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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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신회의는 다이쇼 시대 말기 원로인 사이온지 긴모치의 고령화와 5·15 사건을 계기로 1933년 설치된 일본의 제도이다. 내각총리대신 경험자와 추밀원 의장이 원로 사이온지와 함께 후임 총리 선정을 논의하는 것이 시작이었으며, 사이온지 사망 후에는 내대신이 중신들에게 자문하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1945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진주로 권한이 소멸될 때까지, 일본 내각총리대신 선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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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신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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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메이지 시대 이후 내각총리대신은 원로가 선정했지만, 다이쇼 시대 말기에는 사이온지 긴모치 한 명뿐이었다. 야마모토 곤노효에 등이 원로 보충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사이온지는 낡은 원로 제도를 폐지하고 헌정의 정도에 따른 기계적인 수상 후계 제도를 의도하여 원로 추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5·15 사건에 따른 정당 내각의 붕괴와 군부의 대두, 그리고 사이온지 자신의 고령화로 인해 단독으로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933년 사이온지의 수고를 덜기 위해 '''중신''' 제도가 마련되어, 총리대신 경험자와 추밀원 의장이 원로 사이온지와 함께 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선정했다. 5·15 사건 이후 후계 수상 주천에서도 원로는 수상 경험자로부터 의견을 청취했지만, 정식 절차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중신회의 형식이 유지되었으나, 같은 해 8월 15일 스즈키 내각이 사임했을 때에는 중신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스즈키 간타로 내각 총사직과 10월 9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총사직 시에는 종전 직후 혼란기가 겹쳐 중신회의는 소집되지 않았고, 기도 고이치 내대신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 두 사람만으로 형식적인 회의에서 후계 수반이 선정되었으며, 11월 24일에 내대신부가 폐지되어 주재자를 잃은 중신회의도 자연 소멸되었다. 1946년 5월 시데하라 내각 총사직 시에는 시데하라 본인이 전임자로서 후임자를 선정하여 주천했다. 결국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미군)의 진주에 따라 중신회의의 권한은 소멸되었다.
2. 1. 성립 배경
메이지 시대 이후 내각총리대신의 선정은 원로들이 결정했으나, 다이쇼 시대 말기에는 원로가 사이온지 긴모치만 남게 되었다. 사이온지는 낡은 원로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원로를 더 뽑는 것에 반대했지만, 5·15 사건을 계기로 군부가 대두하고, 사이온지 자신도 나이가 너무 많아 혼자서 후임 총리 선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33년 사이온지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중신''' 제도가 설치되어, 내각총리대신 경험자와 추밀원 의장이 원로 사이온지와 함께 회의를 열어 후임 총리 선정에 대해 의논한 것이 시초였다.그러나 2·26 사건 직후 오카다 내각이 총사임했을 때 중신회의가 열리지 않았고, 아베 노부유키 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 열리지 않았다. 요나이 내각이 성립되자 내대신이 일부 중신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하였고, 요나이 내각 총사직 후 다시 중신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1940년 11월 사이온지가 사망한 후, 내대신이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중신들에게 후임 내각총리대신 선정 등을 자문하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2. 2. 운영 방식의 변화
메이지 시대 이후 내각총리대신은 원로들이 결정했으나, 다이쇼 시대 말기에는 원로가 사이온지 긴모치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사이온지는 낡은 원로 제도를 폐지하고자 원로 추가를 반대했지만, 5·15 사건을 계기로 군부가 대두하고 사이온지 자신도 고령으로 인해 혼자 후임 총리 선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933년 사이온지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중신''' 제도가 설치되어, 내각총리대신 경험자와 추밀원 의장이 원로 사이온지와 함께 회의를 열어 후임 총리 선정에 대해 의논한 것이 시초였다.그러나 2·26 사건 직후 오카다 내각이 총사임했을 때 중신회의가 열리지 않았고, 아베 노부유키 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 열리지 않았다. 요나이 내각이 성립되자 내대신이 일부 중신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하였고, 요나이 내각 총사직 후 다시 중신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1940년 11월 사이온지가 사망한 후, 내대신이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중신들에게 후임 내각총리대신의 선정 등을 자문하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이 형식이 유지되었으나, 같은 해 8월 15일 스즈키 내각이 사임했을 때에는 중신회의가 열리지 않았으며, 결국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미군)의 진주에 따라 중신회의의 권한은 소멸되었다.
2. 3. 종전과 중신회의의 소멸
1940년 11월 사이온지 긴모치가 사망한 후, 내대신이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중신들에게 후임 내각총리대신 선정 등을 자문하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이 형식이 유지되었으나, 같은 해 8월 15일 스즈키 내각이 사임했을 때에는 중신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결국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미군)의 진주에 따라 중신회의의 권한은 소멸되었다.1945년 8월 15일 스즈키 간타로 내각 총사직과 10월 9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총사직 시에는 종전 직후 혼란기가 겹쳐 중신회의는 소집되지 않았고, 기도 고이치 내대신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 두 사람만으로 형식적인 회의를 열어 후계 수반을 선정했으며, 11월 24일에 내대신부가 폐지되어 주재자를 잃은 중신회의도 자연 소멸되었다. 1946년 5월 시데하라 내각 총사직 시에는 시데하라 본인이 전임자로서 후임자를 선정하여 주천했다.
3. 기능과 역할
메이지 이후, 내각총리대신은 원로가 선정했지만, 다이쇼 시대 말기에는 원로가 사이온지 긴모치 단 한 명뿐이었다. 원로를 보충하기 위해 야마모토 곤노효에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낡은 원로 제도를 폐지하고 헌정의 정도에 따른 기계적인 수상 후계 제도를 의도한 사이온지는, 미래를 생각하는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의 조언에 대해 원로 추가에 동의하지 않았고, 5·15 사건에 따른 정당 내각의 붕괴와 군부의 대두 및 자신의 고령화로 인해 사이온지가 단독으로 후계를 선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933년(쇼와 8년)에 사이온지를 돕기 위해 '''중신''' 제도가 마련되어, 총리대신 경험자와 추밀원 의장이 원로 사이온지와 함께 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선정했다. 5·15 사건 이후 후계 수상 주천에서도 원로는 수상 경험자로부터 의견을 청취했지만, 정식 절차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2·26 사건에 의한 오카다 내각 총사직 시에는 중신회의가 개최되지 않았고, 아베 내각 성립 시까지 개최되지 않았다. 요나이 내각 성립 시에는 내대신이 일부 중신으로부터 의견을 청취했고, 요나이 내각 총사직 후에 다시 중신회의가 개최되었다.
1940년(쇼와 15년) 11월에 사이온지가 사망한 후에는, 내대신이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중신들에게 후계 총리대신 선정 등을 자문하는 형식으로 변경되었고, 1945년(쇼와 20년) 4월의 고이소 내각 총사직 시까지 지속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의 스즈키 간타로 내각 총사직과 10월 9일의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총사직 시에는 종전 직후의 혼란기가 겹쳐 중신회의는 소집되지 않았고, 기도 고이치 내대신과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의 두 사람만으로 형식적인 회의에서 후계 수반이 선정되었으며, 11월 24일에 내대신부가 폐지되어 주재자를 잃은 중신회의도 자연 소멸되었다. 1946년(쇼와 21년) 5월의 시데하라 내각 총사직 시에는, 시데하라 본인이 전임자로서 후임자를 선정하여 주천했다.
중신은 제도 도입 초기에 "내각총리대신의 전관례우를 받은 자 및 추밀원 의장"으로 규정되었으며, 전관례우는 총리나 국무대신 등 요직 경험자를 현직자에 준하여 예우하는 제도로 일정 기간의 재직을 요했다. 그러나 육군 출신 총리인 하야시 센주로와 아베 노부유키가 조건에 미치지 못하여, 육군을 배려하여 1940년에 "총리 경험자 및 추밀원 의장"으로 개정되었다.
천황과 총리가 중신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고노에 후미마로는 "고노에 상주문"을 상주(임금에게 글을 올림)했다.
사임하는 총리가 중신 회의에 참석한 예는 1934년 사이토 마코토 뿐이다. 요나이 미쓰마사는 육군에 의한, 도조 히데키는 중신에 의한 각 타도 공작으로 총사직했기 때문에, 후임자를 선택하는 중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꺼렸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제3차 내각 총사직 시에 병을 이유로 결석했는데, 다른 중신들로부터 기요우라 게이고가 91세의 고령과 병약(약 1년 후 사망)을 무릅쓰고 참석하는데 고노에의 병이 그것보다 심하냐는 비판을 받았다.
4. 중신회의 참석자
연도 | 참석자 및 추천 총리 |
---|---|
1934년 7월 | 사이토 마코토, 기요우라 게이고, 와카쓰키 레이지로, 다카하시 고레키요, 이치키 기토쿠로(추밀원 의장), 마키노 노부아키(내대신) , 사이온지 긴모치(원로) - 오카다 게이스케 천거 |
1940년 7월 |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하야시 센주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고노에 후미마로, 하라 요시미치(추밀원 의장), 기도 고이치(내대신) - 고노에 후미마로 천거 |
1941년 7월 |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하라 요시미치(추밀원 의장), 기도 고이치(내대신) - 고노에 후미마로 천거 |
1941년 10월 | 기요우라 게이고,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하야시 센주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하라 요시미치(추밀원 의장), 기도 고이치(내대신) - 도조 히데키 천거 |
1944년 7월 |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고노에 후미마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하라 요시미치(추밀원 의장), 기도 고이치(내대신), 햐쿠타케 사부로(시종장) - 고이소 구니아키 천거 |
1945년 4월 | 와카쓰키 레이지로,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도조 히데키, 스즈키 간타로(추밀원 의장), 기도 고이치(내대신) - 스즈키 간타로 천거 |
5. 평가
중신은 제도 도입 초기에 "내각총리대신의 전관례우를 받은 자 및 추밀원 의장"으로 규정되었으며, 전관례우는 총리나 국무대신 등 요직 경험자를 현직자에 준하여 예우하는 제도로 일정 기간의 재직을 요했다. 그러나 육군 출신 총리인 하야시 센주로와 아베 노부유키가 조건에 미치지 못하여, 육군을 배려하여 1940년에 "총리 경험자 및 추밀원 의장"으로 개정되었다.
중신 회의 구성원은 공식 회의 이외에도 일정한 정치적 동일성을 가진 집단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9년 장쭤린 폭사 사건의 사후 처리에 대해 다나카 기이치 총리가 쇼와 천황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사임했을 때, 쇼와 천황을 현혹하는 중신 그룹의 음모가 원인이라는 주장이 우익 세력에서 발생했다. 쇼와 천황 자신은 쇼와 천황 독백록에서 "구하라 후사노스케 등이 중신 '블록'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고, 내각이 붕괴된 것은 중신들, 궁중의 음모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언급했다. 이후 국가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신들을 "군측의 간신"으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었고, 1932년 5·15 사건과 1936년 2·26 사건에서는 당시의 총리와 대신과 함께 중신도 암살 대상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 도조 히데키 총리의 지도 체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중신 오카다 게이스케를 중심으로 도조 내각의 타도 공작이 진행되어 도조는 사임했다. 오카다 등은 중신 제도가 소멸된 전후에도 쇼와 천황의 도쿄 재판 기소를 회피하는 운동에 협력했다.
천황과 총리가 중신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고노에 후미마로는 "고노에 상주문"을 상주했다.
사임하는 총리가 중신 회의에 참석한 예는 1934년 사이토 마코토 뿐이다. 요나이 미쓰마사는 육군에 의한, 도조 히데키는 중신에 의한 각 타도 공작으로 총사직했기 때문에, 후임자를 선택하는 중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꺼렸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제3차 내각 총사직 시에 병을 이유로 결석했는데, 다른 중신들로부터 기요우라 게이고가 91세의 고령과 병약(약 1년 후 사망)을 무릅쓰고 참석하는데 고노에의 병이 그것보다 심하냐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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