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예쇼네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스 예쇼네크는 독일 공군의 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군 참모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공군으로 전향,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채용되어 공군 재건에 기여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에르하르트 밀히의 부관을 거쳐 공군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공군의 확장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폴란드 침공과 서부 전선에서의 작전을 지휘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와 독소전쟁에서의 자원 소모 등으로 인해 공군의 무능함을 드러냈다. 1943년 함부르크 폭격 이후 책임을 추궁받고, 페네뮌데 공습 직후 자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급 용감공 미하이 훈장 수훈자 - 에르빈 롬멜
에르빈 롬멜은 제1, 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 군인으로,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을 얻으며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용맹함을 떨쳤으나, 전쟁 후반기 나치즘에 환멸을 느끼고 히틀러와 결별 후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의혹으로 자살을 강요받았으며, 군사적 재능과 나치 정권과의 관계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 2급 용감공 미하이 훈장 수훈자 - 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제1차,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으로, 프랑스 침공 계획 입안과 동부 전선에서의 공훈으로 육군 원수까지 승진했으나, 전범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석방, 독일 연방군 재건에 참여했다. - 독일 국방군 공군 상급대장 - 쿠르트 슈투덴트
쿠르트 슈투덴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낙하산 부대 창설 및 발전에 기여, 주요 작전에서 공수부대를 지휘하며 초기 성공을 거두었으나, 크레타 전투에서의 민간인 학살 책임과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군인이다. - 독일 국방군 공군 상급대장 - 알렉산더 뢰어
알렉산더 뢰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나치 독일의 항공대장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폭격 지휘로 전쟁 범죄자가 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사형당했다. - 1급 자유십자 성장 수훈자 - 펠릭스 슈타이너
펠릭스 슈타이너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으로, 무장친위대에서 기갑 부대를 지휘하며 쿠를란트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여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석방된 후 회고록을 집필했으며, 전 무장 친위대원의 명예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 1급 자유십자 성장 수훈자 - 빌헬름 카나리스
빌헬름 카나리스는 독일 해군 제독이자 아프베어 수장으로, 나치 정권에 가담했다가 반나치 운동에 참여하여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인물이며, 그의 행적은 논쟁의 대상이다.
한스 예쇼네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899년 4월 9일 |
출생지 | 호헨잘차, 포젠 |
사망일 | 1943년 8월 18일 (44세) |
사망지 | 골다프, 동프로이센 |
별칭 | 없음 |
군 복무 | |
소속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복무 기간 | 1914년 – 1943년 |
소속 군대 | 공군 |
계급 | [[파일:Luftwaffe epaulette Generaloberst.svg|40px]] 상급대장 |
지휘 및 근무 | |
지휘 | 제1교도비행단 이라크 항공지도부 |
근무 | 공군최고사령부 |
주요 참전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실레시아 봉기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네덜란드 전투 벨기에 전투 프랑스 전투 영국 본토 항공전 발칸 전역 동부 전선 제국 방위 |
훈장 | |
훈장 | 기사 철십자 훈장 |
기타 정보 |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전상장 1914년/1918년 세계 대전 명예 십자장 국방군 근속상 2급 철십자 약장 1급 철십자 약장 자유 십자장 용감공 미하이 훈장 (2급) |
가족 관계 | |
가족 | 게르트 예쇼네크 (형제) |
경력 | |
경력 | 없음 |
기타 | |
관련 인물 | 헤르만 괴링 |
2. 생애
한스 예쇼네크는 1918년 독일의 패배와 독일 제국의 붕괴, 그리고 휴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 국방군에 입대했다. 그는 ''독일 국방군'' 제6 기병 연대의 일원으로서 실레지아 봉기에 참전했다.[1] 자유군단 항공 부대인 ''Grenzschutz Fliegerabteilungen''(GFA)에 합류하여 같은 분쟁에서 비행했다.[2]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쿠르트 슈튜던트 휘하에서 육군 병기부의 ''무기 장비 검사''에서 일했으며 참모 본부에서 공부했다. 당시 독일 장비 부족으로 여러 다른 국가를 방문하여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항공기를 조종할 수 있었다.[1] 1928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1929년 4월에는 헬무트 펠미의 지휘 하에 ''국방군부''(Reichswehrministerium)의 항공전 부서인 검사국 1 (L)에서 일했다. 이 부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금지된 군용기 건조를 비밀리에 담당했다.[1][2]
1937년 4월 20일, 오버스트로이테난트(중령)로 진급하여 항공부(Reichsluftfahrtministerium)에 들어갔으며, 참모본부의 제1과장으로 임명되었다. 공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Luftwaffe)의 참모장이었던 발터 베버의 제자였으며, 베버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1936년 동원령 시 공군 작전참모로 지명했다. 1936년 6월 베버는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다. 베버의 사망 이후 재조직에서 예쇼네크는 1938년 2월 1일 공군 작전참모장이 되었고, 11월에 오버스트(대령)로 진급했다.[1]
1939년 2월 1일, 한스 위르겐 슈툼프를 대신하여 공군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s der Luftwaffe'')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8월 14일, 국방군 소장(준장)으로 진급했다.[1]
예쇼네크는 특히 루프트바페(독일 공군)가 스페인 내전에서 지상 작전에 미친 영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지상 지원이 주로 항공 차단을 통해 달성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지만, 근접 항공 지원 임무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1939년 지상 지원 전문가인 리히트호펜의 지휘 아래 "근접 전투 사단"('Nahkampfdivision')을 편성했다.
1939년 4월 25일 헤르만 괴링에게 계획된 침공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제1 항공군과 제4 항공군에 2,152대의 전투기가 배치되었다. 1939년 9월 1일 아침,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에 전화하여 소련이 민스크 라디오 방송국을 식별할 수 있도록 유지해 독일 폭격기 조종사들이 항해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이 작전은 브주라 전투로 알려진 폴란드의 반격 전까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OKL은 바르샤바 폭격의 암호명인 작전명 바서칸테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9월 13일 알렉산더 뢰어에게 전화하여 소이탄을 북부 바르샤바에 공격하라고 요구했다. 단치히 기차역의 북쪽에 있는 게토가 작전에 포함되었을 수 있다. OKL은 9월 22일 리히트호펜이 "파괴와 테러 습격으로의 실험"을 요청했지만, 바르샤바 포위전에서 이미 도시의 10%를 파괴하고 40%를 손상시키고 최대 40,000명을 죽였기 때문에 거부했다. 예쇼네크는 바르샤바의 항복을 서두르기 위해 폭격하는 것을 "그 이상은 안 된다"며 거부했다.
폴란드가 패배한 후 1939년 10월 27일 철십자 훈장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40년 5월 10일 ''겔브''가 시작되어 6월 3일 네덜란드 침공 전투와 벨기에 전투에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정복하고 영국군을 덩케르크 전투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났다. 작전의 두 번째 단계인 팔 로트는 3주 만에 완료되었다. 급강하 폭격기는 프랑스 공방전과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한동안 예쇼네크의 전쟁관을 입증했다.
5월 24일 OKW는 독일군에게 덩케르크로의 진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예쇼네크는 루프트바페가 포위를 파괴하고 덩케르크 철수를 막을 수 있다는 괴링의 자랑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독일 공세의 실패로 영국군은 본토에서 대부분의 정규군을 철수할 수 있었다.
나머지 작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1940년 6월 25일 항복했다. 예쇼네크는 루프트바페의 성공을 함께했다. 1940년 7월 19일 40세의 나이로 ''비행장군''으로 진급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예쇼네크는 1899년 4월 9일 프로이센 왕국의 이노브로츠와프(호헨잘차)에서 교사이자 철학 박사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카를 예쇼네크[1]와 그의 아내 클라라 엠마 카롤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부터 1908년 4월까지 비드고슈치의 시민학교를 다녔고, 그 후 1년간 현지의 김나지움을 다녔다. 1909년 코샬린의 군사 사관 후보생에 입학했고, 1913년 4월 리히터펠데에 있는 프로이센 육군 사관학교로 전학했다.
1914년 15세의 나이로 무계급 소위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몇 달 동안 제50 하부 실레지아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1] 1915년 16세에 소위로 임관되었고, 17세에 Luftstreitkräfte(제국 공군)로 전출되었다. 제40 전투비행대에 합류하여 서부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적기 두 대를 격추하고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받았다.
2. 2. 전간기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권력을 잡은 후,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독일 국방군을 재편하여 1935년 국방군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1933년 5월 1일 항공부(Reichsluftfahrtministerium)가 설립되자, 예쇼네크는 34세의 나이로 국무장관 에르하르트 밀히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이와 동시에 예쇼네크는 ''Kampfgeschwader'' 152 (폭격기 부대 152)의 지휘관으로서 야전 지휘를 맡았다. 1934년 3월 KG 152의 지휘를 맡으면서 하우프트만(대위)으로 진급했고, 1935년 4월 1일 소령으로 승진했다. 1936년 10월 1일, 예쇼네크는 그라이프스발트의 항공 행정 구역 I의 훈련 그룹 III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곳에 주둔하면서 슈넬봄버(급강하 폭격기) 개념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3]
예쇼네크는 급강하 폭격기의 강력한 옹호자였으며, 에른스트 우데트와 함께 모든 기존 폭격기에 급강하 폭격 기능을 추가하려는 아이디어를 지지했다. 이는 유망한 수평 폭격기 설계의 개발 및 생산을 지연시키고 방해하여 독일의 전쟁 노력을 훼손시켰다.
예쇼네크는 부하들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하급 장교들에게 빈정거리고 거친 경향이 있었다. 그는 사교 행사에서 어색했고 소수의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선호했다. 공군 대장 루돌프 마이스터는 그의 참모들이 대부분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2. 3. 공군 참모본부
1939년 참모 훈련에서 예쇼네크는 적대 행위가 선포되면 루프트바페(독일 공군)는 모든 전력을 적 공군 파괴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육군을 위한 근접 항공 지원 작전이 가장 중요했다.[3] 그의 발언은 그의 스승 발터 베버와 헬무트 빌베르크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저술하고 예쇼네크가 기고했던 ''항공전 수행''(Conduct of the Air War)에 담긴 항공 교리를 부정한 것이었다.[4]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교리에 따라 전쟁 시작 시점에 공중 우위를 확보해야 했다.[5] 예쇼네크는 전쟁 발발 직전에 이 점을 철회하면서 육상 지원 작전은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며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공중 우위 임무를 대체해야 한다고 말했다.[6] 루프트바페가 백색 작전을 준비하면서 독일 공군은 첫 몇 시간 안에 적 공군을 파괴할 준비를 했다. 한 분석에서는 예쇼네크가 이 시기에 우유부단하고 모순된 지시를 내렸다고 썼다.
1939년 9월 1일, 독일 국방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며 폴란드를 침공했다. 전쟁 당시 OKL(루프트바페 최고 사령부)은 1937년과 1938년에 차세대 항공기로 전환하면서 직면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독일의 대공 방어 부대, 공수 부대(''강하엽병'') 및 근접 지원 능력은 1939년에 다른 유럽 강대국들이 따라올 수 없는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다.
그 지도력의 특성에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헤르만 괴링, 에른스트 우데트, 에르하르트 밀히, 예쇼네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었다. 생산의 이익을 위해 그들은 개발을 몇몇 항공기, 즉 He 177, Ju 88, 메서슈미트 Me 210에 한정했다. 이 결정은 다른 유형의 항공기에 대한 연구 개발을 중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분야에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고 이 실수는 1942년까지 인식되지 못했다. 그때는 너무 늦었다. 루프트바페는 1943-44년의 전투를 1939년에 가지고 있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설계를 가지고 싸웠다.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예쇼네크는 독일 공군의 작전을 지휘했다.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 공군의 성공에 기여했으며, 1940년 7월 19일 비행장군으로 진급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가능해졌는데, 이 조약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분할했으며, 소련은 히틀러에게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했다. 예쇼네크는 1939년 4월 25일 괴링에게 계획된 침공에 대해 브리핑했고, 제1 항공군과 제4 항공군에 2,152대의 전투기가 배치되었다.
1939년 9월 1일 아침, 예쇼네크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에 전화하여 소련이 민스크 라디오 방송국을 식별할 수 있도록 유지해 독일 폭격기 조종사들이 항해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폴란드 공군과 폴란드 육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9월 14일까지 폴란드 공군은 산발적인 저항만 했다. 이 작전은 브주라 전투로 알려진 폴란드의 반격 전까지 성공적이었으며, OKL은 바르샤바 폭격의 암호명인 작전명 바서칸테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9월 13일 예쇼네크는 알렉산더 뢰어에게 전화하여 소이탄을 북부 바르샤바에 공격하라고 요구했다. 단치히 기차역 북쪽에 있는 게토가 작전에 포함되었을 수 있다. KG 4의 작은 부대(단 2개의 ''staffeln''(비행대))는 마틴 피비히의 지휘하에 소이탄과 고성능 폭탄을 50:50으로 투하했다. ''Fliegerdivision'' 1 부대는 7,000개의 소이탄을 투하했고, 피비히는 예쇼네크에게 게토가 불타고 있다고 보고했다. OKL은 9월 22일 리히트호펜이 "파괴와 테러 습격으로의 실험"을 요청했지만, 바르샤바 포위전에서 이미 도시의 10%를 파괴하고 40%를 손상시키고 최대 40,000명 (비전투원 6,000명 포함 가능성 있음)을 죽였기 때문에 거부했다. 예쇼네크는 바르샤바의 항복을 서두르기 위해 폭격하는 것을 "그 이상은 안 된다"며 거부했다.
폴란드가 패배한 후, 예쇼네크는 1939년 10월 27일 철십자 훈장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패배 후 며칠 안에 예쇼네크는 1939년 11월 12일에 시작될 예정인 팔 겔브 (Fall Gelb), 벨기에와 프랑스 침공 계획을 돕도록 지시받았다. OKW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당시 군대의 준비 부족으로 항의했다. 괴링과 예쇼네크는 네덜란드를 침공에서 제외하는 것에 반대했고, 히틀러는 흔들리지 않았다. 예쇼네크는 OKW에 접근하여 영국이 네덜란드 비행장을 사용하여 루르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11월 14일 OKW는 이 점을 인정했다. 예쇼네크는 네덜란드를 점령하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고, 1940년 2월 6일 알프레트 요들에게 접근하여 네덜란드가 침공될 것이라는 보장을 위해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1939년 11월 20일 히틀러는 예쇼네크의 제안에 동의했다.
참모장은 공군이 어떻게 ''겔브''를 가장 잘 지원할 수 있을지 논의를 시작했다. 요들과의 논의에서 예쇼네크는 서부 공격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공군이 북부 프랑스에서 적을 고정시키는 것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 계획은 처음에 받아들여졌으나, 날씨 때문에 겨울 내내 공격이 연기되었다. 1940년 1월 11일 예쇼네크는 저지대 국가 침공을 지원하기 위한 공격이 3일 동안 시작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군은 1월 17일에 육상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연합군 공군 기지에 대한 예비 공격을 수행할 것이며, 같은 날 메헬렌 사건이 발생했다. 계획은 폐기되었고 2월에 만슈타인 계획이 발동되었으며, 공격은 5월까지 연기되었다.
그 사이 괴링은 영국 항구와 조선소에 대한 공격 허가를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팔 겔브''가 시작되어 저지대 국가에 기지가 확보될 때까지 공군의 전환을 허용하지 않았다. OKW 지침 제9호는 영국 항구와 하구에 대한 공중 및 해상 기뢰 부설을 허용했다. 이를 위해 요아힘 쾰러 휘하에 ''Fliegerdivision 9''이 편성되었으나, 기뢰와 항공기가 심각하게 부족했다. 예쇼네크는 돕지 않았고 하인켈 He 111, 도르니에 Do 17, 개발 중이던 도르니에 Do 217을 해군 작전에 투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예쇼네크의 해상 전쟁에 대한 협조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제독'' 에리히 레더, ''해군'' 사령관으로부터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베저übung 작전) 계획을 돕도록 요청받았다. 침공 지침은 1940년 3월 1일에 발표되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OKL의 장교 110명이 작전에 대해 자신보다 먼저 통보받았다고 불평했고, 루프트바페 부대가 육군에 종속된 것에 격분했다. 요들과 예쇼네크는 육군의 전투 부대에 대한 요청이 OKL을 통해 걸러지고 OKL이 명령을 내리는 타협안을 마련해야 했다. 루프트바페는 7주간의 노르웨이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0년 5월 10일 ''겔브''가 시작되어 6월 3일 네덜란드 침공 전투와 벨기에 전투에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정복하고 영국군을 덩케르크 전투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났다. 작전의 두 번째 단계인 팔 로트는 3주 만에 완료되었다. 급강하 폭격기는 프랑스 공방전과 노르웨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한동안 예쇼네크의 전쟁관을 입증했다.
예쇼네크와 괴링의 작전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아누 전투의 와중에, 리히트호펜의 ''Fliegerkorps'' VIII은 아누 전차전이 시작된 다음 날 독일 세단 돌파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리히트호펜은 예쇼네크의 의도를 당일에 알게 되었고, 이는 유능한 참모 작업과 참모 장교의 부족을 보여주었다. 돌파가 위험에 처하자 타협이 이루어졌고, 리히트호펜은 물류 문제로 인해 세단에 일부 병력만 보내야 했다.
5월 24일 OKW는 독일군에게 덩케르크로의 진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예쇼네크는 루프트바페가 포위를 파괴하고 덩케르크 철수를 막을 수 있다는 괴링의 자랑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독일 공세의 실패로 영국군은 본토에서 대부분의 정규군을 철수할 수 있었다. 나머지 작전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프랑스는 1940년 6월 25일 항복했다. 예쇼네크는 루프트바페의 성공을 함께했고, 1940년 7월 19일 40세의 나이로 ''비행장군''으로 진급했다.
1940년 말, 예쇼네크와 OKL은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과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 실패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마를 방문한 예쇼네크는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이탈리아 공군)가 절실한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쇼네크는 다른 인종 차별적인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가 독일 항공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게 많은 양의 장비를 제공하는 것을 자제했다. 편견과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지배적인 견해로 인해 OKL은 이탈리아를 돕는 것이 노력 낭비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견해는 결국 추축국이 북아프리카를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예쇼네크는 전문 해상 차단 부대인 ''플리거코어'' X를 시칠리아로 투입하는 것에 동의했다. 1940년 12월 14일, 14,389명의 병력, 226대의 전투기, 31대의 수송기가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어 수에즈를 기뢰로 봉쇄하고 지중해 항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군은 즉시 몰타 폭격에 참여했다. 예쇼네크와 히틀러는 이 섬이 나타내는 즉각적인 위험을 인지하고 무솔리니에게 섬을 "제압"하라고 권유했다. OKL이 전쟁 전에 항공 어뢰를 개발하지 못한 것은 지중해 작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의 명에 따라 예쇼네크는 서둘러 그러한 부대를 창설할 준비를 했지만, 1940년 10월까지 예쇼네크는 항공 어뢰 개발을 무시했다.
예쇼네크는 발칸 전역—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침공에 관여했다. 크레타 전투에서 공수 부대 사용을 지지했으며, 쿠르트 슈투덴트가 크레타를 키프로스와 수에즈 운하 지역 침공을 위한 발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열망을 지지했다. 예쇼네크는 크레타 침공을 감독하기 위해 아테네로 날아갔다. 전투 중 그는 ''비스마르크''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울트라에 의해 가로채진 에니그마 기계 메시지를 보내 탑승한 참모 아들의 행방을 문의했다.
크레타에서의 승리는 추축국이 그것을 이용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특히 이라크의 반란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외교관 프리츠 그로바의 조언에 따라 반군에 대한 독일 공군 지원을 명령했다. 예쇼네크는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는 ''야크트플리거퓌러'' 3 (''Jafü'' 3—전투기 지휘관)의 지휘관 발터 융크에게 이라크로 가서 ''플리거퓌러 이라크'' (비행 사령부 이라크)를 구성하라고 명령했다. 이 작전은 재앙으로 끝났고, 1941년 6월 1일에 19대의 항공기를 잃고 종료되었다. 그로바에 의해 오도된 예쇼네크는 융크를 군사 법정에 회부했지만, 더 나이가 많은 장교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부적절함은 예쇼네크가 케셀링을 몰타 포위와 북아프리카 전역을 지원하기 위해 지중해로 파견할 것을 제안하게 만들었다. 이 제안의 결과로 괴링은 케셀링과 그의 전체 항공대인 ''루프트플로테'' 2를 그 전장으로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1941년 10월 동부 전선에서 케셀링의 공군력을 재배치한 것은 소련에서 루프트바페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시켰다.
예쇼네크의 형제들은 ''크리그스마리네''(해군)에서 복무했고, 그는 대서양 해전에서 해군이 적절한 공군 지원을 받기를 원하는 것에 공감했다. 카를 되니츠는 유보트의 기함 장교였으며, 1941년 초에 한 부대를 장악했지만, 곧 괴링에 의해 되찾아졌다. 타협이 이루어져 루프트바페의 통제하에 ''플리거퓌러 아틀란틱''(대서양 비행 사령관)이라는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대선 작전은 전쟁 기간 동안 필요한 관심을 받지 못했고, 괴링의 완고함과 다른 전선들이 독일의 공군력을 끌어들였다. 1942년 9월 5일, 부대를 지휘하는 울리히 케슬러는 예쇼네크에게 ''플리거퓌러 아틀란틱''은 "산송장"과 같으며 해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케슬러는 영국 폭격을 위해 폭격 부대가 철수하고 "해운 공간"을 차단하는 것이 영국을 격파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탄했다. 1943년 2월, 전투가 절정에 이르자 되니츠는 괴링에게 장거리 항공기를 요구했지만 적절한 항공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히틀러가 개입하여 6대의 블롬 운트 포스 BV 222를 대서양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지만, 예쇼네크는 머뭇거렸고, 그들은 여름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검은 5월에 유보트가 패배하기 전에 4대의 융커스 Ju 290와 10대의 개조된 Ju 88H 항공기만 사용할 수 있었다.
주목할 만한 성공으로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및 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은 대서양 습격 작전을 완료했다. 브레스트, 프랑스 항구에 갇힌 그들은 RAF 폭격기 사령부의 공습을 받았다. 1942년 1월 12일 동 프로이센(볼프스 샨체)에서 히틀러는 잉글리시 채널을 통한 위험한 철수를 명령했다. 루프트바페는 공중 엄호 및 기만적인 공습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예쇼네크는 약 250대의 항공기를 약속했지만 채널 지역에 전투기를 증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운터네멘 도너케일''(썬더볼트 작전)은 공중 엄호 계획의 암호명이 되었다. 작전의 존재는 너무나 비밀스러워서 예쇼네크와 갈란트는 히틀러 본부를 떠나면서 기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도너케일''은 루프트바페의 성공이었고, 단 22대의 항공기만 잃었다.
1943년부터 루프트바페는 해상 차단의 영역으로 지중해 전역에 집중했다. ''소장'' 요하네스 핑크는 1942년 11월 마르세유에 기반을 둔 ''플리거사단'' 2를 지휘하도록 임명되었다. 핑크는 서부 지중해에서 공격적인 작전을 옹호하고 그의 두 부대 KG 26 (어뢰) 및 KG 100 (미사일)로 모든 동쪽으로 향하는 호송대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KG 77의 일부는 이 시기에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 어뢰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핑크는 자신의 방식을 거부하면 예쇼네크에게 사임을 제안했다. 1943년 1월부터 8월까지 26척의 선박만 침몰했고, 사단은 1943년 5월 튀니지의 함락을 막지 못했다. 예쇼네크의 후임 군터 코르텐은 대선 부대의 전력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1943년 말까지 점점 더 소외되었다.
1943년 중반, 참모진은 감소하는 독일 공군력을 육군 지원에 사용하는 것이 전략적 결과를 낳을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타델 작전 이전에 예쇼네크와 OKL은 친숙한 작전 수준의 임무와 함께 소련의 무기 산업에 대한 전략적 폭격 캠페인을 탐색하고 실행했다. 철도 수송의 차단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지만, 공세 전에 예쇼네크는 "루프트바페의 전력이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한 역사가가 "루프트바페의 지도부가 목표와 수단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또 다른 사례를 제공한다."는 루프트바페 지도부가 가지고 있는 교리와 능력 사이의 격차를 드러냈다. 예쇼네크의 인정은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의 참모장인 프리츠 클레스와의 대화와 대조를 이루었는데, 이는 최전선 뒤의 도시에서 소련의 사기를 꺾기 위한 "테러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20~30대의 항공기를 사용하는 노력을 논의했다.
프리츠 클레스와 예쇼네크는 장거리 폭격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Generalkommando*(특별 참모)를 만들었다. 전략 폭격 부대는 모항공대가 아닌 OKL의 지휘를 받는 독립 부대였다. 이 사령부는 최고 동부 공군 사령관으로 명명될 예정이었고, 예쇼네크의 후임자인 코르텐에 의해 *Fliegerkorps* IV로 지정되었다. 예쇼네크는 작전을 위해 공군을 조직하고 "러시아 전쟁 산업 전체를 연구하고 평가하며 모든 접근 가능한 연구를 활용하는" "목표 연구"를 위한 별도의 참모를 만드는 것을 고려했다.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의 제6항공대는 *Luftflotte* 4의 지원을 받아, KG 55, KG 3, KG 4, KG 27, KG 51, KG 53 및 KG 100—7개의 폭격기 부대를 할당받아 공세를 수행했다. 지상 지원의 선구자인 리히트호펜조차도 작전에 동의했다. 루프트바페가 이런 식으로 육군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느꼈다. 쿠이비셰프주의 공장 번호 24는 소련의 모든 항공기 엔진의 1/4과 모든 일리우신 Il-2 엔진의 85%를 생산했고, 우파의 공장 번호 26은 전체 생산량의 31%와 모든 전투기 엔진 생산량의 60%를 생산했으며, 카잔의 공장 번호 16은 전체의 12%와 모든 중형 폭격기 항공기 엔진의 60%를 생산했으며, 모스크바의 공장 번호 45는 전체의 5%이지만 IL-2 엔진의 15%를 생산했으며, 마지막으로 고르키의 공장 번호 466은 전체의 5%와 모든 전투기 엔진 생산량의 1/10을 생산했다. 5개의 볼 베어링 공장 중 3개가 사정권 안에 있었고, 야로슬라블의 합성 고무 공장(생산량의 23%)과 유조 공장과 제철소가 모두 고려되었다. 생존한 정보 지도는 사라토프의 원유 및 볼 베어링 공장도 고려되었음을 보여준다. 최종 단계에서 탱크와 장갑차의 생산이 공격의 무게를 받았다. 고르키의 시설은 T-34의 15%를 생산하고 우랄 산맥 서쪽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기 때문에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오류로 인해 계획자들은 덜 위협적인 T-60과 T-70을 생산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자동차 공장인 국립 자동차 공장 제1호 몰로토프를 목표로 삼았다. 크라스노예 소르모보 공장 제112호는 탄약을 생산하기 때문에 목표가 되었다.
공세는 1943년 6월 4일 고르키를 상대로 시작되었다. 420대의 폭격기가 파견되었고 636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682대의 출격으로 구성된 7번의 주요 공습이 고르키를 상대로 수행되었고 1,105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T-34 부품을 생산했던 몰로토프 자동차 공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크라스노예 공장은 손상되지 않았다. 6월 9일과 20일 야로슬라블 고무 공장 SK 1은 324톤의 폭탄을 맞았다. 독일 정보부는 고무 생산 손실에 대한 자국 산업의 취약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목표를 선택했고, 공장은 심하게 손상되었다. 사라토프의 유조 목표는 6월 12일부터 15일까지 181톤의 폭탄을 받았으며—SU 66 75와 SU 65 76은 병목 현상이었는데, 소련의 광대한 유류 매장량에도 불구하고, 원유를 고옥탄 항공 연료로 정제할 수 있는 공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세 중간에 알베르트 슈페어 무기 장관과 다른 기술 관료들이 RAF 폭격 사령부의 독일 공세 경험을 바탕으로 개입하여 목표 선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슈페어는 1943년 6월 23일 "항공 공격을 위한 경제적 목표에 관한 실무 위원회"를 구성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연락관인 발터 헤벨조차 6월 12일에 예쇼네크에게 소련 배후지의 목표에 대한 권고 사항을 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헤벨의 지원은 1943년 가을, 예쇼네크의 후임자인 코르텐과 슈페어에 따라 발전소에 대한 공세를 히틀러가 승인하도록 설득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폭격이 소련 군사력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은 성공하더라도 거의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쇼네크가 탱크 공장을 폭격하라는 육군의 권고와 위원회의 권고에 기꺼이 동의한 것은, 아마도 소련 무기 산업의 위치와 잠재력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한 전쟁 전의 정보 실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정보는 바르바로사가 성공했다면 불필요했을 것이지만, 공세의 실패로 인해 "독일군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예쇼네크는 쿠르스크 전투가 대승리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 독일 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쿠르스크 공세를 지원했다. 루프트바페는 붉은 공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쿠투조프 작전에 대항하고, 제9군과 제2기갑군의 포위를 막는 데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의 패배에 이어 쿠르스크 공세의 최종적인 실패는 히틀러조차 공군 참모총장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괴링은 이미 히틀러에게 예쇼네크를 공군 참모총장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주저했다.
3. 1. 영국 본토 항공전
1940년 6월 22일 휴전 이후, 최고사령부(OKW)는 전쟁이 거의 승리한 것과 같다고 믿었다. 헤르만 괴링과 공군 최고 사령부(OKL)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0년 6월 30일 괴링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제공권 작전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OKL에 내렸다. 이 지시는 "적 공군이 파괴되지 않는 한, 주야간, 공중, 지상에서 가능한 모든 유리한 기회를 이용하여 다른 임무에 관계없이 적 항공 부대를 공격하는 것이 공중전 수행의 기본 원칙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괴링은 공중전에서 승리하여 처칠 정부가 독일에게 굴복하거나 평화 협정을 맺도록 설득함으로써 영국의 침략을 피하고자 했다.영국은 히틀러의 평화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히틀러는 영국에 대한 수륙 양용 상륙 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비상 계획을 준비했다. 1940년 7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바다사자 작전 회의에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대표는 참석하지 않았고, 괴링은 히틀러의 육해공군 협력을 위한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그의 부관인 한스 예쇼네크는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7월 18일 히틀러와 함께 영국에 대한 일반적인 군사 전략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히틀러는 스탈린의 비우호적인 태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생각하며, 바다사자 작전이 포기될 경우 소련 침공이 차선책이라고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같은 날 괴링과 그의 ''Luftflotten''(항공대) 사령관들은 카린할에서 만났지만, 곧 시작될 공중 공세, 즉 독수리 공격 작전에 관한 주변적인 문제만을 논의했다.
육군과 해군이 수륙 양용 공격 계획을 세우는 동안, OKL은 공중 지배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목표를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부 논쟁을 벌였다. 7월 11일 예쇼네크는 영국 공군과의 주요 전투에 앞서 해안 수송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두 ''Luftflotten'' 사령관인 슈페를레와 케셀링은 OKL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다른 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예쇼네크의 명령을 선점했다. 영국 해협에서 해상 수송에 대한 공중 작전이 시작되었고,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이를 해협 전투 단계라고 불렀다.
슈페를레와 케셀링은 정보의 오판이나 오도에 의해 전투 사령부에 이용 가능한 전투기 수를 과소평가했다. 실제 숫자가 750대였을 때 그들은 RAF 전체를 450대로 추정했다. 영국 생산, 방어 시스템 및 항공기 성능에 대한 만성적인 정보 실패는 전투 전반에 걸쳐 독일 공군 작전을 방해했다. 예쇼네크의 정보 참모인 요제프 슈미트는 과도한 자신감을 조장하면서 선임 독일 공군 사령관들에게 부정확하고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진행되면서 예쇼네크, 괴링, 케셀링은 독일 조종사들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승전 보고와 슈미트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RAF 전투 사령부가 붕괴 직전에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 정보는 괴링이 9월 7일 공세를 런던으로 전환하여 전투 사령부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전투에 투입하도록 장려하는 요인이 되었다. 슈페를레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슈페를레는 영국 전투기 세력을 1,000대로 추정했는데, 이는 훨씬 더 정확한 평가였다. 1940년 9월 14일, 히틀러는 예쇼네크와의 회의에서 지도력에 대해 비판하고 전투 보고를 의심했다. 예쇼네크는 공중전에서 승리했다고 간주하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런던을 상대로 폭격 캠페인을 펼치라고 히틀러에게 압박했다.
히틀러는 영국 수도의 군사 및 공공 시설을 계속 공격하여 침략의 위협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쇼네크는 군사 및 민간 산업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전자를 공격하여 사기를 떨어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주거 지역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히틀러는 거절했다. 그는 런던의 군사 목표만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예쇼네크는 독수리 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런던을 목표로 간주했으며, 다른 고위 장교들도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
예쇼네크의 전략은 괴링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괴링은 예쇼네크와의 대화에서 그의 참모에게 영국이 정말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예쇼네크는 독일 국민은 같은 상황에서 항복하지 않을 것이지만 영국은 더 약하다고 대답했다. 괴링은 영국의 결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9월 15일 런던에 대한 대규모 주간 공습이 RAF에 의해 격퇴되었다. 야간 블리츠는 주간 전투가 약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영국에 대한 공중전을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분석 결과, 런던을 공격하고 비행장에 대한 공세를 포기한 독일의 결정이 전투 사령부를 구했다는 신화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영국의 방어는 대체로 손상되지 않았다.
코번트리 공격 몇 시간 전, 괴링은 휴가를 떠나고 밀히를 루프트바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예쇼네크는 그의 적 밑에서 복무하기를 꺼려하여 괴링의 예를 따랐다. 둘 다 1941년 1월 말까지 복귀하지 않았다. 블리츠는 영국의 전쟁 노력을 실질적으로 손상시키지 못했다. 폭격은 도시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플리머스, 사우샘프턴, 코번트리, 런던, 카디프, 브리스톨, 버밍엄, 벨파스트, 셰필드, 헐 및 맨체스터가 심하게 폭격되어 생산에 다소 영향을 미쳤다. 리버풀 블리츠는 부두와 해운에 매우 큰 피해를 입혔다. 일반적으로 OKL은 야간 작전 동안 적절한 전략을 개발하지 못했다. 루프트바페의 최고위층에서 논의된 내용은 전략보다는 공중 전술에 관한 것이었고, 작전은 점점 더 목적을 잃어갔다. 폭격이 1941년 6월에 끝날 무렵 약 40,000명이 사망하고 46,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1941년에는 작전의 기술적인 측면이 더욱 어려워졌다. 1941년 2월부터 시작된 영국의 대책은 폭격의 정확성에 영향을 미쳤다. 예쇼네크는 중폭격기 없이 효과적인 전략 폭격을 수행하기 위한 해결책(그는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으로, 훈련된 소수의 정예 공군 승무원을 중요한 산업 목표에 대한 정밀 타격에 투입했다. 이러한 작전은 성공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대체 불가능한 승무원을 위험에 빠뜨리는 단순한 핀치였다. 독일의 항공기 손실은 컸지만, 훈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공군 승무원의 손실은 루프트바페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 전날, 독일 폭격 부대는 1940년 5월 10일보다 200대 적은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3. 2. 독소 전쟁
1941년 6월 22일, 독일 국방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했다. 예쇼네크는 침공 직전 "드디어 제대로 된 전쟁이 시작됐군!"이라고 말했다. 영국 본토 항공전과 프랑스 전투에서 발생한 소모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전과 비교해 양적으로는 동일했지만, 승무원 경험과 훈련 수준이 낮은 공군으로 세계 최대 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였다. 1941년 2월 27일, 예쇼네크는 프란츠 할더에게 항공기와 영공 비율이 낮아 필수적인 지역에만 공중 지원을 보장할 수 있다고 알렸다.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는 육군 야전 사령관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적의 공중 공격에 노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초반에는 성공적이었다. 붉은 공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로스토프나도누,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941년 말,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했음이 명백해졌다.[2] 독일 공군의 전투력은 위태로웠다. 폭격 능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941년 12월, 폭격 부대는 승인된 전력의 47.1%만을 보유했으며, 그중 51%만이 가동되었다. 1,950대의 폭격기가 승인되었지만, 실제로는 468대(승인된 항공기의 24%)만 가동되었다. 전체 전력은 6월 3,451대에서 1941년 12월 2,749대로 감소했다. 에른스트 우데트, 헤르만 괴링, 예쇼네크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다.[3]
에르하르트 밀히의 1942년 생산 계획("괴링 계획")은 소련의 패배를 전제로 했다. 모스크바 전투 실패는 항공기 생산 증가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히틀러는 동부 전선에서 육군 손실과 작전이 계속되면서 산업계에 이 계획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밀히는 예쇼네크에게 이것이 항공기 산업의 생산 능력 감소를 의미하며, 노동력과 원자재 확보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알렸다.[4]
밀히는 우데트의 자살 이후 그를 대체하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공군 최고 사령부(OKL)에는 계획 규모에 대한 상당한 회의론이 있었다. 1942년 3월, 예쇼네크는 밀히의 전투기 생산 증가 요구에 반대하며 "360대 이상의 전투기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5] 1942년 6월, 예쇼네크는 견해를 수정하여 1943/44년 겨울까지 매달 최소 900대의 전투기를 생산해야 한다고 동의했다. 한 역사가는 이를 두고 "1940년과 1941년의 소모율을 고려할 때 놀라운 발언"이라고 평가했다.[5] 예쇼네크는 독일 공군이 공격 무기라고 주장했고, 아돌프 갈란트 제 전투기 사령관에게 공감했지만, *전투기 부대*를 희생시키면서 공격 부대를 계속 건설하고 지상 공격 조종사를 개발했다. 그는 공중 방어가 아닌 소련의 패배가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의 전제 조건이라는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와 괴링은 전투기 생산보다 폭격기 생산을 지지했다.[6]
1942년 동안 동부 전선에서 독일 공군의 규모는 감소했다. 11월 중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여러 추축군이 포위되면서 재앙으로 향했다. 괴링은 잃어버린 위신을 되찾기 위해 히틀러에게 공중으로 군대를 공급할 수 있다고 확신시켰다. 예쇼네크와 참모진은 거의 언급 없이 공중 수송에 동의했다. 11월 24일,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즉각적인 돌파를 촉구하는 대화를 기록했다. 예쇼네크는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육군 최고 사령부(OKH)가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라고 히틀러를 설득하려는 노력에 공군 참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했고, 포위된 군대를 재보급하는 불가능한 임무를 공군에 맡겼다.
히틀러와 예쇼네크는 며칠 전 베르크호프에서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예쇼네크는 히틀러에게 적절한 항공기와 비행장으로 데미얀스크 포위전을 반복할 수 있다고 확신시켰다. 히틀러는 9월에 독일군이 강제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후 스탈린그라드에 군대를 유지하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게 도시로 돌파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선호했다. 예쇼네크는 공중 수송의 기술적인 부분을 계획하면서 자신의 실수를 재빨리 깨닫고, 괴링에게 필요한 톤수를 전달할 수 없음을 히틀러에게 경고하라고 촉구했지만, 괴링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고 거절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약속했고 예쇼네크에게는 침묵을 지시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안심시키고, 세부 사항에 의문이 있으면 밀히에게 문의하라고 지시했다. 1946년, 밀히는 이 대화를 알고 자신의 일기에 "기만과 무능함이 한 명의 제국 원수를 만든다!"라고 썼다. 참모진 중 누구도 공중 수송 승무원이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포위 기간 동안 최전선으로 간 고위 장교는 리히트호펜과 밀히뿐이었다. 밀히는 다른 독일 공군 장군들에게 "그저 민간인"으로 평가받았다. 1942년, 예쇼네크는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3. 3. 몰락과 죽음
1943년 8월 함부르크 대공습으로 도시가 궤멸되자, 괴링과 예쇼네크 등 공군 수뇌부의 해임이 논의되기 시작했다.[1]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공군의 활약에 불만을 품고 있던 히틀러는 괴링을 무시하고, 미국 육군 항공대에 주간 공습까지 허용하게 된 공군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를 예쇼네크에게 표출했다.[1] 괴링은 자신의 보신을 위해 예쇼네크를 감싸지 않았다.[1]1943년 8월 17일 밤부터 18일 새벽에 걸쳐 페네뮌데가 공습을 받자,[1] 예쇼네크는 라스텐부르크에 있는 대본영에서 자살했다.[1] 괴링은 예쇼네크의 죽음이 이 공습과 관계없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망 진단서의 날짜를 19일로 조작했고, 사인도 위출혈로 조작했다.[1] 이 때문에 예쇼네크의 사망일은 여러 서적에서 8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다.[1]
4. 평가
한스 예쇼네크는 유능한 참모 장교였으나,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의 지나친 간섭과 자신의 한계로 인해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 그는 급강하폭격기를 선호하고 중폭격기 개발을 소홀히 했으며, 장기전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 또한 히틀러의 확고한 추종자였으며, 전쟁 장기화 가능성을 간과하고 히틀러의 단기전 전략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1] 그의 우울증과 정신적 불안정은 군사적 상황 악화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
예쇼네크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RAF 전투 사령부가 붕괴 직전에 있다고 오판했다.[1] 이는 요제프 슈미트의 부정확한 정보 때문이었는데, 이 정보는 괴링이 공세를 런던으로 전환하는 요인이 되었다.[1] 9월 15일 런던에 대한 대규모 주간 공습이 RAF에 의해 격퇴되었고, 야간 블리츠는 주간 전투가 약화되면서 영국에 대한 공중전을 계속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 전후 분석 결과, 런던을 공격하고 비행장에 대한 공세를 포기한 독일의 결정이 전투 사령부를 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1]
1941년, 예쇼네크는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과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 실패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1] 그는 이탈리아가 독일 항공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장비 제공을 자제했다.[1] 이러한 편견과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견해는 추축국이 북아프리카를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1]
예쇼네크는 발칸 전역에 관여했다.[1] 그는 크레타 전투에서 공수 부대 사용을 지지했으며, 쿠르트 슈투덴트가 크레타를 키프로스와 수에즈 운하 지역 침공을 위한 발진 기지로 사용하려는 열망을 지지했다.[1]
1943년, 독일 항공성의 부장들은 대부분 개전 전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품고 있던 과대망상적인 공군 장비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쇼네크는 히틀러를 지지했다.[1]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예쇼네크의 의견을 채택하여 히틀러에게 현실적인 공군 건설안 재고를 권하지 않았다.[1] 같은 해 8월 함부르크가 대공습을 받아 궤멸되자, 괴링과 예쇼네크 등 공군 수뇌부의 해임이 논의되기 시작했다.[1]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공군의 활약에 불만을 품고 있던 히틀러는 괴링을 무시했고, 미국 육군 항공대에 주간 공습까지 허용하게 된 공군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는 예쇼네크를 향했다.[1] 1943년 8월 17일 밤부터 18일 새벽에 걸쳐 페네뮌데가 격렬한 공습을 받자, 직후 예쇼네크는 자살했다.[1]
5. 진급 내역
날짜 | 계급 |
---|---|
1914년 8월 10일 | 사관후보생[1] |
1914년 가을 | 소위[1] |
1925년 4월 1일 | 대위[1] |
1932년 6월 1일 | 대위[1] |
1935년 4월 1일 | 소령[1] |
1937년 4월 1일 | 중령[2] |
1938년 11월 1일 | 대령[2] |
1939년 8월 14일 | 소장[2] |
1940년 7월 19일 | 항공병 대장 (중장 계급을 거치지 않음)[3] |
1942년 2월 1일 | 상급대장[4] |
6. 서훈 내역
수여 국가 | 훈장 | 수여 날짜 |
---|---|---|
프로이센 왕국 | 철십자 훈장 2급 | 1915년 10월 14일[2] |
프로이센 왕국 | 철십자 훈장 1급 | 1918년 10월 23일[2] |
프로이센 왕국 | 군용 조종사 배지 | 1918년 6월 30일[2] |
독일 제국 | 공중전 승리자 명예 고블렛 | 1918년 7월 9일[2] |
독일 제국 | 검은색 부상 훈장 | 1918년 8월 17일[2] |
독일 | 통합 조종사/관측사 배지 | 1935년 8월 2일[2] |
독일 | 국방군 장기 근속상 2급에서 4급 | 1936년 10월 2일[2] |
독일 | 국방군 장기 근속상 1급 | 1939년 8월 10일[2] |
독일 | 안슐루스 기념 메달 | 1938년 11월 21일[2] |
독일 | 주데텐란트 메달 (프라하 성 바 포함) | 1939년 5월 22일[2] |
독일 | 메멜 메달 | 1939년 9월 19일[2] |
독일 | 1939년 철십자 훈장 부속장식 2급 | 1939년 9월 21일[2] |
독일 | 1939년 철십자 훈장 부속장식 1급 | 1939년 9월 26일[2] |
독일 | 철십자 기사십자 훈장 | 1939년 10월 27일[2] |
불가리아 왕국 | 군사 공로 훈장 대십자장 (전쟁 장식 포함) | 1941년[2] |
핀란드 | 자유의 십자 훈장 1급 (칼 포함) | 1942년 3월 25일[3] |
헝가리 왕국 | 공로 훈장 장교 | 1938년 11월 4일[2] |
이탈리아 왕국 | 이탈리아 왕관 훈장 사령관 | 1940년 9월 15일[2] |
루마니아 왕국 | 미하이 용감공 훈장 3급 | 1941년 11월 7일[3][4] |
루마니아 왕국 | 미하이 용감공 훈장 2급 | 1942년 9월 1일[3] |
루마니아 왕국 | 루마니아 별 훈장 대십자장 (군사적 미덕 리본의 칼 포함) | 1941년 10월 14일[5] |
유고슬라비아 왕국 | 성 사바 훈장 2급 | 1939년 6월 2일[2] |
일본 제국 | 훈1등 서보장 | 1942년 9월 26일[6] |
참조
[1]
문서
Doctor of Philosophy
German
[2]
기록물
Luftwaffe Personnel File of Hans Jeschonnek
German Federal Archives (Bundesarchiv)
[3]
웹사이트
Hans Jeschonnek
https://www.tracesof[...]
[4]
간행물
Monitorul Oficial
1941
[5]
간행물
Monitorul Oficial
1941
[6]
문서
独国総統幕僚全権公使「ワルター、ヘーベル」外二十二名叙勲ノ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