 내분과 마쓰나가 히사히데와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기나이의 정세는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혼란은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과 요시아키의 쇼군 취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4. 1.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등장과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에이로쿠의 변에서 요시테루의 동복 동생인 고후쿠지 이치조인 몬제키 각경(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을 유폐시키는 데 그쳤다. 이는 아와의 아시카가 요시쓰나 · 요시치카(후의 요시히데) 부자를 옹립하려는 시코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히사히데가 자신만의 쇼군 후보를 확보하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건 후, 요시테루의 옛 신하들과 아사쿠라 요시카게 등의 도움으로 각경은 1565년 7월 28일 나라를 탈출하여 오미 고카군의 와다 고레마사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후 여러 다이묘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같은 해 11월에는 롯카쿠 요시카타의 비호를 받아 야지마(矢島, 현 시가현 모리야마시)로 이동했다. 1566년 2월, 각경은 환속하여 요시아키라 칭하고, 4월에는 종5위하 사마노카미에 서임되어 차기 쇼군 후보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한편, 아와의 미요시 나가하루 가신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1566년 6월 시코쿠 세력을 이끌고 셋쓰 효고진에 상륙했다. 시노하라와 미요시 산닌슈는 마쓰나가 히사히데 세력을 압박하며 셋쓰와 야마시로의 성들을 공략했고, 8월에는 가와치 다카야성에서 요시치카(후의 요시히데) 옹립을 협의했다. 요시치카는 요시테루의 사촌으로, 아와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나 시노하라와 미요시 산닌슈의 지지로 유력한 쇼군 후보로 부상했다.

오미의 요시아키오와리오다 노부나가의 상경(上洛)에 기대를 걸고, 노부나가를 통해 미노사이토 다쓰오키와의 화해를 추진했다. 노부나가는 이에 호응하여 상경 계획을 구체화했으나, 1566년 8월 29일 롯카쿠 씨가 미요시 산닌슈와 내통하여 요시아키를 공격하면서 계획은 좌절되었다. 요시아키는 와카사로 피신했다가 11월에 에치젠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의탁하여 이치조다니의 안요지로 들어갔다.

요시아키가 교토에서 멀어진 사이, 아와의 요시쓰나·요시히데 부자는 1566년 9월 셋쓰 고시미즈성으로 이동하여 조정과 교섭했다. 12월에는 셋쓰 도다의 후몬지로 옮겨 입경을 준비했고, 요시히데는 요시아키와 같은 종5위하 사마노카미에 서임된 후 1567년 정월에 개명했다.

두 명의 쇼군 후보가 대립하며 쇼군 자리가 공석인 상태가 길어지자 조정은 고심했다. 요시히데 측은 마쓰나가 히사히데 등과의 항쟁, 요시아키 측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잇코잇키 대처 문제로 상경이 지연되었다. 조정은 쇼군 취임 요건으로 헌금을 요구했고, 요시히데 측이 먼저 일부 금액을 납부하여 1568년 2월 셋쓰 도다에서 쇼군 선하를 받았다. 그러나 기나이 정세 불안과 일부 막부 신료들의 비협조(일부는 요시아키를 지지하여 에치젠으로 향함)로 인해 요시히데는 교토에 들어가지 못했다.

1568년 4월, 요시아키는 에치젠 이치조다니에서 원복(元服)을 치렀으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상경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요시아키는 다시 오다 노부나가와 교섭하여 7월 25일 미노 릿세이지로 옮겨갔다. 8월, 노부나가오미 사와야마에서 롯카쿠 씨에게 상경 협조를 요청했으나 결렬되었다. 오히려 롯카쿠 씨는 미요시 산닌슈와 연합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9월 7일 6만 대군을 이끌고 기후를 출발, 12일 미쓰쿠리성, 13일 간논지성을 함락하며 빠르게 오미 남부를 장악했다.

같은 시기, 미요시 측은 마쓰나가 히사히데 토벌을 위해 야마토를 재침공하여 쓰쓰이 준케이 등과 싸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요시 세력은 병력을 집중하여 노부나가의 진격을 막지 못했고,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받들어 9월 26일 야마시로국에 입성했다.

오다 군은 즉시 미요시 세력 토벌에 나서 쇼류지성의 이와나리 도모미치를 몰아내고(9월 29일), 셋쓰로 진격했다. 미요시 나가야스는 아쿠타가와 산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30일 요시아키가 이 성에 입성했다. 이케다 가쓰마사, 이타미 지카오키 등도 항복했으며, 시노하라 나가후사, 미요시 야스나가, 미요시 소이 등은 싸우지 않고 아와 등으로 퇴각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는 상경하지 못한 채 이 무렵(9월 30일경, 날짜에 여러 설 존재) 병사했다.

10월 4일,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 이케다 가쓰마사, 하타케야마 씨 등이 아쿠타가와 산성의 요시아키에게 출사하여 노부나가의 지원 아래 요시아키를 받드는 체제가 형성되었다. 마쓰나가 측은 야마토에서 쓰쓰이 준케이를 몰아내고 시기산성 등을 탈환하며 지배권을 확립했다.

10월 14일, 요시아키 군은 혼코쿠지, 오다 군은 기요미즈데라에 입성했다. 18일, 조정은 요시아키를 종사위하·정토대장군·참의·사콘노추조에 서임하여 제15대 쇼군으로 임명했다. 요시아키는 앞서 요시히데의 쇼군 선하에 관여했던 인물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관백 고노에 사키히사참의 다카쿠라 나가스케는 이시야마 혼간지로 도피했고, 곤추나곤 간슈지 하루스케는 은거했으며, 참의 미나세 지카치카는 요시히데와 함께 아와로 내려갔다. 반면, 에치젠에서 요시아키의 원복 의식을 도왔던 니조 하루요시는 요시아키의 후원으로 차기 관백에 임명되었다. 지금까지, 공가 사회에서는 고노에가가 아시카가 요시하루·요시테루 부자와 혼인을 맺어 외척의 지위를 획득했고, 구조가니조가가 요시쓰나·요시히데 부자를 지원했다. 이 때문에, 요시하루요시테루가 교토에서 쫓겨났을 때에는 고노에가도 함께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고노에 사키히사는 아버지 다네이에의 병의 영향인지, 다네이에의 동생 의준의 배려로 나라를 탈출한 요시아키와 행동을 함께하지 않고 요시히데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또한 이를 받아 구조 다네미치나 니조 하루요시는 반대로 요시아키를 지원하는 등, 섭관가와 쇼군가의 관계 변동이 일어났다.[11] 또한, 구조가·니조가와 함께 요시히데를 지지해 온 것으로 보이는 혼간지(법주인 오타니 가문은 원래 구조가의 가신적 존재였다고 한다[12])는, 요시히데 지지 입장을 바꾸지 않고, 요시아키에게 추방된 고노에 사키히사를 받아들여, 종래 니조가에 의뢰해 온 법주의 유부(猶父)도 고노에가로 전환하고 있다. 요시아키·노부나가사키히사·혼간지와의 대립은 이후 이시야마 전투의 한 원인이 되지만, 그 후 노부나가와의 관계가 악화된 요시아키는 혼간지와 화해하여, 이른바 노부나가 포위망을 형성하지만 노부나가에게 패배하여,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하게 된다.

10월 22일, 신임 쇼군 요시아키는 천황을 배알했고, 다음 날 (能) 공연을 열어 노부나가 등을 위로했다. 노부나가는 26일 기후로 귀환했으며, 요시아키는 월말에 거처를 혼노지로 옮겼다.

4. 2. 미요시 가문의 몰락과 전국 시대의 격화

요시테루 사후, 미요시 세력은 그의 이복동생 주코를 살해했으나, 동복동생인 각경(후의 요시아키)은 마쓰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히사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쓰나(요시후유)·요시치카(요시히데) 부자를 옹립하려는 시코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각경을 장군 후보로 확보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타케야마 마사요리(아키타카)의 중신 야스미 무네후사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거병을 촉구했고, 요시테루 생모(게이주인)의 오빠인 기슌은 아사쿠라 요시카게, 다케다 요시무네, 오다 노부나가 등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설득한 결과, 에이로쿠 8년(1565년) 7월 28일, 각경은 잇시키 후지나가,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의 도움으로 나라를 탈출하여 오미고카군의 와다 고레마사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후 각경은 여러 다이묘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같은 해 11월에는 로쿠카쿠 요시카타의 보호 아래 야스군 야지마(현 시가현 모리야마시)로 이동했다. 이듬해 에이로쿠 9년(1566년) 2월 환속하여 요시아키라 칭하고, 4월에는 종5위하 사마노카미에 서임되어 차기 장군 후보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요시아키가 세력을 규합하는 동안 미요시 가문 내에서는 분열이 일어났다. 에이로쿠 8년(1565년) 11월,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소이, 이시나리 도모미치는 젊은 당주 요시쓰구를 압박하여 각경 탈출의 책임을 물어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실각시켰다. 이들 세 명(미요시 산닌슈)은 가문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아와의 실질적 국주 미요시 나가하루를 보좌하는 미요시 야스나가도 이를 지지했다.

산닌슈는 야마토에서 쓰쓰이 씨 및 고후쿠지와 손잡고 히사히데 토벌에 나섰다. 히사히데는 과거 쓰쓰이 씨의 영지와 고후쿠지의 야마토 수호 지위를 빼앗은 바 있었다. 12월, 산닌슈 군대는 야마토를 침공하여 쓰쓰이 씨와 함께 히사히데를 다몬 산성에 포위했으나, 성의 견고함과 마쓰나가 군의 높은 사기로 인해 실패했다. 이듬해 2월에는 쓰쓰이 군을 격파했으며, 기나이의 여러 성주 중 히사히데를 따르는 이들도 많았다. 히사히데는 5월에 셋쓰 노다까지 진격하여 요시아키를 지지하는 가와치의 하타케야마 씨와 연합, 이즈미 사카이에서 산닌슈와 싸웠으나 대패하고 잠시 행방불명되었다.

에이로쿠 9년(1566년) 6월, 아와의 미요시 나가하루 가신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시코쿠 세력을 이끌고 셋쓰 효고진에 상륙했다. 시코쿠 세력과 산닌슈는 8월까지 셋쓰와 야마시로의 마쓰나가 측 성들을 대부분 공략했고, 9월에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타미 친흥도 항복했다. 가와치의 하타케야마 씨도 화의를 요청하면서 마쓰나가 측은 궁지에 몰렸다. 8월 28일, 시노하라와 산닌슈는 가와치 다카야성에 모여 아시카가 요시치카(아시카가 요시히데) 옹립을 협의했다. 요시치카는 과거 사카이 공방 요시쓰나의 아들로, 시노하라와 산닌슈의 제휴로 유력한 차기 쇼군 후보로 부상했다.

한편, 오미 야지마의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의 상경에 기대를 걸고 미노사이토 류코와의 화해를 추진했다. 노부나가도 이에 호응하여 상경 계획이 구체화되었으나, 8월 29일, 로쿠카쿠 씨가 미요시 산닌슈와 내통하여 요시아키를 공격하면서 계획은 좌절되었다. 요시아키는 와카사로 피신했고, 11월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의지하여 에치젠 이치조다니로 들어갔다. 오다 군 역시 미노 진입에 실패하며 상경 계획은 완전히 파탄났다.

교토에서 멀어진 요시아키와 달리, 아와의 아시카가 요시쓰나·요시치카 부자는 9월에 셋쓰 고시미즈성으로 들어와 조정과 교섭을 진행했다. 12월 7일에는 셋쓰 도다의 후몬지로 이동하여 입경을 준비했다. 12월 28일, 요시치카는 요시아키와 같은 종5위하 사마노카미에 서임되었고, 다음 해 정월 요시에이로 개명했다.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옹립한 시노하라 나가후사-미요시 산닌슈 측의 우세가 굳어지는 듯했으나, 에이로쿠 10년(1567년) 2월 16일, 미요시 당주 미요시 요시쓰구가 돌연 사카이를 떠나 마쓰나가 히사히데 진영으로 합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시카가 기세키』에 따르면, 요시쓰구는 자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산닌슈에게 경시당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내통했다고 한다. 미요시 씨 당주가 이탈하자, 아와의 미요시 나가하루가 기나이로 건너왔으나, 그 역시 젊었기에 미요시 야스나가, 시노하라, 산닌슈의 집단 지도 체제가 유지되었다.

4월, 히사히데는 요시쓰구를 데리고 나라 북쪽의 다몬 산성으로 복귀했다. 이에 산닌슈-쓰쓰이 연합군은 나라 남쪽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5월부터 양측은 도다이지고후쿠지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니가쓰도, 다이부쓰덴 회랑 등 사찰 건물이 소실되었다. 10월 10일, 히사히데가 다이부쓰덴에 주둔한 연합군을 총공격하는 과정에서 산닌슈 진영에서 시작된 불이 다이부쓰덴으로 옮겨붙어 전소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전투로 마쓰나가 군은 연합군 격퇴에 성공했지만, 야마토를 비롯한 기내 각지에서 전투는 계속되었다.

같은 시기, 오다 노부나가는 8월 15일 미노이나바야마성(기후성)을 함락시키고 북이세 공략에 착수했다. 다이부쓰덴 전투 이후 노부나가는 야마토 북부와 야마시로 남부 무사들에게 마쓰나가 부자 지원을 호소하며 야마토 진출 의사를 보였고, 히사히데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상경 가능성을 이용해 외교전을 펼쳤으나 여전히 열세였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4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치젠 이치조다니에서 원복(성인식)을 치르고 정식으로 요시아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상경에 소극적이었다.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와 교섭을 지속하여 그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고, 7월 25일 미노의 릿세이지로 이동했다. 8월, 노부나가는 오미 사와야마에서 로쿠카쿠 요시카타에게 상경 협조를 요청했으나 결렬되었다. 한편, 8월 17일에는 미요시 산닌슈도 오미를 방문하여 요시카타와 회동했다. 상경을 위해 로쿠카쿠 씨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진 노부나가는 9월 7일, 6만 대군을 이끌고 기후를 출발, 12일 미쓰쿠리 성, 13일 간논지 성을 함락시키며 빠른 속도로 오미 남부를 장악했다.

이때 야마토에서는 미요시 측이 5월부터 마쓰나가 히사히데 토벌을 재개하여 6월 29일 시기산성을 함락시키고, 9월 4일에는 쓰쓰이 준케이와 함께 도다이지로 진격했다. 오다 군의 오미 침공 후, 9월 10일 이와나리 도모미치가 사카모토로 진출했으나 곧 귀환했고, 16일에는 미요시 소이 등이 나라의 니시쿄로 파견되어 마쓰나가 측을 견제했다. 이처럼 마쓰나가와의 전투에 주력하던 미요시 세력은 병력을 집중하여 오다 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고, 노부나가는 9월 26일 요시아키를 받들고 야마시로국에 입성했다.

오다 군은 즉시 미요시 세력 토벌에 나서 29일 쇼류지 성의 이와나리 도모미치를 몰아냈다. 셋쓰로 진격한 오다 군 선봉대는 아쿠타가와 산성 주변을 불태웠고, 미요시 나가야스(나가쓰구)는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30일, 요시아키가 아쿠타가와 산성에 입성했다. 이케다 성의 이케다 가쓰마사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항복했고, 이타미 성의 이타미 지카오키도 항복했다. 고시미즈 성의 시노하라 나가후사, 가와치 다카야 성의 미요시 야스나가, 미요시 소이는 싸우지 않고 퇴거했다. 시노하라와 산닌슈 등은 신속히 철수하여 세력을 보존했지만, 기나이에서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아시카가 요시히데는 쇼군으로 취임했음에도 상경하지 못한 채 이 무렵인 9월 30일 병사했다(사망일과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10월 4일, 셋쓰 아쿠타가와 산성의 요시아키에게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 이케다 가쓰마사, 하타케야마 씨 등이 출사하여 노부나가와 함께 요시아키를 받드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야마토에 남아 있던 마쓰나가 야스미치는 10월 8일 쓰쓰이 성을 함락시키고 쓰쓰이 준케이를 축출했다. 또한 야마토 지배를 인정받은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요시아키의 가신 호소카와 후지타카, 와다 고레마사, 노부나가의 가신 사쿠마 노부모리 등이 이끄는 군대가 10일 야마토에 진입하여 여러 성을 공략하고 시기산성도 탈환했다.

12월 24일,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인사하기 위해 기후로 내려가자, 미요시 산닌슈는 이 틈을 타 상경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1월 4일, 산닌슈는 쇼군지조산성을 시작으로 교토 주변 여러 곳에 불을 질러 요시아키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요새화된 혼코쿠지에서 농성 태세를 갖추었다. 다음 날, 산닌슈는 1만여 군사(5천 또는 8천 설도 있음)로 공격했으나, 쇼군 직속 부대와 노부나가, 와카사 다케다 씨 가신들로 구성된 2천 명의 막부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하여 침입을 막았다. 그 사이 호소카와 후지타카, 기타카와치의 미요시 요시쓰구, 셋쓰의 이케다 씨, 이타미 씨 등이 구원군으로 도착하여 6일에는 미요시 군을 삼면에서 공격했고, 혼코쿠지의 농성군도 호응하여 반격했다. 불리해진 미요시 군은 퇴각하려 했으나 추격을 받아 가쓰라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에이로쿠의 변과 같은 쇼군 시해는 재현되지 않았다. 급보를 받고 기후를 출발한 노부나가와 히사히데가 혼코쿠지에 도착한 10일에는 이미 산닌슈는 철수한 뒤였다. 훗날 혼노지의 변을 일으키는 아케치 미쓰히데도 이때 쇼군 측으로 참전하여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했다.

참조

[1] 논문 松井家研究余録 角田因幡守入道宗伊・細川陸奥守入道宗賢者の事績について 戒光祥出版
[2] 논문 永禄政変後の室町幕府政所と摂津晴門・伊勢貞興の動向 ―東京国立博物館所蔵「古文書」所収三淵藤英書状を題材にして 戒光祥出版
[3] 논문 『後鑑』所載「伊勢貞助記」について 戎光祥出版
[4] 서적 『言継卿記』 https://books.google[...]
[5] 간행물 歴史評論, 第 639~644 号 https://books.google[...]
[6] 문서 興福寺大般若経奥書」天文20年5月11日条。ただし、1年後の記述では河内の有力者だった萱振賢継の野心のための謀反と見られており、義輝の関与は推測されていない。
[7] 논문 将軍義輝殺害事件に関する一考察 戎光祥出版
[8] 서적 戦国の活力 小学館
[9] 논문 永禄の政変の一様相 戎光祥出版
[10] 서적 論文集二 戦国・織豊期の西国社会 日本史史料研究会
[11] 논문 足利義晴~義昭における摂関家・本願寺と将軍・大名 戒光祥出版
[12] 서적 蓮如と七人の息子 誠文堂新光社
[13] 문서 미요시 나가야스·미요시 마사야스·이와나리 도모미치
[14] 문서 사카이 구보 소멸(堺公方消滅)
[15] 문서 만도로코(政所)는 무로마치 막부의 재정과 영지에 관한 소송을 담당하던 기관이며, 장관직은 시쓰지(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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