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쓰에 소요 사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쓰에 소요 사건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발표 후, 극우 사상을 가진 오카자키 이사오를 중심으로 한 황국의용군이 일본 사회의 혼란을 틈타 일으킨 사건이다. 이들은 시마네 현청 방화, 지사 암살, 신문사 습격 등을 계획했으나, 군부의 협조를 얻지 못하고, 경찰에 진압되어 실패했다. 오카자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패전 후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극단주의와 폭력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쿠데타 미수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일본의 쿠데타 미수 - 5·15 사건
    5·15 사건은 1932년 일본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하고 주요 시설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정당 내각 붕괴와 군부 영향력 강화로 이어져 일본이 군국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 쇼와 시대의 정치 (일본 제국) - 입헌정우회
    입헌정우회는 1900년 이토 히로부미가 창당한 일본 정당으로, 게이엔 시대를 거치며 원내 제1당 지위를 유지하고 하라 다카시 시대에는 정당 내각을 구성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분열과 군부 영향력 확대로 1940년 해산되었다.
  • 쇼와 시대의 정치 (일본 제국) - 입헌민정당
    입헌민정당은 1927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에 존재했던 정당으로, 헌정회와 정우본당의 합당으로 창당되어 의회 중심 정치와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표방하며 입헌정우회와 경쟁했지만 군부의 대두와 당내 분열로 해산되었다.
마쓰에 소요 사건
지도 정보
사건 개요
사건 이름마쓰에 소요 사건
일본어 명칭마쓰에소조지켄
발생 장소일본 제국 시마네현 마쓰에시
발생 날짜1945년 8월 24일
공격 목표시마네현청
주요 시설
지사
검찰관
공격 수단일본도
38식 보병총
총검
다이너마이트
사망자1명
범인황국의용군 (皇國義用群)
주도자오카자키 이사오 (岡崎勳)
동기태평양 전쟁 (일명 "성전") 속행
쇼와 유신(군국주의) 정부 수립 및 왕정복고
사건 관련 이미지
전소된 시마네현 청사
전소된 시마네현 청사

2. 사건의 배경

1945년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발표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그러나 이 방송은 일본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고,[1]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도쿄 등지에서 봉기를 시도하기도 했다.[1] 마쓰에 소요 사건은 이러한 봉기 시도 중 하나였다.[54]

옥음방송은 고어로 전달되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2] 8월 16일, 마쓰에 신문(松江新聞)은 이 방송이 휴전을 호소하는 내용이라고 보도했다.

시마네 현(島根県) 당국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시마네 현 지사 야마다 타케오(山田武雄)는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통일을 촉구하는 발표를 했고, 현청은 공공 질서를 요구했다.[71] 반면, 마쓰에 지구 사령부(松江地区司令部)의 오가와 젠쇼(小川善昭) 소장은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투쟁 의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근거 없는 소문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했다.[71]

도쿄·오사카 등 대도시는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지만, 산인 지방과 같이 공습 피해가 적었던 지역에서는 본토 결전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11] 시마네 현에서는 일본 비행기가 "전쟁을 계속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73]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마쓰에 소요 사건 발생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75]

사건의 주동자인 오카자키 이사오는 극우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일본 사회에는 패전으로 인한 혼란과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릿쇼 대학에 입학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한편 극우 민족주의 단체인 '킨노 마코토무스비'(欣農誠結び)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5]

2. 1. 오카자키 이사오의 사상과 활동

1939년 3월 마쓰에 중학교를 졸업한 오카자키 이사오는 2년간 만주의 미쓰이 물산 펑톈 지점에서 근무하면서 국수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42년 11월 일본으로 돌아와 승려가 되고자 일련종 계열의 릿쇼 대학 전문부에 입학하면서, 중학교 시절 친구였던 히로에 고분이 가입해 있었던 국가주의 단체 긴노마코토무스비에 들어가 국가 혁신 운동에 참가했다.[143][157] 당시 오카자키에게 영향을 준 서적으로는 미쓰다 이와오의 《쇼와 풍운록》, 마쓰나가 모토키의 《황국체제》, 아마노 다쓰오의 《국체황도》 등이 있었다.[143][157]

오카자키는 사재를 털어 "일심료"(一心寮|잇신료일본어)를 세워, 거기서 매일 밤 다쿠쇼쿠 대학 2학년 사이토 나오유키 등 7~8명과 함께 정치가, 군벌을 비판하는 격론을 펼쳤다.[157]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도조 히데키 내각의 타도나 암살 계획이 여러 번 이루어졌다. 기도 고이치나카노 세이고 등도 내각총리대신·육군대신·해군대신을 쇄신하는 비밀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조가 선수를 쳐 새 총리 후보로 점지되어 있었던 우가키 가즈시게가 구류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오카자키는 도조가 육해군의 협조를 저해하고 있다고 보고 도조와 이치키 기토쿠로의 암살을 계획[154][158], 와세다 대학교련 장교로부터 수류탄, 권총을 얻어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카자키와는 별도로 사이토 일당이 기획하고 있었던 도조 타도 계획이 사전에 헌병대에 의해 발각되어 오카자키도 연행되었다. 오카자키는 1943년 7월, 방화살인예비·폭발물단속벌칙 위반에 따라 연행되어 스가모 구치소에서 1년 반 동안 갇힌 후, 1944년 9월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158]

오카자키는 그 해 11월 석방되었지만, 이지마 요시오(飯島与志雄일본어)가 결성한 존양동지회에 바로 가입했기 때문에 특별고등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고향 마쓰에로 돌아간 후에는 쇼와 유신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근로동원서용원(勤労動員署傭員일본어)이 되었다.[157][159] 오카자키가 태평양 전쟁의 실상을 보게 된 계기는 근로동원서용원으로 근무한 일이었다.[160]

근로동원서에서 오카자키는 "군수 공장에 사람을 징용할 때는 개개인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라는 신념에 따라, 징용을 면제해달라고 탄원하는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고자 자신의 책임으로 이들을 면제해주었다. 그 결과 서장과 의견이 충돌하여, 구레시에 있는 해군 공장에서 일할 여성 정신대원 75명을 1주일 안에 추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카자키는 정신대원을 추리기 위해 신상서를 조사하면서, "지위가 높은 이들의 자제는 징용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카자키는 재판소 소장과 검사정(검사장에 해당)의 딸을 여성 정신대로 뽑았고, 그들의 자제가 여성 정신대로 추려진 일을 현지 신문에서는 대서특필했다. 근로동원서장과 검사정은 크게 분노하여 오카자키를 협박했지만, 오카자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추려진 여성 정신대원이 출발하기 이틀 전, 오카자키는 오사카부로 출장을 나갈 것을 명령받았다. 얼마 후 출장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오카자키는, 이미 출발한 여성 정신대 중에 유력자들의 딸들이 다시 제외되어 돌아간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오카자키는 근로동원서에 사표를 제출하고, 1945년 4월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에 들어갔다.[161]

오카자키는 종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164], 철저한 항전과 봉기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173]

2. 2.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와 후카다야 여관

1945년 4월, 오카자키 이사오는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이하 보국회 시마네 지부)에 들어갔다. 당시 도쿄 대공습이오지마 섬의 전멸 등이 발생하여 전황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보국회 시마네 지부는 마쓰에 시내 와다 킨라이 변호사 사무소의 한 방과, 후카다야 여관(마쓰에 시 도노마치, “후카다 여관”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음[69]) 별관 2층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 여관은 보국회 시마네 지부장인 사쿠라이 사부로우에몬(당시 만 41세)의 단골 숙소이기도 했다.[70] 오카자키는 존양동지회와 연락을 취하면서 하타노 야스히코(존양동지회 소속), 하세가와 분메이(당시 24세, 대동숙 소속), 모리와키 쇼키치(시마네현립 농업기술원 양성소 소속), 시라나미세 노보루 등과 함께 패색이 짙은 전황에 조급해하며 “쇼와 유신·일제 결기”를 모의하고 있었다.[70] 지부장 사쿠라이는 결기에 있어 민간뿐 아니라 군대와의 연계도 제안했지만, 오카자키는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 연락할 여유가 없고, 민간에서 일어서면 군도 따를 것이며 쇼와 유신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이 하타노나 하세가와 등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었다.[70]

군부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순간, 사쿠라이 사부로에몬은 오카자키 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77] 사건 후, 사쿠라이가 봉기의 배후였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사쿠라이는 이를 부정했다. 하지만 후카다야 여관 별관에서 오카자키 등과 일제히 봉기할 것을 논의했던 사쿠라이가 몰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오카자키 등이 무언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과 행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못 본 체 했을 것이라고 저널리스트 하야시 마사유키는 추리하고 있다.[77] 이노세 나오키도 마찬가지로, 사쿠라이는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76]

당시 사쿠라이는 야스오카 마사아츠가 설립한 금계학원의 사실상 산인 지부인 「산인소행회」 회장이기도 했다. 종전 당시 야스오카 마사아츠 자신이 종전의 칙령 편찬에 참여했고, 금계학원의 태도 또한 철저 항전이 아니라 칙령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인소행회 회장인 사쿠라이가 봉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며, 또한 군대와의 연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은 행동할 수 없지만 오카자키 등의 주장에도 공감하는 심정으로 고뇌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야시는 추측하고 있다.[78]

2. 3. 일본의 항복과 사회적 혼란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발표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그러나 이 방송은 일본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1]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도쿄 등지에서 봉기를 시도하기도 했다.[1]

옥음방송은 고어로 전달되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2] 8월 16일, 마쓰에 신문(松江新聞)은 이 방송이 휴전을 호소하는 내용이라고 보도했다.

시마네 현(島根県) 당국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시마네 현 지사 야마다 타케오(山田武雄)는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통일을 촉구하는 발표를 했고, 현청은 공공 질서를 요구했다.[71] 반면, 마쓰에 지구 사령부(松江地区司令部)의 오가와 젠쇼(小川善昭) 소장은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투쟁 의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근거 없는 소문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했다.[71]

도쿄·오사카 등 대도시는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지만, 산인 지방과 같이 공습 피해가 적었던 지역에서는 본토 결전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11] 시마네 현에서는 일본 비행기가 "전쟁을 계속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73]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마쓰에 소요 사건 발생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75]

3. 사건의 전개

1945년 8월 24일 새벽, 오카자키 이사오를 중심으로 20세 전후의 남녀 수십 명이 '황국의용군'을 자칭하며 무장 봉기했다. 이들은 시마네 현청, 신문사, 발전소 등 현내 주요 시설을 습격했다. 시마네 현청은 방화로 전소되었고, 신문사와 발전소도 일부 기능이 파괴되었다. 지사와 검사장 암살도 계획되었으나 실패했다.[54]

황국의용군은 각지를 습격한 후 마쓰에 방송국에 집결하여 전국적인 봉기를 호소하려 했으나, 방송국장은 이를 거부했다. 경찰과 군대가 방송국을 포위하여 황국의용군 전원이 체포되면서 사건은 진압되었다.[54]

이 사건으로 시마네 현청사와 현의회 의사당 3000m2가 소실되어 약 1920000JPY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1946년 당시 현 직원 급여 총액 1030000JPY을 넘는 금액이다. 방화 당시 주민 1명이 사망했고,[52] 중요 서류들도 소실되었다.[89] 마쓰에 시는 발전소 습격으로 3시간 반 동안 정전되었으며,[57] 신문사는 타블로이드판 발행을 강요당했다.[58]

패전 직후 이 사건은 시마네 현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118] 보도 통제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55]

3. 1. 옥음방송과 봉기 결심

1945년 8월 15일, 하세가와 후미아키와 하타노 야스히코는 무내신사 사무소에서 옥음방송을 들었다. 하세가와의 증언에 따르면, 잡음으로 내용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패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고, 천황의 눈물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봉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대일본언론보국회 시마네 지부로 달려갔는데, 오카자키 이사오 역시 이미 봉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76]

한편, 보국회 시마네 지부장 사쿠라이 사부로에몬은 군 수뇌부와 만나 군대가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오카자키 일행과 거리를 두었다.[76] 사쿠라이는 오카자키 등의 불온한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과 행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77]

3. 2. 하타노 야스히코의 상경과 사전 공작

2008년 현재의 미호 비행장


하타노는 도쿄로 가서 정보를 수집하고, 오카자키는 마쓰에에서 군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8월 17일, 오카자키 대신 도쿄로 간 하타노는 나카노구의 방공호에 있던 마쓰나가 모토키의 문하생 니시 미치하루(西 三千春일본어)에게서 도쿄의 정세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충고를 들었다. 니시는 시마네 현에서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고 전국민이 일제히 봉기해야 하며, 봉기했을 때는 가스미가우라에서 비행기를 움직여 환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174]

하타노가 도쿄에 간 사이, 오카자키는 군대와의 연락 대책을 위해 분주했다. 하세가와의 증언에 따르면, 마쓰에 시에 주둔하고 있었던 101부대 내 한 중대 정도는 오카자키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다.[175] 8월 22일,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26일이라는 보도에 따라 오카자키는 25일 전에 봉기하기로 결정했다. 후카다야 여관 2층에 수백 장의 갱지가 마련되어, "현민에 고한다", "황국 장병에 고한다", "제국 일본에 항복은 없다" 등의 격문이 쓰였다. 계획에 따르면 미호 항공대 기지의 항공대가 격문 살포를 맡을 예정이었지만, 22일 밤에 이미 미호 비행장 기지의 항공대는 해산되었으며, 요나고시의 육군 항공대 기지에서도 비행기를 띄울 수 없도록 비행기 부품이 모두 해체되고 있었다.[176]

3. 3. 사건 전날의 계획

표적이 되었던 시마네현청사.


8월 23일 밤, 도쿄도에서 돌아온 하타노는 오카자키에게 도쿄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3]

  • 시마네 현청 방화.[14]
  • 지사 암살.[15]
  • 마쓰에 우편국 전화실 파괴.[15]
  • 시마네 신문 기능 마비.[15]
  • 봉기 실행을 위해 마쓰에 발전소 정전.[15]
  • 최고 검사 암살.[15]
  • 여성 대원들이 거리에 팜플렛 배포.[15]
  • 그 후, 시마네 방송국 점거 및 봉기 소식 방송.[15]
  • 봉기 시작 시각은 8월 24일 새벽 2시 40분.[15]


오카자키는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타노 등에게 마쓰에 호국 신사 경내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무기를 얻기 위해 헌병대 본부로 갔지만, 헌병대장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13]

3. 4. 황국의용군 결성과 부대 편성

1945년 8월 24일 오전 1시경, 오카자키 이사오의 동지 수십 명은 마쓰에 호국신사 배전 왼쪽의 꾸지나무 그늘에 집결했다.[87] 남성 대원들은 카키색 국방복, 여성 대원들은 몬페 차림으로 모였는데, 대부분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었다. 무기는 하세가와 분메이와 모리와키가 일본도를, 후지이가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했고, 그 외에 오카자키가 모교인 시마네 현립 마쓰에 북 고등학교(마쓰에 중학교)에서 훔친 38식 보병총과 총검 15정이 있었지만, 탄약은 없었다. 중학생이 재치를 발휘하여 탄약을 미리 숨겼던 것이다. 봉기 직전 오카자키 이사오는 연설을 하고,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전사가 존왕양이 사상을 불러일으켜 후에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자신들의 죽음도 후세의 일본 정신 부흥에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하타노 야스히코가 도쿄의 상황을 보고하고, 하세가와가 습격 목표와 부대 편성을 지시했다.

습격 목표담당자구성원
지사 관사오카자키 이사오5명
검사장 관사타카기 시게오3명
시마네 현청모리와키 쇼키치3명
마쓰에 우체국후지이 료사부로2명
주고쿠 배전하세가와 분메이4명
시마네 신문사시라하마세 노보루4명
오오노 화약점하타노 야스히코4명
격문 배포모리와키 미키에여성 대원 15명



목표 달성 후에는 마쓰에 방송국에 집결하여 라디오로 전 국민에게 항전을 호소하고,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지만, 방해하는 자는 살해하기로 했다. 일제 봉기 시간은 오전 2시 40분으로 하고,[87] 단체 이름을 '''황국의용군'''으로 결정했다.[88]

이때 결집한 황국의용군의 인원수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기록이 다르다.


  • 『신수시마네현사(新修島根県史)』: "오카자키 이사오(岡崎功) 외 14명"[89]
  • 『마쓰에시제100주년기념 마쓰에시지(松江市制一〇〇周年記念 松江市誌)』: "오카자키 이사오를 중심으로 한 남녀 34명"[90]
  • 『도설 시마네현의 역사(図説 島根県の歴史)』: "오카자키 이사오 등은 (중략) 46명의 청년을 모아 황국의용군을 결성했다"[74]
  • 『시마네현대백과사전(島根県大百科事典)』: "남녀 47명(여자 16명)"[52]
  • 『국사대사전(国史大辞典)』: "48명(여자 8명)"[54]
  • 『신수마쓰에시지(新修松江市誌)』: "남녀 40명 남짓"[91]

4. 사건의 진행

1945년 8월 24일 새벽, 오카자키 이사오를 중심으로 20세 전후의 남녀 수십 명이 "황국의용군"을 자칭하며 무장 봉기했다. 이들은 시마네현청, 신문사, 발전소 등 주요 시설을 공격했다. 신문사와 발전소는 일부 기능이 마비되었다. 시마네현 지사와 검찰청장을 살해할 계획이었으나, 지사와 검사장이 화재 소식을 일찍 접하고 현장으로 피신하면서 실패했다.[93]

황국의용군은 각지를 습격한 후, 전국에 봉기 호소를 하기 위해 마쓰에 방송국에 집결했으나, 방송국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경찰과 군대가 방송국을 포위하여, 결과적으로 전원이 체포되었다.

시마네 현청사와 현의회 의사당 3000m2가 전소되었고, 피해액은 약 192만 엔(1946년 당시 현 직원 급여 총액은 103만 엔)이었다. 방화 당시 주민 1명이 살해되었고,[52] 서류 등도 다수 소실되었다.[89] 발전소 습격으로 마쓰에 시내는 3시간 반 동안 정전되었다.[57] 신문사도 습격받아 8월 31일까지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되었다.[58]

8월 24일 오전 1시경, 오카자키의 동지 수십 명은 마쓰에 호국 신사 배전 왼쪽의 꾸지나무 그늘에 집결했다.[87] 남성 대원들은 카키색 국방복, 여성 대원들은 몸빼 차림으로, 대부분 20세 전후였다. 무기는 하세가와와 모리와키가 일본도를, 후지이가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했고, 오카자키가 모교인 시마네현립 마쓰에 북 고등학교(마쓰에 중학교)에서 훔친 38식 보병총과 총검 15정이 있었지만, 탄약은 없었다. 중학생이 재치를 발휘하여 탄약을 미리 숨겼다. 봉기 직전 오카자키 이사무는 연설을 통해,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전사가 존왕양이 사상을 불러일으켜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자신들의 죽음도 후세의 일본 정신 부흥에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타노가 도쿄 상황을 보고하고, 하세가와가 습격 목표와 부대 편성을 지시했다.

황국의용군은 마쓰에 방송국에 집결하여 라디오로 전 국민에게 항전을 호소하고,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되 방해하는 자는 살해하기로 했다. 일제 봉기 시간은 오전 2시 40분으로,[87] 단체 이름은 '''황국의용군'''으로 결정했다.[88]

도청 방화는 예정보다 20분 빨리 진행되어 각 부대 움직임은 혼란스러웠다.

4. 1. 각 습격대의 움직임

시마네 현청사가 전소되었다.

  • '''현청 습격대'''는 오전 2시에 현청 구내에 잠입했다. 당초 2시 40분에 일제히 봉기할 예정이었으나, 순찰 중이던 경관에게 발각되면서 예정보다 20분 빠른 2시 20분에 청사에 방화를 시작했다. 목조 건물이었던 현청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방화 후 집결 장소인 방송국으로 향하던 중, 화재를 진압하려던 찻집 주인 소다 간(曽田 完|소다 간일본어, 당시 36세)을 저항자로 오인하여 습격대장 모리와키가 일본도로 베었고, 대원 기타무라 다케시가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다. 소다는 이 사건의 유일한 사망자였다.[186]
  • '''신문사 습격대'''는 화재를 틈타 신문사에 침투, 단도와 착검총으로 숙직자를 위협하고 윤전기 벨트를 절단하고 활자판을 뒤엎었다.[187] 무전기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188] 이로 인해 산인 중앙 신보는 8월 31일까지 타블로이드판으로 신문을 발행했다.[152]
  • '''주고쿠 배전 변전소 습격대'''는 변전소가 마쓰에 호국 신사에서 4km 이상 떨어져 있어 3시경에 도착했다. 습격대는 일본도로 당직 직원을 위협하고 자신들이 황국의용군임을 밝힌 후, 배전선을 해체하고 인접한 주고쿠 배전 미나미 변전소에서 65000V 케이블을 절단했다. 이로 인해 마쓰에 시내는 3시간 반 동안 정전되었다.[187]
  • '''지사 습격대'''는 지사 관사 뒷문에 도착했으나 암살에는 실패했다. 지사가 화재 소식을 듣고 2시 35분경 현관을 통해 화재 현장으로 갔기 때문이다. '''검사장 습격대''' 역시 같은 이유로 암살에 실패했다.[187]
  • '''우편국 습격대'''는 전화시험실 뒤쪽 울타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으나, 도화선만 타고 불발로 끝났다.[187]
  • '''화약점 습격대'''는 대원 전원이 마쓰에 시내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리에 어두워 화약점 자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화약 탈취를 단념했다.[186]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견해가 갈린다. 마에다 하루미의 《쇼와 반란사》에서는 그대로 방송국이 있는 쇼기 산(쇼기야마)에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89] 이노세 나오키의 《은사의 장난》(恩赦のいたずら|은사의 장난일본어)에서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하고 해산했으며, 대장 하타노는 자결을 주장하는 젊은 대원들을 설득하고 귀가하여 그날 저녁까지 잤다고 기록되어 있다.[190]

4. 2. 방송국 집결과 봉기 진압

총포점 공격 집단을 제외한 모든 황국의용군 대원들이 마쓰에 방송국에 모였다. 이들은 방송국장에게 봉기를 알리는 "결기취의서(決起趣意書)" 방송을 요청했으나, 방송국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98] 실랑이가 계속되는 사이 아침이 밝아오자, 방송국은 약 50명의 무장 경찰과 마쓰에 연대 병사 20명에 의해 포위되었다.[98]

리더인 오카자키 이사오는 칼을 뽑아 장교에게 자신들은 천황선전포고를 받들어 미국영국 격멸을 맹세한 황국의용군(皇國義勇軍)임을 선언했다. 그는 군대가 천황과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고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넣었으며, 자신들만이 황조황종(皇祖皇宗)의 뜻을 따르려는 자들이고, 반대하는 자는 역적이라고 외쳤다.[98]

그 후, 양측 간에 협상이 이루어졌다. 오카자키와 아는 사이였던 특고과장은, 이대로 교전 상태가 된다면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므로, 타협을 촉구했다. 오카자키는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황국의용군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마지막으로 동방요배를 하고 싶다”는 오카자키의 제안에 따라, 황국의용군, 병사, 경찰 모두 정렬하고, 오카자키가 “동방요배” 구령을 외치자, 병사들은 총을 들고, 경찰과 황국의용군은 경례를 하고, 모두 함께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 외쳤다.[98] 그리고 황국의용군은 무장한 채 수갑을 채우지 않은 상태로 마쓰에 경찰서로 연행되었다.[98]

황국의용군은 마쓰에 경찰서 검도장에 수용되었다. 오카자키와 특고과장은 별실에서 처리 방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고과장은 검사장으로부터 “폭도의 석방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이전의 약속을 철회한다는 것을 오카자키에게 알렸다. 오카자키는 항의하고, 동지들과 상의하기 위해 검도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오카자키는 이전의 약속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동지를 석방시키려 했다.[98]

오카자키는 대원들에게 심문을 당당하게 받고, 석방 후에는 일본의 부흥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말하며, 결기의 실패를 사과했다. 그리고 재빨리 갑옷을 입은 채 배를 두 번 찔렀다. 특고과장과 방송국장은 다가가려 했지만, 일본도를 든 하세가와에게 제지당했다. 오카자키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이번에는 목덜미를 찔렀다. 같은 방에 있던 대원들은 통곡했고, 오카자키는 의식불명 상태로 마쓰에 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건졌다.[98]

그 후, 전 대원이 전시소요, 주거침입, 전신가스이용방해,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은 후, 여자 대원들은 다음 날, 각 습격대 책임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그 다음 날 모두 석방되었다.[99]

4. 3. 경찰 및 현 당국의 대응

당시 시마네현 경방과장 겸 경무과장이었던 니시무라 구니지로는 1946년 9월 2일 《시마네 현청 방화 사건 참회각서》를 남겼다. 그 글에 따르면, 당시 당국은 매일 최악의 사태를 고려한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대비하지 않았다.[194] 조직 내부 지휘 계통에도 혼란이 있어, 경찰부장 가도 겐타로와 특별고등경찰 과장 와다 사이이치 사이에도 감정적인 대립이 있었다.[195] 니시무라는 "촌놈이 뭘 할 수 있겠어?"[196]와 같은 자괴감도 있었다고 기록했다.[197]

사건 전, 니시무라는 와다에게 시마네현 안에 경계가 필요한 우익 인물이 몇 명이나 있는지 물었는데, "1명 있다"는 대답을 듣고 안심했었다고 한다.[194] 와다는 "해군항공대가 살포한 선전물을 들고 현 농업기술원 양성소 학생들이 수군대고 있다"는 이즈모시민의 정보와 오하라군에서 국민의용군 대원이 죽창을 들고 집합하여 사이렌을 울리며 기세를 드높이고 있다는 정보를 무시했다.[191] 사건 전날 저녁에는 와다의 판단에 따라 마쓰에 경찰서의 경계 요원을 반으로 줄였다.[194]

사건 발생 후, 주모자 오카자키 이사오가 와다가 주시하고 있었던 그 인물이었고, 간부 대부분은 오하라군 출신이며, 현 농업기술원 양성소 생도 대부분도 황국의용군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 측은 크게 놀랐다. 니시무라는 우익에 대한 경계를 계속하고 있었더라면 사건을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191]

사건 당일, 당시 현지사 야마다 다케오는 앞서 서술한 대로 습격을 피했다. 경찰 전화를 받아 화재 사실을 안 야마다는 막대기를 무기로 삼아 방화 현장으로 갔는데, 현청 정면 2층에 안치되어 있던 어진영의 안전을 확인했다. 경관으로부터 어진영은 마쓰에성산 공원의 지하 피난소에 옮겨두었다는 보고를 받고, 그곳에 의자를 배치하여 사건 수습을 지휘했다.[165]

사건 당시 지사였던 야마다 다케오는 책임을 지고 1945년 9월 12일에 사표를 제출했다.[137] 경찰본부장인 가토와 특고과장인 와다도 각각 직무 정지, 훈계 등의 징계를 받았다.[118]

5. 재판과 판결

1945년 12월 20일, 마쓰에 지방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오카자키 이사오에게 무기징역을, 나머지 전원에게는 징역형을 선고했다.[206] 전시형사특별법이 적용되어 항소심 없이 변호인 측과 검찰 측 모두 대심원에 상고했다. 대심원은 변호인 측의 상고는 기각하고, 형량이 가볍다는 검찰 측의 상고만 일부 받아들였다.

1947년 5월 2일, 대심원 판결에서 하세가와 등 7명에게는 지방 판결보다 무거운 형벌이 부과되었다.[206] 이 판결은 일본 제국 헌법 하의 대심원의 마지막 판결이었으며, 다음 날부터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다. 주요 관련자들의 판결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구형과 판결[207][208]
피고인구형지방재판소 판결대심원 판결
오카자키 이사오사형무기징역무기징역
하세가와 후미아키징역 15년징역 10년징역 12년
모리와키 아키요시무기징역징역 8년징역 10년
하타노 야스히코징역 15년징역 7년징역 10년
후지이 료자부로징역 12년징역 5년징역 7년
기타무라 다케시·이즈미 스에토미징역 12년징역 5년에서 10년징역 5년에서 10년
다카기 시게오징역 10년징역 2년 6개월징역 5년
시라나미 라이토징역 10년징역 2년·집행유예 5년징역 3년
우사 쇼이치징역 6년징역 2년·집행유예 5년징역 2년


5. 1. 공판 과정

이 사건의 첫 공판은 1945년 11월 5일, 미세 다다토시를 재판장으로 하여 마쓰에 지방법원에서 열렸다. 피고인은 황국의용군의 주요 회원 15인이었다. 오시마 명주로 만든 기모노하오리, 하카마 차림으로 법정에 들어선 오카자키는 재판장에게 예를 갖췄다. 오카자키는 법정에 주둔군 장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재판장에게 "이 재판이 주둔군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천황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가?"하고 물었다. 만약 주둔군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이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세 재판장은 일본이 비록 패전했지만, 이 재판은 천황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고 답했다. 황국의용군 회원들은 이 답변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기소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201]

11월 7일 제2차 공판에서 오카자키는 황국의용군 봉기의 동기에 대해 진술했다. 그는 천황의 위엄을 가로막는 중신과 재벌을 몰아내고 유신 내각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와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

  • 도조 히데키가 전쟁에서 이길 가망이 없는데도 수상이 되어, 결국 정치에 실패하고 정권을 내던진 것은 적과 내통하는 행위이다. 적과 내통하는 행위란 적과 결탁하거나 사보타주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 실패가 최대의 적과 내통하는 행위이다.
  • 승전이었던 러일 전쟁 때조차 무훈에 빛나는 장병도 "폐병(廢兵)"이라고 불린 것을 생각하면, 패전으로 상처 입은 장병이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보일지 생각할 때 피가 거꾸로 솟았다.
  • 시게미쓰 마모루는 "종전으로 자유민권의 정신이 확립되어 기쁨을 감출 수 없다"라고 말했지만, 성전(聖戰)에 패배하고 무엇이 기쁨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인가.[201]


11월 25일 제13회 공판에서 오카자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검찰 측은 자신들이 고사기를 맹신한 결과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지만, 고사기 이상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신뢰할 수밖에 없다.
  • 자신들은 "천황 중심주의"이며, 검찰 측이 말하는 것과 같은 우익도 아니고 좌익도 아니다.
  • 대동아 전쟁팔굉일우의 이상을 내건 것이며, 침략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카자키는 자신의 행동이 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자신이 앞장서서 모든 책임을 질 테니 다른 회원들은 책임을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건에 동참한 다른 회원들은 비록 계획은 실패했지만, 자신들의 행동이 일본 국민을 각성시켜 쇼와 유신의 대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자신들의 희망이라고 진술했다.[202]

11월 24일 제12회 공판에서는 증거물인 일본도총검 등을 둘러싼 검사 측과 변호인 측의 논쟁이 있었다. 검찰 측은 이 사건의 동기가 황국의용군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에서 나온 것임은 이해하지만, 휴전 조칙에서 국민의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동기와 관계없이 이 사건은 지극히 유감이라고 밝혔다. 또한, 휴전 조칙이 천황의 진심인지 아닌지 억측하는 것은 일본 신민의 바른 길이 아니며, 조칙이 천황의 진심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단 발표된 이상 지켜야 하므로, 어떤 애국 운동이라도 법령을 무시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죄 없는 상점 주인이 희생된 것은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오카자키에게는 사형을, 기타 피고인에게는 유기 또는 무기징역을 구형했다.[203]

11월 25일 열린 제13회 공판에서는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이루어져, 두 명의 변호사가 검사 논고에 대해 반론하였다. 변호인은 이 사건이 앞으로도 이야기될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밝힌 뒤, 아래의 네 가지에 대해 변호했다.[204]

  • 사건 당시 오카자키 이사오는 집행 유예 상태에 있었으며, 그를 감시하는 역할은 검찰 당국이 맡고 있었다. 감시를 게을리한 검찰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 이 사건에는 검사정이 피해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 검사정이 지휘하는 검사의 의견은 공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 검찰 쪽은 피고인의 심정이 "충성심과 애국심에서 나온 것"임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비뚤어진 충성심"이라 한다. 하지만, "충성심"이라는 것은 두 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피고인이 천황의 조칙에 반항하는 일본국의 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세상 사람들, 즉 민심이 결정할 것이다.
  • 검찰 쪽은 전시형사특별법을 이 사건에 적용하여 "전시소요죄"로 단정 짓고 있지만, 사건 당시 전쟁은 이미 끝났으므로 이 법률의 적용은 부당하다.


마쓰에 지방 재판소에서 이 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던 미세 다다토시는 몇 차례의 공판을 치르면서 오카자키의 인격이 훌륭하고 황국의용군 회원들이 오카자키의 방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목숨을 걸고 행동했다는 것에 감동하여 이들을 깊이 동정했다. 그는 "이 재판을 맡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어, 온 힘을 다해 공정한 재판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재판에 임했다고 스스로 밝혔다.[205]

검찰 의견 및 판결[39][40]
피고인검찰 의견법원 판결대심원 판결
오카자키 이사오사형무기징역무기징역
하세가와 분메이징역 15년징역 10년징역 12년
모리와키 쇼키치무기징역징역 8년징역 10년
하타노 야스히코징역 15년징역 7년징역 10년
후지이 요시사부로징역 12년징역 5년징역 7년
키타무라 타케시/이즈미 미후징역 12년징역 5년~10년징역 5년~10년
타카기 시게오징역 10년징역 2년 6개월징역 5년
세토 시라나미징역 10년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징역 3년
우사 쇼이치징역 6년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징역 2년


5. 2. 대심원 상고와 판결 확정

1945년 12월 20일, 지방 재판소는 이 사건을 결심하고 오카자키 이사오에게 무기징역을, 나머지 전원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전시형사특별법이 적용되어 항소심 없이 변호인 측과 검찰 측 모두 대심원에 상고했다. 대심원은 변호인 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형량이 가볍다는 검찰 측의 상고만 일부 받아들였다.[206]

1947년 5월 2일, 대심원 판결에서 하세가와 등 7명에게 지방 판결보다 무거운 형벌이 부과되었다.[206] 이 판결은 일본 제국 헌법 하의 대심원의 마지막 판결이었으며, 다음 날부터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다. 주요 관련자들의 판결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구형과 판결[207][208]
피고인구형지방재판소 판결대심원 판결
오카자키 이사오사형무기징역1심 확정
하세가와 후미아키징역 15년징역 10년징역 12년
모리와키 아키요시무기징역징역 8년징역 10년
하타노 야스히코징역 15년징역 7년징역 10년
후지이 료자부로징역 12년징역 5년징역 7년
기타무라 다케시·이즈미 스에토미징역 12년징역 5년에서 10년1심 확정
다카기 시게오징역 10년징역 2년 6개월징역 5년
시라나미 라이토징역 10년징역 2년·집행유예 5년징역 3년
우사 쇼이치징역 6년징역 2년·집행유예 5년징역 2년


6. 사건 이후

1946년 11월 3일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및 일본국 헌법 공포를 기념하는 사면[212]1952년 4월 18일 평화 조약 발효에 따른 사면[120]으로, 오카자키는 두 차례 감형을 받아 6년 7개월 만에 출소했다.[120]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 이후 국제 연합 가입까지 사면은 단 7회뿐이었다.[213]

출소 후, 오카자키 이사오, 하타노 야스히코, 하세가와 분메이 등 황국의용군 주요 멤버들 간의 접촉은 전혀 없었다.[121] 이들은 모두 "대동아 전쟁"의 종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은 변함없었지만, 서로 소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마쓰에시에 거주한 오카자키와 하타노조차 연락하지 않았고, 하세가와는 도쿄도로 상경했다. 다른 황국의용군 구성원들의 행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121]

6. 1. 사면과 출소

1946년 11월 3일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및 일본국 헌법 공포를 기념하는 사면[212]1952년 4월 18일 평화 조약 발효에 따른 사면[120]으로, 오카자키는 두 차례 감형을 받아 6년 7개월 만에 출소했다.[120]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 이후 국제 연합 가입까지 사면은 단 7회뿐이었다.[213]

출소 후, 오카자키 이사오, 하타노 야스히코, 하세가와 분메이 등 황국의용군 주요 멤버들 간의 접촉은 전혀 없었다.[121] 이들은 모두 "대동아 전쟁"의 종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은 변함없었지만, 서로 소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마쓰에시에 거주한 오카자키와 하타노조차 연락하지 않았고, 하세가와는 도쿄도로 상경했다. 다른 황국의용군 구성원들의 행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121]

6. 2. 주동자들의 이후 행적

주범 오카자키 이사오는 1952년 가석방된 후, 유일한 피해자인 소다 간(曽田完|소다 간일본어)의 위령에 힘썼다.[217] 1960년 마쓰에 조사이 고등학교(지금의 릿쇼 대학 부속 쇼난 고등학교) 이사장이 되어,[154][216] 매일 아침 조회 때 전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동방요배, 축사주상(奏上), 교육칙어 암송, 기미가요와 교가 제창을 시켰다.[218] 일본사 수업을 "국사"라고 칭하고[219] 직접 가르치기도 했으며,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교육칙어를 암기하게 되었다.[216] 1968년 참의원 의원 선거 전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154] 마히카리 간부로서 "릿쇼 대학 문학부 종교학과 졸업, 문학박사"라는 직함을 사용했고,[223] 마히카리 기념관 관장을 지냈다.[224] 그 외 전국 일본 학사회원, 일본 라이플 사격 협회 평의원 등을 역임했다.[225] 2006년 사망했다.[156]

부리더 하세가와 후미아키는 도쿄로 가서 인쇄 회사에서 일하며 일본어 타자기(和文タイプライター|와몬 타이푸 라이타일본어)를 이용한 일본어 악보 인쇄 자동화에 성공했다. 오카쿠라 덴신베토벤 이해에 영향을 받아 서양 음악 악보를 수집하다가 직접 악보를 조판하고자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226]

하타노 야스히코는 일본 천황에게 쌀을 바치는 운동, 반공우익 활동을 하다가 공갈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재출소 후 산업폐기물 처리 사업을 하는 다이토 산업 유한공사를 설립, 1년 만에 매달 50톤 이상의 폐기물을 처리했다. 시마네 현 오하라 군 소재 하타야 신사의 네기(禰宜|네기일본어)로서 시마네 현 지정 무형민속문화재·이즈모국 오하라 신직 가구라의 지위 전승자이기도 했다. 황국의용군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227]

사건 당시 지사였던 야마다 다케오는 1945년 사임 후 료테이(料亭|료테이일본어) 지배인, 부동산 고문 등으로 일했으며, 요코하마시 교외에서 여생을 보냈다. 오카자키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며, 자신도 종전 당시 본토 결전과 철저 항전을 결심했었다고 회상했다.[210][228]

7. 사건의 역사적 평가와 의의

마쓰에 소요 사건은 여러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극단주의의 발현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주모자인 오카자키 이사오는 시마네현 출신으로, 극우주의에 영향을 받아 국가 혁신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도조 히데키 내각에 대한 불만과 일본의 항복에 대한 반발로 시마네 현청 방화 등을 계획했다.[64]

나이토 마사나카는 오카자키가 헌병대, 마쓰에 연대, 미호 기지 항공대의 항전파 장교들과 연락하며 계획을 진행했기 때문에, 만약 일제 봉기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대사건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139]

『신수 시마네현사』는 이 사건이 오카자키 등의 어쩔 수 없는 심정에서 발생한 동시에, 당시 전쟁 지도자층에 대한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118]

테러리즘 전문가 마에다 하루미는 시마네현청 방화 사건을 종전이라는 격동기의 반란 종식과 동시에 쇼와 반란사의 종언으로 자리매김했다.[141]

전 마이니치 신문 기자인 나카가와 노부히로는 황국의용군이 취한 행동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 태도를 "전후 현대인이 잊어버린, 일에 과감히 도전하는 '사는 자세'"라고 지적했다.[142]

7. 1.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일본 정부는 마쓰에 소요 사건 당시 시마네현청 화재로 인해 독도시마네현으로 편입한다는 내용을 담아 1905년 대한제국에 알린 문서인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의 원본이 소실되었다고 주장했다.[233] 20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의회는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여 2006년부터 매년 기념 행사를 열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가 되는 문건이 바로 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이기 때문이다.[233]

7. 2.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이 사건은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패전 직후 일본의 항복에 반대하여 일어난 소요 사건 중 하나로, 극단주의와 폭력의 위험성을 보여준다.[54]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전국적인 폭동을 목적으로 한 마지막 쿠데타이자, 대심원에서 재판이 진행된 마지막 사건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55][56]

1945년 8월, 포츠담 선언 수락과 일본의 항복쇼와 천황의 옥음 방송으로 발표된 후, 이에 반발한 오카자키 이사오와 황국의용군이 일으킨 이 사건은, 사회적 불평등과 불만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54] 시마네 현청 방화, 신문사 및 발전소 기능 파괴 등은 당시 일본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52][89][57][58]

검찰은 황국 의용군의 행동 동기가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법령을 무시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109] 이는 사회 통합과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력적인 방식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마쓰에 소요 사건은 극단주의와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만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사회 통합과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7. 3. 후세의 평가

나이토 마사나카는 주모자 오카자키가 헌병대, 마쓰에 연대, 미호 기지 항공대의 항전파 장교들과 연락을 취하며 계획을 진행했기 때문에, 만약 일제 봉기가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면 큰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229]

《신수 시마네 현사》에 따르면, 이 사건은 오카자키 등의 어쩔 수 없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당시 전쟁 지도자층에 대한 전쟁 책임을 묻는 저항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사건 발생 다음 달, 시마네 현은 현민들에게 천황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르고(承詔必謹|쇼쇼힛킨일본어), 경솔한 행동을 삼가며 서로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전쟁 책임 전가로 인해 국민 모두가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153]

테러리즘 전문가 마에다 하루미는 쇼와 초기 이후 일본의 반란사를 테러리즘이라는 불행한 사실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230] 이 소요 사건이 종전 이후 격동기 반란의 종식이자 쇼와 반란사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231]

마이니치 신문 기자였던 나카가와 도시히로는 2002년 발표한 논문에서, 이 사건이 이미 일본 현대사의 한 부분이 되었지만 사건이 발생한 산인 지방에서조차 잊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이 패전 후 폐허와 실의에서 벗어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카가와는 황국의용군의 방향성과 비뚤어진 애국심은 지양해야 하지만, 사태 해결을 위한 그들의 '저돌적인 자세'는 전쟁 이후 현대 일본인들이 잊어버린, 모든 것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삶의 자세'로서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밝혔다.[232]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japanpen.[...] Unknown 2012-08-09
[2] 서적 大審院 Dai-shin'in
[3] 서적 Shimaneken 1967-08
[4] 서적 Inose 1983
[5] 서적 Maeda 1965
[6] 서적 Hori 1961
[7] 서적 Nakagawa 2002
[8] 서적 Kinro-Doin-Sho
[9] 서적 Maeda 1965
[10] 서적 Inose 1983
[11] 서적 Hayashi 1987
[12] 서적 Hayashi 1987
[13] 서적 Nakagawa 2002
[14] 서적 Hayashi 1987
[15] 서적 Nakagawa 2002
[16] 서적 Shimaneken 1967
[17] 서적 Matsueshishi 1989
[18] 서적 Naito 1997
[19] 서적 Sugitani
[20] 서적 Chokai
[21] 서적 Matsueshishi 1962
[22] 서적 Inose 1983
[23] 서적 tokubetsu koto keisatsu
[24] 서적 Hayashi 1987
[25] 서적 Nakagawa 2002
[26] 서적 Hayashi 1987
[27] 서적 Inose 1983
[28] 서적 Inose 1983
[29] 서적 San-inchuuoushinbunsha 1983
[30] 서적 San-inchuoshimbunsha 1983
[31] 서적 Takenaga 2005
[32] 서적 Inose 1983
[33] 서적 Yanagimoto 1965
[34] 서적 Oshima tsumugi
[35] 서적 Nakagawa 2002
[36] 논문
[37] 논문
[38] 논문
[39] 논문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44] 논문
[45] 논문
[46] 논문
[47] 논문
[48] 논문
[49] 논문
[50] 논문
[51] 논문
[52] 간행물 島根県庁焼き打ち事件
[53] 웹사이트 島根この100年 昭和元(1926)年~昭和20(1945)年 http://www.pref.shim[...] 島根県広聴広報課 2008-03-27
[54] 간행물 松江騒擾事件
[55] 논문
[56] 논문
[57] 논문
[58] 논문
[59] 논문
[60] 논문
[61] 서적 主要右翼団体幹部〔戦前の部〕 公安問題研究協会
[62] 웹사이트 非戦の闘い 日本の処方箋(1) 阪神大震災12年を迎えて http://www.ac.auone-[...] 2007-01-25
[63] 논문
[64] 논문
[65] 논문
[66] 논문
[67] 논문
[68] 논문
[69] 논문
[70] 논문
[71] 논문
[72] 논문
[73] 논문
[74] 논문
[75] 논문
[76] 논문
[77] 논문
[78] 논문
[79] 논문
[80] 논문
[81] 논문
[82] 논문
[83] 논문
[84] 논문
[85] 논문
[86] 논문
[87] 논문
[88] 논문
[89] 논문
[90] 논문
[91] 논문
[92] 논문
[93] 논문
[94] 논문
[95] 논문
[96] 논문
[97] 논문
[98] 논문
[99] 논문
[100] 논문
[101] 논문
[102] 논문
[103] 논문
[104] 논문
[105] 논문
[106] 논문
[107] 논문
[108] 논문
[109] 논문
[110] 논문
[111] 논문
[112] 논문
[113] 논문
[114] 논문
[115] 서적 櫻濃く 創元社 1949-03-10
[116] 논문
[117] 논문
[118] 논문
[119] 논문
[120] 논문
[121] 논문
[122] 논문
[123] 논문
[124] 논문
[125] 논문
[126] 논문
[127] 뉴스 読売・毎日 1968-07-06
[128] 웹사이트 沿革 https://www.ris.ac.j[...] 立正大学 2022-02-18
[129] 서적 現代のこころ 崇教真光 旺文社
[130] 간행물 崇教真光
[131] 서적 社団法人全国日本学士会創立五十周年記念史 全国日本学士会
[132] 서적 警備公安警察の素顔 新日本新書
[133] 웹사이트 제36회 국회 중의원 지방행정위원회 법무위원회 연합심사회 제1호 쇼와 35년 10월 24일 https://kokkai.ndl.g[...] 국립국회도서관 2022-02-18
[134] 논문
[135] 서적 警備公安警察の素顔 新日本新書
[136] 논문
[137] 논문
[138] 논문
[139] 논문
[140] 서적 쇼와 반란사 일본주보사
[141] 논문
[142] 논문
[143] 서적 시마네현청 방화사건
[144] 웹사이트 시마네 그 100년 쇼와 원년 (1926년) ~ 쇼와 20년 (1945년) http://www.pref.shim[...] 시마네 현 2008-03-27
[145] 서적 마쓰에 소요사건 국사대사전편집위원회
[146] 웹사이트 은사(恩赦)의 장난, 마지막 쿠데타 http://www.japanpen.[...] 일본 펜그룹 2009-07-07
[147] 서적
[148] 서적
[149] 기타
[150] 서적 2. 현민 지휘의 대강과 현청사 방화 사건 시마네 현
[151] 논문 시마네 현청 방화 사건 - 신문으로 본 패전 직후의 쇼와 유신 - 데즈카야마 대학 나라 캠퍼스 종합문화연구소
[152] 서적
[153] 서적 2. 현민 지휘의 대강과 현청사 방화 사건 시마네 현
[154] 서적 산료 쇼보 주식회사
[155] 서적 주요 우익 단체 간부 (전쟁 전) 공안문제연구협회
[156] 웹사이트 비전(非戰)의 싸움 일본의 처방전 (1) - 한신·아와지 대지진 12주기를 맞아 http://www.ishiikazu[...] 2007-01-25
[157] 서적
[158] 서적
[159] 서적
[160] 서적
[161] 서적
[162] 서적 '교육칙어'의 학교 마쓰에 고교 아오키 쇼텐
[163] 서적 마쓰에 소요 사건 산인 중앙 신보사 백년사편찬위원회
[164] 서적
[165] 서적 현청사 방화 산천출판사
[166] 서적
[167] 서적
[168] 서적 미군의 진주 가와데 쇼보 신샤
[169] 서적 산인 중앙 신보사
[170] 서적
[171] 서적
[172] 서적
[173] 서적
[174] 서적
[175] 서적
[176] 서적
[177] 서적 산인 중앙 신보사
[178] 서적
[179] 서적
[180] 서적
[181] 서적
[182] 서적
[183] 서적 시마네 현
[184] 서적 마쓰에 시제100주년 기념 마쓰에 시지 마쓰에 시 편찬위원회
[185] 서적 신수 마쓰에 시지 마쓰에 시 편찬위원회
[186] 서적
[187] 서적
[188] 서적
[189] 서적
[190] 서적
[191] 서적 산인 중앙 신보사
[192] 서적
[193] 서적
[194] 서적
[195] 서적
[196] 서적 田舎者に何ができるか
[197] 서적
[198] 서적
[199] 서적
[200] 서적 시마네 현의 역사 산천출판사
[201] 서적
[202] 서적
[203] 서적
[204] 서적
[205] 서적
[206] 서적
[207] 서적
[208] 서적
[209] 뉴스 현청사 방화 아사히 신문 1994-08-26
[210] 서적
[211] 서적
[212] 위키 사면
[213] 서적
[214] 서적
[215] 서적
[216] 서적
[217] 서적
[218] 서적
[219] 서적
[220] 뉴스 요미우리・마이니치 1968-07-06
[221] 웹사이트 http://kokkai.ndl.go[...] 2013-02-14
[222] 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www.ris.ac.jp[...] 2009-01-29
[223] 서적 현대의 마음, 숭교 마히카리 (現代のこころ 崇教真光) 오분샤
[224] 간행물 숭교 마히카리
[225] 서적 사단법인 전국 일본 학사회 창립 50주년 기념사 전국 일본 학사회
[226] 서적
[227] 서적
[228] 잡지 시마네 현청 방화 사건
[229] 서적 패전과 현청 방화 산천출판사
[230] 서적 쇼와 반란사
[231] 서적
[232] 서적
[233] 뉴스 '독도 편입'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불타 소실 https://n.news.naver[...] 뉴스1 2013-11-15
[234] 기타 시마네 현립 도서관 소장 자료
[235] 기타 황실의용군 갤리판 인쇄 격문 사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